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20화 (520/813)

514 흐라스린드의 혼재

잠깐 멍하니 절벽 위의 고풍스러운 저택을 바라보던 환연은 자신의 앞에 달그락, 자기 머리만 한 포도 세 알이 담긴 접시가 놓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포도알에서 살짝 풍겨오는 과일 고유의 시고 달콤한 향기.

그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킨 환연은 잘 익은 포도알로 손을 뻗으며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중급 거리를 왜 널찍이 둘러보는 루트로 알려달라 했는지 이제야 알았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

이실리테는 다람쥐처럼 옴뇸뇸 포도알을 먹기 시작한 환연을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거뿐이야? 상황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더 안 물어봐?

혼재가 영주성에 있다는 환연의 이야기에 생긴 놀람과 호기심이 갈 곳을 잃고 헤맨다.

이실리테는 쟁반을 가슴이 짓눌릴 정도로 끌어안은 채 곤두선 신경을 달래주는 차를 조용히 드는 환인을 힐끔거렸다.

어떻게 영주성에 혼재가 있는지 매우 궁금하지만 어떻게 질문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차를 들고 계시니 이런 민감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지 알 수 없고…….

결국 호기심의 해결보다 환인의 평온을 위해 궁금증을 억누른 이실리테는 욕실 조가 목욕을 끝내면 마실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좀 있다 유리 언니나 안느가 나오면 어떻게든 이 주제가 다시 재조명될테니 그때 들을 수 있겠지.

“이실리테. 셔츠만 입고 이리로.”

안느와 유르파의 체질에 맞는 찻잎을 꺼내던 이실리테는 환인의 부름에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셔츠만?

재빨리 바지와 재킷을 빠르게 벗어 개어놓고 얇은 팬티에 셔츠 차림으로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간다.

환인이 그녀에게 스킨십을 요구한 적은 제법 있었다. 덕분에 익숙하게 서로 마주 보듯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자신의 가슴으로 환인의 머리를 안아주는 이실리테.

얇은 옷감을 통해 가감 없이 전해져오는 그녀의 말랑하고 포근 폭신한 살결, 허벅지에 닿는 탱글탱글한 엉덩이 밑살의 감각에 환인은 살짝 당황했다.

자신은 그냥 무릎 위에 앉힌 뒤 그녀의 체취를 맡으려고, 그리하려면 두꺼운 가죽옷 차림은 방해되니 셔츠 차림으로 오라 한 거였는데 설마 말 그대로 ‘셔츠만’ 입고 오다니.

“…….”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곧바로 인지했지만, 환인은 딱히 정정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기며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녀와 몸이 맞닿은 곳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와 가슴골 사이에서 솔솔 피어나는 키위 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준다.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는 것도 마치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릴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해서 더더욱 그러하다.

말 그대로 힐링의 시간.

‘곤란하군.’

이러고 있으니 여자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재차 실감이 든다.

그녀들이 소중해질수록 약점이 커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하루 이틀의 정신 수양으로는 어쩌지 못할 만큼…… 아니, 지금도 계속해서 그녀들이 소중함이 커진다.

그녀들 중 누군가가 사고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크게 허전해질 정도.

“…….”

=주인님 간지러워요….=

아기 피부처럼 보드랍고 매끄러운 가슴골에 얼굴을 비볐더니 이실리테가 어깨를 작게 움츠리며 웃는다.

환인이 자신의 2/3는 될까 싶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층 더 강하게 옭아매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표출하자 이실리테는 환인의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그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주인님을 처음 만난 그날, 주인님을 따라나선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나로 인해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후회하지 않는 건가.”

=거짓말 같으시겠지만, 주인님을 만난 뒤로 저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금이 행복한 꿈을 꾸는 것이고, 자고 일어나면 꿈에서 깨어나 도적 두목 이실리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두려워서 잠들지 못할 정도다.

“그리 말해주니 조금 안심되는군.”

처음 그녀를 받아들였을 때는 적당히 몇 년, 지구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노예로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방어술이, 그녀에게는 자신이 바라던 다목적 용도의 힘 세고 튼튼한 몸이 있었으니까.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생겨난 관계라고 여겼다.

그 생각은 행동에도 드러나서, 못 견디고 도망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방어술 전수를 단순무식한 대련으로 고집했었다.

