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4화 〉 508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쿵짝거리며 들려오는 음악 소리. 희열과 절망에 찬 사람들의 웃음과 탄식 소리.
이따금씩 환호성도 터져나오고 속옷만 입은 여자가 테이블에 올라가서 춤을 추기도 한다.
즉석에서 교미까지 하려는 사람도 나타났지만, 그런 사람들은 카지노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 어딘가로 안내했다.
가죽 갑옷을 풀세트로 입은 사병은 옻칠까지 했는지 적흑색으로 번쩍이기까지 해 조직원 특유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환인은 거기에도 일련의 현대적 감각을 느꼈다.
카지노 종사자와 종업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고객들이 돈을 마음껏 쓰기 위한 장치.
원래대로라면 창문도 모두 틀어막아 시간적 괴리를 느끼게 하는 요소도 있어야 할 테지만, 그게 없다는 것은 니오네브레스의 정서와 맞지 않아 설치하지 않은 거겠지.
인원족 남자가 헐벗은 웨이트리스를 옆에 끼고 젖무덤을 주물럭거리는 광경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진다.
안면인식 장애 후드를 눌러쓴 안느가 똑같은 후드를 쓴 유르파에게 속삭였다.
=언니. 저거 그, 도령네 세계의 카지노라는 거 아냐?=
=맞는 거 같아. 심연의 마굴은 다른 차원 방랑자가 만든 조직일까?=
“그건 아닐 겁니다. 조직의 두목은 인표족 남자라고 하니까요.”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대략 6년 전쯤.
아마도 그때 자신처럼 엉뚱한 장소에 트립한 차원 방랑자를 손에 넣은 조직의 두목이 지구의 지식을 바탕으로 만든 사설 업체가 바로 저 카지노일 것이다.
도박에 술, 매음과 관음을 제공하고 인신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매음은 이 세계에도 흔하니 그걸 제외하더라도 한 자리에 이 모든 것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지구인이 아니라면 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때 환연이 그의 뺨을 꾹꾹 밀면서 작게 속삭였다.
「환인. 지하에 노예 감옥이나 경매장 같은 건 없어. 다른 데 있나 봐.」
=……도령.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쳐들어가?=
=안에 손님이 많고 조직원들이랑 섞여 있는 거 같은데… 전투가 벌어질 걸 생각하면 손님들부터 내보내야 하지 않을까?=
“여긴 제가 하겠습니다.”
카지노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조직원의 주시를 느끼며 앞으로 나선 환인은 광창의 코어를 꺼내 광선검처럼 한쪽으로만 창의 형태를 끌어낸다.
거기에 문양 에너지를 지긋이 밀어 넣는 환인.
문양 에너지가 약 3%가량 주입되자 광창이 황금색으로 물들며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거기에 맞춰 카지노의 출입구가 아니라 건물의 뒤편에서 일단의 조직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야. 저놈 맞…지?=
=예. 그런데 저 새끼 손에 든 거 설마…….=
=…마도기 아닙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데요. 어떻게 해요, 대장?=
완연히 어두워진 주변을 환히 밝힐 정도의 광량에 각자 무기를 들고 달려 나온 조직원들은 당황과 당혹을 드러내며 주춤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저런 신비를 발휘하는 무기의 사용자다. 어디 고명한 모험가일 게 틀림없겠지. 그런 자들이 왜 갑자기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아드네빌라의 책을 보고 익힌 심핵력의 응용을 무기에 도입한 환인은 수군거리는 조직원들을 보면서 한 발을 내딛는 동시에 좌에서 우로, 광창을 크게 휘둘렀다.
그 일격에 황금색 섬광이 커튼처럼 펼쳐지며 1층짜리 카지노 건물의 상단부와 지붕을 두부처럼 가르고 지나갔고.
=……!=
=……?!=
…쿠궁, 쿠콰쾅, 콰과과광—
돌과 나무로 지어진 지붕이 굉음과 함께 내려앉으며 건물 내부를 덮쳤다.
