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흐라스린드의 혼재
나이겔=드마레=흐라스린드 3급 호족.
그의 지위를 일국에 비유한다면 재상이라 할 수 있다.
한평생 흐라스린드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3급 호족 신분으로 살아오던 나이겔에게 이런 책망 어린 시선은 매우 드문 경험이었다.
다른 도시의 4급 이상 고위 호족이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흐라스린드의 총집사장인 그가 4급 이상 고위 호족의 가문이나 도시를 따로 방문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렇다 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다지만 무식을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이겔은 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긴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가 하면 그의 뒤에 선 두 명의 여자, 여자는 남자의 씨받이일 뿐이며 자손을 보고 일가를 번창시킬 번식 도구로만 보는 나이겔의 눈에도 흑심이 생길 것만 같은 아름다운 여자 둘이 환하고 아름다운 아우라를 피워 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명 다 희귀 직업자인데다 아우라의 농도만 보면 최소 5급에서 최대 7급 수준이다.
다른 요소는 제외하고 성장 한계와 자질만 따져도 소도시 따위가 아니라 대도시의 기사단 단장을 맡을 수준인데 그걸 한 남자를 위해서 바친다고?
게다가 분명 로비에서는 아우라가 없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지금은 아우라가 보인다.
나이겔의 시선이 이번에는 갈색 머리의 샌님처럼 곱상하게 생긴 쿼터 플뢰 남자에게 향했다.
뒤의 두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유약하게 생긴 남자가 영도에서 발표한 그 성제라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소문대로 아우라 무발현자로서 아우라가 전혀 없는 모습.
만약 어젯밤에 있었던 이적과 가르파테의 장담이 없었다면 의심을 해도 두 번은 했을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성제인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상황.
=크흠.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이겔은 한층 깊어진 눈빛을 발하며 상대를 대하는 방침을 전격적으로 수정했다.
존대하고 있지만 태도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지배자의 풍격, 그리고 그러한 풍격에 걸맞은 호위의 능력.
상대는 쿼터 플뢰다. 숨길 수 없는 혼혈의 특징이 저 짧은 귀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저런 풍격과 저만한 호위, 그리고 소도시의 호족인 자신을 일반인처럼 대하는 자세는 하루 이틀로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메리아놀에서 공왕公王에 버금가는 신분의 자식으로서 훌륭한 제왕학을 배운 거겠지.
혼혈의 특징 탓에 정식으로 가계도에 오르진 못하였고 계승 서열도 받지 못했겠지만, 틀림없이 부친의 총애를 받는 남자일 것이다.
‘당연한가.’
이적을 선보일 수 있으며 영도에서도 성제라는 칭호를 받은 영혼사. 혼혈인 자식이라 해도 어여삐 여길 수밖에 없겠지.
나이겔은 눈앞의 사내를 두고 퍼지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의 내막, 각성 1년 만에 혼재를 성불시키고 타락한 바르둘을 토벌했으며 알류겔의 마룡을 제어했다는 소문의 진실을 간파했다……고 생각하며 45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가르파테 울링 경이 돌아와 올린 보고에서 제가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말로도 덮거나 감출 수 없는 사실이며 그에 직접 찾아뵙고 사죄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귀한 시간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환인은 허리를 숙인 나이겔의 호랑이 머리 정수리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참 자신과 여자친구를 번갈아보더니 차례대로 놀란 눈빛에서 심각한 눈빛, 이해했다는 눈빛으로 변하던 모습.
뭔가 오해를 해도 큰 오해를 한 듯한 모양새다. 플뢰로 분장한데다 뒤에 선 안느로 인해 빚어진 오해인듯한데…….
“…….”
이 호랑이 머리 남자가 직접 입에 담은 것도 아니니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오해라곤 해도 남 탓으로 미루지 않고 사과했기에 환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고개를 드십시오.”