나중에는 대련이 가장 효율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무작정 그녀를 봉으로 두들겨 팼던 것.

그랬는데 언제부터 그녀가 여자로 보였던 걸까.

‘안느의 동료 참전이 분수령이었군.’

그녀가 동료로 들어와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이실리테와는 아직도 주인과 하녀 사이이지 않았을까.

환인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여신처럼 빛나는 이실리테의 온화하고 자상한 미소를 바라보다 그녀의 뺨을 잡고 입술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이실리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내 곁에 있어 다오.”

갑작스러운 키스와 고백에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뜬 이실리테는 행복이 스며 나올듯한 웃음으로 똑같이 환인에게 키스해주고 대답했다.

=네. 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평생 주인님의 곁에 있을게요.=

욕실 조 세 명이 발갛게 홍조가 오른 얼굴로 나왔을 때, 환인은 그녀들을 앉혀놓고 자신이 새롭게 얻은 능력에 대해서 알려주며 혼재가 영주성에 있는 듯하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금방 씻고 나와 어깨, 팔꿈치, 무릎이 복숭앗빛으로 촉촉이 물든 안느가 잠옷 차림으로 멍하니 중얼거린다.

=혼재가 영주성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혼재가 흐라스린드의 영주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 있어. 혼재에게도 영주가 소중한 인물일 수 있고.=

이실리테가 찻잔을 나누어주며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니 백려강이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아들며 되물었다.

=그렇지만 언니, 혼재잖아요. 재액화나 재앙화 하게 되면 그 근처 사람도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데…….=

묻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다문 백려강은 환인을 대놓고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만약 혼재가 환인이고 영주가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본 표정이다.

생각이 훤히 보이는 동생의 표정에 힘없이 웃은 안느는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고 환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주성에 갈 생각이지? 그 혼재랑 계약을 맺으면 최고 등급의 혼옥을 얻을 수 있잖아.=

아까 치른 성불행도 계약을 맺을 영혼을 찾기 위한 비중이 컸다. 게다가 지금은 혼재를 발견한 마당이니 찾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안느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예정대로 아침이 되면 떠난다.”

=……엑?=

=네?=

=어머…….=

“도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영주다. 그런 영주와 혼재로 연관이 되는 짓은 사양하고 싶군. 좀 더 내심을 말하자면 안느 널 납치하려 한 심연의 마굴 놈들의 죄를 영주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안느가 도시에서 납치 시도를 당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는 이유다.

후자의 이유가 꽤 큰 임팩트를 남겼기에 그 이유가 커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자의 이유도 제법 크다.

보통 영주성에는 일라일 꽃이 어디에든 심겨 있다. 정원은 물론 꽃꽂이로 만들어 복도나 실내 곳곳에 장식해두고 생화 꽃병을 만들어 중요 위치, 혹은 혼재가 발생할만한 장소에 비치해둔다.

환인이 이때까지 방문했던 파르히스트의 성주성, 헬루멘의 영주성, 프라버의 영주성과 알소프의 영주성 모두 그런 식으로 일라일 꽃이 배치되어있었다.

그런데 흐라스린드만 그런 대처를 해두지 않고 혼재를 키운다?

이실리테의 의견대로 영주와 혼재 간의 사연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혼재를 성불시키거나 혼옥으로 만들겠답시고 들이대다간 십중팔구는 결말이 좋지 못할 테고.

“좀 더 넘겨짚자면 영주가 흐라스린드의 운영에 손을 뗀 것이 그 혼재와 관련되어있을 수도 있다.”

흐라스린드가 엉망이 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년 전부터라고 영혼이 떠드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메리아놀의 여행자’가 유독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는 것도.

무려 둘이나 되는 차원 방랑자의 흔적. 성안에 존재하는 혼재. 빈번하게 방문한다고 하는 메리아놀의 여행자들…….

“세 가지를 묶어 가설을 내놓는다면 이 도시에서 차원 방랑자의 거래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쿠쿵. 머리 위에 바위가 떨어진 듯한 얼굴의 안느를 힐끔 살핀 유르파가 재확인하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 자기는 지금 혼재가 차원 방랑자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니? 영주가 그 차원 방랑자랑 모종의 관계가 있고……?=

“짐작일 뿐입니다. 차원 방랑자가 아닌, 차원 방랑자와 인연이 있는 니오네브레스의 주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환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귀찮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일에 발을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뒷일을 생각 하지 않고 손에서 놔버린다면 여자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실망할 것이니 통신 수정구로 영도에 연락해 위치와 사정을 알려주고 대응을 부탁할 생각인 환인이었다.

