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화 〉 506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량배 같은 자들은 포위망을 형성하며 슬금슬금 다가오기만 할 뿐이다.
얼굴을 감추고 수적 우위에 있으면서도 방심하지 않는 모습.
‘나름대로 전술 교육을 받은 자들인가.’
환인의 시선이 그들을 빠르게 훑는다.
3급 정도 되어 보이는 아우라의 전사, 녹술사, 강화 비술사 세 명에 나머지 여섯은 일반인.
일반인 중 허리에 찬 주머니가 신경 쓰이는 인간이 둘, 쇄겸과 활을 든 인간이 각각 둘.
전부 일상복에 가까운 가죽옷 등을 걸치고 있지만, 포위망을 구성한 실력도 그렇고 자세에서 우러나는 무술의 숙련도도 조직력이 있어 보이는 태도에 비해 형편없다.
‘엘위드리스 가문이 보낸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그쪽 가문이 추적자와 암살자를 보냈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을 공격하겠다 마음먹었다면 예지자와 예언자를 보유하고 있으니 자신의 일정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은 메리아놀 국가의 상위 귀족이 보낸 습격자라고 보기에는 수준이 지나치게 낮다.
그 외에는 자신을 공격할만한 집단은 없다. 자신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현재로서는 아드네빌라 외에는 없어서다.
영도를 나온 뒤에 안느가 르아웬 추기경과 통신을 시도하려 했지만 환인이 제지했고 그대로 흐라스린드에 도착했으며, 닌실=아나그에게도 메리아놀로 향할 거라는 말만 했을 뿐 남부의 벨티칼로 갈지 북부의 히스론드로 갈지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고 중급이나 하급 거리의 조직들이 비상을 보고 탐을 내서 다가온 거라고 보기에도 이상하다.
일반적인 회색 쿠에하고 모습이 좀 다르긴 해도, 회색 쿠에 한 마리를 빼앗자고 영주의 비호를 받는 거리에서 이런 습격을 결의할 만큼 비싸냐면 그 정도는 아니니까.
결론이 안 나온다.
상황 파악에 1초정도 소비한 환인은 두들겨패서 습격의 원인을 알아낼 생각을 굳혔다.
주변은 고족 거리 중에서도 조금 외딴 장소. 성벽에 드리워진 그늘과 통행인이 없는 구석진 곳이라 시선도 없다.
그 말은 저들에게 습격이 용이한 곳이지만, 역으로 환인이 실력을 드러내기에도 안성맞춤이라는 뜻.
아공간 주머니에서 제압용 천칭을 꺼내든 환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경고다. 용건을 말하고 물러난다면 이번 습격은 용서해주지.”
말을 끝마치고 5초 정도 기다려준 환인은 툭, 비상의 옆구리를 가볍게 쳐서 신호를 보냈다.
쿠엑!
그 즉시 녹색 쿠에의 뛰어난 각력으로 허리에 주머니를 찬 인간들에게 섬광같이 뛰어드는 비상.
환인은 망설임 없이 여자들의 관자놀이를 후려쳤고, 목이 꺾인 두 명은 즉시 나가떨어져 팔다리를 떨어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활잡이 둘이 반사적으로 환인에게 화살을 날렸지만.
쉬쉭—
“…….”
강령을 통해 증가한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으로 화살의 궤도를 천칭으로 수정, 녹술사에게 날려 보내자마자 자신의 어깨를 향해 내려꽂히는 사슬낫의 끄트머리를 후려쳐 옆의 활잡이에게 튕겨낸다.
푸푹 콱!
끄헉…!? 컥!
풀석, 털썩
옆구리에 사슬낫이 꽂힌 활잡이가 먼저 주저앉고 아군의 화살에 옆구리와 어깨를 꿰뚫린 녹술사가 이어서 쓰러진다.
터엉!!
게흑….
환인의 반격에 놀라 허우적거리며 등의 화살통으로 손을 뻗는 다른 활잡이도 정수리를 내려쳐 기절시킨 환인은 삽시간에 아홉에서 넷으로 줄어든 습격자들을 비상의 등에서 내려다보았다.
전사와 비술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 인풋 되지 않는지 멈칫멈칫하고 있고 쇄겸을 든 두 명은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중이다.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군. 뭘 목적으로 날 습격했는지 도통 알 수 없어.”
=……! 이 자식!=
환인의 도발에 시바견 머리의 인견족 전사가 두 손에 장검을 한 자루씩 꼬나쥐고 달려드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비술사도 황급히 발동어를 외쳐 전사에게 강화 효과를 부여한다.
근력 상승의 비술인지 전사의 돌진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지만, 고작 해봤자 3급 전사에 3급 비술사의 강화 효과.
=크아악!!=
비상을 향해 돌진해오는 전사를 향해 천칭을 창처럼 쥔 환인은 눈에 훤히 보이는 약점 중 제압을 위한 세 곳. 전사의 인중, 어깨, 가슴에 3연속 찌르기를 먹였다.
