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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513화 (513/813)

〈 513화 〉 507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시체를 방치한 채 여관으로 돌아온 환인이 본 것은 여자친구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있다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환인 님!=

=다행이다. 혹시나 해서 도령 찾으러 나가려 했는데. 딱 맞춰서 돌아왔네.=

=주인님. 별일 없으셨어요?=

여자친구들이 드러내는 걱정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신매매범들의 습격을 받았지. 보아하니 안느도 습격받았나 보군.”

=응. 벌건 대낮에 날 끌고 가려 하길래 전부 박살 내놓고 왔지.=

“거리에 두고 왔다는 건가.”

=놈들을 교단에 던져두면 정체가 드러나잖아. 그래서 그냥 길거리에 놔뒀는데…… 교단에 넘기고 올 걸 그랬나? 도령은 어떻게 했는데?=

“후미진 골목에서 습격해오기에 심문한 뒤 모두 죽였다. 캐낸 정보에 따르면 이 도시의 고위층 인사들과 커넥션이 있는 조직 같더군.”

환인의 부연 설명에 유르파의 표정이 작게 찡그려진다.

=귀찮게 됐는걸. 자기, 이렇게 된 이상 그 조직을 박살 내는 게 좋겠어.=

“조직을 건드리면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호족을 자극하지 않겠습니까. 싸움이 도시 전체로 번져나갈지도 모릅니다. 후일 생겨날 귀찮음을 고려하면 그냥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정답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 전체와 싸우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아니다. 이엘카타 덕분에 사용법을 익힌 혼령주가 있다면 도시와도 싸울만하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환인이 우려하는 것은 대학살로 인해 그녀들이 마음에 짊어질 부담이다.

그랬는데 유르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후후 웃으면서 그의 왼편에 앉아 팔을 가슴골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자기가 너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게 이런 데서 드러나네.=

그리고 환인의 반대쪽에는 안느가 앉아 그의 오른팔을 끌어안는다.

=도령. 라드세아의 호족 대부분이 어떤 인물인지 잊었어?=

“…….”

=선민의식 덩어리 같은 인간들이 사회 하층민인 조직의 전멸을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상위 미궁 탐험가 파티로 추정되는 인물과 적대하지 않으려고 가볍게 조직들하고 관계를 끊을걸.=

=유리 언니와 안느 말대로예요, 주인님. 저들에게 조직은 들판과 산과 바다의 도적들이나 다름없어요. 그들이 죽어도 호족들은 길거리의 개나 고양이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환인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 백려강이 살포시 미소 짓는다.

=환인 님은 안느 언니를 지키기 위해서 도시랑 싸움도 각오하신 거에요?=

“그래.”

할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감동하는 여자 친구들의 시선을 받으며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로 이동하지.”

결론은 나왔다. 미룰 것 없이 바로 자신과 안느를 습격한 조직, 이름도 거창한 심연의 마굴을 치러 간다.

=아, 자기 그럼 이거 입어. 정체를 감추는 데 도움이 될 거야.=

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르파가 재빨리 자신의 가방을 가져와 회색 바탕에 검은색을 일부분 도색한 가죽 갑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

평소 입던 검은색의 보강한 가죽옷이 아니라 정식 가죽 갑옷이다.

하지만 중세나 고대의 투박하고 방어력에 중점을 준 형태가 아니라 현대의 미적 감각에 기동성을 더한 방어구라 꽤 세련된 형태다.

입어보니 착용감이 타이트하지만, 신체 가동 부위에 맞춰 신축성이 높은 소재를 이음매에 채용해 움직임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와, 환인 님이 그 갑옷을 입으니까 굉장히 능숙한 전사 같으세요.=

=그러게……. 히익? 이거 다 한 땀 한 땀 꿰맨 거잖아. 어마어마한 수고가 들어간 갑옷이네.=

=이슬이 아가씨가 깁는 걸 도와주어서 만들 수 있었던 거야. 나 혼자였다면 아직 절반도 못만 들었을걸?=

“좋군요. 잘 쓰겠습니다. 고맙다, 이실리테.”

갑옷을 모두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선 환인은 완전히 변한 자신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에는 영혼사인 환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한 명의 플뢰 전사가 서 있었던 것.

이런 자신을 보고 영혼사라고 생각할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

여관에는 혹시 모를 조직의 습격이나 도둑질을 대비해 이실리테와 백려강을 남겨두고 환인은 안느와 유르파, 환연과 함께 내성벽을 빠져나와 중급 거리로 향했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중급 거리로 향하는 일행이 이상했을까. 내성벽 출입문의 경비병이 제지했지만.

