517 흐라스린드의 혼재
「모두 끝입니다. 전부 다…….」
“…….”
=…….=
이실리테는 환연이 전해주는 영주와 총집사장의 대화, 온실 정원 안의 상황 전달에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러니까, 영주는 모든 시정 업무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됐고…… 그 이유가 사랑하는 여자를 나이겔 총집사가 죽게 내버려 두어서라는 건가?
현재 위치는 환연의 감지 범위 안에 영주성이 들어오는 상급 거리의 어느 찻집. 방까지는 아니고 좌석마다 꽃장식 칸막이가 세워져 약간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는 2층의 창가 자리다.
「그 호랑 머리 인간이 유령한테 홀린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온실 정원을 나갔어. 온실 정원에 남은 남자는 다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고.」
=온실 남자는 더 안 움직여?=
「응.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걸 상실한 남자의 표본 같아.」
테이블마다 비치된 넙적한 꽃병, 그 뒤에 숨어 이실리테가 작게 잘라주는 인절미 같은 떡을 먹으며 하는 환연의 설명에 이실리테는 자신의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있는 환인을 바라보았다.
나이겔이 느닷없이 찾아온 집사의 이야기에 황급히 복귀하자 환인은 상황 파악을 위해 일행 중 기동력이 뛰어난 이실리테만 데리고 나이겔을 추적했다.
그가 복귀할 때 여관 주변의 기사들까지 전부 데려갔으며 이쪽에는 환연이 있었기에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영주성의 도개교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나이겔이 영주를 찾아가 나눈 이야기까지.
찻집에 앉아 그걸 전부 들은 환인은 흐라스린드에서 벌어진 정황을 전부 이해했다.
하급 거리가 저 꼴이 된 이유, 뒷골목 패거리들이 플뢰족을 납치해 인신매매하게 된 이유, 그리고 멀쩡히 있을 수 있었던 이유까지.
처음에는 호족의 뒷배가 있어서 플뢰족을 인신매매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이었군.’
왈키스, 심연의 마굴 두목이 건넨 장부에는 플뢰족을 사간 인물이 전부 적혀있었는데 그중 태반이 흐라스린드의 호족이었다.
도시에서 반출된 플뢰족도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가학 변태적인 성향에 사망한 플뢰족도 있었다.
플뢰족만 있던 것이 아니다. 플라비우스족도 거래되었고 식인 성향이 있는 인물에게 팔려 간 사비족도 적혀있었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팔 수 있는 것은 전부 납치해서 팔아먹었던 것.
그게 소도시의 하잘것없는 뒷골목 조직폭력배들이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다. 영주가 지시를 내리면 하루아침에 토벌당할 조직들이었다. 그런 조직이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노예질을 할 수 있었을까.
‘자매님, 정말로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중급 거리의 악명높은 왈키스를 이리도 쉽게 잡아 오시다니…!’
거기다 자꾸만 실종되는 동족 때문에 약이 잔뜩 오른 땅신 교단의 추적까지 번번이 피했다.
놈들의 무력 수준, 급이 떨어지는 행동을 보면 지능과 지혜가 매우 높은 인물의 원호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장부에 적혀있던 수상한 항목 몇 가지가 정말 그런 품목의 거래 내역이라면…….’
환인은 영주성을 직접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어디 가?」
재빨리 인절미 조각 두 개를 챙기는 환연을 안주머니에 넣고 이실리테와 함께 찻집을 나온 환인은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영주가 죽기 전에 해볼 것이 있다.”
=네? 영주가 죽어요?=
「엥? 영주가 죽어? 왜?」
지나가던 인묘족 여자가 이야기를 듣고는 흠칫 놀라며 귀를 쫑긋 세우고 환인을 돌아보지만, 환인은 살기를 뿌려 갈 길을 가게 만들어놓고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거짓말이다. 그에 합당한 추측은 있지만,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관련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규모와 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영주의 행동에 자신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을 맞이한 자신이 저지를 행동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 탓에 진심을 숨긴 환인은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짐작에 조직의 뒷배는 영주다. 왈키스가 넘긴 장부에 그런 이야기는 일절 언급되어있지 않고 유사성도 없지만, 90% 확률로 그가 주범이겠지.”
