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16화 (516/813)

〈 516화 〉 510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중급 거리의 가장 큰 조직 하나를 괴멸시킨 여파는 당장 커지진 않았다.

다만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해 훨씬 안 좋아졌다.

상급 거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지만, 중급 거리에는 포고령과 대자보가 붙은 뒤 영주성을 향한 불만이 크게 터져 나왔던 것.

물론 대놓고 떠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사가 없고 후미진 곳이나 으슥한 곳에 사람이 모이면 심연의 마굴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그 내용은 분위기에 걸맞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씨이발. 우리 거리는 신경도 안 쓰면서 그나마 쉬고 스트레스를 풀 장소를 없애버리네.=

=빌어먹을. 상급 거리에 사는 놈들만 시민이라는 건가? 좆같아서 도시를 뜨던가 해야지.=

=카지노 무너진거 봤냐? 그때 내 친구가 거기 있었는데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도 지붕을 그냥 무너트렸다더라.=

=어어. 그돌씨네 아들도 크게 다쳤다던데.=

심연의 마굴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친서민적인 조직이었는지 주민들의 여론은 ‘잘 사라졌다.’가 아닌 ‘왜 쓸어버린 거지?’로 쏠렸다.

덕분에 포고령이 붙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불만으로 인해 점점 험악해져갔다.

환연이 정령으로 보고 듣고 전해주는 소식에 아침 훈련을 마치고 탱크탑과 숏팬츠 차림으로 요가를 하며 뭉친 근육을 풀던 백려강이 고양이 자세로 엉덩이를 높게 치켜든 채 언니들에게 물었다.

=인신매매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이 사라진 거면 좋은 일이 아닌가요? 왜 영주성을 욕하는 걸까요…?=

=그런 자극적인 오락 시설이 사라지면 불만을 가지는 게 당연하겠지. 아가씨도 알다시피 평범한 사람들의 놀거리라고 해봤자 술을 마시거나 연초를 피우거나 계집질을 하는 정도잖니? 고족이나 호족쯤 되면 시서화 같은 것을 하지만 그건 놀이라기보단 일종의 교육이고.=

=하지만 도박과 인신매매는 범죄잖아요…….=

유르파의 대답에 백려강은 오히려 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썹 끝을 늘어트리며 엉덩이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든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빈틈이 없는 숏팬츠가 사타구니에 꽉 끼며 음부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평상시라면 이런 말이 안 나오겠지만 물자 제한 때문에 중급, 하급 거리의 상황이 나쁘잖아. 고통을 오락으로 잊으려는데 그 오락마저 없어지니까 갈 곳 잃은 불만과 분노가 터져 나오는 거야. 그나저나 상황이 조금 심각해 보이는데… 영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별생각 없겠지. 이런 불만을 해소할 생각이 있는 영주라면 처음부터 물자를 상급 거리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테니까.=

주방에서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나와 거실 탁자에서 목욕 중인 환연의 옆에 내려놓으며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이실리테.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안느를 비롯한 여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생각해봐도 그랬던 거다.

찻주전자 비슷한 그릇 속에서 알몸으로 느긋하게 잠겨있던 환연은 이실리테에게 뜨거운 물을 조금만 부어달라고 손짓하며 환인을 향해 말한다.

「그런 이유로 갑자기 나타나서 마굴 조직 아지트를 쓸어버린 플뢰 남자의 평판은 나쁘게 퍼져나가는 편이야.」

=그건 너무하네요. 그런 조직은 사회를 병들게 해서 언젠가는 모두를 힘들게 만들 텐데…… 현재의 쾌락에 눈이 먼 걸까요?=

=힘든 현실을 잊으려는 시민들과 힘든 현실을 들이미는 영주. 잘잘못을 따지자면 영주와 시민이 7:3 정도겠지.=

고양이 자세로 등을 한껏 휘고 있던 백려강은 부들부들, 몸이 살짝 떨릴 때까지 버티다가 끙 앓는 소릴 내면서 자세를 풀었다.

=아무튼, 점점 요가가 힘들어지는 느낌이에요. 몸이 계속 굳는 걸까요?=

=근력 훈련으로 몸에 근육이 생겨서 그럴 거야. 계속 요가를 해서 유연성을 늘려주는 게 좋아. 계속해.=

=네!=

강아지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모습이라서 붙은 다운독 자세, 거기서 무릎을 접고 환인쪽을 향해 골반을 활짝 연 백려강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그곳에 닿는 것에 오싹, 기분 좋은 소름을 느끼며 몸에 조금 더 힘을 준다.

