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19화 (519/813)

513 흐라스린드의 혼재

흐라스린드에는 네 개의 폭력 조직이 결성되어있었다.

하나는 가장 먼저 환인의 손에 박살 난 심연의 마굴.

주력으로 인신매매와 도박에 부수적으로 주류의 생산 및 판매와 매춘업을 일삼고, 조직원은 등급을 가리지 않고 직업자만 30명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흐라스린드 뒷골목의 세력 1위 조직이었다.

두 번째는 붉은 꼬리.

심연의 마굴과는 다르게 인신매매는 부수입이고 주력은 중급 거리와 하급 거리의 자릿세 수금이었다.

악독하고 혹독한 방침으로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수천 명의 피해자를 낸, 악명과 피해 범위로 치자면 네 곳 조직 중 단연코 원탑인 조직.

그로 인해 업보 스택이 터져 아지트는 환인의 영혼 폭발에 박살, 두목인 뷰즈헬레는 환인에게 심장이 꿰뚫려 사망했고 부하들은 성불행을 뒤따르던 시민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

평소였다면 시민들에게 죽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문양 강화 영혼 폭발에 휘말린 자들은 빠짐없이 영혼에 대 타격을 입어 거동과 운신이 불가능해진 상태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 번째는 오르벤파派.

두목인 오르벤은 하급 연금술사를 부려 독초와 환각초와 각성초로 마약을 제조해 팔아먹으며 조직의 세를 불리는 쪽을 선택했다.

조직의 전력만 보자면 네 곳 조직 중 네 번째.

힘이 약한 만큼 주변 동향에 주의를 많이 기울이고 있었기에 이상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한 오르벤은 도시 밖으로 도주와 도시 외곽의 안가安家에 은신하는 것을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도시 밖으로 도주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판단 아래 안가에 숨는 것을 선택했지만, 환연의 추적과 시민의 제보에 끌려 나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네 번째는 다죽어파派.

앞선 조직원의 질은 앞선 세 조직보다 나았고 세 조직의 안 좋은 점만 보고 배워 시민들의 고혈을 악질적으로 빨아먹던 조직이었다.

그러나 조직원의 숫자는 고작 15명에 조직원은 물론 두목도 머리가 나빠서 ‘사업’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이런 이유로 입힌 피해는 다른 조직에 비해 크지 않았지만, 반대로 조직에 당한 사람은 살점 하나 뼈 한 조각 남김없이 빨려 죽을 만큼 지독한 짓을 저질러 원한을 많이 산 부류였다.

처음에는 악덕 고리대금으로 시작해 억지로 돈을 빌려주거나, 잘 모르고 찾아온 희생양에게 높은 이자율을 기본으로 돈을 빌려준다.

그 후 집안의 모든 돈과 돈이 될만한 사재를 다 빨아먹는데 어찌어찌 돈을 가져와 갚으려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원금과 이자 상환을 피한다.

그다음에는 갖은 이유를 들먹여 가져온 돈을 빼앗는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인 척 피해자를 습격해 강탈한다던가 가족을 납치해 돈을 요구한다던가 집에 숨어들어 훔쳐 간다던가.

이렇게 빌린 돈의 ‘이자’를 갚을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진정한 지옥이 시작된다.

남자는 계약에 묶여 마물과 괴물, 야수가 출몰하는 숲에 목숨 걸고 들어가 들나물이나 고가의 식자재를 채취하거나, 미궁에 들어가는 노동자의 파티에 운반꾼이나 짐꾼으로 붙어 목숨을 걸고 짐을 운반한다거나 지하 살인 격투장에서 강제로 출전한다거나.

여자는 기본적으로 몸을 팔고 마약 제조의 위험한 제조 과정에 투입되거나 외모가 뛰어나면 변태들의 특이성벽 노예로 제공된다.

몸이 안 좋아져 위의 일을 못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마약의 실험체나 너무 더러워 하급 거리의 시민들도 피하는 장소에 투입되어 청소하게 되고, 그마저도 못하게 되면 조직이 운영하는 경주 레이스에 내보내어진다.

쫓아오는 마수들을 피해 도망치는 죽음의 레이스라지만 실상은 마수나 마물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발정제를 먹어 흥분한 괴물에게 덮쳐져 강간당하는 공연물이다.