으아아악—! 끄아악…….
꺄아아…!
아아아악…….
풀썩 피어오르는 먼지구름과 함께 카지노 내부의 불이 꺼지며 흥청망청 웃고 떠들던 소리 대신 수십, 수백 명이 지르는 비명과 절규가 건물 내부에서 울려 퍼진다.
눈앞에서 조직에 대한 파괴 행각이 자행되었지만, 조직원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간 섬광 때문에 온몸이 굳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자신들을 향해 좀전의 공격이 다시 날아올 것만 같아서였다.
환인은 그런 조직원들을 무시하고 살짝 얼이 빠진 그녀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유르파, 안느. 조직원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습니다. 환연은 아지트와 연결된 비상탈출 통로를 전부 무너트려라.”
=으응? 아, 응.=
=어어.=
「응.」
환연이 힘을 쓰는지 약한 진동이 몇 차례 발바닥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사이 환인은 광창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철창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굳어있던 조직원들이 작게 웅성거리며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환인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 누님…….=
=방금 그 공격은 마도기로 쓴 거다. 마도기를 넣은 걸 보면 더는 못 써. 적은 셋뿐이니 우리가 동시에 덮치면 이길 수 있어.=
검회색 머리카락에 고양잇과 귀를 한 여자가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처럼 조직원들을 독려한다.
유물도 일단은 마도기로 분류되니 광창이 마도기라는 것은 맞고 광창으로 기술을 펼쳤으니 마도기로 썼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문양 에너지를 3%나 쓴 것에 비해 별로 효율적이지가 않아 다시 집어넣은 건데.
=쳐라!=
으아아악!!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라 환인은 무기를 꼬나쥔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1~2급의 근접 직업자 일곱을 향해 철창을 흐느적거리며 휘둘렀다.
일견 무성의한 그 동작에 쇠빛의 철창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낭창 휘어지며 조직원의 심장, 목을 꿰뚫는다.
=컦!=, =끄헉?!=
=아아악…! 끄읅….=
풀썩, 털썩털썩.
가장 앞서 달려들던 셋이 유령에 홀린 것처럼 쓰러져 움직이지 않자 나머지가 놀라 일제히 멈춰 섰지만, 이번에는 환인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푹, 푸푹
산책하러 나가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동작이지만 사정거리에 들어온 조직원은 여지없이 머리나 목, 심장이 찔리며 그대로 절명했다.
고통 없이 죽어 나가는 그들에 비하면 안느에게 덤볐던 이들은 지옥을 보고 있었다.
콰광! 쿠과광! 콰자작—!
=으가아악!! 끄아아아아!!=
=헤, 헤헤. 헤헤헤헤.=
=꺼으어억…! 주, 주겨줚……!=
팔다리가 뭉개진 사람이나 상반신이 터져 즉사한 사람은 양반이다.
머리 일부가 무너진 채 눈코입으로 뇌수를 흘리며 웃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위상력이 담긴 워 해머에 뱃가죽이 훑어지며 내장이 곤죽으로 변해 내장 조각을 입과 음부와 항문으로 질질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히이익!=
=시, 싫어엇!=
하반신이 짓이겨지거나 척추가 부러져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손톱이 부러져라 땅을 긁어대는 인간의 모습에 남은 조직원들이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려 도망쳤지만.
=도망가면 안 돼.=
유르파는 새로운 지팡이, 전자기력 공부에 술법을 접목해 구현한 광학병기로 빔beam을 쏘아 조직원을 죽이거나 무력화시켰다.
=끄하아악!!=
=뜨것, 아아악! 뜨거아악…!=
=음~ 위력이 생각보다 낮네. 원래는 빔이 적을 꿰뚫어야 하는데.=
애초 목적한 위력은 말 그대로 빔을 쏴 적을 꿰뚫는 건데 실제 위력은 그정도가 나오지 않았다. 기껏 해봤자 상처 부위를 깊게 태워버리는 정도.
그것도 면적이 좁아서 목이나 머리, 심장이 있는 위치가 아니면 치명상이 되지 않아 잘 죽지도 않는다.
