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화 〉 505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성문의 여 병사가 가리킨 푸른 지붕 건물이 밀집한 거리에 도착한 환인은 도시에 뿌리 깊게 내리고 있는 신분 차별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파르히스트와 헬루멘이 특이한 거였나.’
환인이 이때까지 방문한 도시는 웨이포드, 파르히스트, 헬루멘, 프라버, 알소프, 엘스너펠과 영도 아랫도시 아드지까지 해서 일곱이다.
그중 파르히스트와 헬루멘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는 빈민가가 존재했으며 특히 슬럼화가 심한 곳이 웨이포드와 알소프였다.
어느 정도냐면 버젓이 내성벽으로 구역을 나누어 빈민들이 사는 곳만 따로 격리할 정도.
격리된 곳은 치안도, 시설 정비도 뭣도 하지 않고 알아서 살라고 내버려 둔 채 세금만 징수해간다.
덕분에 쥐어짜일 대로 쥐어짜여 버려진 과일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처럼 빈민들은 구더기가 들끓는 쓰레기 오물더미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수준.
빈민가가 아닌 빈민굴이라 불러야 어울릴 장소다.
그에 비하면 파르히스트에는 빈민가가 아예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딸의 유지를 성주가 이어받아 빈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직접 정책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헬루멘은 대대로 ‘민중을 위한 영웅의 가문’을 표방해왔기에 빈민가의 발생을 막고 굴러들어오는 부랑자들은 죄다 잡아 격리된 수용소로 보내어 더럽고 힘든 작업에 투입해 저렴한 비용에 부려 먹는다.
특이한 점은 그 저렴한 비용을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다. 그 때문에 도시 내에는 빈민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영도의 아랫도시 아드지는 특이점이라 불러야 할법한데, 전 세계에서 순례행을 오는 이들로 넘쳐나기에 도시 외곽에는 여비가 떨어진 순례자들이 머무는 판자촌이 형성되어있다.
슬럼가라면 슬럼가고 빈민가라면 빈민가지만, 이곳에도 지역순행기관의 기관원들… 즉 예비 영혼 기사들과 영혼 기사 지망생들이 줄기차게 순찰과 순회를 하며 조금이라도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은 당장 잡아다가 교화원(비교적 가벼운 범죄), 혹은 회개원(무거운 죄를 지른 범죄)에 처박는다.
여기에 도시 차원에서 하루 한 번 감자 하나와 맑은 수프뿐이라지만 무료 급식도 진행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분열시킨 청소 괴물도 매번 나누어 주어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을 유지중이다.
그러나 판잣집은 1층 이상 높이로는 짓지 못 하게 하고 정해진 구역 바깥에도 짓지 못 하게 해 판자촌이 슬럼화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있기도 하다.
더욱이 영혼사의 시발점이라는 상징성으로 나쁜 짓을 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어 빈민가 아닌 빈민가가 유지 중.
그리고 이곳 흐라스린드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10년 안에 도시가 지옥으로 변하겠군.”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귀도 조금 길게 해 쿼터 플뢰로 위장한 환인을 향해 여자들이 시선을 돌린다.
=네?=
=엉? 무슨 말이야?=
“흐라스린드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물자 탓이지.”
환인의 손이 가리킨 곳은 식료품 상점이었다.
이곳, 상급 구역으로 오는 길에 봤던 텅텅 빈 가게들과 달리 열린 대형 나무창 너머로 충분한 구색을 갖추다 못해 풍성한 품목들이 보인다.
생과일류처럼 유통기한이 짧은 품목도 있는데 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물자가 부족해지니 중급과 하급 거리에 물자를 푸는 게 아니라 상급 거리에만 물자를 풀고 있다.”
=아…….=
그제야 여자들은 내성벽 바깥과 안쪽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흐라스린드의 사회 계급도 여느 도시처럼 세 등급 정도로 분류된다.
상급 거리, 중급 거리, 하급 거리.
흐라스린드 상위층이 머무는 내성벽 안쪽의 상급 거리는 도로마저 깨끗하고 평평한 돌로 잘 포장되어있는 데다 쓰레기 하나 없이 청결하다.
건물 또한 금가거나 무너진 곳 없이 깨끗함을 자랑하고 있고 대부분 담쟁이덩굴이 벽을 얽고 있어 외관도 보기 좋다.
내성벽의 성벽 쪽, 평민들이 사는 집과 평범한 가게들이 이러할진대 고족이나 호족들이 사는 구역은 어떠할지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러나 성벽 바깥의 중급, 하급 거리는 물자 부족으로 인해 중급하급 거리 가리지 않고 통째로 슬럼화가 진행 중이다.