담담하지만 명백하게 지시 내리는 자의 언행에 품격. 나이겔은 속으로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제대로 고쳤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하나 확인해보겠습니다. 울링 경이 움직인 경위에는 드마레 공의 의지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변명일 뿐이지만,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녀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을 다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보고를 받을 때였던지라.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순순히 대답한 나이겔은 환인이 팔걸이에 팔을 올리며 턱을 괴고 자신을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서늘한 살기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느낌이어서.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를 했나 싶었던 나이겔은 방금 한 말을 재차 되뇌었다.
이상한 부분은 없다. 바닥에는 더한 바닥이 있다는 말을 한 상대여서 입 밖으로 내놓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썼는데?
그러나 환인은 나이겔이 의도적으로 영주에 관한 언급을 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방금 대답에서 환인은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그림 조각을 찾아내었다.
나머지는 사소한 디테일의 확인뿐.
환인은 소파에 등을 좀 더 깊게 묻으며 담담하게 비수처럼 나이겔의 속내를 찌른다.
“흐라스린드 영주께서는 최소 4년은 시정을 내려놓으신 상태이군요. 소문에 의하면 아직 젊은 분이신듯한데…….”
=……!=
나이겔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저는 대성녀님께서 인정한 영혼사입니다.”
=…….=
“멀리에서도 혼재의 기척을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서, 설마 성에 혼재가 있단 말씀입니까?!=
비수가 제대로 꽂혀 자기 자신의 지식에 기반한 온갖 상상이 나이겔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이럴 수가. 단지 성제가 방문해서(환인을 영성보다 좀 덜한 영혼사 정도, 가문의 위광 탓에 대성녀가 예의상 대접해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예의상 성에 초대해 대접한 뒤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예.”
환인의 확답에 나이겔은 심장이 철렁했다가 이윽고 눈앞의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상기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성제님. 열과 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부디 성의 혼재를 정화하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한 보답은 영주님께서 응당 충분하게 드릴 것입니다.=
“내키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아랫것들의 실수를 말로만 넘기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지요. 그…….=
가르파테의 실수를 말로만 덮으려 해서 심기가 상했다고 여긴 나이겔은 자비로 그에 대해 보상을 해주려 했지만, 채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환인에게 말허리가 끊어졌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드마레 공께서는 듣지 못했나 봅니다.”
=무…… 무엇을 말씀이신지…….=
눈이 가늘어지며 지어지는 저 불길한 미소에 나이겔의 심장이 재차 뛰기 시작한다.
“상급 거리에서 뒷골목 조직들에게 플뢰만 노린 납치 시도를 당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 영혼 기사인 그녀도 말이지요.”
=……….=
불길하다는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내용에 나이겔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게 결례라는 건 알지만 하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이 어마어마하다.
설마 영혼 성불행의 이적 뒷면에 이런 내막이 있었다니!
“응분의 대가로 조직 네 곳을 전부 박살 냈지만…… 드마레 공도 호족이니 지금 제 심정이 어떤지 알고 있으실 겁니다.”
나이겔은 숫제 용암이 피부에 들러붙는 듯한 살기에 숨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호족의 행동에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같은 호족뿐이다. 그건 메리아놀의 호족이라 할 수 있는 귀족도 마찬가지.
이때까지 인신매매의 피해자는 대부분 평민과 서민들이었다. 그랬기에 큰 문제로 비화한 적이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당한 사람이 하필 메리아놀과 영도 양쪽의 핵심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니!
이게 만약 공론화되면 흐라스린드는 끝장이다.
메리아놀과 험악한 관계가 되면 주도의 제재가 곧장 날아올 것이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 영도와 사이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질 거다.
영혼사를 납치해 팔아넘기려 한 셈이니까.
=…….=
나이겔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온 심정으로 성제의 뒤에 선 두 여자를 보았다.
공론화하지 않고 성제가 직접 보복하겠다고 해도 문제다.
흐라스린드의 검치호 기사단 전력으로는 저 여자 두 명도 못 막는다. 그런데 고위 비술사도 뒤에 있고 영혼사도 있다.