=에잇.=
푹, 푸북.
컥, 악.
=아니 잠깐. 율이 언니, 위험하게 적한테 가까이 다가가지 마.=
=하지만 위상력을 쓰는 것도 아깝잖니.=
빔 병기 대신 레이피어를 꺼내 덜 죽은 조직원을 처리해가는 유르파와 그런 유르파를 말리는 안느에게서 고개를 돌린 환인은 지붕이 무너진 카지노를 눈에 담았다.
지붕이 떨어지며 잘게 부서진 탓에 들썩거리다 카지노의 손님들과 종업원들이 적잖이 다친 모습으로 하나둘씩 빠져나오는 중이다.
=자기. 저들도 다 죽일 거니?=
“저들은 내버려 두겠습니다.”
환인을 따라온 두 여자는 그의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거면 지붕은 왜 무너트린 거지? 지붕을 무너트렸으면 사람들도 다 죽이는 게 맞지 않나?
=힉.=
=흐억.=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은 십수 명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장면과 그 근처에 서 있는 환인과 여자들을 보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건물이 무너진 것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 크게 겁을 먹었다.
=우, 우우우리는 심연의 마굴하고 관계, 관계가 없어요.=
=잠깐, 잠깐 놀러 왔을 뿐이에요. 지, 진짜예요.=
“조직과 관계없다면 꺼져라.”
=감, 감사합니다.=
=으읏.=
피투성이가 된 채 절뚝거리거나 비틀거리며 시체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
환인은 그들이 도망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손에 죽은 조직원의 영혼들을 전부 그러모았다.
워낙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던데다 영혼사이기까지 해서일까. 악령화 하는 영혼이 없다.
그사이 점점 잔해에서 빠져나오는 카지노의 손님들이 많아진다.
기본적으로 지구인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데다, 카지노의 지붕은 돌과 흙을 굳혀 만든 천장에 그 위를 서까래처럼 나무 기둥을 얼기설기 엮어 기왓장 같은 걸로 뒤덮은 구조라 무거운 것이 거의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지붕이 쉽게 무너지도록 일부러 지붕을 적당히 베어낸 것도 있었고.
물론 재수가 없어 떨어지는 지붕 기둥에 짓이겨져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사고에 휘말려 넋이 나간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겨 지하 계단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환인. 밑에서 인간들이 나오려 해.」
“무너트린 굴을 파헤쳐서 도망가려는 움직임은 없나.”
「응. 황술사 같은 인간이 있지만, 등급이 낮아서 그만한 일은 못하는 거 같아.」
“그래. 잘하고 있으니 계속 주시해라.”
「응.」
때마침 지하 계단을 뒤덮은 잔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래쪽에서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다.
=밑에 힘이 센 직업자는 없나? 이 정도도 밀어내지 못하네.=
「지하에 있는 인간 중에 직업자는 얼마 안 남았어. 5급이랑 4급이 한 명에 3급하고 2급 다 합쳐도 다섯이 안 돼.」
=지금 나오려는 사람들은 조직원? 아니면 손님?=
「손님이야. 지하에서 매춘하다가 건물이 무너진 걸 깨닫고 도망치려고 길을 내려는 인간들.」
=흐응. 남은 조직원의 직업이 뭐뭐 있는지 알겠어?=
「두목 같은 고양잇과 인간이 5급 투사고 4급은 흑술사야. 2~3급은 전사랑 엽사랑 투사랑 대충 섞였어.」
=흑술사면 어둠 속성 공격 쪽이려나. 저주면 좀 성가신데…… 지금 죽여놓을 수 있겠어?=
「……정령들이 그 인간한테는 손 쓰기 싫어해.」
=그래? 그럼 저주 쪽인가 보네. 보자마자 죽여야겠는걸. 걔 어떻게 생겼어?=
「여자인데…….」
들썩거리는 잔해 근처에서 안느와 화연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생존자 중 일부가 얼굴에 피를 묻힌 채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도베르만을 닮은 머리의 인견족 남자는 이마가 찢어졌는지 얼굴 절반이 피칠갑이 된 채 환인에게 성을 내기 시작한다.
