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 509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크아아악—!
끄아아……!
챙 채쟁, 푸욱
촤아악—
환인은 자신의 지시에 눈이 돌아가 방어를 도외시하고 상대방의 몸에 검과 창, 도끼, 발톱 등을 찔러넣으며 죽고 죽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약 서른 명이 눈앞에서 팔다리가 날아가고 배가 찢어지고 목이 떨어지고 머리가 갈라져 죽어간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니 뒤늦게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명이란 태어나고 자라기까지 수많은 아픔과 고통, 행복과 기쁨이 있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거라는 가르침.
환인은 속이 약간 불편해졌다.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어긴 것 같은 심정에서 오는 힘듦이다.
=어, 어. 뭐…야. 가, 갑자기 왜들 이래?! 멈춰 이 새끼들아!!=
일부러 빙의에서 제외한 조직의 두목, 검은색 퓨마 머리에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그 잠깐 사이 다 죽고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일곱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내장이 뱃가죽에서 흘러나왔거나 팔이 반쯤 잘려 덜렁이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사람들 뿐.
=아아악!!=
그때 빙의당해 두목의 앞에서 푸들푸들 떨기만 하던 시커먼 로브의 흑술사가 거친 괴성을 지르며 몸을 크게 털었다.
그 격한 행동에 빙의가 해제되었는지 영혼이 튀어나오며 흑술사가 무릎을 짚고 거칠게 숨을 토해낸다.
=으욱, 흐억, 허윽……!=
죽을 듯이 헐떡이던 흑술사는 침입자 세 명 중 가운데 남자를 분노와 공포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어떤 징조도 없이 펼친 집단 세뇌라니, 무직자가 어떻게 한 거지? 마도기를 쓴 기척도 없었는데!
어떤 수를 썼는지 알 수도 없다는 사실에 크게 겁을 집어먹은 흑술사는 지팡이를 들어 환인을 겨누었다.
이쪽이 수를 쓰지 않으면 다음에 죽는 건 자신—
콰아아앙!!
=누구한테 감히 지팡이를 들이미는 거야?=
위상력을 2할 가까이 담아 투척한 워 해머에 직격, 그대로 터져나간 흑술사를 향해 차갑게 중얼거린 안느는 허리춤에서 다른 워 해머를 꺼내 바짝 얼어버린 조직의 두목을 노려본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다시 워 해머를 투척할 생각인 것.
환인은 고기 파편으로 변해버린 흑술사의 잔해를 보다가 서로의 배와 가슴에 검을 찔러넣고 비트는 마지막 두 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게 의미가 없겠군.’
별로 정신력이 강해 보이지 않던 흑술사도 빙의에 저항할 정도다.
직업의 등급도 영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영혼을 빙의시키는 것은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쓰지 못할 듯하다.
털썩털썩.
마지막 남은 여자 두 명이 서로의 배와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울컥, 피를 토해내고는 동시에 쓰러진다.
그것으로 심연의 마굴 조직원은 두목 하나만 남고 전멸. 환인은 석실 안의 영혼을 전부 갈무리한 뒤 조직의 두목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 오지맠!!=
촤좡
양손에 단검 두 자루를 꼬나쥔 두목이 짐승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지만, 겁먹은 고양이의 하악질과 다를 바 없는 기세다.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환인을 향해 단검을 겨눈 두목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재차 소리쳤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뭐 때문에 날 공격하는 거냐고!!=
“네 부하들이 나와 내 여자를 납치하려 해서다.”
=…….=
“알고 보니 이전에도 열심히 플뢰를 납치해서 팔아넘겼더군. 이번에는 우리를 노렸고. 우리에게는 너희 조직을 무너트릴 힘이 있었기에 이렇게 찾아왔다. 이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가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다.
두목은 한순간이지만 어두컴컴한 석실 안이 환해진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비이일……어먹으을……!=
위험해 보이는 것들은 그토록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결국 이 사달을 일으킨 행동대장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저런 얼굴에 무직자라면 자신이라도 움직였겠다는 납득이 방향 없는 욕설을 토해내게 만든다.
