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화 〉 501 용의 계약자
* * *
백려강의 용인人 신체 적응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짧아도 이틀, 길면 일주일 넘게 걸릴 거로 생각했던 여자들의 예상과 다르게 그날 저녁, 안느가 알고 있는 신체 유연성 검증 체조를 백려강이 완벽하게 따라 했던 것.
유르파가 급히 치수를 줄여 만들어준 평범한 회색 속옷에 안느의 탱크탑과 돌핀 팬츠를 빌린 백려강이 푸른색의 용의 꼬리를 적당히 늘어트린 채 y자 밸런스를 하니 허벅지가 옆구리에 딱 붙는다.
비 온 다음 날의 하늘처럼 푸르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고 허벅지를 끌어안은 백려강이 신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몸 정말 대단해요. 유연성도 엄청나고 회복력도 얼마나 좋은지 조금만 먹어도 기운이 막나요.=
그녀의 말대로 백려강은 용인의 육체를 차지한 뒤 조금 늦은 아침으로 묽게 끓인 죽에 야채+과일 주스 한 잔, 점심에는 간을 심심하게 한 도삭면을 먹었고 저녁으로는 철판 고기구이 몇 점에 샐러드와 하얀 쌀밥을 먹었다.
메뉴에서 나오다시피 소화 기관에 문제가 있는 것도 없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몸이라 향신료, 조미료, 고기 기름이나 채소 등에 위장이 적응할 겨를도 없었을 텐데 세 끼를 다 챙겨 먹었음에도 위장이 탈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소화 흡수율도 좋고 먹은 것을 고스란히 에너지로 만드는지, 점심을 먹은 뒤부터는 환연과 함께 마차 주변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만큼 회복되었고 저녁 즈음에는 뛰어다닐 정도로 몸 상태가 정상이 되었다.
마악 빙의했을 때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던 걸 보면 가히 엄청난 회복력.
그 경이로운 회복력에 환연이 감탄하면서 그녀의 뒤로 돌아가 요추 아래쪽부터 시작된 용의 꼬리를 콕콕 찔러본다.
「꼬리가 있어서 무게 중심 잡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나 보네.」
=네. 날개를 꺼냈을 때랑 요령이 비슷해서 금방 익숙해졌어요.=
=자, 다음은 이거야.=
마차 바닥에 앉은 안느가 다리를 90도 각도로 벌리더니 발끝을 안쪽으로 향하게 젖힌 뒤 상체를 앞으로 숙인다.
그 바람에 봉긋한 젖가슴이 눌리며 먹음직스러운 찐빵처럼 옆구리로 삐져나온다.
=보이지? 발끝은 세우면 안 되고 이렇게 안쪽으로 모아서 엄지 옆이 바닥에 닿아야 해. 상체는 가슴이 바닥에 붙을 정도라야 하고.=
=이렇게요?=
=와, 배까지 닿네? 고관절이랑 척추 유연성도 굉장해.=
이어서 허벅지를 좌우로 벌리기 시작하더니 완벽하게 1자가 되도록 다리를 찢는 안느를 따라 백려강도 똑같이 다리를 찢는다.
그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환인의 눈빛이 만족스러움을 띄었다.
안느가 입고 있던 분홍색 돌핀 팬츠가 마치 T 백 팬티처럼 엉덩이골에 끼어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그대로 노출한 것.
당연히 사타구니도 크게 강조되어서 도톰한 대음순의 윤곽에 도끼 자국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백려강의 경우는 더 심했다.
그녀가 빙의한 용인의 신체, 줄여서 용인체는 키가 160cm에 불과한데다 몸매도 192cm의 안느는커녕 175cm인 이실리테보다도 가녀리고 호리호리하다.
안느에게 빌려 입은 돌핀 팬츠도 당연히 헐렁해서, 다리를 좌우로 찢자 헐렁한 돌핀 팬츠가 제대로 사타구니를 가리지 못하고 젖혀져 회색 팬티를 훤히 드러낸 것이다.
덕분에 음부가 회색 민무늬 팬티를 야무지게 물어서 음핵의 윤곽까지 볼록 튀어나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완벽한 각선미의 다리가 보기에도 시원할 만큼 좌우로 찢어져 일종의 심리적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앞에서 자세를 봐주던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려강.=
=네, 이실 언니.=
=그 몸은 제가 보기에도 완벽한 상태에요.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건 안 쓰면 금방 굳고 둔해지기 마련이에요.=
=아……. 이 상태를 유지하려면 운동이랑 체조랑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네요.=
=맞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아침 훈련을 우리와 같이하는 건 어떨까요? 주인님께서 힘들여 좋은 몸을 가져오셨는데 대충 쓰면서 낭비하면 아까우니까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군.’
