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화 〉 512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환인의 뒤를 따라 유령처럼 소리 없이 주택 사이를 걷던 안느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흘린다.
=와… 이건 좀 아닌데…….=
=네? 어떤 점이요?=
환인의 일거투일수족과 주변에 수상한 자는 접근 하지 않는지, (자칭)수습 영혼 기사로써 선배인 언니들을 보며 촉각을 곤두세우던 백려강이 귀를 쫑긋하며 묻는다.
=으응. 성벽 마력 방호는 위상력을 엄청나게 소비하니까 평상시에 꺼두는 건 이해해. 소도시는 그만한 위상력 충전이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주위를 봐. 중급 거리로 들어온 뒤부터 야간 순찰을 한 명도 못 봤잖아. 통행하는 사람도 없고.=
=아…….=
=민가에 불도 거의 안 켜져 있지? 이게 뭘 뜻하는 거 같아?=
=…불을 켜지도 못할 만큼 생활고가 심하고, 치안이 나빠져서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거 같아요.=
=맞아. 영주는 중급과 하급 거리에 하나도 신경 안 쓰고 있다는 거야.=
=…….=
호족 가문 출신이라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빠르게 눈치챈 백려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남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사는 기생충들이 다가오고 있네.=
플뢰 종족 특성으로 일행 중 누구보다 청각이 예민한 안느가 구석 쪽 골목을 가리킨다.
거기서 일단의 인물들이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건들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손에 든 단검을 던졌다 받으며 킥킥 웃는 것은 덤이다.
=킥킥키…… 헥?=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나쁜 어린…… 헉?=
여기저기 얼굴의 털이 눌어붙은 데다 귀도 찢어지고 꿰맨 자국이 많아 흉한 얼굴의 인견족이 딸그랑 던진 단검을 놓치면서 손을 베였지만, 의식도 못 하고 어버버거린다.
다섯 정도가 걷는 소리를 포착한 남자는 ‘무리 지으면 안전한 줄 아는 멍청이들’이라고 비웃으며 전부 납치할 생각이었는데…….
=…….=
스르릉
후드 망토를 써서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척 봐도 굴강해보이는 희귀 직업 아우라의 인간이 살을 베는듯한 살기와 함께 기사검을 뽑는 모습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 저런 인간들이 왜 여기 있어?!
다섯 중 직업자는 셋. 그중 하나는 평범한 비술사지만 그마저도 6급은 되어 보이고 나머지 둘은 본 적도 없는 희귀 직업자다.
이런 데 있을게 아니라 영주성의 기사단이나 호족의 대 저택에 있어야 어울릴 인간들이 어째서?
“이실리테.”
=네, 주인님.=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들이다. 전부 죽여라.”
=네.=
적당히 겁을 주거나 패서 돌려보낼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르게 살인 지시가 떨어졌지만, 이실리테는 동요하지 않고 탁 가볍게 날아들어 검을 휘둘렀다.
—…….
무음의 검격이 제비처럼 S자를 한 차례 그리고, 뒤돌아서며 기사검을 집어넣는 이실리테.
자신들에게서 뒤돌아선 정체불명의 모습에 중급 거리의 조직 말단 양아치들은 의아함을 품었지만, 이내 도망칠 기회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최소 5급 이상의 희귀 직업자들이 거리에 나타났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징조. 아지트로 돌아가서 두목한테 알려야 한다.
‘영주가 드디어 작심한 걸지도 몰라. 저만한 청소부를 불렀다는 건…… 전부 다…… 죽일…… 생각…….’
하지만 그들은 세 발자국도 걷지 못하고 풀썩풀썩, 머리와 몸이 나누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깔끔한 검격에 목이 베인 줄도 몰랐던 것.