=……세상에.=
「흠.」
왈키스는 보기보다 꼼꼼했는지 장부는 직관적으로 잘 정리되어있었다. 그리고 장부에는 몇 가지 수상한 거래 항목이 있었는데.
“만약 그 항목이 정말로 ‘차원 방랑자의 매매 정보’라면, 메리아놀은 흐라스린드 영주를 기필코 죽이려 들 거다.”
메리아놀은 세계에 특정 사상과 기술이 퍼지지 않도록 차원 방랑자를 보호하고 관찰한다는 명목 아래 솔선수범해서 차원 방랑자를 찾아내어 자국으로 데려간다.
안느의 말에 따르면 따로 격리되어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무튼.
이런 상황에 자국의 메리아놀 국가 관리가 호송&호위하던 차원 방랑자를 중간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자국민인 플뢰가 노예로 매매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다. 메리아놀 입장에서는 프라이드에 흠집 난 수준이 아니라 면상에 칼자국이 난 셈인 것.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려 하겠지.
“메리아놀 정부의 고관이 아니라 대주교가 왔다는 것은 장부의 그 정보가 아직 정부 측에 전달되지 않았다거나 교단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영주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네.」
“그리되기 전에 이쪽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거지.”
어느 쪽이든 영주인 그의 미래는 머지않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바뀔 터. 그리되기 전에 혼재를 만나볼 생각인 환인이었다.
차원 방랑자가 노예로 거래되고 팔린 일을 두고 영주에게 비난과 항의를 하기 위해서 찾는다?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환인이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건 혼재를 만나기 위한 빌드업의 일환일 뿐.
‘습격당한 보상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쉽군.’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 협박 따위가 통할까. 오히려 이쪽을 분노케 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어 도발하려 들지도 모른다.
‘만약 혼재가 예상대로라면 그 혼을 볼모로 요구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내키지 않는 선택지다.
현 상황을 표현하자면 흐라스린드라는 초대형 TNT 폭탄 옆에 횃불이 툭, 떨어진 상태이다.
횃불의 열기와 불티로 TNT가 점화, 폭발할 수도 있고 폭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터진다면 근처에 있을 경우 100% 죽는다.
라드세아가 자국의 도시 호족을 지키기 위해 메리아놀과 알력을 빚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라드세아가 영주를 살리겠다는 게 아니라 ‘호족을 죽여야 한다면 적어도 그 주체는 우리 라드세아가 되어야 한다!’라는 느낌이겠지.
알력이 빚어지면 흐라스린드에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흐라스린드 영주와 성제가 모종의 거래를 한 흔적이 있다?
의심 사기 딱 좋은 건수다. 그런 위험한 다리를 환인은 건널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상황을 설명하고 적당히 머릿속으로 마지막 행동 방침을 정하며 도개교 앞에 도착한 환인은 근 백에 가까운 직업자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중 황금색 갑주 차림의 땅신 교단 신관 기사 한 명이 황색의 망토를 펄럭이며 환인에게 다가가 정중히 말을 건넨다.
=현재 영주성은 봉쇄되어 누구도 통과하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셔서 봉쇄가 풀린 이후 재방문해주십시오.=
그 정중한 행동에 환인도 형상 변화를 해제하고 환인 성제로써 후드를 벗고 정체를 드러냈다.
“저는 영도 에쉬누르의 대성자 후보이자 대성녀 닌실 아나그 님의 뜻을 받들어 대륙을 떠돌며 성불행을 이어가는 성제, 환인이라고 합니다.”
=어, 예? ……어엇!?=
이 발언과 함께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혼령주가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크게 펼쳤다.
후와아아아아—!
상급 영혼사는커녕 영성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은 초광범위 평온의 파동.
대낮임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회백색 빛의 파문이 어마어마한 넓이로 퍼져나가니 이쪽을 바라보던 검치호 기사단은 물론 등을 보이고 있던 땅신 교단의 정예 병력도 놀라 굳어버린다.