여자친구들의 일상에서 펼쳐지는 에로스.
그녀들이 다리를 쫙 뻗은 채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의자에 앉아 이실리테가 내려준 커피와 함께 감상하고 있으니 환인의 스트레스 수치가 점진적으로 감소한다.
여자의 육체는 어째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만큼 아름다운지.
그때 검회색 부츠, 그리모암의 양화를 가져온 유르파가 환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곤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기, 눈요기 제대로 하네?=
환인은 작게 웃으며 유르파가 내미는 부츠를 받아들고 말을 돌린다.
“조사해보니 어땠습니까.”
=혁대랑 완륜, 수파에 양화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조사법을 다 동원해 살폈지만, 어째서 이런 물건이 생성된 건지 가늠도 못 하겠어.=
“마도구와 마도기의 제작 방식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나 보군요.”
=응. 자기가 해왕님한테 받았다는 그 책의 내용에서 유추해낸 것처럼, 심핵을 이용해 유물을 복사하는 건…… 시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
아쉽다. 자신이 가진 유물은 하나같이 비범한 것들 뿐. 이걸 복사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유용할 텐데.
아드네빌라가 준 얇은 책자에는 심핵이 만들어지는 이유, 성장 방식, 심핵이 파괴되면 생겨나는 현상과, 그 에너지를 몸에 받아들였을 경우 활용하는 방법 등이 짤막하게 나열되어있었다.
미궁의 심장인 심핵. 그 정체를 그동안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땅신 교단의 중추와 인맥이 있는 안느를 통해 땅신 교단의 추기경인 르아웬=아기오시스에게 질문하려 했었다. 그러나 미궁 심핵과 관련된 정보는 매우 중대한 사항인지 통신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리라고, 메리아놀 본단까지 찾아오라는 답을 들었다.
영도의 대서고에서도 찾아보았지만, 그저 오랫동안 누적된 땅의 힘이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정도의 가설밖에 보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차후로 미루고 있었는데, 아드네빌라가 준 책자에 그 내용이 적혀있었던 것.
‘심핵은 영혼이 변질되어 기를 흡수하며 팽창된 것…….’
종류를 불문한 영혼이 미궁에서 진주의 핵과 같은 역할을 해 세상에 퍼져있는 사람들의 감정 에너지와 신비(위상력) 에너지, 대자연의 기운 등을 빨아들여 결정화된 것이 심핵이다.
심핵이 소원석이라 불리게 된 이유도 의사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유사 인격이 심핵에 스며들어있어 대상의 소원을 읽고 들어주게 된 것이 그 계기라고.
문제는 이 소원이라는 게 모든 욕망을 억누를 정도로 강한 의지, 혹은 열망이 너무 강해서 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경우 구현되는 방식이라는 거다.
자신의 최우선 목표, 니오네브레스에서의 삶의 이유는 당연히 지구 귀환이다. 이보다 앞서는 것은…… 설정할 수 없다.
차선책은 유물의 해박한 지식인데.
‘고등 수학을 졸업하고 박사 수준의 수학을 공부 중인 유르파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복사는 불가능하겠지.’
=그럼 근력 시험도 해볼까? 나랑 팔씨름해 보자.=
=네!=
앉은뱅이 탁자를 가져와 서로 마주 보고 앉는 안느와 백려강. 그걸 자신의 곁에 서서 구경하는 유르파를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매끈하지만 말랑말랑한 배와 굉장한 볼륨의 밑가슴을 어루만지는 환인.
손바닥 가득 온기와 여자의 살결이 묻히니 정신적인 안정이 가속한다.
아드네빌라가 어떻게 이 정보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건 계약사항에 따라 그 서책의 내용에 거짓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군요. 유물의 복사 시도는 관두겠습니다.”
복사할 수 있다면 파티의 전력이 급상승할테지만, 불가능한 일을 오래 붙잡을 생각은 없다.
=미안해. 내가 모자라서…….=
환인은 사과하려는 그녀의 입술에 검지를 살짝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유르파, 당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노력 중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유르파는 특별한 일, 예를 들어 환인과 정사를 치르다 기절해버린다거나 하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2~3시간을 채 안 잔다.
모두가 자려고 누웠을 때도 조그만 공책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수식과 술법을 구상하고 적거나 자신들이 입을 옷, 속옷의 디자인을 그리다가 까무룩 잠드는 식.
좀 더 자는 게 좋지 않겠냐고 권해봤지만, 유르파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정현족이 된 이후로 신체 기능이 향상되어 밤에는 두 세 시간, 낮에 30분 정도 낮잠을 자두면 충분하다고.