명분마저도 저쪽에 있으니 흐라스린드 가문에 있어서 현 상황은 주위 사방의 숲이 거세게 타오르는 격.
‘바닥에는 더한 바닥이 있다는 말…… 이걸 두고 한 말이었나!’
어쩐지. 이건 반 칩거한 영주를 대신해 대리 업무를 맡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건이다.
나이겔이 조금 다급해진 심정으로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똑똑똑- 출입문에서 뭔가 다급함이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얌전히 서 있던 백려강은 환인의 시선을 받고 재빨리 출입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사복 차림의 러시안블루 종 인묘족 남자가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총집사장님! 큰일입니다!=
=커펜, 지금 중요한 분과 면담 중인 것이 안 보이나!=
움찔, 푸른 눈동자로 거실을 빠르게 살핀 커펜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다시 절제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어서 부득이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벌은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
호통에도 물러나지 않는 집사를 본 나이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환인 또한 그것을 보며 영혼 기척 감지를 펼쳐 영주성의 혼재를 감지했다.
그 혼재의 기운은 새벽과 다를 바 없는 장소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일 텐데…… 그런가.
환인은 자신이 대충 굴려놓은 눈 뭉치가 구르고 굴러 집채만큼 커졌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후, 냉소를 흘리며 나이겔에게 권유했다.
“1분 1초가 급한듯한데 우선 내용부터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면 호된 질책을 받을 줄 알아라.=
말을 하라 지시를 내렸지만, 커펜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나이겔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평소였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가뜩이나 연달아 충격이 가해져 인내심의 역치가 낮아진 상태인데 성제의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는 생각이 그의 심기를 강하게 흔든 것.
커펜 또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 쪽이 되든 좆됐다는 것도.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속으로 부르짖은 커펜은 고개를 푹 숙이며 소리쳤다.
=땅신 교단에서 나온 전투 신관, 신전 전사들이 각 상급 신관들과 함께 일제히 호족 가문의 저택을 급습하고 있습니다! 사유는 노예 거래로 팔린 플뢰족의 구출……입니다! 성에도 교단의 신관장과 신관 기사들이 나와 있습니다!=
나이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리엔네 교구장! 대관절 이게 무슨 파렴치한이란 말이오?! 벌건 대낮에 신전의 기사들을 이토록 무장시켜 성엘 들이닥치다니!!=
황급히 성제에게 무례를 사죄하고 성으로 달려온 나이겔은 성의 도개교 앞에서 검치호 기사단과 대치 중인 수십 명의 신관 기사들, 그리고 사이에 서 있는 아리엔네 흐라스린드 교구장을 발견하곤 역정을 냈다.
전원이 직업자, 특히 황금색 금속 갑주를 걸친 신관 기사들은 전원 4급 이상의 직업자로 이루어져 있어 대단한 위세를 풍기고 있었지만, 좀 전까지 환인의 용암 같은 살기를 정면에 받고 있던 나이겔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호족들의 저택에 전투 신관과 신전 전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알 바 아니다. 그런 것보다 도시의 주인인 영주의 성엘 저런 철 신발을 신고 밟으려 하다니, 이 무슨 용납할 수 없는 무례란 말인가!
그간 낸 기부금이 얼마인데!
나이겔의 격분에 흐라스린드 신전 교구장, 아리엔네는 반쯤 안쓰러워하고 반쯤 화난 얼굴로 대답했다.
=나이겔 총집사장님. 지난 4년간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었지요. 지하 경매장을 폐쇄하고 무뢰배들의 활동을 좀 더 찍어누르지 않으면 업보가 쌓일 거라고요. 이번 일은 그간 쌓여온 업보가 터져 나온 거라고 말씀드리겠어요.=
=그게 지금 말이라고……!=
어찌 저 볼품없고 천한 것들을 영주성이 직접 찍어눌러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일을 하는 놈들은 따로 있거늘!
