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화 〉 504 흐라스린드의 이방인
* * *
첫 경험 이후 백려강은 말 그대로 몸살이 나서 앓아누워버렸다.
근 9시간에 걸쳐 기절했다 깨어나길 반복하며 100번 가까이 절정에 오른 탓이다.
이실리테가 마차를 모는 사이 안느와 유르파, 환연은 백려강이 흘린 땀과 애액, 정액, 눈물 등으로 엉망인 마차 내부를 정리 청소한 뒤 기절해서 늘어진 백려강을 씻기고 옷까지 입혀서 마차 한쪽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눕혔다.
그리고 끙… 으응…. 작게 신음을 흘리며 앓는 백려강을 살피면서 환인에게 조금 불만을 드러냈다.
=도령……. 저렇게 앓아누울 정도로 한 건 조금 심했어.=
“…….”
=자기니까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래도 아직 애인데…….=
거기다 치유까지 걸지 말라니. 설마 일부러 괴롭히는 건가?
여자들이 아주 살짝 우려를 표시할 때 비상의 머리 깃털 속에 폭 파묻혀있던 환연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넌 여자들을 누구보다 아꼈잖아. 일부러 이런 거 같은데 왜 그랬어?」
뭔가 눈치챈 듯한 환연의 추궁에 환인은 기절에서 수면 상태에 들어간 백려강을 바라보다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치유를 제지한 것은 신체 회복력으로 컨디션이 회복되어야 어젯밤의 일이 몸에 기억될 테니까 제지한 거였고.”
「필요? 무슨 필요? 혹시…….」
“거기까지만 해라. 그리고 네 추측이 맞을 거로 보고 있다.”
환연이 초를 칠까 봐 혹시 몰라 미연에 방지하는 환인. 그 때문에 여자들의 혼란이 가중된다.
=응? 뭐야, 뭔데?=
=무슨 뜻이니?=
「…….」
환인의 제지에 입을 다문 환연은 무슨 말이냐며 재차 묻는 유르파와 안느에게 조용히 하란 듯이 팔을 붕붕 휘둘렀다.
이유를 듣고 싶지만, 환인의 반응도 그렇고 어처구니없어하는 환연의 태도도 신경 쓰여 일단 두 여자는 입을 다문다.
그런 그녀들을 보면서 환인은 어제 백려강의 용인체를 안으며 자신의 몸 안에 일어났던 현상을 떠올렸다.
분명 백려강의 한기에…… 그녀의 것이 아닌 영기가 몸에 흘러들어왔었지.
영도의 대성녀이자 신수 기린인 닌실을 안았을 때처럼 독특한 느낌으로 자신의 영기와 섞이는 감각.
그게 신수 특유의 영기가 아닐까 환인은 추측 중이었다.
지금까지 환인이 안은 여자는 수백 명. 그중에는 영혼도 있었고 플뢰도 있었으며 수많은 종의 루크랑 여자들도 있었다.
무직자, 일반 직업자, 희귀 직업자, 근접, 원거리, 무사, 술사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품에 안았다.
그런 여자 중에서도 닌실이나 어제 획득한 영기와 같은 느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는데 백려강을 안으며 닌실의 영기와 아주 같진 않지만, 다른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의 영기가 흘러들어왔던 것.
닌실의 영기는 자신의 혼탁해진 영기를 대량으로 정화해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영기와 여자친구들 및 타인의 영기가 섞일 수 있도록 사이에서 중재해준 느낌이다.
그런데 저 용인체의 영기는 뭔가, 영기의 속성을 하나 더 추가해주는 느낌이었다.
저 어머니의 바다……처럼 여자친구들과 자신의 영기를 하나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
이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둘째치고.
‘아드네빌라의 영기가 용인체를 타고 내게 넘어온 거라 봐야겠지. 그러면 저 인형…… 아니, 용인체는 그녀의 분신이고 일종의 신호 증폭기 같은 역할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계약을 맺고 신수가 건 권능이라지만, 관찰과 주시의 권능이 수천, 수만 킬로미터 밖에서 정상적으로 발동할 리 없다.
지구의 통신설비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통하거나 위성 통신 설비를 이용해야 하는 마당인데.
그렇다면 분신의 역할은 본신이 보내오는 권능의 신호를 받아 증폭시키는 증폭기나 신호의 열화 없이 장거리로 전파할 수 있는 중계기의 역할일 터.