물론 인신매매는 기본에 흑마술사의 실험용으로 제공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규모 면에서 붉은 꼬리보다 못했기에 최악이 되지 않았지만 한 짓을 보면 최악을 넘어 극악.

이 때문에 다죽어파의 두목인 코트롭과 조직원 14명은 환인이 직접 광창으로 목을 잘라 삶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와아아아아—!!!

…으아아아……!!!

마지막으로 다죽어파 여두목의 목이 잘려 머리가 땅에 떨어지자 수만에 달하는 군중이 환호성을 지른다.

몸이 떨리고 허술한 판잣집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

오직 한 명에게만 향하는 군중의 함성은 자의식이 미숙한 인물일 경우 도취감에 섣부른 선택을 할 정도였지만, 환인의 정신은 얼음물도 따뜻하다고 할만큼 차갑고 냉정한 상태였다.

불법 도박, 불법 살인 공연, 살인 투기장과 마약, 매음까지.

뒷골목 조직의 불법 사업이 흥하는 이유에는 거리의 시민들이 거기에 지출을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급 거리와 하급 거리의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의 돌파구를 열 생각도 못 하고 조직의 피와 살을 불려주며 부평초처럼 남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로밖에 안 보였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이 병든 사람들의 함성에 정신적인 만족감이나 충족감을 느낄 만큼 환인의 정신은 말랑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현실에 안주했고 현실을 외면했기에 이런 꼴이 되었다며 시민들에게 뭐라고 하진 않는다.

무릇 자신이 선 장소의 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준의 노력이 필요한 법.

일반인은 그 고통을 이겨내기보단 주저앉아버리기 일쑤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며 대다수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길보다 쉽고 편한 길을 찾아 현실에 안주하기 마련이니까.

대신 시궁창에 주저앉은 시민들에게 깨어나라고 일갈하지도 않고 그들을 이끌어 보다 나은 삶과 환경을 만들어나가지도 않는다.

증오보다 더욱 무서운 무관심을 군중에게 보내며 환인이 광창을 거두어들였을 때, 그의 안주머니에서 환연의 작은 목소리가 함성을 꿰뚫고 흘러나왔다.

「환인. 기사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인파의 원 밖에서 지켜보고 있어.」

“적개심이 보이나.”

「담담해. 와서 말 걸기에는 분위기가 위험해서 나서지 않는 거 같아.」

“그런가. 그쪽은 계속 주시해주고, 이 인파가 한곳에 모일만한 장소가 하급 거리에 있나.”

환연이 임의로 그려준 도시 지도는 상당한 축약과 데포르메가 들어간 거여서 공터나 광장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질문에 환연은 곧장 찾아보겠다고 대답한 뒤 하늘 높은 곳에서 흐라스린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람 정령과 시야를 공유, 환인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하급 거리에는 3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거대 광장이 있었다.

흐라스린드의 시조이자 시초인 호족의 동상을 세워놓은 장소다.

하급 거리에서 도시가 유일하게 관리하는, 종합운동장 4개를 합친 넓이의 광장.

조직을 하나씩 박살 낼 때마다 성불하려던 영혼을 붙잡고 있던 환인은 광장으로 이동한 다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접선을 이루어 주었다.

정확히는 영혼들에게 알아서 가족을 찾아가 마지막 해후를 나누라고 한 것.

유르파가 만들어낸 특대 광구光球, 광구에 이끌려 날아든 빛의 정령을 환연이 부려 광장에 빛을 비춘다.

그곳에서 천수백의 영혼이 떠다니며 가족을 찾아다니고 산 사람도 자신의 가족 영혼을 찾아 돌아다니는 시간이 잠깐 이어지다 광장 곳곳에서 상봉이 이루어졌다.

개중에는 더 이상 여한이 없는지 성불하는 영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족들과 만나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하고 있다.

약간 높은 단 위,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엄호하는 사이로 그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몸에 벌어지는 변화를 관조했다.

한 번에 천수백 명의 영혼을 다루어서 숙련도가 급격히 올라서일까 아니면 영혼의 자연스러운 한기가 대량으로 모여서일까.

환인은 몸 안의 영적 기관이 자극받는듯한 기이한 감각을 줄곧 느끼고 있었다.