=예, 예?=

“심연의 마굴 조직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보복하지 못하게 이쪽이 먼저 치러 가는 중입니다.”

환인의 담담한 대답에 경비병은 차마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내 주었다.

=율이 언니, 그놈들이 플뢰를 잡아서 인신매매하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지?=

=응. 한통속일지도 모르겠네. 뇌물을 받고 들여보내 준다거나.=

=생각보다 어둠이 짙은 거 아냐? 성문 경비병까지 매수되어있는 거라면 문제가 조금 심각해질 텐데.=

=그런 거보다…… 안느 아가씨는 동족이 잡혀서 팔려나간 거잖니. 그건 괜찮아?=

=뭐 나도 과거가 좀 과거다 보니까…… 플뢰 중에서 친구가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동족애가 끈끈한 건 아니라고 할까…….=

「영혼사님, 저기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년이 망꾼입니다.」

헐어가는 거리를 걸으며 안느와 유르파가 대화하는 것을 듣던 환인은 심연의 마굴 조직원의 영혼이 가리키는 여자에게 다가가 대뜸 오른팔부터 잘랐다.

=아아악! 끄으, 이게 씨발 갑자기 무슨 짓이야?!=

나오는 길에 무기점에서 대충 산 창이지만, 상급 거리에 있는 가게여서 그런지 품질은 나쁘지 않다.

갑작스레 팔이 잘린 여자가 잘린 부위를 움켜잡고 하얘진 얼굴로 소리치자 노끈을 들고 피를 철철 흘리는 여자에게 다가간 안느는 잘린 팔의 윗부분을 꽉 묶으며 말했다.

=너, 심연의 마굴 조직원이지? 다 알고 왔으니까 아지트까지 앞장서라.=

쿠웅!!

천벌의 망치가 아니라 예비용 워 해머로 옆의 땅을 내려쳐 작은 구덩이를 만드는 안느.

그 뒤에는 워 해머의 헤드를 건드린 뒤 여자의 이마를 툭툭 치면서 다음은 네 머리 차례라는 눈치를 준다.

=허튼짓하면…… 알지?=

웅성웅성.

이 소란에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들자 망꾼 여자는 이를 악물면서 몸을 돌려 어두컴컴하고 더러운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인도 자신의 손에 죽은 아홉의 조직원 영혼을 앞세워 그 뒤를 따른다.

「영혼사님. 옆집은 조직원의 은신처입니다.」

“안느, 저 집을 부숴버려라.”

=엉.=

콰광! 쿠구구구궁—

위상력을 머금은 워 해머가 도색이 벗겨지는 벽을 후려치자 푸른 파문이 넓게 터지며 건물 절반을 집어삼켰다. 그 뒤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콰과광, 쿠르르르—

푸북­ 푹

끄악! 컥.

그렇게 집이 반쯤 무너지자 환인은 영혼 시야로 사람의 흔적을 탐색, 눈에 보이는 사람의 심장을 패널 단검을 날려 찔러 죽인다.

영혼을 수거한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얼마안가 조직의 영혼이 다른 집을 가리켰다.

「영혼사님. 이 앞집은 조직 간부의 집입니다. 여럿이 머무는 집입니다.」

“유르파. 저 3층 집을 무너트릴 수 있겠습니까.”

=응. 마침 알맞은 술법이 있지.=

각자 다른 색의 3급 위상석 4개가 박힌 지팡이를 내밀어 벽에 대고 중얼거리자 집이 물결처럼 출렁출렁하다가 폭삭 주저앉는다.

그리고 무너진 집의 잔해 아래에서 퍼져나오는 여자와 남자의 단말마.

환연이 환인의 후드 안쪽에서 속삭인다.

「집 안에 깔린 인간들 다 죽였어.」

“잘했다. 안느, 이번에는 저 집이다.”

=알았어.=

쿠쿵, 콰아앙—

으억! 크악!!

“유르파. 저 집입니다.”

=응.=

펑— 콰르르르—

켁.

끄으윽!

환인이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킬 때마다 유르파의 손에 의해 집이 내려앉거나 안느의 손에 박살 나버리고 환연의 정령술에 심연의 마굴 조직원의 목숨이 추수기 볏단처럼 거두어진다.