퍼버벅,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끄어헉 신음을 흘리며 나동그라지는 전사.
한발 늦게 환인을 향해 쇄겸 두 자루가 쇄도해왔지만, 환인은 별 어려움 없이 하나는 낚아채고 다른 하나는 천칭에 감아 무력화시킨다.
쇄겸을 쥔 여자들이 깜짝 놀라 쇠사슬을 잡아당기고 거기에 맞춰 환인도 힘을 주어 사슬이 팽팽해진 순간, 그리모암의 혁대를 발동한 환인은 쇠사슬을 있는 힘껏 크게 잡아당겼다.
=꺄악?!=
=아앗!=
만화나 무협 영화처럼 붕 날아오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여자는 낚싯바늘에 꿰여 올라오는 생선처럼 비상의 앞까지 끌려와 엎어지고 만다.
빈틈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은 비상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꾸웃!
퍼벅!!
끅! 꺼헉!
서둘러 일어나려다 2급 마물의 배를 터트려버리는 비상의 발차기에 당한 여자들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 혼자 남게 된 비술사 여자는 뒤늦게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려 몸을 돌렸지만.
쉭 퍽
=꺄윽!=
환인이 던진 스팀펑크 단검에 허벅지를 맞고 절뚝거리며 도망가다 이내 전신이 마비되어 쓰러져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사람 상대로는 마비 단검 효과가 제대로군.”
이때까지 스팀펑크 단검을 써본 적은 단 두 번이었다.
한 번은 타락한 바르둘에게 던졌지만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고 다른 한 번은 영도의 저택을 관리해주는 여우 남매를 구출하기 위해 영혼 기사에게 쥐여주었던 것뿐이다.
마비 효과를 직접적으로 경험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환인은 마비독의 즉효성에 만족해하며 비상의 등에서 내렸다.
=크, 크윽……!=
그즈음 3연 찌르기에 당해서 쓰러졌던 전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왼손만으로 검을 치켜세운다.
오른쪽 어깨를 찔렸을 때 뼈가 박살 났는지 오른팔은 축 늘어진 상태.
전사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마주하며 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날 습격한 이유를 말할 기분이 들었나.”
=…….=
“아직인가 보군.”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경계와 살기를 있는 대로 드러내는 전사를 뒤로한 채 환인은 몸에 화살대를 꽂은 채 공포에 물든 눈의 녹술사에게 다가가 양쪽 무릎을 밟아 분질렀다.
=끄, 꺄아아악…!=
여자가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환인은 차례차례 다른 습격자들의 어깨며 팔꿈치, 무릎 관절을 짓밟아 부숴나간다.
=사, 살려, 살려주 주…… 아가아아악!!=
=내 팔! 내파아아알…!=
=으아으어억…….=
”음, 이쪽은 두개골이 깨져서 빨리 치료받지 않으면 죽겠는데.”
가장 처음 관자놀이를 얻어맞아 널브러졌던 여자 둘은 눈이 뒤집힌 채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복면이 게거품에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는 상황. 저대로 두면 호흡 곤란으로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천칭으로 머리를 툭툭 건드리고 있자니 이가 나갈 정도로 부드득 갈던 전사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악마 같은 자식! 그만해! 멈추란 말이다!!=
“이쪽을 습격한 놈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환인은 전사의 외침에 아랑곳하지않고 경련하는 여자의 허리춤 주머니를 뜯어내서 열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안에는 침 부분이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다트 몇 자루와 던지면 연기가 터져 나오는 연기 구슬이 들어있다.
다트에 발린 것은 독인듯한데 생포용 마비독과 살해용 치사독 중 어느 쪽일까.
젖가슴이며 사타구니에 몸 곳곳을 더듬어봐도 해독제로 보이는 것이 나오지 않자 환인은 생포용 마비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설마 인신매매를 하기 위해 납치하려 한 건가.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손을 털자 이성을 잃은 전사가 울분의 외침과 함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재차 덤벼든다.
=으아아아!!=
전사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힐끔 본 환인은 그나마 멀쩡한 왼쪽 손목을 후려쳐 검을 떨군 뒤 팔꿈치와 무릎 슬개골을 찔러 박살내버렸다.
컥, 숨이 반쯤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전사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환인은 천칭으로 전사의 목을 짓누르고 입을 열었다.
“죽일 생각은 없지만, 죽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조, 좆까…….=
헐떡이며 내뱉는 욕설에 환인은 인견족 전사의 사타구니를 천칭으로 내려찍었다. 뿌직, 무언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이 돌아가고 게거품이 흘러나온다.
전사는 잠시 내버려 두고 다른 습격자들의 복면을 벗겨가며 얼굴을 확인한 환인은 그중 심약해 보이는 외모의 여자를 붙잡고 비상을 불러들었다.