중급 거리는 사회 피라미드의 중간 계층이 머무르는 곳이니 그래도 사람이 살만한 장소일 텐데, 오면서 본 내성벽의 성문 바깥 근처에는 하급 거리와 마찬가지로 도로포장이 오래되어 흙이 올라오기 시작한데다 곳곳에 오물과 썩어가는 쓰레기들이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상급 거리에 들어오는데 안느의 땅신 교단 성직자 신분증에 열은화 한 닢의 뇌물이 아니었다면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우라 은폐 마도구를 끼고 있어 무직자로 보이는 안느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해맑은 모습을 둘러보다가 후드를 벗으며 묻는다.
=도령. 혹시 도시에 개입할 생각이야?=
설마 저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프라버에서 한 행동이 그녀들에게 충격이었던 건가.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지. 그중에 흐라스린드의 환경 개선은 없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환인의 태도에 안느와 이실리테는 안도한 것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은 자신들을 향해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상급 거리 거주민들에게 질문하는 대신, 그간 쌓아온 눈썰미를 발휘해 선술집에 가까운 여관을 찾았다.
4층 석조목재 혼합 건물로 1층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바가 있고 나머지 층은 숙박시설, 마구간과 차고도 따로 있으며 시설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여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단정했으며 많은 숫자가 오간 데 비해 여관 입구가 청결했기에 고른 선택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출입구가 계속 청결하고 단정하다는 것은 가게 주인이 줄곧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생활형 방 두 개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온통 회색빛 인테리어의 실내 풍경을 본 안느가 짤막하게 탄성을 흘린다.
=오. 1박에 3은화치곤 제대론데?=
거실 겸 응접실에 방 세 개와 욕실 하나가 붙어있는 대형 객실. 여관에서 두 개뿐이며 숙박비도 가장 비싼 객실이다.
=안느 언니. 이 정도에 3은화면 좋은 건가요?=
하얀 수녀 두건 같은 것으로 머리의 뿔을 덮어 가린 백려강이 두 손 가득 들고 온 짐가방을 내려놓으며 묻자 안느도 같은 자리에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두며 응, 하고 대답했다.
=호텔급이 아니지만 상급 거리의 여관이고 이 정도 인테리어에 다인실이면 4은화 정도는 해.=
바닥은 대리석처럼 매끈한 돌판이 가지런히 깔려있고 벽도 기다란 돌판을 이어붙여 석조 집처럼 느껴진다.
깔끔하기도 하고 타일 바닥이 전부 아교로 단단히 붙여놔 빈틈이 없다.
가구도 마감까지 나름 신경 쓴 고급이며 바닥에 배치된 카펫도 좀 품질이 떨어지지만 가구와 내부 풍경에 맞는 색으로 배치되어있다.
=특히 이 돌판 바닥은 손이 굉장히 많이 가. 밑바닥 작업을 대충하면 밟았을 때 쪼개지기도 쉬운 거라 돈이 많이 들어. 이런 작업을 해놨다는 거만 봐도 이 여관이 보통 이상이라는 거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거네요.=
=응. 바닥에 깨지거나 금 간 돌판이 하나도 없잖아? 관리도 잘하고 있다는 뜻이야.=
백려강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유르파와 함께 나머지 짐을 가져온 이실리테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방을 둘러보는 환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객실이 돌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그런지 실내 온도가 낮은 거 같아요. 벽난로에 불을 지펴도 될까요?=
“그래. 조금 늦었지만, 점심도 먹지.”
후드 망토를 벗은 환인은 출입문 옆에 붙어있는 끈을 두 차례 잡아당겼다. 그러자 체크인할 때 주인에게 들은 대로 하녀 복과 흡사한 옷차림의 여관 종업원이 찾아와 무슨 용무냐고 묻는다.
“식사 주문을 하고 싶습니다.”
=점심 식사 주문이시네요. 메뉴는 주방장에게 맡기는 점심 특선과 고기 위주인…….=
교육을 받았는지 이제 13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 종업원의 입에서 고기 위주의 요리와 채소 위주의 요리, 생선 위주의 요리가 각각 여섯 가지씩 나왔다.
볼 것도 없이 18종류의 요리를 1인분씩 전부 주문한 환인은 짐 정리와 방 배정을 끝낸 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음식을 많이 시킨 건가.”