「붉은 꼬리 패거리 놈들은, 거리의 사람들을 돈과 장난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크흑……. 제 여동생도, 저 새끼들한테 끌려가서……! 저도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으허허헝!!」
「흐으으으…….」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실리테의 뒤로 피 분수가 치솟아 오르다 점차 잦아 들어가는 것을 보던 환인은 영혼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릴 들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영혼 감응에 대해 정신적인 방어를 꽤 견고하게 세우고 있음에도 찌릿찌릿한 울분이 조금씩 마음에 스며든다.
이걸 보면 오늘 밤은 성불행이 아니라 청소행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길 가다 마주친 영혼들이 중급 거리의 폭력인신매매단을 향해 죄다 울분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으며 그 숫자도 적지 않으니까.
‘어쩌면 어딘가에서 혼재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올해는 윤년마다 시행하는 승령천제의 해다.
이런 상황의 도시가 혼재의 발생을 우려해서 매년 영혼사를 불러다 영적 안정화를 진행할 리 없으니 지난 4년간 영혼은 쌓일 대로 쌓였을 상황.
그렇다고 도심 곳곳에 혼재 감응화, 일라일 꽃이 심겨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도시 곳곳에 심겨 있는 수목이 아니었다면 녹색이라곤 없는 탁한 잿빛의 도시가 되었을 게 이곳 흐라스린드인데, 4년 동안 영혼사를 초청해 성불행도 하지 않았고 일라일 꽃을 깔아서 혼재의 발생을 사전에 파악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러니 성불행보다 흐라스린드의 조직 청소를 우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설명에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챈 안느가 습관적으로 후드를 고쳐 쓰며 물었다.
=영혼들이 전부 그 조직에 희생된 사람들이야?=
“지금까지 본 17명의 영혼은 그렇군.”
=……진짜 도시 어딘가에 혼재가 있겠는데?=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반응에 백려강도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환인 님…… 만약 그 혼재가 영주의 죽음을 바라면 어떻게 해요?=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영주 가문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우리의 여정에도 큰 지장을 초래하는 일일뿐더러 영도에도 문제가 발생할 일이니까.”
그렇게 대답해준 환인은 흑흑 울면서 음울한 분위기를 피워올리는 영혼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지.”
그 일이 무엇인지, 긴장하는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작게 웃어준 환인은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혼재의 여부는 아직 모른다. 지금은 도시를 돌아보도록 하지. 흐라스린드가 다른 도시에 비해 작다곤 해도 오늘 밤에 전부 살피려면 시간이 부족할 거다.”
=아… 응.=
=네.=
환인은 머릿속으로 흐라스린드의 지도를 떠올리며 중급 거리를 빠르게 돌아다녔다.
흐라스린드의 지형은 전형적인 부채꼴 모양으로, 부채 손잡이 부분이 상급 거리이며 그 끝 지점에 플라비우스족의 절벽과 영주성이 있다.
부챗살 중간 부분은 중급 거리이며 그런 중급 거리의 오른편 끝에 미궁, 또 다른 숲의 미로가 존재한다.
중급과 상급 거리를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더 넓고 로아팅스 정글 끄트머리와 인접해있는 하급 거리는 화전민촌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환인이 돌기 시작한 곳은 세 곳 거리 중 중급 거리.
이곳부터 먼저 돌기 시작한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저 쓸만한 영혼을 찾는다는 일차적인 목표와, 머물던 여관과 가장 가까운 곳이 중급 거리였기에 선택했을 뿐.
그런 중급 거리를 전부 돌았을 때 그의 주변에는 300이 넘는 수의 영혼이 모여있었다.
그만한 숫자의 영이 한자리에 모여 흐느끼며 음울한 분노를 흘리니 영혼을 보거나 느낄 수 없던 그의 여자들도 무언가 섬뜩하고 오싹함을 느끼는 지경이다.