“비상. 이 여자를 밟고 있어라. 도망가거나 몸을 비틀지 못하게 잘 밟아야한다.”
쿠에~
그리고 켈틱 돌도끼를 꺼내 도끼 머리 부분으로 엄지손가락부터 차례대로 짓뭉개기 시작했다.
=끄아악! 아가가각!! 끄아아아!!=
여자는 미칠 지경이었다.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쿠에가 자신의 등을 짓누르고 있는 것도, 손가락이 뭉개지는 고통도 끔찍하지만 질문도 없이 무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분쇄하는 플뢰 남자가 너무 무섭다.
질문이라도 하면 대답해줄 텐데! 뭐가 궁금한지 말해야 대답해줄 거 아냐!!
결국 네 번째 손가락까지 걸레짝이 되었을 때 여자는 눈물과 콧물과 오줌을 질질 흘리면서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프, 플뢰족 노예의 수요! 수요가 늘어서예요옥!! 노예! 노예로 만들려고 공격한 거였어요으악!!=
“…….”
환인은 대답 없이 여자의 손가락을 계속 뭉개 나갔고, 여자는 손가락이 뭉개지는 고통에 울부짖고 몸을 비틀며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입에 주워 담았다.
이 일을 시킨 사람. 조직의 이름. 조직의 위치.
그랬음에도 환인은 멈추지 않았다. 끝끝내 열 손가락을 전부 뭉갠 환인은 손등까지 짓밟아 완전히 손병신으로 만든 뒤에 다른 여자를 찾아 또다시 손가락을 뭉개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사이코패스 같은 짓거리에 두 번째 여자는 시작부터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며 앞선 여자가 말하지 않았던 것, 두목의 이름이며 조직원의 숫자 등을 말했지만, 환인은 이번에도 여자의 모든 손가락을 다 망가트린 뒤에야 멈추었다.
습격자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는 환인의 시선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잘못 건드렸다. 저건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이대로 있다간 손병신이 되는 것은 확정.
어떤 자는 박살 난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도망치려 했고 어떤 자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감성팔이를 시도했으며 어떤 자는 눈을 까뒤집을 기세로 욕을 퍼부으며 죽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아홉 명을 전부 손병신으로 만든 뒤에야 고문을 멈추고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취합했다.
조직의 이름, 두목의 이름, 조직의 위치와 조직원 숫자, 조직의 규모, 조직의 특징, 자신을 습격한 이유, 현재 조직의 동향 등.
그걸 통해 알아낸 사실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 자들이 자신을 습격한 이유는 흐라스린드에 플뢰족 노예가 유행하고 있어서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
자신을 노린 이유도 외부에서 들어온, 흐라스린드에 연고가 없는 플뢰라는 정보를 입수해서였다고.
그 말은 안느도 표적이 되었다는 이야기지만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는 땅신 교단의 성직자라는 신분으로 도시에 입도했으며 정령 기사가 되어 루모라는 빛의 정령과 계약한 이후 성투사일 때보다 더욱 강해졌다.
그녀가 당할 정도의 조직이라면 헬루멘의 영웅 기사단과도 견줄 수 있을 조직이고 자신의 앞에 널브러져있는 벌레들도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의구심이라면 땅신 교단의 성직자를 한낱 조직이 어떻게 습격하겠냐지만, 자신은 그런 그녀의 일행이다. 자신도 습격해왔는데 그녀라고 습격하지 않을까.
‘조직의 배경이나 습격의 배후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은 게 신경 쓰여.’
습격을 실행한 놈들이니 고급 정보를 알리 없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름 고급 인력인 직업자들은 특히 공을 들여 발가락까지 망가트렸음에도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의뢰를 사주한 고족이나 호족이 더 무서워서. 다른 하나는 정말 몰라서.
상급 거리에서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뒷배의 존재를 나타내는 행위이며 그런 플뢰를 판다는 건 곧 구매자, 흐라스린드의 고위층이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땅신 교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
왜 그런지 환인은 자신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법 니오네브레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도 마찬가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환인은 비상에게 물었다.
“비상. 여길 지켜보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나.”
뀨으? 뀨웃.
아니라고 대답하는 비상의 머리를 다독여준 환인은 천칭을 집어넣고 광창을 꺼내 들었다.
부우웅— 공기가 떨리는 듯한, 혹은 벌떼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빛이 모여들어 창의 형상을 이룬다.
그 장면을 목격한 습격자들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척 봐도 유물인 무기다. 저걸 이제 와서 꺼내는 이유는…….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아는 거, 아는 거 전부 말씀드릴 테니까 제발 물어만 주세요! 제발요!=
=싫어… 주, 죽기 싫어어…….=
“…….”
그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환인의 광창은 무자비하게 습격자들의 심장을 찢고 목을 갈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