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화 〉 502 용의 계약자
* * *
구 알소프, 현? 마룡의 둥지를 벗어난 일행은 로아팅스 정글 최동단을 따라 히스론드와 라드세아의 접경에 위치한 소도시, 흐라스린드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비는 완전히 그쳐 청명한 푸른 하늘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땅에는 불시에 내렸던 빗물이 모두 흘러가 파릇파릇한 새싹이 초원을 형성한 상태.
산이라고 표시하기에는 낮지만, 언덕이라 하기에도 높은 울퉁불퉁한 지형을 지나 플라비우스족 국가인 히스론드의 주도 팔라툼으로 가는 보편적인 루트다.
캉, 카강 카가각—
=좋아. 잘하고 있어. 휘두르고 막을 때 몸의 회전에 허리 동작과 발 위치도 계속 신경 써.=
=네!=
=무기 쥔 손아귀에 힘도 때에 따라서 쥐고 뺄 줄 알아야 해. 손에 피로가 어떻게 하면 어느 정도로 쌓이는지 그것도 잘 기억하고. 간다.=
북상 사흘째 저녁, 저녁 식사 전 훈련 시간.
지는 노을을 받으며 백려강과 지도 대련을 해주던 안느는 경고와 함께 그녀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천벌의 망치를 숟가락 휘두르듯 한 손으로 무시무시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스쳐도 뼈에 금이 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맹공. 안느가 예비용으로 들고 다니던 워해머를 양손으로 잡은 백려강이 겨우겨우 힘겹게 막아낸다.
카각, 까가강 퍽, 콰가각—!
=으윽!=
팔에 가해지는 부하가 한계에 다다르는지 두 해머가 맞부딪칠 때마다 백려강의 몸이 휘청이고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니 안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성체술!=
=핫!=
그 고함에 백려강이 반사적으로 성체술을 펼치자 뿌연 연기 같은 아우라와 함께 몸 안에 힘이 차오르며 휘청이던 자세도, 떨리던 팔도 안정을 되찾는다.
불타는 듯한 적색조의 세상에서 지도 대련 중인 안느와 백려강을 바라보던 환인은 눈을 감고 신체 내면의 관조에 재차 들어갔다.
“…….”
그러나 오늘도 척추를 따라 흐르는 영기의 통로와 전신 세맥, 문양 에너지라고 부르던 가슴의 심핵력에는 변화가 없다.
호천명이 해주었던 주의를 기억하고 며칠째 체질과 능력의 동화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는데, 이쯤 되면 아드네빌라가 일부러 특질 변화의 전달을 틀어막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지경이다.
‘단시일 내에 벌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살펴보았었는데 이제는 하루 세 번 정도로 줄이면 될듯하다.
어차피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은 명상하니 그때 함께 살피면 되겠지.
깡—!
=꺅!=
무기가 깨지는 쇳소리와 백려강의 비명에 눈을 뜬 환인은 뒤로 붕 날아가 뒹구는 백려강을 볼 수 있었다.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짧은 가죽치마가 펄럭이며 검회색 속바지가 하반신을 꽉 물고 있는 것이 환인의 눈에 훤히 들어온다.
땅을 몇 바퀴 구르다가 멈춘 백려강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다 풀썩 주저앉았다.
뿔이 땅에 몇 차례 부딪히며 충격이 뇌에 닿은듯하다.
=으~……. 안느 언니 힘 너무 세요……. 이걸 어떻게 막아요오…….=
=무식하게 정면으로 막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안느는 타격이 정면에서 날아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험에서 오는 천금 같은 조언을 건네주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투술과 방어술이 대단한 거야. 적은 힘으로 강한 힘을 견디게 해주니까. 도령을 봐. 너만도 못한 힘으로 나랑 이슬이가 퍼붓는 모든 공격을 전부 흘리고 피하면서 오히려 우릴 두들기는 거. 근접 직업을 가진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도령이라는 걸 너도 잘 기억해둬.=
=…….=
그를 바라보는 백려강의 눈빛이 단숨에 초롱초롱해진다.
그동안 환인과 이실리테, 안느의 삼자 대련을 지켜보며 환인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던 백려강이었다.
다만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는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수학자가 같게 느껴지는 것처럼 무엇이 대단한지 몰랐는데, 이제 그녀도 안느에게 무기술과 방어술의 지도를 받다 보니 점점 그의 대단함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
=그런데…… 언니, 제가 환인 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음. 그건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하지만 이 말은 해줄 수 있어. 도령을 따라잡으려고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그만한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생기지만,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마저도 없어질 거라고 말이야.=
가능성이 0.0000001%와 0%인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된다’와 ‘안 된다’의 차이인 것.