혼재를 퇴치, 성불시키면 곁다리로 따라붙는 명성의 상승(성자/성녀) 등이 있으니 세대교체를 앞둔 대성녀 입장에서 쓸만한 카드가 될 거다.

포도알 세 개를 다 먹고 수건에 포도즙이 묻은 손을 닦던 환연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알려준다.

「떠날 거면 지금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아까 우릴 추적하던 인간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지 이곳으로 모이고 있어.」

=아…… 정체가 탄로 난 건가요?=

「들켰다기보단 소거법 같아. 저쪽도 확신은 못 하지만 일단 확인해보자는 느낌? 많은 쿠에, 마차에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의 파티, 때마침 비슷하게 나타난 성자…… 물증은 없어도 심증이 생기기엔 충분하잖아.」

=그러네요…….=

「아, 우리 객실에 불이 켜진 거 보고 올라오려 해. 여관 주인한테 기사단이라고 알리고 그냥 밀고 들어오고 있어.」

=옷부터 입어야겠다.=

씻고 나오느라 잠옷 혹은 잠옷에 가까운 민소매 숏팬츠 차림의 안느, 백려강, 유르파가 발딱 일어나 방으로 사라진다.

환연도 환인의 안주머니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잠시 후, 똑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객실 출입문에서 울려 퍼지자 이실리테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갔다 올게요.=

기사검을 허리에 찬 이실리테는 출입문으로 걸어가며 기감을 펼쳐 문 너머를 살폈다.

두 명. 둘 다 직업자다. 그중 한 쪽은 아까 보았던 추적 계통의 엽사인 요엔이라는 인랑족 여자.

출입문 앞에서 인기척을 낸 이실리테는 천천히 문을 열었고, 열린 문 너머로 피처럼 빨간 머리카락의 강인해 보이는 여기사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 기사가 문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빨간 웨이브펌의 여기사는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미녀를 보고 잠깐 멍해져 있다가 핫, 정신을 차리곤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이른 새벽에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흐라스린드 검치호 기사단의 상급 기사, 가르파테 울링입니다. 이쪽은 같은 기사단의 요엔 토그비.=

=…….=

꾸벅 고개를 숙이는 키 130cm 정도의 소녀를 잠시 내려다본 이실리테는 가르파테=울링에게 시선을 돌리며 정중하게 물었다.

=흐라스린드의 기사님들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그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하급 거리에서 벌어진…… 특별한 일에 있어 영주 대리께서 내린 지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검희 이실리테 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아우라도 숨겼고 레드릭 얼터와 천상의 장막도 넣어놨는데 알아보다니.

허를 찔린 이실리테는 어색해진 얼굴로 시치미를 뗐지만, 요엔의 추적도 그렇고 자신의 추측을 30% 정도밖에 장담하지 못하던 가르파테는 방금 이실리테의 반응에서 자신의 추측이 정답이었다고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기사라 자칭하는 이들 중 녹색 성자님을 곁에서 모시는 적색 대검의 여신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떠보는 것에 걸려들었다는 걸 이실리테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멍청한 실수에 속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린 이실리테가 조금 날 선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방문한 울링 기사님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 알고 있으시겠군요.=

=영주 대리님의 지시가 있어 부득이…….=

=그 영주 대리라는 분이 주인님의 사색을 방해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건가요?=

=……?=

조금…… 아니, 최근에 주변에서 큰일이 많이 벌어져 정보의 정리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 가르파테는 이런 이실리테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그냥 성자가 아니었나? 아니, 그냥 성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이적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5급 호족의 대리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할 정도인가?

뭔가 이상하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걸 눈치챈 가르파테는 일단 사과해야겠다고 판단하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로써 받은 지시는 큰 문제가 없는 한 반드시 이행해야 하기에 저지른 무례였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여기사의 사과에 이실리테는 조금 난감해졌다.

이들이 손님으로서 방문했다면 주인님 앞에 데려가는 걸로 끝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냥 손님이 아니다.