=으응? 아아니, 우리가 배불리 먹으려면 그 정도는 먹어야 하잖니. 자기도 많이 먹는 편이니까.=
그러면 왜……. 다시 물으려던 환인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바꾼 얼굴이 이상한가 보군요.”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로 무척 잘 어울리셔서 조금 놀랐어요.=
=어. 누가 봐도 플뢰야.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몰랐던 내 이상형을 알게 됐을 정도?=
안느의 솔직한 발언은 여자들의 시선과 환인의 작은 웃음을 끌어냈다. 바꾼 거라곤 머리카락 색과 피부색에 귀 모양 정도인데 그 정도란 말인가.
뭐 반쯤은 장난이겠거니 생각한 환인은 거울 속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실리테의 바뀌기 전 머리카락 색 정도에 흔한 황색 눈동자, 그리고 안느보다 좀 더 작고 끝이 뭉툭한 귀에 그녀와 같은 피부색의 이질감이 심한 남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흠. 다음에는 머리카락도 너와 비슷하게 바꿔볼까.”
=어? 왜?=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어쩐지 이런 모습일듯해서 말이다.”
피부색과 귀 모양 때문인가, 의외로 안느와 비슷한 느낌이다.
=…….=
안느의 얼굴이 이보다 더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지는 걸 보고 웃으며 거실의 3인용 소파에 환인이 앉자 안느가 냉큼 대각선의 1인용 의자를 점거해서 그를 빤히 바라본다.
평소 그의 옆을 선호하던 안느답지 않은 위치선정이었지만, 환인은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
음식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네 명의 종업원이 들고 와 탁자에 차린 뒤에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음식을 들었던 것.
=진짜 안느 아가씨의 이상형인가 보네…….=
=안느가 저렇게 주인님의 얼굴을 쳐다보는 건 저도 처음 봤어요.=
=아마 귀를 뾰족하게 만들어서 플뢰족처럼 한 게 언니에게 치명적이었나 봐요.=
그녀들의 속닥거림에도 안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때 최대한 많이 봐두겠다는 듯이 환인 얼굴과 행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식사를 끝마친 일행은 각자 볼일을 위해 따로따로 여관을 나섰다.
유르파와 백려강은 마을의 마도구점과 비술사의 관? 방문을 위해서, 이실리테는 이런 산속 도시에 신선한 생선 요리가 나왔다는 사실에 신기해서 시장으로, 안느는 자유 성투사의 의무 시기 확인과 직업 재각성 보고를 위해 땅신 교단 지부로.
환인은 비상을 타고 상급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 여관의 마구간을 찾았다.
마구간은 상급 거리에 있는 마구간답게 석조로 잘 지어진데다 냄새와 환경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환인의 쿠에들이 머무르는 장소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말과 사슴 비슷한 동물에 소와 양을 섞은 듯한 동물, 트리케라톱스의 크기를 줄여놓고 다리만 길쭉하게 만든 초식룡 등을 모아둔 곳이 아니라 마구간과 외따로 떨어진데다 마치 새로 지은 것처럼 청결하고 깨끗한 장소였던 것.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푹신한 지푸라기에서는 신선한 들판의 향기가 났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와 내부도 쾌적하기 그지없다.
마구간지기에게 5열동화를 팁으로 준데다 자신의 쿠에들을 정말 깨끗하고 청결하게 돌봐준다면 같은 양의 팁을 더 주겠다고 한 결과다.
=아이고! 나으리, 오셨습니까요?!=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비상과 쿠에들을 부탁했던 인우족 여자 마구간지기가 눈 주변에 멍이 들고 땅을 몇 차례 구른듯 이곳저곳에 희미하게 먼지가 묻은 모습으로 수박만 한 가슴을 출렁이며 달려와 하소연하듯 굽신거린다.
=나리께서 당부하신 대로 쿠에들을 보살피려 했는데 아니 저 회색 쿠에가 글쎄 절 날갯죽지로 치고 발로 걷어차면서 다가오질 못 하게 하지 않겠습니까요…!=
빗질해주고 다리와 발톱도 닦고 손질해주려했는데 비상이 두들겨 패서 나동그라졌다는 이야기다.
쿠우. 큐으, 큐삣
“……뭐?”
큣! 큐삐삣.
비상이 억울하다는 듯이 날개를 위아래로 휘저으며 우는 소리에 환인은 비상이 가로막고 있는 입구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라, 파르히스트에서 양도받은 쿠에 부부 중 암컷이 건초를 그러모아 둥지처럼 만든 곳에 홀로 앉아있는 게 보인다.
남편인 쿠핀은 그런 쿠라를 지키듯이 자신의 몸으로 가린 채 앉아있다.
쿠에~.
쿠으.