분신이라면 당연히 본신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다. 본신의 영기가 분신을 타고 오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자신이 이렇게 아드네빌라의 영기를 흡수할 경우, 아드네빌라에게도 육합등약의 특성이 적용될 것인가.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다.
‘된다 하더라도 나에게 해가 될 일은 없겠지.’
환인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느와 유르파,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환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몸은 아드네빌라가 만든 인형 같은 게 아니라, 아드네빌라의 권능이 내게 닿을 수 있도록 해주는 분신이라 생각하고 있다.”
=……!=
=……?!=
눈을 휘둥그레 뜨는 여자친구들을 보면서 환인은 9시간 동안 집요하게 백려강을 괴롭힌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늘어놓았다.
“용인체가 아드네빌라의 분신이고 본신과 링크되어있다면, 저 용인체의 음부는 아드네빌라의 것이고 아드네빌라의 의지가 전해질 테니 백려강이 어찌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려강이를 길들이겠다고 9시간 동안 아랫도리를 쑤셨다는 거네.」
=환연이 너 또 나쁜 말 쓰지.=
「아 이게 뭐가 나쁜 말인데~! 사실이잖아! 사실적시!」
처음 환인 일행에 들어왔을 때 예절을 주입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갈구던 안느가 생각난 환연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투덜거린다.
그런 환연에게 예쁜 얼굴로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 품위가 생기는 거라며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설교를 늘어놓는 안느와 그런 안느를 보며 진저리치는 환연.
환인은 환연이 총대를 메고 주제를 바꿔준 것에 작게 웃음 지었다가 끙끙 앓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닌실은 자신의 영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었지. 영기가 워낙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드네빌라도 비슷하다면 닌실처럼 눈치 못 채고 있을 수 있다.’
지금 이 광경도 지켜보고 있을 텐데 굳이 언급해서 대응을 마련할 시간을 주기보단, 아드네빌라가 스스로 눈치챌 때까지 최대한 챙겨 먹은 뒤에 여자친구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생각인 환인이었다.
환인의 예상대로 회복력이 비상하게 높은 용인체 덕에 백려강은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고…….
“그럼 잘 부탁한다.”
=……넷? 앗, 아앙…!=
그때부터 또다시 5시간 동안 환인에게 조련 아닌 조련을 당했다.
이유라면 첫 번째로 아드네빌라의 영기를 얻기 위해서, 두 번째는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유는 순전히 환인의 감이었지만, 용인체의 여성기는 백려강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드네빌라 본인이 원격조작 중일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진맥진해서 흐늘거리는 와중에도 혼자 쌩쌩한 것처럼 꽉꽉 물어댈 리 없으니까.
온갖 체위로 유린당한 백려강이 눈을 까뒤집고 두 번째로 실신에 이르렀을 때 환인은 아드네빌라의 개입이 있다고 확신, 그녀의 뒤에서 팔뚝으로 목을 조르며 귀에 속삭였다.
“아드네빌라. 관음에도 룰이 있는 법입니다. 관전자가 경기에 난입하고 개입하려 들면 경기는 당연히 난장판이 되겠지요. 당신은 경기가 엉망이 되길 바라는 겁니까.”
=…….=
“서로가 룰을 지키고 따를 때 아름답고 원활한 경기가 성사되는 법입니다. 부디 그 점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환인의 조용한 경고가 끝났을 때, 그때까지 환인의 양물을 꽉꽉 물고 있던 백려강의 아랫입이 스르륵— 소리 없이 풀어졌다.
시험 삼아 몇 차례 더 움직여봐도 의식을 잃은 여성 특유의 약간 허전한 감각이 충만하다.
그럼에도 다른 여자친구들의 조임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그건 명기라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수준이었기에 환인은 그제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무리에 들어섰다.
아드네빌라의 개입이 사라진 뒤의 백려강과 교접은 표현 그대로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으응. 환인 님, 기분이 너무…….=
“좋은가.”
=네헷!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아요…….=
개입이 있을 적에는 과도한 조임이 환인에게도 부담이었지만, 용인체를 움직이는 당사자인 백려강에게도 괴롭기 그지없었던 것.
역치를 넘어서는 쾌락은 고통과 마찬가지다. 가고 싶지 않은데, 그만 가고 싶은데도 계속 가버리는 것은 육체와 정신 양쪽에 고문과 다를 바 없다.