내가 멋대로 돌려보내도 되는 건가? 내 실수로 주인님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이건 어쩌지. 무엇보다 돌아가라 해도 기사들의 입장을 보면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

“이실리테.”

고민하고 있을 때 적절하게 날아든 환인의 호출.

이실리테는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두 여기사를 안으로 들이고 바로 뒤에서 따라간다.

약간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즉각 검격을 날릴 수 있는 최적의 거리다.

그런 이실리테의 눈에 변장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환인이 들어왔다.

‘아…… 내 실수 때문에 변장을 푸신 거구나.’

이실리테가 살짝 시무룩해졌을 때 가르파테는 성자로 짐작되는 남자 앞에서 몸이 절로 위축되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마치 거인 앞에 선 생쥐처럼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 같다.

이게 뭐야. 기사단장님이나 영주님 앞에서도 이러지 않았는데.

긴장감에 심장이 둑, 둑, 둑 크게 뛰는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요엔은 아예 겁먹고 자신의 뒤에 숨은 상태.

스읍— 길게 숨을 들이마신 가르파테는 빠르게 용무를 끝낼 생각으로 척, 가슴에 손을 올려 경례하며 입을 열었다.

=흐라스린드 검치호 기사단의 상급 기사, 가르파테 울링이라고 합니다. 녹색 성자님께 나이겔 영주 대리께서 보내는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두 손으로 편지를 꺼내 환인에게 내민다.

“…….”

=……?=

가르파테는 편지를 가져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환인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안 가져가시는 거지?

진짜 뭔가 이상하다. 성내에서 당직 중이던 상급 기사가 자신뿐이었기에 명령을 하달받아 나온 건데… 영혼 기사인 검희의 반응도 이해가 안 되고 자신을 가만히 응시 중인 성자의 행동도 이해가 안 된다.

문득 기사단장님의 한숨 섞인 한탄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넌 주어진 일도, 맡은 일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만, 시야를 넓게 보는 법을 모르는 게 옥의 티다. 그 점만 해결되면 차기 단장 후보로도 추천할 수 있을 텐데. 쯧쯧.’

그 말씀이 지금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가르파테의 머릿속이 혼란과 의문으로 양분되어가고 있을 무렵, 환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울링 경은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서신의 배달을 맡으셨군요.”

=영주 대리께서 시키신 일…….=

“그것이 문제입니다.”

=……네?=

저도 모르게 반문한 가르파테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기사로서 할 언행이 아니었던 거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전해주십시오. 바닥에는 더한 바닥이 있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바닥…에는 더한 바닥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어감만 봐서는 절대 좋은 뜻은 아닌 거 같은데…….

“이실리테. 문을 열어드려라.”

호족들 사이에서 나올법한 은유적인 축객령에 가르파테는 홀린 듯이 요엔과 함께 객실 밖으로 쫓겨났다.

그럼에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은 녹색 성자의 존재감이 영주님이나 기사단장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과, 그에 걸맞은 품행과 언행이었기 때문이겠지.

=가테. 어떻게 해?=

객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막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요엔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가르파테는 고개를 저으며 여관을 나왔다.

=난 성엘 다녀올게. 집사장님이 말해주지 않으신 게 있는 거 같아. 성자님의 전언도 전해드려야 하고…….=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주변을 잡아먹는 밤의 어둠처럼, 보이지 않는 불안이 심장을 끄트머리에서부터 잡아먹는 느낌이다.

가르파테는 부디 자신의 직감이, 별로 틀린 적이 없던 직감이 이번만큼은 틀리길 바라며 중급 기사들에게 여관을 지켜‘만’ 보라고 지시한 뒤 영주성으로 향했다.

가르파테가 다녀간 이후 환인은 출발을 미뤘다.

그녀가 찾아오기 전이었다면 출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쪽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어도 출발에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주 대리의 서신을 가져온 가르파테는 넘겨짚기로 이실리테의 당황을 유도해 이쪽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흐라스린드를 떠날 경우,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혼재의 재앙화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그 책임 요소가 이쪽으로 날아들 가능성이 발생한다.

억지나 다름없지만 ‘혼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하고 떠난 게 아니냐!’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유르파. 영도에 연락해서 흐라스린드 영주성에 혼재로 판단되는 영적 파동이 느껴진다고 전달해주십시오. 안느, 너는 땅신 교단을 찾아가서 혼재가 영주성에 숨어있는 듯하다고 알리고 와라.”