그런 심정을 불같이 토해내려던 나이겔은 청록색 머리카락의 아리엔네 교구장 옆으로 비실비실한 몸을 황색 수단으로 감춘 남자가 나오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은색 수실로 땅과 바다와 산을 수놓은 수단. 교구장의 바로 윗급인 대주교와 상급 대주교만 입을 수 있는 의복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그 수단을 입은 남자가 나오다니, 어떻게?
메리아놀의 본단에서 초장거리 공간이동진을 쓴 건가? 그렇다 해도 거리를 생각하면 10번 이상은 써야 할 텐데?
희귀 직업의 아우라를 가졌는데 직업의 특성인가?
나이겔이 혼란스러워할 때 남자가 지극히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피차 상호 간에 예의를 차리기에는 멀리 온 마당이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땅신 교단 본단의 제7 전투단을 이끄는 대너리오 르치토네입니다. 교계는 대주교이며 본단의 다섯 꽃잎 중 한 분이신 르아웬 아기오시스 추기경 예하의 지시에 따라, 흐라스린드에서 횡행하는 플뢰족의 인신매매 근절과 관련자 처벌을 위해 메리아놀 종족협의회 위임장을 지참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면적인 조사와 전폭적인 협조를 메리아놀과 땅신 교단의 이름으로 흐라스린드 영주에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새벽부터 중한 일이 연달아 터지고 있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있던 나이겔은 참을 수 없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지독히도 독선적인 플뢰족 특유의 긴 문장이 두통을 부채질한다.
그렇다고 해도 머리 아프다며 이 자리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나이겔은 잔뜩 긴장한 기색의 검치호 기사단 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메리아놀 종족협의회의 위임장이라 해도 라드세아에서 그것으로 강제력은 발휘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으시오?=
=이 도시에서 벌어진 인신매매와 납치 시도의 대상이 일반 메리아놀의 국민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 도시에서 납치 시도를 당한 분은 땅신 교단 본단의 추기경 예하 직속 성전사와 그녀가 영혼 기사로서 섬기는 성제님입니다. 추기경 예하께서는 하늘의 눈이 부릅뜨고 있는 대낮에 교단 직속의 성전사를 인신매매 목적으로 납치 시도가 버젓이 일어나는 흐라스린드의 참담한 치안 상태 우려와 걱정을 표하시며 이와 관련된 사태의 해결에 가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 선언하셨습니다. 이를 거부하시다니, 흐라스린드의 영주성은 라드세아와 땅신 교단의 외교 마찰과 종교분쟁을 바라시는 것입니까?=
제발 듣는 사람 배려해서 말 좀 나눠서 해!!
그렇게 소리 지를 뻔 한 나이겔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며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이… 안건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 당신들을 성내에 들일 수도 없는 일, 답변을 바라신다면 밖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겔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급한 일을 미뤄놓고, 긴장한 기색으로 땅신 교단의 신관 기사들과 대치 중인 검치호 기사단의 부단장을 불러 저들이 듣지 못하게끔 지시를 내렸다.
=저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라. 들어가는 즉시 성내 전력을 전부 보낼 테니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막아. 알겠나?=
=전투도 불사하라는 겁니까? 저들은 땅신 교단의 정예입니다.=
저들을 이길 수 없다고 대답하며 부단장은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에는 흐라스린드 땅신 교단 지부의 신관장이 대주교와 함께 다섯 명의 전투 신관과 찾았고, 자신들이 앞을 막자 대주교가 30명이 넘는 신관 기사를 소환했다는 것.
저 대너리오라는 대주교, 전이轉移 계통의 희귀 직업자였나!
흐라스린드 땅신 교단 지부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나이겔은 저 많은 숫자의 신관 기사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궁금했는데, 덕분에 궁금증을 풀고 각오가 깃든 목소리로 재차 지시를 내렸다.