=중…급 거리만 돌았는데 300명의 영혼이라니, 미쳤어 이건.=
안느의 혼잣말을 들은 이실리테는 도시 안이라 레드릭 얼터 대신 기사검의 검자루를 꽉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라스린드의 시민은 몇 명일까요?=
“이 규모를 보자면 상급과 중급 거리를 합쳤을 때 2만 명정도 되겠지. 하급 거리의 인구는 이 상황에 셈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8만 명은 넘지 않을까.
=2만 명 거리에 300명의 영혼이라면 하급 거리에서는 못해도 천이 넘는 영혼이 나올 수 있겠네요.=
“열악한 환경에 영주를 향한 분노가 어떠하냐에 따라 더 늘면 늘었지, 그 숫자에서 줄진 않을 거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중급 거리에서는 혼재가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하급 거리.
영혼들의 정보를 통해 세 곳의 뒷골목 조직의 위치를 파악한 환인은 두 가지 선택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가늠하다가 몸을 돌리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하급 거리로 내려간다.”
=도령, 이번에도 벽을 탈 거야?=
“아니. 이번에는 제2 내성문을 통해 넘어갈 거다.”
=영혼사가 나타났다는 게 알려질 텐데?=
“그래.”
그럴 생각이라고 대답한 환인은 저 앞에 보이는 제2 내성벽 중문을 향해 걸어가며 평온의 파동에 영기를 섞어 발사했다.
파아앗—
일반적인 회백색의 파문이 아니라 아주 희미하게 황금색으로 물든 빛의 파문이 퍼져나가며 환인의 뒤를 따르는 약 300의 영혼이 영기의 파동에 휩싸여 가시화한다.
=……!=
환인의 여자들도 영혼의 군단을 보고 흠칫 놀랐을 정도다. 지루한 야간 경비 일에 하품을 쩍쩍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경비병들은 소스라쳐서 하마터면 창까지 떨굴뻔했다.
=누, 누구냐! 아아아니, 누구… 누구십니까?!=
=야 이 미친 새끼야…! 당연히 영혼사님이시지 누구겠어…!=
제2 내성벽의 서문, 중문, 동문 세 문 중 중문中門의 경비초소실은 난리가 났다.
영혼사가 도시에 들어왔다는 연락은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경비병의 보고에 한달음에 달려 나온 야간 초소장은 성문을 둘러싼 듯한 무수한 영혼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킬뻔했다가, 황급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후드 망토와 후드 로브 차림의 다섯 명을 살폈다.
누가 영혼사지? ……뭐야. 왜 빛내림 현상 같은 아우라가 안 보여?
초소장은 반쯤 패닉에 빠져 보고하러 왔던 병사의 멱살을 잡고 작게 윽박지른다.
=이 새끼야, 영혼사님은 없으시잖아…!=
=저, 저기! 다섯 명 중 가장 앞에 계신 분이 평온의 파동을 쓰셨습니다…! 저와 윤켈이 확실히 봤습니다…!=
=……?!=
뭐? 아우라 무발현자의 영혼사?
‘……그런 사람은 알려지기로 한 명뿐이잖아!’
지금 라드세아 전체에서 명성이 퍼져나가고 있는 비자룩스와 린덴의 구원자, 알소프의 마룡을 진정시켜 물난리를 멈춘 희대의 성자!
초소장은 며칠 전 상급 거리로 들어가던 상단부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도에 엄청난 영혼사님이 나타나셨는데 아무래도 그 영혼사님이 지금 세간에 알려진 녹색 성자인 것 같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녹색 성자님이 다음 대의 대성자인 것 같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주도의 여왕 폐하께서도 그 성자를 눈여겨 보고 계신 것 같다는 이야기!
헉, 허억. 헉.
초소장은 과호흡으로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지만 어쩌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부적절한 행동과 부패, 비리가 떠오르고 사라진다.
만약 저 사람이 진짜 녹색 성자라면 영혼들과 의사소통은 무척 간단할 텐데, 저 많은 영혼이 만약 녹색 성자님한테 자기가 저지른 비리를 꼰질렀다면……!