조직의 두목은 1:3으로 다른 세 조직과 목숨 걸고 싸우던 때만큼이나 머리를 팽팽 굴렸다.
정황상 바깥의 실행 부대와 결행 부대, 보낸 선발대는 전부 뒈졌다고 봐야겠지.
그 말은 저 셋의 힘은 도시 기사단 기사단장급이라는 뜻.
자금줄이던 카지노까지 폭삭 무너진데다 손님들까지 좆됐을테니 이 도시에서 재기는 불가능하다.
이대로는 개죽음당할 거란 계산에 두목은 딸캉, 땡그랑 단검을 떨궜다. 그리고 환인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는다.
=어, 어르신. 조직의 은닉자금과 비자금, 그리고 이때까지 경매하며 기록해둔 장부도 전부 드리겠습니다. 현물까지 전부하면 1000금화는 될 겁니다. 경매 장부는 도시 중추 세력과 거래 용도로도 쓰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모든걸 드릴테니 제발 살려만 주십쇼.=
=어머, 눈치 빠른 두목이네.=
=그러니까 두목이겠지.=
여자들의 이야기에 비해 가운데 남자의 차가운 시선에는 변함이 없다.
그를 흐라스린드의 제일가는 뒷골목 조직 두목으로 만들어준 직감이 소리친다. 전부 내려놓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내일 떠오를 태양은 못 보게 될 거라고.
똥 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두목은 이마가 깨지도록 쿵쿵, 땅에 박으며 무조건적인 용서를 빌었다.
=죽을죄를 지었지만! 한 번만 용서해주신다면 짐승신님의 이름에 맹세코, 어르신과 어르신의 일행분께 남은 평생 절대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가져와라.”
=예, 예!=
두목은 황급히 단상의 자기 옥좌로 달려가 비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남자 하나는 집어넣을 수 있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나왔다.
리벳이 촘촘하게 보강된데다 위상력까지 흘러나오는 아공간 상자다.
그리고 품에서 양피지 책자를 꺼내 상자 위에 올려두는 두목.
「환인. 저 방 안에 숨겨진 공간이 더 있어.」
환연의 고자질에 두목이 흠칫 어깨를 떤다.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목을 지나친 환인은 그대로 비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먹만 한 자갈 벽으로 이루어진 5평 남짓한 공간. 내부를 살폈지만 특별한 장치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환인이 숨겨진 공간을 찾고 있으니 환연이 재차 정보를 알려주었다.
「왼쪽 벽에서 두 걸음, 밑에서 50cm 정도 되는 위치야.」
그녀가 말하는 곳을 더듬던 환인은 자갈 하나가 다른 곳과 달리 살짝 움직이는 걸 느꼈고, 그 자갈을 잡고 당기자 자그마한 공간과 작은 주머니가 나왔다.
주머니를 열고 내용물을 조금 손에 쏟아내자 각양각색의 3급(약 2금화), 4급(약 7.5금화) 위상석이 보석처럼 굴러 나온다.
무게도 제법 묵직한 게 안에 든 것이 전부 3~4급 위상석이라면 족히 500금화는 될 양.
위상석 주머니를 들고 비밀방을 나온 환인은 매우 어두워진 안색의 두목에게 말했다.
“상자를 들고 따라와라. 목이 달아나고 싶다면 헛수작을 부려도 된다.”
=부,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용무를 끝낸 환인이 지하 2층 석실을 나가려 했을 때, 환연이 다시 그의 뺨을 쿡쿡 찔렀다.
「환인. 아직 한 명 남아있는데 괜찮아?」
“숨어있는 인간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숨어있지 않았어. 전투원도 아닌거 같아서 아깐 빼놨던 거야. 저기.」
환연이 가리킨 곳에는 구질구질한 넝마나 다름없는 천으로 머리까지 뒤덮은 채 웅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넝마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겁먹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생김새가 독특해.」
독특하다니. 환연이 그런 평가를 한 여자는 없었기에 환인은 의문을 품으며 다가가 창끝으로 넝마를 벗겼다.