이 감각의 시작은 300의 영혼이 모였을 때부터였는데 그로부터 대여섯 시간이 지나 천수백의 영혼이 모이고 달이 머리 위로 올라온 지금.

그 자극이 하나의 기술을 능력으로 개화시켜주었다.

평소에는 30m 내외로 짧은 거리의 주변 기척을 감지하는 기술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일정 범위에 영혼이 어디 있는지, 상태가 어떤지 알 것 같다. 기척 감지가 한층 성장하며 영혼 탐지로 변화한 건가.’

눈을 감아도 영혼 한정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태가 어떤지 전부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자신의 옆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하느라 바짝 긴장하고 있는 백려강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다는 것.

범위는…… 대략 1km 정도. 감각적으로 인지하자니 1km가 넓은 건지 좁은 건지 분간이 어렵다.

“…….”

멀면 멀수록 기척이 흐릿해지고 가까우면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왠지 이러면 집중이 더 잘될 것 같아 환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이 이마에 네손가락을 댔다.

피부에 손가락이 닿는 감각과 함께 찌릿- 아프지 않은 전기적 자극이 뇌리를 한차례 훑더니 영적 지도가 단숨에 뚜렷해지고 명확해졌다.

마치 레이더로 영혼의 위치를 보는 듯한 느낌.

그때 왼팔에 물컹- 젖무덤이 짓눌리는 감각과 함께 백려강의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찔렀다.

=환인 님… 피로하세요? 그러시면 저한테 기대주세요….=

“괜찮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던 거니.”

=앗, 넵.=

움찔하면서 재빨리 떨어져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백려강. 지레짐작이 틀려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는 의도인듯하다.

환인은 그녀의 배려에 희미하게 웃었다가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반 영혼은 작은 연못의 수면에 비친 달빛처럼 희미하다. 청령인 백려강의 혼은 그보다 짙고 커서 반딧불처럼 느껴진다.

일반 혼령과 청령이 다르다면 혼재인 적령이나 악령인 흑령도 다를 텐데.

손을 내려 흑옥 하나를 꺼내 비가시화로 불러내자 역시나, 밤의 어둠과는 분류 자체가 다른 흑색이 느껴진다.

“…….”

다시 영혼 탐지로 범위 안쪽을 샅샅이 훑었지만 역시 없다.

혼재가 없다니. 영혼이 천수백, 어림짐작으로 1700에 가까운 숫자인데 이중 혼재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수 있는 건가.

네 곳 조직을 박살 내며 하급 거리는 거의 다 훑었다. 남은 것은 중급 거리와 상급 거리뿐.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천칭을 꺼내 세우고 두 손으로 잡은 뒤 후우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가족 상봉은 거의 끝난 상황. 남은 것은 영혼을 전부 성불이나 승천시키는 것뿐이다.

그 뒤에는 이 능력으로 혼재를 찾아야겠지.

약 1,700명의 영혼 중에 청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차 목표가 사라졌으니 2차 목표로 선회하는 수밖에 없다.

혼재 찾기.

환인은 천천히, 매우 천천히 훈기와 한기를 두 팔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훈기와 한기를 응축시켰다가 한 번에 보내 터트리면 회백색 빛기둥이 솟아오른다. 적당한 수준으로 훈기와 한기를 보내 부딪치면 평온의 파동이 펼쳐진다.

그러면 매우 느릿하게 일정량을 계속 흘려보내면 어떻게 될까.

“………….”

영도의 기록실에서 본 책자에 나와 있는 대로 천천히, 그러나 섬세하고 가녀리게 훈기와 한기를 조절하고 있자니 두 손에서 흘러나간 훈기와 한기가 지팡이에서 만나 평온의 파동으로 번져나간다.

그 양이 지속될수록 파동이 계속해서 퍼지다가 이윽고 밀도가 높아지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대신 회오리처럼 환인을 중심으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변화가 벌어지는 것과 비례해 훈기와 한기를 늘려나가니 평온의 파동도, 혼령주도 아닌 중간 현상이 벌어지는 것.

하지만 한밤중에 어둠을 밀어내며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느릿한 빛의 회오리, 그 거룩함은 마치 빛의 강림 같아 사람들은 물론 영혼의 시선까지 휘어잡았다.