그사이 성문에 도착한 환인은 적 봐도 패닉에 빠진 초소장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하급 거리로 내려가려 합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저, 저…….=
문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흔들리는 눈으로 더듬거리는 염소 머리의 초소장.
이실리테는 초소장의 입에서 허튼소리가 나올 거라 직감하고 부우웅— 다중 검기인 빛의 대검 두 자루를 소환해 옆에 띄운 채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렸다.
=성자님의 귀를 더럽힐 이야기를 꺼낸다면 베겠습니다.=
화들짝!
성자에게 기부를 가장한 뇌물을 먹여 어떻게, 보신을 생각하던 초소장은 이실리테의 압박에 끽소리도 못하고 어느새 몰려나온 병사들에게 볼썽사나운 손짓으로 문을 열라 지시를 내린다.
방금 그것은 협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입을 열었다간 정말로 베였을 거다.
제길! 하필 이때 야간 당직일 게 뭔가! 오늘만 아니었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분하고 억울하지만,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다 여긴 초소장은 제발 성자 일행이 그냥 지나가길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주는 일은 없었다.
「으으으으…….」
「우우우…….」
「켁탈…… 켁타아아알……!」
환인은 300명 중 20명이나 되는 인물이 초소장에게도 원한을 피워올리는 것을 확인, 돌아오는 이실리테에게 나지막이 지시를 내렸다.
“이실리테. 네가 영혼들을 대신해 그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어야겠다.”
=…네, 주인님.=
호된 맛이 뭘 뜻하는지 눈치챈 이실리테는 기사검을 검집째 들어 냉기를 풀풀 풍기며 초소장에게 되돌아간다.
그에 기겁한 초소장이 허둥지둥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잠깐! 기, 기다려주십시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영혼들이 당신에게 원한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당신 자신이 더 잘 알겠지요.”
=저, 저는 흐라스린드의 영주님이신 크로알 둠드 흐라스린드 영주님께 서임을 받은 백부장입니다! 저, 저를 건드리면 영도와 라드세아 간에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메헼, 격한 숨을 토해내면서 위협 아닌 위협을 하는 초소장이었지만 환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인보다 이실리테의 분노만 끌어낸 행태.
이실리테는 환인을 협박하는 초소장에게 분노, 당초 예정보다 더욱 힘을 줘 팔다리뼈를 분지를 생각으로 기사검을 무시무시하게 휘둘렀다.
퍽! 뻐걱, 빡! 빠박!
=끄아— 껙, 끄허헥! 메헤헤헼!=
파공음과 함께 기사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초소장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피하고자 몸을 뒤틀었지만…….
퍼벅! 우직, 뚜둑! 뻐버벅!
=끄헤엑! 사, 살려… 꾸헤익! 메켘!=
자신의 몸으로 어디를 어떻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맞아야 뼈가 부러지는지, 어떤 식으로 맞아야 넘어지는지 체득한 이실리테에게는 헛된 몸부림이었다.
1분. 쓰러지지도 못하고 전신을 골고루 두들겨 맞아 전신 골절 타박상을 입은 초소장의 입에서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는다.
음. 여기서 끝내기에는 뭔가가 부족한데.
이실리테는 잠깐 고민하면서 환인의 뒤에 선 영혼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분노하면서도 속 시원해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란 듯이 기사검을 크게 휘둘러 머리통을 가격, 떠엉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초소장이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자 두 명의 영혼이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옅은 빛무리가 되어 성불했다.
=저 두 명은 염소 인간 때문에 죽었나 보네…….=
“…….”
회백색의 빛가루를 뿌리며 승천하는 영혼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크게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 사이를 지나 하급 거리로 내려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약 300여 명의 영혼. 그 행군에 도시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2 내성벽의 중문에서 일으킨 소란 탓에 판자촌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하급 거리는 정말 빠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중문 쪽에서 성자님이 나오셨대!