=카지노를 무너트린 게 너희들이냐?!=
“그래.”
=이 미친 새끼!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 지붕을 무너트리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들을 다 죽일 셈……!=
옷차림이 제법 고급이지만 태도에서 졸부 특유의 느낌이 드는 인간이다.
“죽기 싫다면 꺼져라.”
환인은 상대하기 성가셔 진득한 살기를 내뿜어 위협했고, 인견족 남자는 아우라가 없는 일반인이란 사실에 성을 내다 갑자기 밀어닥친 살기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야, 야. 그냥 가자.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옆에 서 있던 다른 과의 인견족 남자가 어깨를 잡으며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오기를 불러일으켰는지 거칠게 그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씨발! 이거 놔봐!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죽고 싶은가 보군.”
굳이 중급 거리의 슬럼가로 내려와 몰래 퇴폐를 즐긴 놈이다.
진짜 호족이라면 정체를 감추는 짓 따위 하지 않고 초호화 마차에 호위를 끌고 와서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인견족 남자는 호위는커녕 마차도 없다.
걸치고 있는 옷도 몸의 치수에 맞지 않는 옷. 진짜 고족이나 호족이라면 죽으면 죽었지, 저렇게 입지 않는다.
환인이 목에 창을 겨누며 살기를 내뿜자 남자는 히익,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 제풀에 발이 꼬여 잔해 위로 철푸덕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주저앉은 자리가 좋지 못했다.
매우 길고 뾰족한 나무 잔해가 있는 곳에 그대로 체중을 실어 주저앉았던 것.
푸우욱….
=끄아악!!=
불에 달군 창날이 항문을 통해 뱃속을 찌르는 고통에 인견족 남자는 간질에 걸린 것처럼 몸을 크게 비틀며 떨어대다가 옆으로 쓰러졌고, 끄헥… 꺼으윽 피똥을 지리며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던 안느가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뭐야. 죽었어? 왜?=
“심인성 쇼크다.”
=어쩜 재수도 없지…….=
족히 팔뚝 길이만 한 나무 잔해가 항문에 박힌 채 죽은 남자의 모습에 유르파가 몸을 부르르 떨며 인상을 썼다.
앞으로 자기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끔 힘에 부치는데 저런 걸 남자가, 대비도 없이 뒷구멍으로 박혔으니 당연히 충격을 받아서 죽지.
환인은 환인대로 이건 뭐 하는 인간인가 싶어 죽은 인견족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영혼이 일어서는 것을 보곤 붙잡고 강제력으로 캐물었다.
정체가 뭔가. 가문의 이름과 지위가 어떻게 되는가.
결과는 그의 예측과 똑같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고족이었지만, 지금은 평민이나 다름없으며 현재는 상급 거리에서 적당한 크기의 매장을 운영하는 집안 막내라는 것.
오늘은 부모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을 몰래 빼내 입고 놀러 나온 것.
“…….”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살의가 밑 빠진 독의 물처럼 한숨과 함께 쑥 빠져나간다.
자신이 습격받은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대응하면 그만일 뿐이니까.
안느도 습격받았을 거라는 사실을 예측했을 때도 그렇게 크게 화가 나진 않았다. 안전할 거라는걸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환인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차가운 분노가 가슴을 채우는 걸 느꼈다.
그녀를 습격했다는 것은 납치해다가 성노예 같은 것으로 팔아넘기려 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여자를 납치하려했다는 분노에 환인은 그 분노를 외면하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조직원을 전부 살해한 것도, 지하의 조직원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반 손님의 피해가 나도 상관하지 않고 카지노를 무너트린 것도 그 분노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그랬는데 눈앞에서 우스꽝스럽게 죽은 남자를 보았을 때, 환인은 잠시 어긋나있던 도덕적 관념이 다시 살아난 것을 깨달았다.