「이제 그만 가야 할 때인 거 같아…….」

「안녕, 잘 지내…….」

「여보…… 이제 난 잊고…… 행복하게 살아…….」

사람과 영혼도 이제 헤어져야 할 때임을 직감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러는 사이에도 회백색의 회오리는 천천히 크기와 규모를 확대해나갔고 사방을 포근한 빛으로 뒤덮었을 때.

「아아…….」

「이제 해방이다…….」

그 빛에 파묻힌 영혼들은 승천과 성불로 이끄는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하나둘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오른다.

한둘도 아닌 천수백의 영혼이 일제히 빛의 인도를 따라 승천하는 광경. 그리고 광장 전체는 물론 그 너머까지 덮어나가는 빛의 권역.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못 보았고 이후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인지를 아득히 초월한 현상에 사람들은 마음속에 하나의 신앙을 품었다.

상급 거리에서 나오지도 않는 땅신과 짐승신 교단의 인간들 보다, 믿는다면 차라리 저분을…….

일부는 의식해서, 또 일부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룩한 빛의 기둥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부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신님의 정원에 들어 안식을 찾기를.

부디 성자님께서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많은 영혼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내어 주시기를.

부디 많은 사람에게 그 영혼의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사아아아—

대나무숲의 바람 소리처럼 이파리와 이파리가 옅게 스치는 소리가 나며 빛이 스러져간다.

환인은 군중의 기도 장면을 보면서 평온의 기둥이 퍼져나갈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기감 범위 내에 기척을 드러내는 영혼이 없는지 예의 주시했지만…….

‘위력이 약했나.’

천수백의 영혼 전부가 승천할 때까지 혼재로 짐작되는 영혼은 발견하지 못했다.

평온의 파동도 아니고 혼령주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다. 혼옥 보관고, 혼고의 백수십 개 영혼 구슬과 여덟 개의 흑옥도 멀쩡하니 위력이 약해 혼재의 자극이 덜했을 수 있다.

‘……놓치더라도 상관없지.’

혼재가 악의를 품고 숨었다면 발견할 방법 따윈 없다.

재앙화한 혼재는 영혼을 연료나 재료로 쓴다. 피해를 걷잡을 수 없이 확대할 천수백 명의 영혼을 승천시켰으니 이것만으로도 도리는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떠난 뒤 혼재가 발생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도시의 호족 탓인 것.

환인은 자석에 이끌리듯 저절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천수백 명분의 빛구슬을 모두 획득했을 때 몸이 살짝 부푼 듯한 환상통을 느꼈지만, 큰 문제는 아닌듯해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는 인파 사이를 지나 하급 거리의 광장에서 멀어졌다.

사람들이 쫓아오는 등의 곤란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무릎 꿇은 채 환인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보내줄 뿐이다.

덕분에 일행은 아무런 제지와 방해 없이 골목길 사이 어둠에 스며들었고.

=연. 주변에 사람의 시선이 있어?=

「아니, 없어. 어둠의 정령을 불러서 둘러줄 테니까 얼른 갈아입고 변장해.」

=고마워. 다들 아우라 은폐 목걸이도 다시 껴.=

=주인님, 여기 형상 변화 마도구랑 망토예요.=

“음.”

다들 한밤중이라 눈에 확 띄는 회백색의 후드 로브 대신 평범한 갈색 망토를 두르기 시작한다.

아우라 은폐 목걸이도 목에 차서 발동시키고 백려강은 뿔을 감추기 위해 부분 변화 반지를 껴서 사슴뿔 같은 용의 뿔만 숨긴다.

마지막으로 환인이 갈색 머리카락의 쿼터 플뢰로 외모를 변화시켰을 때였다.

「다들 쉿. 기사 같은 인간들이 와.」

정식 기사단 정복 차림의 남녀 여덟, 전원 3급 이상의 직업자들이 골목길에서 튀어나오며 당황한듯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길, 늦었다. 성자님은 벌써 사라지셨어!=

=요엔. 성자님의 기척 느껴져?=

=……안 느껴져. 냄새도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아.=

=멀리 가시지 않으셨을 거야. 다들 흩어져서 찾자. 푸르덴과 리오, 하텐은 제3 내성벽 서문, 중문, 동문으로 가면서 찾아. 아신나, 프릿, 쿠훌룸은 외성벽 서문 중문 동문으로 가고. 요엔은 나랑 같이 주변을 탐색한다. 찾으면 절대 경거망동하지말고 정중하게 움직여.=

=응.=

=옛.=

여자들은 바로 코앞에서 자신들을 찾기 위해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다가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느. 저 사람들, 기사 맞지?’