“…….”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검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브릿지로 아무 색도 물들지 않은, 자신처럼 오직 새카만 머리카락.
“고개를 들어라.”
오들오들 떨던 여자가 자신의 말에 흠칫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러더니 왈칵 눈물을 흘리며 떠들기 시작하는데 환인은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특유의 빠르게 오르내리는 성조에 강한 억양의 말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언어.
중국어다.
“calm down.”
환인이 진정하라고 영어로 말을 걸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데 전부 중국어다.
몇 차례 영어로 회화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중국어만 쏟아졌기에 환인은 냉담한 시선으로 중국어를 쓰는 여자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여자가 놀라 손을 뻗어 환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환인이 창을 코앞까지 들이밀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한 번만 더 잡으면 죽이겠다는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낸 뒤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자기, 저 여자는 뭐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어? 저 여자 차원 방랑자 아냐? 안 도와주는 거야…?=
“타국의 국수주의자와는 어울리거나 도와줄 생각 없다.=
자신의 민족국가에게 극단적으로 헌신할 것을 주장하는 주의, 그것이 국수주의다.
카지노를 만들 정도의 지식이 있다면 아무리 못 해도 영어 단어 한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블랙잭, 포커 같은 것은 지식이 없다면 만들어낼 수 없는 물건이니까.
그럼에도 몇 차례나 영어로 말을 걸어도 자국어로만 떠든다는 것은 그 뜻이 일목요연하다.
영어가 일부 국가의 전유물이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언어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영어는 반 공통어니까.
“Wèishéme bù bāngmáng?! Huílái! Bùyào zu!!”
뒤에서 악을 쓰는 목소리에 유르파가 기막혀한다.
=도와주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거 같은데?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니?=
=언니, 신경 쓰지 말자. 도…… 주인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정도잖아.=
=으응.=
환인은 정말 신경 안쓴다는 듯이 두목을 앞장세워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다.
여자들은 걸음을 재촉해 그의 뒤에 따라붙었고, 이제는 오열하며 소리치는 목소리를 환인처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내성벽 경비병은 불길한 소리를 하며 나갔던 플뢰족 일행이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중급 거리에서 악명 높은 조직 두목을 짐꾼처럼 부리며 돌아오는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그것보다!
=어, 어어.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 그자는 상급 거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땅신 교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에? 아니, 그래도……!=
“이 자를 습격의 증거물로 제출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막으신다면 저로서는 교단에 가서 경비병분이 막았다고 이야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
경비병은 경비병대로 자신이 책임을 덤터기쓰게 될 상황에 기겁했고 조직 두목은 두목대로 땅신 교단, 플뢰족의 국교나 다름없는 교단에 끌려갈 상황임을 깨닫고 경악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납치해서 팔아넘긴 플뢰만 백 명에 다다른다. 교단에 끌려갔다간 죽은 목숨이다.
“도망치려 한다면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버리겠다.”
=……!=
플뢰족이 아니지만 남자의 목소리에 깃든 진심을 읽은 조직 두목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떨었다.
아직, 아직 기회는 있다. 저 괴물들이 사라지면 그때 어떻게든 탈출하면 된다. 숨죽이고 기회를 기다리자.
“할 말 없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환인은 막지도, 그렇다고 들여보내 주지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경비병을 두고 상급 거리로 들어와 곧장 땅신 교단으로 이동했다.
교단의 위치는 안느가 알고 있는 상황.
길게 움직일 것도 없이 상업 구역인 중앙 사거리 인근의 땅신 교단을 찾은 환인은 아닌 밤중의 손님들로 인해 난리가 난 신관과 사제들을 구경했다.
=신관장님, 신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전투 신관님들도 모셔오세요!=
=빨리들 움직이셔요!=
약삭빠르게 꼬리나 빌미를 남기지 않고 플뢰족 납치 혐의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우롱하던 범죄자가 증거물과 함께 찾아오다니!