어어? 어디라고?! 중문!?
중문의 그 쓰레기 초소장이 영혼 기사님한테 존나 처맞고 뻗었다던데?!
당장 가보자!
사람들의 뛰어다니며 외치는 소리에 불이 꺼져있던 집안에 불이 켜지거나 등롱, 랜턴을 들고 잠옷 차림으로 집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늘어난다.
=여, 영혼사님이다…….=
=영혼사님이, 성불행 중이셔…….=
그러다 환인의 뒤를 따르는 영혼의 행렬을 발견한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행렬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저분, 아우라가 없으시잖아.=
=……성자님이다. 녹색 성자님이야!=
=우리, 우리 도시에 녹색 성자님이 오셨어……!=
파아앗—…….
=펴, 평온의 파동이다……. 아아…….=
=으으, 흐으윽…….=
그러다 가끔 터져 나오는 평온의 파동에 하급 거리의 시민들은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환인을 향해 고개 숙여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영혼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환인을 따른다.
개중에는 영혼을 알아보고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빠, 저에요! 미욘이에요!=
=여보……!=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가족들, 놈들에게 끌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가족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애탁게 부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계속 늘어나자 주위가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환인의 여자들은 그 상황에 살짝 위기감과 경계심을 느꼈다.
한둘도 아니고 수천 명이다. 그중 10%만 나서도 수백 명.
=이슬이 아가씨, 안느 아가씨. 사람들이 너무 모이고 있어. 정리가 필요해. 이러다 성불행이 중단될지도 몰라.=
유르파의 지적에 가라앉은 눈빛을 빛낸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의 곁을 백려강과 유르파에게 맡긴 뒤 좌우로 나누어져 사람들을 줄 세워나간다.
=성자님의 성불행입니다! 가족의 영혼이 보이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성자님께서 시간을 내어주시길 기다리십시오!!=
=성자님의 성불행을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가까이 붙지 말고……!=
여자친구들이 인파 정리에 나서고 있을 때, 환인은 점점 쌓여가는 영혼들에게 한기를 자극받는 중이었다.
영체 속에 팔을 집어넣어 한기를 흡수할 때와는 다른, 무수한 영혼의 한기와 몸 안의 한기가 공명해 좀 더…… 순수해지고 정갈해지는 느낌.
그러는 사이 사람들도 계속 모여들어 이제는 환인이 나아가는 길가의 작은 골목 사이사이에도 사람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영혼의 행렬에 이끌린 것처럼 멀리서도 영혼들이 날아서 합류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어느새 1만을 넘는 규모가 되었고 영혼 또한 천 단위를 넘은 상황.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던 환인은 그럭저럭 상권이 유지되고 있는 십자로에 도착했다.
목표로 한 장소다.
‘여기군.’
이곳에 온 목적은 흐라스린드의 남은 세 조직 중 하나를 박살 내는 것.
환인은 십자로의 한쪽 건물, 서부극의 오래된 2층 여관 같은 나무 건물 앞에 섰고, 하급 정령 하나를 잡아 영혼 폭발 구슬로 전환, 문양 에너지를 3%만 밀어 넣어 쏘았다.
쿠구궁—!
빠르게 날아가 건물의 중심에서 지름 7m의 폭발을 일으키는 문양 강화 영혼 폭발.
그 일격에 너무 오래되어 갈색을 넘어 흑색으로 변질되어가던 나무 건물이 박살 나 사방에 나무 파편과 사람을 흩뿌린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크으아아……!
쿵, 털썩 철푸덕, 터덩—
사람들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떨어지는 인간들의 모습에 얼음처럼 꽁꽁 굳어버렸다.
전투 능력은 전무하다 알려진 영혼사가 헉 소리가 날 정도의 공격 술법을 쏘았다는 사실과, 그 공격 술법이 펼쳐진 곳이 하급 거리에서 악명을 떨치는 붉은 꼬리 패거리들의 아지트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네가 붉은 꼬리의 우두머리로군.”