그랬기에 처음 이틀간의 교접은 백려강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섹스는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다. 그랬는데 육체를 가진 뒤 이틀간 14시간의 성고문을 당했으니 두려워질 수밖에.
하지만 그것까지 꿰뚫어 본 환인은 필로우 토크를 병행해가며 소도시 흐라스린드로 향하는 사흘간 연인이나 부부가 가질법한 부드럽고 마음이 넘치는 교접을 진행했고, 백려강은 흐라스린드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성애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다.
물론 두려움을 떨쳐낸 것은 마지막 날이었지만, 환인의 마음씨를 받아들인 백려강의 마음은 이전과 비할바 없이 단단해졌다.
환인과 일 대 일 대련에서 대련의 탈을 쓴 구타를 당해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것은 물론, 환인에게 배우는 무략??과 유르파에게 배우는 문식文?에도 집중력을 어마어마하게 발휘한 거다.
흐라스린드로 향하는 사흘간의 일과는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다.
아침에는 모여서 종합적인 체력 단련과 전투 훈련.
오전에는 환인과 백려강의 교접.
오후에는 각자 개인 시간.
저녁 식사 전에는 비무 및 대련.
저녁 식사 후에는 개인 자유시간.
가끔 출몰하는 괴물이나 짐승은 백려강의 전투 경험의 희생양으로 삼고, 강한 괴물이 출몰하면 이실리테와 안느가 기술 위력 시연용의 제물로 삼는다.
그렇게 사냥한 괴물이나 짐승의 가죽, 부산물을 챙기고 때때로 환연이 찾아내는 야생 과일, 야채 군락지에서 별미를 채집하기도 한다.
정말 오랜만에 급한 일이나 귀찮은 일 없이, 성가신 일행 없이 여유롭게 나아가는 여행에 환인을 비롯한 그의 여자들은 평화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풍경이 점차 산악 지대로 변해갈 무렵.
=주인님, 저기 흐라스린드의 성벽이 보여요.=
절벽과 숲이 맞닿아 있고 깊은 강이 도시를 감싸며 흐르는 산악 도시, 플라비우스족의 국가 히스론드로 가는 관문 역할인 라드세아 끝단의 흐라스린드가 나타났다.
슬슬 기후가 바뀌며 앙상한 활엽수와 초록색이 무성한 침엽수가 뒤섞인 숲 위로 검회색의 높다란 성벽이 우뚝 서 있어 눈에 확 들어온다.
=성벽이 무척 높네. 멀리 떨어진 여기에서도 보일 정도면…… 다른 일반 성벽의 2배는 될 거 같은데.=
=숲과 맞닿아 있어서 언제 맹수나 괴물이 습격할지 모르니까. 멀리까지 감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해. 성벽도 타워를 곳곳에 세워놓고 사이사이에 벽으로 막은 형식이잖아.=
=방어에 치중한 구조라는 거구나……. 안느는 그런 거 어디서 배운 거야?=
=응? 교단에서.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땅신 교단을 찾아가서 주변 도시 정보랑 특징을 수집했거든.=
=아……. 교단 소속이니까 정보를 얻기는 좋았겠다.=
=그렇지. 그점에서는 교단의 도움을 크게 받았어. 지리랑 도시, 마을 정보를 평범한 직업자나 모험가들이 얻으려면 돈이 엄청나게 깨지거나 품이 엄청 많이 드니까.=
이실리테와 안느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환인은 폭이 넓은 언덕길과 그 주변을 넓게 살폈다.
일단 도시 대부분을 숲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도시 한켠에는 높이 수백 미터의 꼭대기가 평평한 돌산이 불쑥 솟은 형태.
이런 세상에서 도시가 성립되기에는 지형과 주변 지리가 좋지 않은 편이다.
‘역시 미궁 덕분인가.’
영도에서 니오네브레스의 도시들에 관해 대략적이나마 쭈욱 읽어본 환인이었다.
거기서 흐라스린드를 묘사한 문장으로 미루어봤을 때, 산악 도시 흐라스린드는 전형적인 미궁 도시였다.
미궁의 생산성에 도시 운영의 절반 이상을 의존 중인 곳.
나머지 절반은 숲의 채집, 작은 경작지를 통한 재배와 상단의 외부 유통에 의지하는데…….
‘알소프가 패망한 후유증이 서서히 나타나는군.’