‘어. 어깨 망토의 고정용 브로치 문양이 흐라스린드 가문의 징표야.’

‘으음~ 기사를 보낸 이유는 역시 자기를 성에 초대하려는 거겠네.’

‘저 요엔이라는 인랑족 여자애는 추적 기술을 가진 엽사 직업자야. 코도 좋아 보이는데 피할 수 있을까?’

여자들의 눈짓과 손짓에 환연이 모기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여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내 말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해. 바람과 어둠으로 기척이랑 냄새 숨겨서 기사들이 없는 곳으로 갈 테니까 지시대로만 움직여. 일단 대기.」

요엔이라는 인랑족 여자와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린 남자는 광장이 있는 곳 반대편으로 점점 멀어져간다.

약 3분. 기사들이 멀어지길 기다린 일행은 다시 광장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골목과 골목 사이 오물이 쌓여 냄새가 심한 곳으로만 움직여 제3 내성벽 아래에 도달한다.

어두컴컴해 달빛도 비추지 않으며 쓰레기와 온갖 폐기물이 쌓여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곳.

=연이가 바람 정령으로 냄새를 차단해서 다행이긴 한데 좀…… 되게 찜찜하네.=

똥오줌이 쌓이다 못해 썩어서 기괴한 색으로 변해가는 골목길을 지나온 안느가 해쓱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백려강과 유르파도 그에 못지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멀쩡한 것은 어린아이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해본 이실리테뿐이다.

그녀는 보수 보강을 하지 않아 비바람에 풍화되어 울퉁불퉁한 성벽을 올려다보며 환연에게 물었다.

=지금 올라가면 돼?=

「아니. 기다려. 지금 오르다간 기사들의 눈에 띌 수 있어.」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승천 광경의 여운에서 빠져나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적지 않은 수가 하급 거리의 시민들이지만 중급 거리의 시민도 다수다.

그들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일단은 기다려야한다.

환연이 신호를 주길 대기하며 안느가 의식적으로 숨을 덜 쉬려 노력하면서 말한다.

=사람들의 복장만 좀 더 깨끗하고 단정했다면 그들 틈에 끼어서 중급 거리로 이동했을 텐데.=

=중급 거리 시민도 기운 옷을 입고 다니는 마당이잖니. 지금 우리 복장은 상급 거리에서도 보기 힘든 옷들이니까 그건 힘들지 않을까?=

=으~. 어쨌든 좋으니까 빨리 넘어갔으면…….=

여행의 특성상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겨 받아들이지만, 원래 플뢰족은 선천적으로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이런 장소에서 머무르는 것 자체가 고역인 터라 안느가 약한 조바심과 안달을 낸다.

「지금이야.」

=……!=

오매불망 기다려온 신호에 이실리테가 안느의 손을 잡고 지붕으로 뛰어오르는 동시에 힘껏 위로 던져 안느를 성벽 위로 올려보낸다.

직후 이실리테는 환인과 함께 다중 검기와 방벽 패널을 발판 삼아 반쯤 날아오르고, 백려강과 유르파도 환연의 바람 정령 보조를 받아 짧은 비행 술법으로 날아올라 내성벽을 넘었다.

제3 내성벽의 안쪽, 상대적으로 매우 깨끗한 중급 거리의 뒷골목에 내려서자 환인의 목깃 안쪽에서 환연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지시한다.

「됐어. 기사들 시야는 막혔으니까 이제 바로 제2 성벽으로 달려가서 뛰어넘으면 돼.」

=얼른 가자. 빨리 가서 씻고 싶어. ……도령?=

마악 달려나가려던 안느는 우두커니 서 있는 환인을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더 할 일이 남아있는 건가?

“음. 가지.”

영혼 감지에 집중하며 넘어왔지만 역시 하급 거리에 혼재는 없었다.

대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대량 승천 이후 남은 영혼은 바로 옆의 백려강 외에 없기에 확실하다.