이미 조직의 모든 정보를 알고 들어온 듯한 일행의 행동에 환인을 안내하던 망꾼 여자의안색이 하얘지더니 냅다 도망을 쳤고.

푹­

컥!

환인이 던진 단검에 뒤에서부터 심장이 꿰뚫린 여자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쓰러져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조금 쓴 표정을 지은 안느가 단검을 회수하며 중얼거린다.

=그러게 허튼 짓 하지 말라니까.=

“안 했어도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엑, 그랬어?=

“내가 죽이면 네 구두약속이 어겨지는 일은 없고 나도 거짓은 말하지 않은 셈이니.”

「환인. 북서쪽 지붕 위로 인간 셋이 달려오고 있어. 동쪽 골목길 안쪽에서도 넷이 뛰어오는 중이야.」

“안느, 동쪽 골목길에서 넷이 달려오고 있다. 북서쪽 저 지붕에서 달려오는 건 내가 맡지. 봐주지 말고 전부 죽여라.”

환인의 잔혹한 손속과 지시에도 안느와 유르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가 지시하는 것을 성실히 수행했다.

방패에 머리가 찍혀 죽는 사람. 워 해머에 골통이 박살나 뇌수를 흩뿌리는 사람. 유르파의 위상력 사출형 지팡이에 심장이 꿰뚫려 죽는 사람.

「저 자는 심연의 마굴 조직과 적대하는 조직입니다.」

“심연의 마굴과 관계 없다면 관계 없는 채로 가만히 있어라.”

「쓰레기더미 속에도 있어.」

반쯤 숨어서 지켜보던 사람도환인이 영혼사라는 사실에 절망했다가 적극 협조로 태도를 바꾼 심연의 마굴 조직원의 영혼에 걸러졌고쓰레기더미 속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사람도 환연의 감시에 발각되어 목이 잘려 죽는다.

=이 새끼들! 감히 우리 세력권에서 개짓거리를 하다니!=

=다 죽여!!=

=저기다!!=

=저 새끼들이야!=

=씨발, 조져!!=

그렇게 10분 정도 지나자 소식이 안쪽까지 전해져서일까. 등급은 낮지만 직업자들이 속속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들거나 담장 위, 지붕 위에서 지팡이나 활을 겨누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공격하려는 조직원은 환인이 던진 패널 단검에 목이나 심장이 찔려 죽어버리고 지상에서 돌격해오는 조직원은 안느의 워 해머에 다진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다.

삽시간에 죽어 나간 조직원의 숫자가 50을 넘어서자 습격 빈도가 조금 줄어들었지만, 환인은 조직의 두목이나 핵심 간부들을 놓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환연, 아지트에서 도망가는 놈들은 아직 없나.”

「응.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말해줄게.」

처음부터 하늘을 날 수 있는 환연의 도움을 받아 흐라스린드의 지도를 완성, 조직의 아지트 위치를 파악한 뒤 환연이 정령을 불러내 조직 두목과 간부들에게 하나씩 붙여놓았기 때문.

놈들이 도망치더라도 정령흔을 뒤쫓으면 그만이다.

망치에 묻은 살점을 털어낸 안느가 시체를 내려다보며 고운 눈썹을 살포시 찡그렸다.

=위기의식이 없는 걸까? 50명이나 보내서 죄다 연락이 끊기면 뭔가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일 텐데.=

=고작 무직자 몇 명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

「응. 너희가 아우라가 없으니까 적이 얕보고 있는 거 같아. 두목이라는 인간은 보고를 받았으면서 여자 셋이랑 동시에 붙어먹고 있어.」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무한정 지속되진 않겠지. 아지트까지 속도를 올린다.”

그렇게 경보 수준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달린 지 3분. 환인은 놀랍게도 현실의 시골 카지노 같은 건물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조금 어두워진 풍경 속 수많은 창문마다 환한 빛이 쏟아져나오는 ㄴ자 모양 건물.

출입구 위에는 뭐가 뭔지 모를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술법으로 밝힌 불빛이 그림을 비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 풍경은 말 그대로 도박장이었다.

손바닥만 한 팬티만 입고 유방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이 쟁반에 술을 올리고 돌아다닌다.

반바지만 입고 털을 트리밍한 루크랑 족 남자들은 도박판마다 딜러를 보고 있다.

그런 종업원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블랙잭, 포커, 룰렛 등을 즐기는 모습.

「여기가 심연의 마굴 조직의 아지트입니다.」

조직원 영혼의 확답에 환인은 살짝 두통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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