환인이 다가오자 쿠핀이 일어서서 비켜주고, 환인은 그런 두 마리의 사이로 들어가 둥지 안에 앉아있는 쿠라의 배 아래로 손을 넣었다.
따뜻하다기보다는 조금 뜨거운 느낌을 해치며 손을 집어넣다 보니 손끝에 딱딱한 게 닿는다.
‘알을 낳다니.’
이대로면 여행에 지장이 생긴다. 환인은 일단 쿠라를 일으켜 세워 약간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껍질 색의 알을 회수했다.
꾸으…….
왜 가지고 가는 거야……?
무시무시한 괴물도 죽이는 일행의 대장이 알을 가져가니 쿠라는 차마 돌려달라 떼를 쓰지 못하고 소심하게 울면서 환인의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돌려달라 애원한다.
환인은 그런 쿠라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으면서 달래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은 알을 품기에 좋지 않은 시기라 내가 잠시 맡아두는 거다. 나중에 돌려주마.”
쿠에~…….
아침에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고 여기에는 도착한 지 2시간이 채 안 됐다. 그사이에 알을 낳았단 뜻이니 부화는 시작도 안 됐을 터.
혹시나 해 영혼 시야를 열어 알을 확인해도 생명체의 빛은 없다.
“……?”
수박 정도로 큰 불그스름한 알을 들고 마방을 나선 환인은 여자 마구간지기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진 채 알에 꽂히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1초 만에 그 이유도 깨달은 환인은 마구간지기의 손목을 잡고 다시 마방 안으로 들어왔다.
=앗, 아? 나, 나으리 저는 남편이 있는 몸입니다요…!=
“그런 게 아닙니다.”
엉뚱한 오해를 하곤 수박 같은 가슴을 그러모으며 몸을 움츠리는 마구간지기에게 환인은 자신의 정체, 영도의 대성자 후보라는 신분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했다.
쿠라가 낳은 알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물론 저에 대해서도 발설하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긴다면 당신의 혼은 죽어서도 신님들의 정원에 들어서지 못한 채 영원토록 나락을 헤매게 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환인의 좌우에 선 들개 전사단의 불길한 영혼의 모습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마구간지기는 목뼈가 부러져라 위아래로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의 소문은 들었었다.
요즘 거리의 가장 큰 화젯거리라면 영도의 유일 직업자이자 대성자 후보인 검은 머리의 성자님이 아니던가.
검은색 머리카락의 남자에 아우라가 없으면서 영혼을 다루는 모습. 틀림없다.
마구간지기는 냉큼 환인의 앞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이, 이 일은 부모님과 가족에게도 비, 비밀로 하고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요……!=
“부탁합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재차 환인에게 고개를 조아린 마구간지기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마방을 나간다.
얼룩소의 꼬리를 긴장한 것처럼 빳빳하게 세운 채 나가는 마구간지기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외투를 벗어 불그스름한 알을 감싸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짐을 지키는 역할로 환인의 손수건을 이불처럼 몸에 감고 꽃바구니 침대 속에서 웅크려있던 환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벌써 돌아왔어?」
“잠깐 일이 생겨서.”
외투 속에 숨긴 알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고 보존 주머니 여분을 찾고 있으니 환연이 신기해하면서 알을 건드렸다.
「빨간 알은 처음 보네. 무슨 알이야?」
“쿠라가 낳은 알이다. 아무래도 비상과 같은 희귀종인 노을색 쿠에의 알인 것 같다.”
「으응?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거야? 책에서 봤어?」
“마구간지기가 알을 보곤 눈이 찢어져라 크게 뜨고 있더군.”
생각해보면 쿠라가 이때 알을 낳은 것도 이상하다.
쿠핀과 쿠라를 파르히스트에서 노부부에게 양도받은 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쿠에의 번식은 1년을 4분기로 나눠 진행되는데 대부분의 쿠에는 무척 똑똑하고 순하다.
상황 파악도 또한 잘해서 지금 일행처럼 1년의 대부분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수준이면 포란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쿠에들이다.
그 증거로 함께 여행한 지난 2년간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헬루멘과 영도에서도 말이다.
헌데도 알을 낳았다는 건 동물의 육감에서 무언가를 느꼈단 거겠지.
자기 키를 훌쩍 넘기는 알을 살피던 환연은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였다.