스테인드글라스가 줄지어 붙어있는 아케이드 쪽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환인은 잠시 후, 약간 흐트러진 신관장 복장의 아리따운 플뢰가 청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회랑을 따라 일단의 신관들과 함께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환인은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오… 땅신이시여!=
똥 씹은 얼굴의 두목을 보자마자 성호를 그린 여자는 환인을 지나쳐 안느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감격해했다.
=자매님, 정말로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중급 거리의 악명높은 왈키스를 이리도 쉽게 잡아 오시다니…!=
=신관장님, 조직의 두목을 붙잡은 분은 제가 아니라 이분이십니다.=
=…네? 아니, 하지만 당신은…….=
=이분이십니다.=
안느의 강경한 태도에 청록색 머리카락의 여신관장은 그제야 방금 무시한 플뢰족 남자가 외형 변경 마도구로 정체를 감춘 성제라는 것을 깨닫고 고운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본단의 추기경께서 직접 극히 조심해서 대하라는 지시까지 받았었는데…….
=아, 저…….=
여신관장이 눈매를 축 늘어트리며 울상을 짓는 모습에 환인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괜찮습니다. 신관장님의 마음은 이해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형제님의 자비로움에 흐라스린드 교구의 아리엔네, 깊은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허리를 살짝 굽히는 동시에 무릎도 굽혀 올리는 실로 정중한 인사에 환인도 가슴에 손을 올려 약식 경례로 받아준 뒤 왈키스에게 손짓해 상자를 내려놓으라 지시한다.
제 손으로 모든 걸 갖다 바치는 행위에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시키는 대로 상자를 내려놓고 자물쇠를 따서 열어준 왈키스는…….
=흐컥!? 끄헉! 으허허헉!=
켈틱 돌도끼를 꺼내든 환인의 도끼질에 몸에 걸친 가죽 갑옷은 물론 옷까지 죄다 부서지고 찢어져 삽시간에 반바지 차림이 되어버렸다.
피부는 건드리지 않고 체격에 맞춰 옷과 갑옷만 잘라내는 신기.
3초에 목이 5번은 달아나는 줄 알았던 왈키스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찢어진 옷과 부서진 갑옷 잔해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헐떡였다.
이… 괴물 새끼는 대체 뭐란 말인가. 교구의 신관장이 극도로 예의를 갖추는 데다 수십 명을 정신 지배하기도 하고 지금은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기술을 뽐내기까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지트에서 저 인간과 맞섰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란 거다.
환인은 자신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왈키스에게 짧게 살기를 쏘아 눈을 돌리게 한 뒤 신관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 자의 태도를 보면 모종의 탈출 수단을 가진 게 틀림없을 겁니다. 가두어둔다면 엄중한 감시가 필요할 겁니다.”
=……!!=
그, 그걸 어떻게?!
=형제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벌을 받을 그 날까지 삼엄하게 감시토록 하겠습니다. 요시안, 지하 밀실의 위상력 봉인 감옥에 가두고 신전 전사 두 명을 문 앞에 배치하세요. 형제님께서 수고를 들여 잡아 온 범죄자입니다. 한순간의 틈도 없이 감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 신관장님. 가자.=
=큿……!=
신전 전사에게 꽁꽁 포박되어 끌려가는 왈키스를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을 때, 환인은 경매 내용이 적힌 장부를 여신관장에게 내밀었다.
“이 장부는 신관장님이 가장 잘 쓰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재물의 일부는 흐라스린드의 영주 가문이 나서지 않게끔 입막음으로 사용해주시고, 남는 것은 피해자의 구제에 쓰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교단의 이름에 맹세코 흐라스린드의 호족들이 형제님께 손을 뻗치지 못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여신관장의 장담에 환인은 미리 상자에서 빼둔 비싼 보석과 금화를 담은 주머니를 그녀의 손에 올려주었다.