‘곤란하군.’
아무래도 2년을 넘게 니오네브레스에서 여행하며 살인에 익숙해진 여파가 나타난 듯하다.
이 상태로 지구에 넘어갔다간 그녀들이 자신의 역린이 될 가능성이 100%다.
정신 수양의 필요성을 깨달은 환인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벌벌 떠는 인견족 남자 영혼을 풀어주고 성불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인견족 남자의 친구들로 보이는 두 명에게 말을 걸었다.
“저곳을 봐라.”
환인의 손가락질에 벌벌 떨면서 고개를 돌린 두 남자는 끔찍한 살인의 현장에 헉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내 목적은 심연의 마굴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 과정을 위해 카지노 지붕을 무너트렸지만, 정말로 너희를 모두 죽일 셈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도 않았다.”
말하며 눈앞을 지나가는 최하급 정령을 붙잡아 문양 에너지 1%를 집어넣어 지하 계단 근처에 터트린다.
꾸구궁…!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진동과 폭음, 그리고 직경 3m의 황금빛 폭발.
“마음만 먹는다면 흔적도 없이 카지노를 지울 수 있는데 귀찮게 지붕을 무너트릴 이유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이 남자가 죽은 것은 사고라는 뜻이다.”
끄덕끄덕!
“그러나 죽은 것은 죽은 거지. 즉시 이 남자의 부모에게 돌아가 전해라. 원한을 갚겠다면 받아주겠다고. 단, 이쪽을 죽이려 한다면 그쪽도 죽을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확실히 전하도록.”
=네, 네!=
그렇게 말한 뒤 남자의 시체를 둘에게 들려 보내려 했지만, 유르파가 다시 붙잡았다.
=있잖니? 미리 말해두겠지만, 우리가 심연의 마굴 조직을 공격한 이유는 이 자들이 플뢰를 납치해서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는 일당이어서야. 낮에 우리도 공격받았기 때문이고. 너희는 거기에 휘말린 거지만 이런 놈들이 운영하는 영업장에 놀러 온 것부터 잘못이라는 걸 알아둬. 은원의 인과관계라는 말 정도는 알지?=
=…….=
=…….=
모르는 듯한 반응이 나왔지만 유르파는 상관하지 않고 재차 이야기를 이었다.
=너희 둘의 얼굴이랑 기운을 기억했으니까, 만약 너희가 여기에 놀러 온 사실을 얼버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 우릴 곤란하게 만들거나 한 정황이 드러나면…… 다음에는 너흴 찾아갈 거야. 그게 뭘 뜻하는지 알지?=
끄덕끄덕끄덕!!
=좋아. 그 사실을 절대 잊지말고, 그럼 가봐.=
=네엣!=
두 남자는 죽은 친구의 시체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유르파의 협박이 제대로 통한 모습이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후드 옷깃 안쪽에서 환연이 귓불을 잡아당기며 하는 말에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환인. 조직원들이 손님들 틈새에 섞여서 나오고 있어.」
길이 열렸는데도 바로 나오지 않는다 했더니 뭔가 수작질을 준비하고 있었나.
“두목은 뭘 하고 있지.”
「부하들을 닦달하는 중이야.」
“모두 올려보내려는 건가.”
「탈출로가 막혔다는걸 알게 된 뒤로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거 같은데.」
환연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두컴컴한 계단 안쪽에서 타박타박, 족히 열 명은 되는 발소리가 점차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계단에서 물러나자 잠시 후 손님들과 함께 긴장한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조직원들.
대충 돌아갔던 이유를 깨달은 환인은 그중 조직원만 골라 채 말을 할 틈도 없이 찔러 죽였다.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직원의 영혼들이 손가락으로 가르쳐주고 있었으니까.
=커억…!=
=끄악!=
목과 가슴에 뚫린 구멍을 움켜쥐고 벌벌거리다 푹 쓰러져 숨이 끊어지는 조직원들.
“오늘부로 심연의 마굴은 흐라스린드에서 사라진다. 그리 알고 꺼져라.”