백려강은 안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곤 아직도 손에 꾹 쥐고 있던 워 해머를 보다가 땅에 살짝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실리테에게 물려받은 기사검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안느가 조금 짓궂게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우리 려강이, 해머는 마음에 안 들어?=
=네? 아, 아뇨! 해머도 좋아요! 무게 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휘두르고 때리는 타격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거든요.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검을 쥐고 휘두르면 손이 그만큼 길어진 느낌 같은 게 있어서……. 검을 꺼낸 건 휘두르기 근력 훈련을 하려고 꺼낸 거예요! 해머가 싫은 게 아니구요!=
아이한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질문을 재미 삼아 던졌던 안느는 예상 밖의 중요한 대답이 돌아와 장난기를 거두었다.
=그래? 음……. 려강이 너는 검수에 자질이 있나 보다. 그 감각이 중요하니까 앞으로는 검으로 연습하자.=
=넷.=
힘차게 대답한 백려강은 적당히 떨어진 뒤 하나, 둘, 휘두르는 횟수를 세어가며 힘든 기색도 없이 종 베기와 횡 베기 동작을 반복한다.
조그마한 자세의 오류도 내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이제 갓 검을 배우기 시작한 검사 같은 모습.
잠시 자세를 봐주던 안느는 백려강의 검로가 딱 이상적인 경로를 반복해서 그리는 걸 보다가 그녀의 용 뿔에 잠깐 시선을 주고는 환인에게 걸어갔다.
=도령. 뭐해?=
“심핵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으응. 려강이 용인체 말이야. 머리의 뿔 좀 위험하지 않을까? 저 뿔에 충격이 가해지면 뇌에 고스란히 충격이 전달될 텐데 전투에 꽤 큰 약점이 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유르파에게 조사를 부탁해봤었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더군.”
=어? 왜?=
“저 뿔도 뿔이지만, 뼈의 강도와 경도가 강철의 4~5배 정도로 보인다는 게 그녀의 조사 결과다. 신체 회복력도 뛰어나고 반사신경도 좋다. 유연성도 월등하니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어지간한 고통과 충격은 무시할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율이 언니가 려강이랑 붙어있었었지?
“방금도 땅을 몇 차례나 뒹굴며 뿔이 바닥에 부딪혔는데도 아주 잠깐 어지러워하다가 말았다. 조금만 훈련받으면 어지럼증이나 울렁증 같은 것은 간단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흐음. 그 말은 그거네?=
“그래. 내일부터는 너희와 대련을 마친 뒤 백려강과도 10분 정도 단독 대련을 실행할 생각이다.”
그때 10분 동안 죽도록 두들겨 패서 고통에 적응시키겠다는 이야기겠지? 자신들한테 했던 것처럼.
려강도 유약하고 가녀리게 생긴 것과 반대로 심지가 굳고 단단하다.
아마도 도령을 만난 뒤에 생겨난 변화 같은데, 도령이랑 대련한다고 죽는 소릴 할 성격은 아니니까.
이전에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백려강도 똑같이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에 조그맣게 쓴웃음을 짓던 안느는 이실리테가 열기에 들뜬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해볼 게 있다면서 좀 떨어진 곳에 홀로 있더니, 뭔가 완성했나?
=주인님, 안느. 잠시 저 좀 봐주시겠어요?=
=뭘 보여주려고?=
=원거리 공격.=
=……원거리 공격? 너 다중 검기 날려서 공격할 수 있잖아. 그거 말고 다른 걸 만들었다는 거야?=
=다중 검기가 장점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검기에 손상이 나면 내 체력이 급속히 소모되면서 검기 유지 시간이 대폭 감소하니까. 검을 날려도 그런 검기의 상실 효과가 유지되고.=
다중 검기는 환인의 광창처럼 일정 방어력 이하의 적에게는 무쌍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관통력을 넘어서는 방어력 앞에서는 검기의 손상이 쉽게 발생한다.
그점을 보완하기 위해 검기를 단단하게 굳히는 연습도 해와서 어느 정도 단점은 무마했지만, 원거리 공격은 여전히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빠르게 날릴수록 공격의 중단과 회수가 어려워지니까.
게다가 검기 하나가 통째로 증발하면 검기 유지 시간이 절반이나 감소하고 허기 또한 무식하게 밀려와 전투에 굉장한 지장을 주게 된다.
=산란못 미궁에서 만났던 거대 두꺼비 중핵하고 싸울 때 부족함을 처음 느꼈고 린덴 폐촌락에서 싸웠던 거대 촉수 괴물 때에는 절실하게 느꼈어. 필살기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게 원거리 공격이라는 거네…….=
검술 훈련 중이던 백려강도 부르고 모닥불 근처에서 환연과 함께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유르파도 부른다.
그리고 마차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로 온 이실리테는 모두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중 검기 두 자루를 꺼내 양손에 쥐었다.