「밀짚색 쿠에의 알에서는 어어어엄청나게 운이 좋아야 주황색 쿠에가 태어나고 보통 운이 좋아야 갈색 쿠에가 태어나잖아. 걔들이 빨간 알을 낳았다는 건 비상 이한테 무언가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까? 아니 환인의 평온의 파동에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빈 보존 주머니를 찾아 기능이 작동 중이라는 걸 확인한 뒤 불그스름한 알을 안에 집어넣는다. 그걸 짐이 있는 곳에 되돌려놓은 환인은 환연에게 말을 전했다.
“그녀들이 돌아오면 지금 들은 걸 전해다오. 알은 이 주머니 안에 있으니 다들 조심해서 간수 하라고 하고.”
「그럴게.」
다시 마구간으로 돌아온 환인은 마구간지기가 수백 킬로그램은 되는 건초 더미를 번쩍 들고 옮기는 걸 발견했다. 그녀도 환인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가 애써 외면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환인은 그런 마구간지기를 잠시 바라보다 비상을 불러 타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비상을 타고 상급 거리를 돌아다니던 환인은 고족, 호족 거리의 사병이나 도시의 경비병도 자신을 터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경함을 느꼈다.
‘회색 쿠에에 플뢰로 분장한 내가 타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리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검은색 노을색 녹색 쿠에를 제외, 일반적으로 돈만 있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회색 쿠에는 주로 호족의 증거물로 이용된다.
여기에 나름 부유해 보이는 전투 술법사 차림의 환인이라 어느 가문의 손님이라고 여겨지는 거라 환인은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험, 실례합니다. 혹시 길을 잃으셨다면 요그렌글 가문의 사병인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숲과 공생하는 도시의 모습이 좋아 산책 중인지라, 말씀은 감사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방해해서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가끔이지만 어느 가문의 사병이라던가 길을 가던 병사들이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었기 때문.
고족과 호족 거리라서 통행인이 없는 고즈넉한 거리를 걷던 환인은 잠깐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살폈지만, 플라비우스 종족은 보이지 않았다.
‘5층 이상 건물도 많으니 거기에서 지내고 있겠지.’
사람의 몸을 하고서 나무 위에서 지내는 건 매우 불편할 테니까.
플라비우스족도 안보이고 영혼도 대부분 덕지덕지 살찐 돼지 같은 회색 영혼들 뿐이고.
「이봐. 인간.」
비상을 쫓아다니는 바람 정령, 환인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환인도 없는 정령 취급하는 개체가 말을 걸어온 것은 도시의 절반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시선을 잠깐 내려 듣고 있다는 제스쳐를 보낸 환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영혼은 없나 살핀다.
「그 알, 어떻게 할 거야.」
정령이면서 정령력도 없는 자신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바람 정령의 질문.
그냥 지나가는 김에 신기해서 묻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비상의 동생으로 삼을 생각이다. 노을색 쿠에라면 비상처럼 특별한 힘을 쓸 테니 일행에 큰 도움이 될테니까.”
「인간 네 곁에 다른 쿠에가 있는 거, 노르스리넨이 가만히 두고 볼 거 같아?」
“아니. 그 알이 부화해서 나오면 이실리테나 안느에게 맡겨서 키울 생각이다.”
「웃기지 마. 쿠에는 무리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따라. 그건 희귀한 쿠에일수록 더욱 그래. 시루드가 태어나면 널 보자마자 어미 닭을 따르는 병아리처럼 삐악거리며 너만 쫓아다닐걸.」
“…….”
「노르스리넨이 처음에 호박색 여자하고 다퉜던 것도 그런 일의 연장선이야. 그땐 다른 종족이라서 흐지부지 넘어갔지, 같은 쿠에였으면 혈투가 벌어졌을 거야.」
“그리되지 않도록 노력해보고, 안되면 노을색 쿠에를 넘기거나 해야겠지.”
바람 정령은 저 인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쿠에 중에서는 노르스리넨을 가장 우선시하겠다는 말에 만족하며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모습을 감추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자신의 말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니까. 그 말은 믿어도 되겠지.
그리고 환인은 자신을 힐끔거리는 비상에게 웃음을 보이며 목을 어루만져주었다.
“쿠에 중에서는 네가 최우선이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큐흥~
비상도 그게 신경 쓰였었는지 환인의 이야기에 홀가분해 하며 흥흥 웃는다. 그 모습에 잠시 미소를 유지하던 환인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며 살벌한 위압이 퍼져나가자 골목 사이 사이에서 두건과 코까지 가리는 복면으로 정체를 숨긴 남녀 아홉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살기와 옷차림을 보면 명백히 좋은 뜻으로 나타난 게 아닌 모습.
환인은 자신과 비상에게 중급 정령 강령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필요없을 것 같지만 예의상 묻지. 날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