중급 거리에 있는 건가. 환인은 환연에게 부탁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중급 거리를 통으로 가로지르는 루트를 알려달라 요청했고, 그곳을 따라 이동하며 마찬가지로 중급 거리에도 혼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제2 내성벽을 넘어 상급 거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응? 잠깐, 우리 여관 앞에 기사 둘이 있어.」

=엑. 뭐야, 우리 정체가 진작에 들통난 거야?=

=연아. 우리 객실에 침입 흔적은 있니?=

「아니, 밤이 늦어서 방문은 안 했나 봐. 기사들은 우리가 혹여 그냥 떠날까 봐 밖을 지키고 있는 거로 보여.」

해가 뜨기까지 앞으로 약 3시간. 기다리고자 하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이긴 하다.

“일단 객실로 돌아가지.”

일행은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서 객실의 창문으로 들어와 복귀를 마친다.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도령이랑 모두 수고했어!= 말한 안느는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망토와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조바심과 함께 이 옷을 더 입고 있기 싫다는 감상이 전해져오는 급한 움직임이다.

그러다 브래지어와 바지만 남았을 때 멈칫하더니 환인을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으~. 씻고 싶은데…… 이 한밤중에 불을 켜서 씻는 건 좀 이상하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이니 신경 쓰지 말고 해라. 차후에 뭘 했냐고 추궁한다면 잠자리를 가진 흔적을 씻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응!=

살았다는 듯이 표정이 밝아진 안느는 바지도 벗어버리고 매력적인 진주색 속옷 차림으로 백려강도 붙잡아서 욕실로 뛰어 들어갔고, 유르파도 씻고 갈아입을 것을 들고 그녀들을 따라간다.

=이슬이 아가씨, 금방 씻고 나와서 교대해줄게.=

=네, 언니. 전 괜찮으니까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하급 거리의 똥통 같은 뒷골목을 지나와서 이실리테도 당장 씻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환인이 무언가 생각이 깊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최소 안느가 나올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킬 생각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환연, 환연? 나와서 주인님이랑 내 몸 좀 깨끗하게 해줄래?=

「좀 있다가 씻을 건데 귀찮게 왜…….」

=주인님 차 내려드릴 거야. 그런곳을 지나온 상태로 식품이랑 식기를 만질 수 없어. 얼른 씻겨줘.=

「에휴. 알았어.」

환인의 안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환연은 어쩔 수 없다며 물을 만들어내 환인과 이실리테를 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한차례 씻겨주었고, 이실리테는 만족한 듯 차를 내리기 위해 다기를 준비한다.

「이실리테. 나 포도 먹을래. 포도.」

=포도만 있으면 돼?=

「곧 잘꺼니까 세 알만.」

=응. 잠깐만 기다려. 주인님 차 먼저 내려드리고.=

엄청 달콤하고 새콤한 녹색 포도알을 기대하며 흥흥~ 저도 모르게 살짝살짝 허리 율동을 하던 환연은 환연이 매우 무거운 표정으로 사색에 잠긴 것을 발견했다.

맞아. 그러고보니…….

「환인, 능력 또 성장했지?」

“……그래. 영혼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다.”

「굉장히 도움이 되는 능력이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꼭 벌레가 파먹은 과일을 본 것 같아.」

“흐라스린드가 과일이고 혼재가 벌레라면 틀린 비유는 아니군.”

커피는 수면을 방해하니 제외, 주인님을 위해 자신의 용돈으로 사들인 최고급 찻잎을 준비하던 이실리테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인을 돌아본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대변한 질문을 환연이 헐, 하는 표정으로 던진다.

「혼재가 있었어? 어디에?」

이실리테와 환연의 시선을 받으며 환인은 지금도 영혼 감지의 가장 끄트머리, 어느 한 지점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적색 소용돌이를 느끼며 그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저곳은…….

환인의 시선이 혼재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는 걸 눈치챈 환연은 바깥의 바람 정령 시야를 공유한 뒤 그쪽을 보았다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주성에 있다고?」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지금 또 태풍 올라온다던데... 힘내서 추석 당일날 태풍이 왔으면하는 소박한 바램이 있읍니당...

태풍오면 가족 모임 다 캔슬될테니까.. 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