그간 꾸준히 숙련도를 올려왔기 때문일까, 어렴풋하던 검기의 경계선이 실제 칼날처럼 뚜렷하고 예리하기 그지없다.
그 상태로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안느랑 유리 언니가 말했었잖아. 위상력을 뚜렷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양과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고.=
=…그랬었나?=
=안느 아가씨도 참. 자기가 지구에서 위상력을 깨우칠 수 있을까 물어봤을 때 해준 이야기잖니.=
=아. 생각났다.=
=그거에 영도에서 너랑 언니랑 려강이 공부할 적에 나눈 이야기가 힌트가 됐어.=
힌트? 무슨 공부였지? 워낙 했던 공부가 많아 짐작이 가지 않은 유르파와 안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이실리테의 설명이 붙는다.
=물체의 질량이 같을 때는 힘의 크기가 클수록 가속도가 크고, 같은 크기의 힘이 작용할 때는 질량이 클수록 물체의 가속도가 작다.=
“뉴턴의 가속도의 법칙이군.”
환인의 말에 이실리테가 살짝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이라면 알아봐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
=힘과 가속도, 질량과 가속도의 관계에서 가장 큰 효율을 내는 지점을 유리 언니랑 공부해서 익혔어요. 여기에 압축 사출법을 적용해서 완성하게 된 게 이거에요. 봐주세요.=
흐으으으으으읍— 거의 20초에 걸쳐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이실리테. 덕분에 흉부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게 부푼다. 옷이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어 무릎과 상체를 숙여 자세를 낮추며 왼팔은 오른쪽 어깨 뒤로, 오른팔은 왼쪽 옆구리를 통해 검기를 뒤로 늘어트린다.
상체 또한 비스듬히 꺾어 왼쪽 어깨가 무릎보다 앞서 나갈 정도로 숙이는 이실리테.
그런 그녀의 몸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위상력의 아지랑이가 강하게 피어나고 손에 쥔 빛의 대검 두 자루 또한 작열하는 태양처럼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위상력이 그녀의 몸 안에서 강하게 회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가뜩이나 검희로 재각성 하며 1.6배가량 늘어난데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재차 늘어 동일한 등급의 술법 계열 직업자만큼이나 많아진 위상력이 고속 회전을 하자 주변의 공기마저 떨리고 있다.
직후.
=…흡!!=
짧고 강한 기합과 함께 오른손의 검기가 먼저 횡으로 휘둘러진다.
=하압—!!=
그리고 한발 늦게 내려 베는 왼손의 검기.
환인의 눈에는 두 자루 빛의 대검이 블랙홀에 굴절되는 빛처럼 쭈우욱 휘어지면서 늘어나는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횡으로 벤 검기의 궤적에 따라 파괴적인 빛으로 재가공된 위상력이 백색을 머금고 채찍처럼 늘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종으로 내려 베는 검기가 그 궤적에 더해지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힘에 위상력이 뒤섞여 말 그대로 혼돈이 만들어졌다.
서로 엉망진창으로 엉키고 뒤섞이며 날아간 기운은 검기의 날카로움은 모두 상실해버렸지만, 그 혼돈에서 불어난 위력은…….
꽈과과광—!!!
작은 미사일이 터진 것 같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저 멀리 수백 미터 떨어진 구릉을 단숨에 증발시켜버릴 정도였다.
촤악—!
그걸로 끝이 아니다.
다중 검기를 한 자루로 만든 이실리테가 검신을 극단적으로 좁혀 환두대도처럼 변화시키더니.
=……!!=
소름이 돋을 기세로 이를 악물며 검을 비스듬히 횡으로 휘두르자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 빛과 함께 석둑, 검의 경로를 따라 먼지구름이 예리하게 갈라졌다.
1초의 정적 후 콰아아아— 광풍이 몰아치며 먼지구름이 씻겨나간 그 너머로 드러난 광경에 여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첫 번째 폭발에 둥그렇게 파헤쳐졌던 언덕이 비스듬하게 잘려 나가 쿠구궁, 굉음과 함께 흘러내리며 쏟아지고 있었던 것.
=…….=
=…….=
「…….」
족히 200m는 되는 거리를 넘어 작은 산이라 할 수 있는 언덕을 베어버린 검기.
말 그대로 필살기라 할 수 있는 위력에 여자들이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을 때 후우우……. 들이마셨던 긴 숨을 고스란히 뱉어낸 이실리테가 이마에 살짝 땀을 맺은 얼굴로 환인을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주인님께서 보시기에, 어떠세요?=
“위상력 소모는 어느 정도지.”
=전체 위상력의 20% 정도를 썼어요. 원기는 5% 정도 소모했고요.=
“다중 검기 사용 시간에 지장은 거의 없는 수준이겠군.”
=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잘했다. 필살기라고 부를만한 위력이었다.”