“제 영혼 기사인 자유 성투사 안느의 얼굴을 봐서라도 여러분께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성안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길을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
눈앞에 선 사내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린 신관 기사는 퍽 당황했다가 어느새 다가온 대주교와 교구 신관장을 보곤 재빨리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 만남이 이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에 땅신님의 은총을 느낍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제 예하. 저는…….=
대주교, 대너리오=르치토네는 이보다 더한 공경이 없을 정도의 인사법을 보이며 자기소개와 함께 고개를 숙였지만, 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영혼사로서 일말의 트집도 잡히지 않을 완벽한 대응 인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태의 시급함을 의도해서 드러내며 곧장 본론을 찔렀다.
“이럴 수밖에 없는 점을 양지해주시고, 지금은 그저 길을 터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수식어와 미사여구의 서론 없이 곧장 본론과 결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높은 신분에서는 결례가 되는 행동이지만, 상대의 기백이 그런 결례조차 당연한 행동으로 승화시킨다.
다섯 번째 꽃잎이신 르아웬=아기오시스 추기경님이 그렇게나 신경 쓰고 계신 남자.
이 장소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기에 대주교는 환인과 조금 인연을 맺어두고 싶었지만, 군말 없이 기사들을 좌우로 물려 길을 터주었다.
저만한 인물이 반드시 성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 것에서 대충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
환인은 신관 기사들 사이로 지나가며 한쪽으로 물러서있는 아리엔네 신관장에게 살짝 묵례한 뒤 곧바로 도개교를 넘었다.
검치호 기사단도 환인이 펼친 규격외급 평온의 파동을 목격했기에 주춤거리면서 길을 비켜준다. 그 행동의 바탕에는 오늘 새벽녘에 있었던 이적의 목격이 있었다.
그러나 한 명, 검치호 기사단의 부단장만큼은 비켜주지 않고 오히려 환인의 앞을 막으며 용건을 물었다.
“영혼사가 억지를 부려서라도 성을 방문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 뿐인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설마 성안에 혼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먼 거리에서 혼재를 감지할 수 있는 영혼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이며 저는 저입니다.”
부단장 또한 새벽을 가르는 빛기둥과 천수백 명의 영혼이 일시에 성불하는 이적을 목격하였기에 환인의 대답에 크게 설득되었다.
하지만 입장상, 그리고 총집사장이 들어가며 했던 명령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는 상황.
환인은 이해한다는 듯이 부단장에게 제안했다.
“곤란하시다면 기사 몇 분을 저에게 붙여주십시오. 마침 저분이 계시는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향하는 환인과 부단장의 시선에 가르파테는 숨이 멎고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가르파테는 환인이 망설임 없이 성의 사잇길과 우회길을 앞서 걸어가는 걸 보며 심장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이적을 펼친 인물이랑 동일 인물 맞지? 그리고 이적을 펼친 사람은 상급 거리의 여관에 머무는 미남 플뢰 남자랑 같은 인물이고.
그런데 저 남자의 외모는…… 차원 방랑자인데?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와중에도 가르파테는 환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차리고는 더더욱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혼재가 발생을 감지했다기에 흐라스린드의 가문 묘로 향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뒤뜰의 정원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그리고 도착한 이른 봄과 늦은 겨울의 경계에 놓인 초록색과 갈색의 정원.
환인은 가르파테가 뒤에서 의문과 혼란에 빠지든 말든 정원을 잠깐 둘러보았다가 정원의 한복판, 관목으로 둘러쌓인 온실 정원에 눈길을 주었다.
혼재의 기척을 따라왔는데 정말로 영주가 있는 뒤뜰 정원이 나왔다.
“…….”
온실을 향해 환인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가르파테가 흠칫 놀라며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다…….
=저곳은 영주님께서…… 윽!=
이실리테의 손에 의해 제지당한다.
=주인님은 영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분으로서 당신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분이 아니십니다. 자꾸만 무례한 행동을 하신다면 저도 더는 참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떠보는 것으로 주인님 앞에서 실수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가르파테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이실리테에게서 검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흐르기 시작했고, 가르파테는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에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환인은 온실 정원의 출입문에 도달해 문을 열고 있었다.
온도는 물론 습도까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봄날의 훈훈한 공기가 문이 열린 곳을 통해 흘러나온다.
「……?」
=…….=
환인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돌아보는 시뻘건 여자 영혼과 하얀색 호랑이 머리 남자의 시선에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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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편은 조금 늦게 올라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