이른 아침 식사를 끝내고 조금씩 동이 터오며 샛노란 햇볕이 객실을 밝히는 가운데, 환인의 지시가 내려지자 안느가 약간 걱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걸 밝혀버려도 괜찮아? 감히 내 명예를 훼손하다니! 하고 펄펄 뛰는 일 같은 건…….=

“그땐 성제라는 유일 직업자가 펄펄 뛰는 걸 보게 되겠지. 혼재를 성에서 키우다니 대체 흐라스린드의 영주는 무얼 하는 거냐고 말이다.”

환인의 대꾸를 있는 그대로 상상해본 안느는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도 모르는 5급 호족과 환인이 서로 마주 보며 펄펄 뛴다니.

=으응. 알리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할 거야?=

“가르파테라는 기사가 어떤 대답을 가지고 돌아오느냐에 따라 달렸지. 만약 이쪽을 그저 단순한 성자라고 생각한다면…….”

저쪽의 대응 따윈 무시하고 떠나면 된다.

몰랐다고 하면 그건 더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대성녀 닌실=아나그는 도시를 중점으로 4대 국가 전체에 유일 직업자인 성제의 출현을 알렸다고 들었다.

거기에 자신의 도시에서 그런 대규모 이적을 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눈이 아니라 단추구멍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고위 호족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만약 영주 대리라는 자가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가르파테에게 사실 일부를 알리지 않았다면 자신을 우롱하는 처사라 간주하면 그만이다.

그점을 두고 공격하면 영주성은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할테지.

=만약 솔직하게 사과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면?=

도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인간이 과연 사과와 도움을 요청할까 싶지만, 그리되면 들어가서 도와줄 뿐이다.

문서로 만들어 도움을 요청했단 사실을 명시해놓으면 이쪽을 핍박할 건덕지는 사라질 테고 자신은 적옥을 얻을 확률이 생기니까.

혼재를 퇴치한 보상을 요구해도 되고, 혼재를 해결했단 사실을 퍼트리면 영도와 자신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다. 아쉬운 점이라면 안느의 이상형이라고 했던 쿼터 플뢰 모습을 더는 못 쓴다는 건가.”

=엥!? 누, 누누누가 이상형이라는 거야! 내 이상형은 도령이거든?!=

=와, 안느 아가씨 플뢰면서 거짓말하는 거니?=

=거짓말 안 했어! 도령이 플뢰로 분장한 건 플뢰의 심미안에서 엄청나게 미남이라서 그랬던 거고! 내 이상형은 도령이 맞거든!?=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주인님의 세계에서 본 거 같…… 아, 아야. 아파.=

=……!=

평소에는 안느가 놀리고 이실리테가 보복하는 패턴인데 이번에는 반대로 이실리테가 놀리고 안느가 보복하는 모양새다.

빨개진 얼굴로 이실리테의 옆구리를 집요하게 꼬집는 안느를 보면서 작게 웃은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안느는 나갈 때 아우라 은폐 마도구와 후드 망토를 쓰고 나가고, 환연은 안느와 함께 가라.”

=응. 환연, 옷 갈아입으러 가자.=

「나 이제 자고 싶은데.」

=얼마 안 걸릴 거니까 다녀와서 자.=

=려강 아가씨? 지금부터 통신 수정구 쓸 건데 같이 보겠니?=

=수정구 작동법 가르쳐주실 거예요?=

=물론. 조용한 데서 해야 하니까 방으로 따라오렴.=

=네, 언니!=

여자친구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환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옆에 오도카니 서있는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우리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씻을까.”

=네. 바로 목욕하실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아니. 같이 씻자는 뜻이다.”

=…앗, 아앗.=

아침에 주인님과 욕탕에서 함께 목욕이라니!

“같이 씻는 것은 별로인가.”

=그럴리가요! 바로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정말 희소하게도 환인과 단둘이 목욕할 수 있다는 기회에 속으로 크게 기뻐한 이실리테는 곧장 목욕용품 가방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아무래도 추석 당일은 연재가 힘들것 같습니다...

상황봐서 공지로 올리도록 하겠읍니당.

죄송합니당.. ㅠ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