=크헉……! 너, 너는… 대체……!=
자는 중에 공격을 받아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치명상을 입은 붉은 꼬리의 여우 여자가 속옷이 찢어져 속살을 훤히 노출한 차림으로 땅에 널브러진 채 파르르 떤다.
5급 전사의 아우라가 신체를 휘감고 있지만, 영혼 폭발에 당해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힘을 발휘하기란 무리.
왜, 왜? 갑자기, 어째서?
그런 혼란이 여실히 드러나는 20대 후반 외모의 여자에게 환인은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라.”
회색, 회색, 회색. 사방이 회색빛의 영혼들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귀기 어린 분노를 드러내는 영혼들!
“너에게 원한을 불태우는 영혼이 수백이며 네 죽음을 바라는 영혼 또한 그와 같은 숫자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 같나.”
=다…앙신. 서, 성……자….=
“내게 영혼을 벌할 권한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극악무도한 범죄자인 네게 정의를 구현할 수는 있지.”
부아앙—
환인의 손에 들린 광창의 코어가 맹렬한 진동음을 퍼트리며 빛의 창으로 변모한다.
희게 타오르는 횃불처럼 사위를 밝히는 광창을 높이 든 환인은 사람들의 눈에 하늘이 내린 거룩한 빛의 계시자로 보였다.
털썩, 털썩털썩.
사람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영혼들은 자신의 한을 갚아 달라는 듯이 우우우 귀곡성을 흘린다.
환인은 영혼이 자아내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며 살려달란 듯이 피가 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꺽꺽, 손을 뻗는 붉은 꼬리 여두목의 심장에 광창을 꽂았다.
* * * *
=…한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하급 거리에 영도의 차기 대성자 후보라 알려진 비자룩스의 녹색 성제가 나타났다 합니다. 현재 수천 명의 시민과 천 수백의 영혼을 이끌고 성불행을 진행 중이며…….=
……와아아악……!!
…우와아아아……!!!
창문이 살짝 들들 떨릴 정도의 함성에 보고를 올리던 집사장이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다.
흐라스린드의 영주, 크로알=둠드는 호화찬란한 침실을 가로질러 창가에 다가가 달빛 별빛으로 하늘거리는 얇은 커튼을 젖혔다.
그리고 벌컥 창문을 열자 눅눅한 바람과 함께 달빛에 물든 도시 전경이 그의 눈에 담겼다.
=…….=
소란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 바로 꽂힌 것은 더러운 하급 거리의 판자촌 한복판, 빛의 횃불 같은 것을 쳐든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남자 주위를 둘러싼 회백색의 영혼 군단과, 그 영혼 군단의 몇 배를 상회하는 숫자의 시민들.
=……귀찮게 하는군.=
=영주님. 그는 영도에서 일곱 영성의 인정을 받은 차기 대성자 후보입니다. 주도의 현친왕 전하와 친분이 있는 만큼…….=
=알고 있으니 입 다물라.=
=…….=
짜증스런 기색으로 집사장의 조언을 막은 크로알=둠드는 귀찮음만 드러내던 눈을 감았다.
오늘 땅신 교단의 신관장이 찾아와 시끄럽게 땍땍거리며 귀찮게 군 배경에 저것이 있었나.
=너무 작아 교단은 짐승신과 땅신 교단뿐인 도시, 특징이라곤 없어 볼 것도 없는 도시에 대단한 분이 납셨군.=
애정은커녕 무관심밖에 없는 말투로 비웃은 크로알=둠드는 촥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다시 쳤다.
=난 다시 잘 테니 이후 일은 집사장 자네가 알아서 하게.=
=……예, 영주님.=
집사장은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영주의 모습에 슬픔과 아픔을 느끼며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뒷걸음질 쳐 영주실을 빠져나갔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