=……!=
그의 칭찬에 안색이 급격하게 밝아지는 이실리테. 이어서 그의 평가와 조언에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환해지며 강한 눈빛으로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두 번째 검격이었다. 첫 번째 검기 발사의 여파로 뒤엉킨 위상력의 흐름을 곧게 만들며 내지른 검섬은 너의 숙련도와 위상력 제어가 성장하면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네 번의 연격까지 가능케 할 수 있을 거다.”
더욱이 두 번째 검격, 검섬??을 단독으로 발동할 수 있게 실력을 쌓고 발동 직전 움직일 수 있게도 된다면…….
“그때는 필살검이라해도 무방하겠지.”
환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장면을 상상해본 안느의 표정이 소름과 질투와 부러움에 물들었다.
첫 일격은 루모를 부르고 성체술을 방패에까지 돌려 전력을 다해 막으면…… 적지 않은 피해는 보겠지만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피해 방식이 타격 확산이어서 가능한 일.
하지만 두 번째인 검섬은 못 막는다. 그렇지 않아도 절삭 공격인데 위상력 사출 방식도 절삭에 가속한 위상력이 절삭 속성을 또 띄어 삼중 절삭이 이루어졌다.
함부로 막으려 들다간 성벽의 방패랑 같이 자신은 위아래로 두 동강이 날 테지.
그런데 그런 검섬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휘두른다고? 사정거리 200m의 검섬을?
‘미쳤네.’
진짜 필살기다. 아니, 도령 말대로 필살검이다.
그때 이실리테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몸을 조금 꼬면서 물었다.
=주, 주인님? 두 번째 검격을 주인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검섬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까요?=
“그렇게 해라.”
=감사합니다!=
크게 기뻐하는 이실리테를 보며 ‘간신히 이실리테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멀어졌어.’라고 중얼거린 안느는 배 아프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툴툴거렸다.
=그럼 첫 번째 검격은 검폭이라고 하면 되겠네.=
=검폭…….=
좋다. 검섬과 왠지 짝이 되는 느낌.
=응, 마음에 들어. 그럼 그렇게 할……게.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배 아파서 그런다 왜! 으씨. 겨우 뒤쫓았다고 생각했더니 또 저 멀리 가버리고 있어. 어휴, 도령이 기술 이름까지 붙여주고…… 나도 부러워서 빨리 필살기를 만들든가 해야지.=
안느가 칭얼거리듯이 한탄하는 모습을 이실리테는 어이없어하며 지켜보았다.
아니, 자신이 죽어라 연습하고 구상하고 모자란 머리라서 유리 언니한테 도움까지 받아 가며 검섬이랑 검폭을 만든 이유가 뭔데.
쟤가 빛의 정령 기사가 되었을 때 주인님이 말씀하셨던 빛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의 예시를 옆에서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게다가 빛의 정령 기사가 된 뒤로는 주인님의 정령 강령과 비슷한 걸 혼자서도 쓸 수 있게 됐고 성체술까지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지를 뒤흔드는 일격까지 먹여 5급의 쏜즈 리저드를 혼자 일격에 분쇄해버리는 걸 목격했을 때는 저게 진짜 천재구나(환인은 규격 외)싶어 하마터면 자신감을 크게 잃을 뻔했는데!
=……푸훗. 후후후후.=
어이없어하다가 갑자기 푸후후 웃는 이실리테의 반응에 안느가 머리라도 아픈 건가 걱정하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린다.
=뭐야. 왜 갑자기 웃어? 방금 필살검으로 위상력이 바닥나기라도 한 건가?=
=아니, 너나 나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이거 봐. 나는 네가 정령 기사가 된데다 루모를 몸에 받아들이고 5급 이형종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걸 보면서 엄청나게 부러워했어. 게다가 주인님은 빛의 정령으로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예시를 보여주셨잖아. 그래서 필사적으로 검섬이랑 검폭을 개발한 건데 정작 너는 날 부러워하고 있고……. 이게 뭐야.=
다시 후후 웃는 이실리테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는지 안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이실리테처럼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음 지으며 킥킥거렸다.
이실리테가 말한 ‘너나 나나 똑같다’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
그런 그녀들을 백려강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바라보았고, 유르파는 그런 백려강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려강 아가씨도 부럽지? 나도 부러워. 저렇게 서로를 인정하면서 경쟁하듯 사이좋게 성장해가는 관계라니…….=
=저 관계가 선의의 라이벌이라는 거겠죠? 저도 언니들 같은 관계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보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면서 뭔가, 뭔가를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강하게 드는 장면이 아닌가.
선의의 관계인 평생의 호적수, 그러면서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이.
이런 관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진짜 부러워해야 하는 건 우리인 거 같은데 말이야…….=
=정말이에요…….=
강하게 노을이 지는 저녁 풍경 속,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두 미녀를 부러움에 손가락을 빨면서 지켜보는 유르파와 백려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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