환인에게 눈요깃거리를 준다는 숨겨진 목표를 위해 백려강이 더욱 요가에 매진하고 있을 때, 소파에 앉아 커피를 들던 환인은 백려강의 요가에 시선을 주면서 환연이 정령으로 물어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도시의 병사들은 아침 일찍부터 중급 거리로 출동, 심연의 마굴이 관리하던 노예 창고를 급습했지만 구출한 것은 네 명의 플뢰 남녀뿐이었다.

족히 30명은 가둘 수 있는 노예 창고에 네 명의 플뢰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번 일에 플뢰족이 연관되어있단 사실을 다른 조직이 모두 눈치챘으며, 일부러 가져가라고 내버려 둔 4명 외에는 다른 조직이 전부 빼돌렸다는 뜻.

참으로 주먹구구식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정보를 가져다주었는데 정작 출동이 늦어 다른 조직이 파이를 크게 떼먹고 튄 뒤라니.

아무튼 도시의 민심은 계속해서 내려갔고 점심이 지났을 무렵에는 눈에 띌 정도로 불만이 팽배해졌다.

미궁에서 노동자로 불리는 저급 직업자와 용병들이 가져다 파는 이형종의 고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식량 수급이 유지되고 있지만, 모자란 물자 탓에 불만이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은은하게 타는 숯불에 장작을 투하한 느낌이다.

그렇게 오전을 객실에서 보내고 오후가 접어들었을 때였다.

객실의 담당 하녀가 찾아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게 누군데?=

=남문 쪽에서 식료품을 도매와 소매하시는 얀슌데라는 분입니다.=

하녀를 맞이한 안느가 묻자 키가 그녀의 명치께밖에 안 되는 소녀가 조금 위축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 사람이 왜 우릴 찾아와?=

=꼭 할 말이 있으시다고…….=

환인을 돌아보며 어떻게 할까 눈빛으로 물은 안느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객실 하녀에게 그 사람을 데려올 것을 부탁했다.

=네.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5분도 안 걸릴 거예요.=

=응. 이건 팁이야.=

1열철화 한닢을 하녀에게 튕겨준 준 안느는 돌아서서 환인에게 그 사람을 아냐고 물었다.

“어제 우리 앞에서 죽은 그자의 부모겠지.”

=아.=

환인의 말을 들은 안느와 유르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다들 후드를 쓰고 아우라 은폐 마도구는 해제하도록.”

환인의 지시에 여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시킨 대로 움직인다.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녀들이 준비를 끝내고 환인의 뒤에 모였을 무렵이었다.

환인의 지시에 백려강이 출입문을 열자 눈물 자국과 함께 얼굴이 크게 굳은 30대 초중반 외모의 강아지 귀 여자가 병사 차림의 토끼귀 여자와 성큼성큼 들어선다.

곱게 나이를 먹어 젊었을 적 미녀의 태가 남은 강아지 귀 여자의 표정이 분노에서 당혹으로 바뀌는 것을 환인은 가만히 응시했다.

갈색 강아지 귀의 여자, 얀슌데와 함께 들어온 인토족 여병사는 환인의 뒤에 선 여자들을 보곤 얼어버린 상황.

인토족 여병사는 금방 정신을 차리곤 얀슌데를 향해 분노한 기색을 조금 드러내며 물었다.

=얀슌데 씨.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아드님을 죽게 한 자가 있다고 해서 온 겁니다만.=

10년 동안 뇌물을 먹여 인맥을 다졌던 이십인장이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에 얀슌데는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좁지 않은 객실을 가득 채우는 듯한 세 명의 짙은 아우라. 셋 다 최소 6급이며 그중 두 명은 희귀 직업자다.

대대로 이어져 온 가게에서 40년 넘게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그녀도 본 적은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아우라의 형상.

그런 사람들이 거실의 1인용 소파에 앉아있는 플뢰 남자의 뒤에 조용히 시립 해있다.

저게 뜻하는 말은 무엇인가.

얀슌데의 머릿속에 ‘플뢰족의 최고위 귀족’이라는 문장이 스쳐 지나간다.