유르파의 간이 감정으로 족히 150금화에 달하는 가치가 담긴 주머니다.
“이것은 흐라스린드 교구에 제가 내는 기부금입니다. 필요한 곳에 쓰시길.”
=아……. 형제님의 호의와 자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뒷일, 잘 부탁드립니다.”
후드를 쓰고 교단을 나온 환인은 돌아가는 길에 안느에게 질문을 받았다.
=도령. 처음부터 교단에 넘길 생각이었어?=
“그래. 장부와 르아웬 추기경의 언질이 있었으니 그 신관장분도 열심히 움직이시겠지. 흐라스린드의 영주성도 교단의 견제와 뇌물로 입이 막힐 거고. 대신 중급 거리에서 패악질을 일삼던 조직의 소탕은 교단과 영주성의 공동 업적이 될 테니 호족으로서 체면도 설 거다.”
손님 중 몇몇이 죽고 다쳤지만, 조직 소탕 포고문이 나돌면 영주가 한 일이라 생각할 테니 원망이 발생한다면 영주에게 향하지, 정체를 숨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론은 500금화에 달하는 위상석의 부수입이 들어온 셈이지만, 그 인묘족 두목이 자기가 비자금을 챙겼다는 사실을 밝히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그 점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내일 밤에는 정체불명이라고 알려질 성제의 성불행이 진행될 테니까요.”
500금화. 절대 적은 돈이 아니지만, 도시의 영주쯤 되는 인물에게는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다.
그런데 500금화를 챙기자고 영도의 차기 대성자 후보로 알려지는 중인 성제와 마찰을 빚는다?
까딱 잘못했다간 플뢰족 인신매매를 방치하다 못해 그것으로 이득을 보려 한 셈이 되어 메리아놀의 극렬한 항의를 받을 수 있고 성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해버렸다는 식의 소문이 나돌아 영도의 항의까지 받게 될 수 있다.
선민의식도 적당한 대상한테나 할 수 있는 거지, 상대가 4대 국가 중 한 곳인데다 영혼사의 총본산인 영도쯤 되면 아무리 소도시의 영주라 해도 입을 조개처럼 다물 수밖에 없다.
=…으음. 난 도령이 엄청나게 화나서 앞뒤 안 가리고 조직을 뭉개버리는 거로 생각했는데…… 다 계획이 있었구나.=
“거창하게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다. 네 말대로 교단에 귀찮고 시끄러운 일을 적당한 뇌물과 함께 떠넘긴 거니까.”
=평범한 사람이 보면 충분히 거창한 계획인데 말이야. 그치, 언니.=
=후후후.=
환인과 여자들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환연은 그의 옷깃에 앉아 그의 목을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죽여.’
‘죽여? 진짜 죽여? 정말루 죽여?’
‘응. 죽여.’
‘죽이래! 꺄하하하!’
눈을 감은 환연의 망막에 험한 생활을 하느라 못생겨진 검은 머리의 여자가 누군가를 줄곧 욕하다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맺힌다.
환인은 밑바닥 인생인 그 여자가 아무리 주절거리며 떠들고 다녀도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거라 판단을 내렸겠지만, 환연은 무르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이러든 저러든 조직의 손에서 구해준 거나 다름없는데도 그 차원 방랑자 여자는 환인을 향해 저주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여자, 살아남으면 환인한테 안 좋은 말만 떠벌리고 다닐 게 틀림없다.
조직원을 죄다 죽인 마당에 그 여자도 그냥 깔끔하게 죽이지 살려두긴 왜 살려둬?
땅속 20m까지 끌려 내려가 산채로 매장당한 여자를 땅 정령의 눈으로 보던 환연은 시야 공유를 끊고 환인의 목에 머리를 기댔다.
‘남자라서인가? 의외의 부분에서 빈틈을 보인다니까. 흥,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이러니까 내가 곁에서 못 떠나지. 앞으로도 잘 챙겨주는 수밖에.
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체취 속에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