=죽을 각오로 막아라. 어차피 저들이 성엘 들이닥치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죽을 각오로 막아.=
=……예.=
나이겔의 동귀어진을 각오한 발언에 검치호 기사단의 기세가 죽을 각오를 한 그것으로 바뀌고, 나이겔은 즉시 몸을 돌려 영주가 늘 시간을 보내는 성 뒤뜰 정원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가는 중에 만난 집사를 시켜 기사단과 전 군병력을 성 입구 도개교로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정원에 도착한 나이겔은 머뭇거리지 않고 아름답게 핀 꽃과 정원수, 조경수 사이에 지어진 온실 정원에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
역시나 늘 그곳의 흔들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먼 곳만 바라보는 영주.
나이겔은 복장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을 함께 받으며 영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영주님.=
=…….=
바로 옆에서 불렀지만 바위처럼 반응이 없는 모습에 나이겔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크로알 둠드 흐라스린드!=
=…….=
그러자 그제야 돌아보는 영주. 정상적이라면 오체분시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하극상이지만, 그의 얼굴에 분노는커녕 마치 감정을 전부 표백한 것처럼 아무 감정이 떠올라있지 않았다.
복장이 터질듯한 느낌보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 나이겔은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정신 차려라. 대체, 대체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
=이대로는 흐라스린드가 망할 판이다. 메리아놀의 땅신 교단 본단에서 제7 전투단을 맡은 대주교가 서른의 신관 기사와 성의 도개교를 틀어막았다. 교단 소속의 신전 전사와 전투 신관들은 도심의 호족 저택을 급습하고 있어! 도시에서 고위 가문의 영혼사가 납치당할뻔한 일로 영도와 라드세아, 메리아놀, 땅신 교단 네 곳의 집중 공격을 받기 직전이란 말이다!!=
=나이겔 삼촌.=
어렸을 때부터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던 영주였지만 6년 전부터는 제대로 말도 걸지 않던 영주였다.
그런 영주의 입에서 반십년만에 나온 사적인 호칭을 들은 나이겔은 반색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무엇이라도 지시를 내려다오! 고작 5년 만에 흐라스린드를 그렇게나 살기 좋게 만든 너이지 않으냐! 너라면 이 상황도 타개할 수 있……!=
=그녀가 죽었을 때 제가 말했지요. 흐라스린드는 5년 안에 망할 거라고.=
=………!=
=그녀를 죽인 죗값을 우리 모두가 치를 때입니다.=
북풍한설도 이보다는 따뜻할 것 같은 목소리에 나이겔은 말문이 막히다 못해 숨이 턱 막혔다.
설마, 설마 그 이유로…… 지금까지 모든 시정에서 손을 놓은…… 거였나…….
그의 눈앞에 한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 밤의 숲속처럼 불길한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인.
=그 여자를… 그 여자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것이냐…….=
=그녀가 죽기 전에 말했을 겁니다. 제 심장 반쪽이라고.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도와달라고.=
찌이이이잉—…… 나이겔의 귓속에 극심한 이명이 터졌다. 그와 함께 6년 전의 과거에 있었던 일이 잿빛으로 떠오른다.
‘삼촌, 삼촌!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녀를 이렇게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영주님.’
‘삼촌이 한마디만 거들어주면 됩니다! 도시에도, 가문에도 그 어떤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가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할 테니까! 그러니 제발……!’
‘영주님, 정체도 모르는 차원 방랑자를 고귀한 핏줄에 편입하는 법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입니다. 포기하십시오.’
‘나이겔 삼촌! 그녀는 제 심장 반쪽입니다! 그녀가 죽으면 저도 버틸 수 없어요! 그러니 제발……!’
‘일어서십시오. 흐라스린드의 영주 되시는 분이 이런 돌바닥에 무릎을 꿇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영주 님께 어울리는 여성은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제발……. 뭐라도 할 테니까…… 제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입을 벌렸지만 마찬가지다.
=모두 끝입니다. 전부 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바위처럼 어느 한 곳만 미동도 없이 바라보는 영주의 옆모습을 나이겔은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바라보다 비척거리며 온실 정원을 힘없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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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불치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며
이 세상에 만병통치약이 존재한다면 그또한 사랑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미궁 탐험가 및 유물 수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