고생고생해서 늘그막에 겨우 얻었던 아들이 지난밤, 남편의 옷을 입고 어처구니없이 시체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이 반쯤 뒤집혔었다.

아들의 친구들이 무어라 설명을 했지만, 눈이 돌아간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아들을 죽게 만든 놈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며 남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밤새 갈색 머리카락의 쿼터 플뢰, 그리고 외부인이라는 두 가지 조건으로 놈이 머무는 곳을 찾은 얀슌데는 아침이 되자마자 상급 거리 치안 병영으로 달려가 뇌물로 인맥을 쌓은 이십인장과 함께 온 것인데…….

=얀슌데 씨. 말해보십시오. 정말 아드님이 저분들에게 살해당한 게 맞습니까?=

무직자에다 문제아로 불리던 당신 자식이 저런 고위 직업자들과 싸웠다고? 미쳤어? 나까지 죽일 생각이야?!

그렇게 해석되어 들리는 이십인장의 윽박에 정신을 차린 얀슌데는 한발 늦게 자신을 뜯어말리던 남편이 떠올렸다.

왜 그때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서는……!

아들의 사망에 미친년처럼 날뛰는 아내를 어떻게든 말리려 했던 남편이 알면 쓰러질 생각을 한 얀슌데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 제가 잘못 안 거 같습니다…….=

여자이면서 배운 게 많았던 얀슌데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사죄뿐이라는 걸 알았다.

저 뒤에 서 있는 세 명 중 한 명만 나서도 치안 병영의 병사들은 몰살당한다.

두 명이 나선다면 영주성의 기사단이 출동해도 제압할 수 있을지 의심할 정도다.

세 명이 다 나온다면 기사단도 몰살당할 수 있고, 만약 저 플뢰 남자도 정령술을 익혔다면 소도시에 불과한 흐라스린드의 전 병력이 나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플라비우스족이 도시에서 산다고?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비행의 여부는 그저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뿐이다.

환인은 자신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두 여자를 향해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자 친구들만 뒤에 세워놓았을 뿐인데 저렇게나 힘의 논리에 휘둘리는 모습이라니.

“갑자기 찾아와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알아듣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환인의 차가운 어조에 인토족 여병사는 에헤헤 웃으며 앞으로 나와 인사한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님. 저는 흐라스린드 상급 거리의 치안 병영 이십인장, 후토스토입니다. 아 글쎄, 이 아줌마가 착각도 유분수지 자기 아들을 여행자님께서 죽였다고 주장하지 뭡니까.=

생긴 것은 여자 아이돌 그룹의 비주얼 센터 감인 여병사가 비굴하게 웃는 모습에 환인은 모르는 척,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그러니까…….=

약 5분에 걸쳐 자초지종을 들은 환인은 냉랭한 시선(으로 꾸민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인 얀슌데를 보며 후토스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해준다.

간략하면서도 육하원칙이 명확하며 이해하기 쉽게 단락의 구분까지 완벽한 이야기.

모든 걸 들은 후토스토는 환인의 이야기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낯빛이 울긋불긋해질 정도로 빡친 모습을 보였다.

=서, 설마 포고령에 나온 그분이셨다니……. 얀슌데 씨.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저분이 댁네 아드님을 죽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처음에는 저분께서 시비에 걸린 건데요. 거기다 불법 업장에서…… 하아.=

어이없어하는 한숨과 함께 상아색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후토스토는 토끼귀가 앞으로 꺾일 만큼 환인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귀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여행자님의 말씀에 따르면 죄는 이 아줌마에게 있는 것 같으니 그만 데리고 나가서 취조하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러다 의견이 뒤집혀 저에게 다시 죄가 씌워지는 것은 아닙니까.”

=설마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답드릴 수 있습니다. 이 아줌마는 잘못된 신고로 영주님께서 포고하신 내용을 음해하려 했으니 치도곤을 당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당할지 궁금하군요. 잠깐 견학할 수 있겠습니까.”

=예? 아, 물론입니다. 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 자신의 얼굴이나 정체는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환인은 어차피 외모를 변형시킨 마당이라 거리낄 것 없이 후드 망토를 두르고 병사를 따라나섰다.

그의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뒷길을 통해서 여관을 빠져나와 환인과 함께 치안 병영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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