남쪽에서 올라오는 길에 마주친 상단은 거의 없었다.
남쪽이 젖줄이라 할 만큼 상행로가 활성화되어있었는데 알소프는 망해서 마룡의 둥지가 되었고 그 옆의 호르손이라는 소도시는 아드네빌라에게 집적거리다 현재 도시 중추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황이라고 하니.
도시에 가까워져 가자 절벽 도시라고 부를법한 풍경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깎아지른 절벽 곳곳에 나 있는 집과 절벽 꼭대기에 지어진 저택들, 그리고 절벽 밑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주택과, 그런 주택지의 삭막함을 줄여주는 무성한 가로수와 공원들.
그때 절벽의 틈에서 하얀 날개를 가진 새 같은 게 나와 훌쩍 하늘로 날아오른다.
영혼 시야를 펼치자 시력이 한층 좋아지며 하얀 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날개도 두 장이 아니라 네 장이다.
“저건 플라비우스 족인가 보군.”
=응? 어어. 날개가 두 쌍인 걸 보면 귀족이네.=
날개 한 쌍은 평민. 두 쌍은 하급 귀족, 세 쌍은 상급 귀족, 네 쌍은 왕족.
특이하게도 플라비우스족은 성장하며 힘이 강해질수록 날개 개수가 늘어나고, 그 개수만큼이나 신분이 오른다.
그리고 그 강함은 직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핏줄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루크랑, 플뢰나 프라우드 족과 다르게 플라비우스족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날개 수가 많을수록 고위 직업자이며 가진 힘도 강하다.
“강할수록 높은 곳에서 사는 습성이 있다더니, 두 쌍인 플라비우스족이 절벽 안에서 산다면 한 쌍은 땅에서 사는 건가.”
=응. 그래도 높은 곳을 선망하는 건 같아서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어 살거나 고층 건물의 꼭대기 같은 곳을 선호한대.=
여러모로 특이한 종족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나무 위에서 둥지를 짓고 살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텐데.
혹시 웨이포드에서 이엘카타가 지내던 나무 위 집처럼 둥지라지만 나무판자 집인 건가.
=정지. 어디서 오는 길이지?=
여자친구들과 단락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흐라스린드 성문에 도착하자 갈색의 날개를 가진 가죽 갑옷 차림의 조인족 여자 병사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멈춰 세운다.
대응에는 안느가 나섰다.
=알소프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야.=
=……알소프? 거긴 마룡의 습격으로 망했다고 들었는데.=
=응. 우리도 거길 지나는데 심장이 쫄깃하더라. 여기 신분증.=
=…땅신 소속 성직자였군. 그보다 배짱도 좋은데? 마룡의 둥지를 지나쳐 올라오다니, 그래서 용은 봤나?=
=흐흐흐흐.=
의미심장함이 가득 담긴 웃음소리에 갈색 가죽 투구를 뒤집어쓴 여자 병사의 갈색 눈동자가 커진다.
=설마. 진짜 본 건가?=
=하늘에서 번개를 감고 번쩍이면서 우르릉거리는데 팔이랑 가슴에 소름이 쫙 돋더라고.=
안느의 대답에 여자 병사가 신분증을 든 채 어이없다는 얼굴로 안느를 쳐다본다. 그러다 고개를 젓고 시선을 신분증으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여행자들이군. 일행의 신분증과 통행료를 내라.=
=어어. 어른 다섯에 쿠에 네 마리하고 마차 하나야. 아, 안쪽은 좀 봐줘. 귀한 분이 있다고.=
여자 병사가 마차 안을 들여보려다 안느의 제지에 눈썹을 찡그렸다. 플뢰인데다 땅신 교단 성직자니까 거짓말은 아닐 텐데…….
그리 생각하던 여자 병사는 환인이 슬쩍 찔러주는 은화 두 닢에 어험, 헛기침과 함께 물러나며 후드를 뒤집어쓴 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인 다섯에 쿠에 네 마리, 마차 통행료 합쳐서 7은화다.=
역시 비싸다. 마을이나 촌락은 통행세로 비싸봤자 1은화도 들지 않았는데.
통행세를 내고 나자 여자 병사가 길을 터주면서 적당히 조언을 주었다. 뇌물의 효과인 듯했다.