힉, 히이익!
아아아으…!
조직원이 순식간에 살해당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곤 벌벌 떠는 손님들을 향해 창을 휘둘러 쫓아 보낸 환인은 어두컴컴한 계단 안쪽을 노려보았다.
어그러졌던 도덕적 관념이 제자리를 찾았다지만 이미 사건을 크게 벌인 마당이다.
이제 와서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자신의 정체를 밝히던가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니 계획의 수정은 없다.
안느와 유르파에게 정화용 마스크를 착용하라 지시한 환인은 자신도 마스크를 쓰고 지하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이 분홍색 연무, 홀레른 꽃을 태워서 나는 거야. 미약한 미약의 효과를 가지고 있어.=
=몸에 나빠?=
안느의 질문에 유르파는 옆의 작은 방, 실크 같은 천으로 입구만 반쯤 가린 방 안쪽에서 루크랑 남녀가 질펀한 정사를 벌이는 걸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렇게 정신을 놓을 정도로만 맡지 않으면 괜찮아. 성욕을 살짝 자극하는 정도? 성수를 적신 마스크로 다 막을 수 있는 수준이야.=
지하 1층은 곳곳에 은은한 주황색 등과 분홍색 연기를 피워올리는 향료를 설치해놓은 매음굴이었다.
지하의 구조는 감옥 식으로 통로를 따라 좌우로 쿠션과 깔개를 채워놓은 네모난 방이 줄줄이 이어지는 형태.
지상에 그 사달이 났음에도 알몸으로 여자와 얽힌 남자, 배와 아랫도리 털만 깎아 민둥산으로 만든 남자와 몸을 겹치고 있는 여자가 반투명한 장막을 친 입구 너머로 훤히 보인다.
조직원의 영혼을 통해 20여 개에 달하는 방 어디에도 조직원이 없다는 걸 확인한 환인은 곧바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환인. 지하 2층은 조직원들이 거주하는 장소고 두목이랑 부두목하고 서른 명 정도 되는 졸개들이 모여있어.」
“지하 2층 구조는 어떻지.”
「홀처럼 커다란 방이 하나 있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방이 감옥처럼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중급 정령 구슬로 영혼 방패를 펼쳐 유르파와 안느 앞에 씌운 다음 곧바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몇 걸음 내려가지 않아 여자친구들을 멈춰 세운 뒤 철창으로 벽을 쾅, 후려쳤다.
촤좌좡!!
=엑, 함정?=
충격에 기관이 발동되어 왼쪽 벽에서 튀어나오는 나무창 십여 개.
환인은 그걸 죄다 잘라 주머니에 챙겨 넣은 뒤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함정은 그 뒤에도 두 번이 더 나왔다.
천장에서 독이 묻은 날붙이가 떨어지는 함정, 독과 마비 가스를 뿌리는 함정.
간단히 함정을 발견하고 그보다 더 간단히 함정을 해체하는 환인을 뒤에서 지켜보던 안느가 감탄을 흘렸다.
=도령, 아직도 파르히스트에서 배운 함정술을 까먹지 않고 있었네.=
“필요한 기술을 잊어서야 되겠나. 라수비탄이나 히스론드로 가는 이유도 마법, 술법 함정 간파와 해제를 배우러 가는 것인데.”
=1년 넘게 기술을 안 쓰면 조금 녹스는 게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안느의 혼잣말에 피식 웃으며 별문제 없이 지하 2층으로 내려온 환인은 축구 필드 절반만 한 넓이의 공간에 약 서른 명이 전투 준비 만반 상태로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숨어있는 인간은 없어. 저들이 전부야. 제일 뒤에 있는 인간이 두목이랑 부두목.」
=이…….=
고갤 작게 끄덕인 환인은 온통 검은색의 고양이 머리를 한 두목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았지만, 문답 무용으로 여기까지 오며 거두어들인 조직원의 영혼을 살아있는 조직원들에게 죄다 덮어씌웠다.
그리고 강제력으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