=요즘 도시 분위기가 별로 안 좋으니까 말썽부리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고.=
=왜? 알소프가 망해서?=
=그런 것도 있고…….=
환인 일행을 제외하면 통행인이 없기에 여자 병사는 어깨에 창을 걸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 분위기가 좀 매우 뒤숭숭해. 승령천제 때가 다가와서 그런지 숲에 마물도 늘어났고 그런 마물을 잡으러 모험가하고 풋내기에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이 모여들고 있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상단이 뚝 끊겨서 도시에 유통되는 물자도 좀 빈약하고.=
=아…….=
=뭐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당신들의 실력은 짐작 가지만 그래도 무직자잖아. 도시 곳곳에 질 나쁜 직업자들이 널려있으니까 쉬려면 저쪽 절벽 아래 푸른 지붕이 모여있는 곳 보이지? 저쪽 거리에서 머물 곳을 구하는게 좋을 거야.=
=저기가 안전해?=
안느의 질문에 여자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자들과 돈 많은 서민들이 있는 구역이라 설명해준다.
그 대답이면 충분했기에 환인 일행은 병사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 풍경은 예상 이상으로 안 좋았다.
성문과 이어진 대로는 그나마 멀쩡했지만, 건물 틈새 사이사이로 보이는 뒷골목은 부랑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슬럼인 듯 어두컴컴하고 온갖 오물로 더러웠으며 남쪽의 통행량이 급속도로 줄어서인지 대로 쪽도 그다지 분위기가 좋다고는 못할 정도.
환인의 손짓에 벗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안느가 작은 목소리로 환인을 불렀다.
=도시 분위기가 이때까지 봐왔던 도시 중에서도 최악인데?=
=이정도면 평범한 도시야. 우리가 이때까지 지나쳐왔던 도시들이 살기 좋았던 거구.=
안느의 이야기를 이실리테가 담담하게 지적하자 살짝 당황한 듯 뺨을 긁적인다.
=그, 그랬어? 나도 본 도시가 적은 편은 아닌데…….=
환인은 영혼 시야로 도시를 둘러보며 둘의 의견 차이에 중재를 넣었다.
“이실리테는 밑바닥에 가까운 도시들을 많이 보았던 거겠지. 안느 너는 상대적으로 깔끔하고 깨끗한 도시들을 봐왔던 거겠고.”
서로를 쳐다본 이실리테와 안느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실리테는 도적질하느라 도시는 잘 들어가지도 못했고, 가더라도 도적 출신인 자신들을 몰래 받아들여 주는 그런 도시만 들어갔었으니까.
안느는 땅신 교단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루트를 골라 다녔고.
=…….=
=…….=
거리와 가까운 골목에서 넝마를 몸에 걸치고 썩은 포댓자루처럼 주저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자연스레 입을 다문다.
제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더럽고 꾀죄죄한 몰골에서 안느는 안쓰러움을, 이실리테는 자신의 또 다른 미래를 본 듯한 씁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환인은 도로까지 나와 배회하는 지성 잃은 배회령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입을 다문 상태였다.
영혼 감응은 미리 차단해놨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저 배회령들의 기억은 없지만, 그럼에도 미약한 감응 현상 덕분에 저들이 생전 고통만 받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빈민가와 슬럼의 사람들 영혼이며 남쪽의 유통망이 망가진 직격타를 받은 사람들이란 뜻.
“…….”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회색으로 깃털 색을 바꾼 비상을 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보인다.
우호적이거나 호의적인 시선이 아니라 욕심과 욕망, 질투와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덕지덕지 묻은 악의에 찬 시선이다.
가진 자와 부자를 향한 증오의 눈빛이지만 환인의 마음속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하다.
오히려 약간의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고 있다.
‘잘됐군. 잘하면 청색 영혼이나 또 다른 악령, 혼재화 직전의 영혼을 발견할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계약을 통해 혼옥을 늘려야지.
현재 환인의 왼팔에는 정령 구슬은 많지만 혼옥은 들개 전사단의 흑옥 여덟 개 밖에 없다.
영도를 나온 뒤 영혼은 많이 봤지만 평범한 회옥을 만드는 것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영성들이 자신의 혼옥을 양도해주려 했지만, 같은 이유로 혼옥 또한 거절했기 때문이다.
환인은 영도에서 익힌 영혼술을 펼쳐볼 생각을 하며 일행을 이끌고 흐라스린드의 부자 거리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