=윽!=
안느의 팔을 넘겨보려 낑낑 힘을 쓰던 백려강이 팔씨름에 지면서 옆으로 발라당 넘어진다.
용인체의 힘을 가늠해보다가 가볍게 넘긴 안느는 다시 몸을 일으켜 탁상 앞에 앉는 백려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기초 근력도 확실히 높아. 각성하지 않은 인웅족, 인상족 남자랑 비슷한 수준이야. 근육의 결도 유연하면서 단단하고 신체 유연성도 뛰어나고 신체 회복력도 높고…… 근접 직업자로 각성하면 굉장한 성장 동력이 되어줄 텐데.=
이야기를 듣던 이실리테가 고개를 갸웃했다.
=각성이 가능할까?=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르겠지? 각성을 못한다 해도 기본 신체 사양이 일반적인 여자 기준으로 3배가량 되니까, 도령의 중급 강령을 받으면 3~4급 정도의 힘은 낼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면…… 주인님의 전투술을 얼마나 잘 배우느냐에 따라서 일 인분 정도의 몫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율이 언니가 신체 능력 향상 마도구를 만들어줘도 좋겠…… 아, 토너먼트 보상 목걸이도 려강이 쓰면 되겠다.=
그녀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백려강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손을 살짝 들며 질문했다.
=있잖아요. 언니들, 저는 이 몸에 빙의한 거잖아요. 이런 제가 정령 강령의 효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물어보면 되지. 환인, 백려강 몸에 강령 가능해?」
천장의 꽃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밀어 구경하던 환연의 질문에 유르파의 유방을 만지며 문양 에너지 활용법을 떠올리던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인체가 골렘이라면 백려강은 골렘의 핵이다. 그리고 강령은 외골격 장갑 같은 것이지. 가능하다.”
가벼운 손짓으로 백려강에게 중급 정령 강령을 펼치는 환인.
갑작스럽게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백려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와, 하고 감탄한다.
=안느 언니, 저랑 다시 팔씨름해 주세요!=
=그래. 어디 힘이 얼마나 올랐나…… 오오?=
=이이잇……!=
미간을 모으고 안간힘을 다하는 백려강에 비해 굉장히 평온한 태도의 안느지만, 확실히 놀라는 중이었다.
=용인체 진짜 대단하네. 중급 강령 받았다고 5급에 가까울 만큼 힘이 늘었어.=
=꺄으!=
짧게 감탄한 안느가 다시 백려강을 훌렁 넘어트린 뒤에 물었다.
=려강아. 너 그 몸의 위상력 다룰 수 있어?=
=네에. 법술사의 기초 교육 첫 번째가 신체의 위상력으로 법술을 쓰는 거니까요…… 얍.=
짧은 기합과 함께 그녀의 손바닥 위로 선명한 녹색 바람이 모여들어 구체처럼 뭉쳐 드니 백려강이 제풀에 놀라 중얼거린다.
=어? 어어, 바람이 더 강해졌네……. 위상력도 훨씬 적게 들고 발동도 빨라졌고…….=
=용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육체라서 기본 신체 성능 자체가 월등한 거구나. 아무튼 쓸 수 있다니 잘됐다. 내가 성체술의 요결을 위상력으로 전환해서 알려줄 게 그것도 배우자. 그럼 훨씬 강해질 거야.=
=그, 그건 언니의 비전이잖아요. 만드는데 굉장히 고생하신 건데…….=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한테 그까짓 기술 알려주는 게 뭐가 아깝다고.=
=맞아요. 우린 가족이니까요. 주인님의 영혼술에 안느의 성체술하고 유리 언니가 신체 능력 향상 마도구를 만들어주면…… 려강은 법술사의 지식과 능력도 쓸 수 있으니 희귀 직업인 법전사처럼 싸울 수도 있겠네요.=
손가락을 꼽아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실리테도 웃으며 제안했다.
=검술을 배우겠다면 제 검기와 신법을 가르쳐줄게요. 주인님의 방어술을 배우며 저 나름대로 보법과 신법에 접목한 거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에요.=
=우으……. 정말 감사드려요. 언니들이 가르쳐주시는 거 정말 열심히 배워서 환인 님한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힘낼게요…!=
안느의 성체술은 물론이고 1년 넘게 환인과 대련하고 얻어터지며 익히고 발전시킨 경신법, 보법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배우지 못하는 특급 기술이다.
그런 것을 아낌없이 전해주려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백려강은 그녀들에게 와락 안겨 코를 훌쩍였다.
귀중한 기술을 알려준다는 것도 기뻤지만, 가족이라고 해준 것이 무엇보다 기뻤던 백려강이다.
진짜 가족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가족애를 언니들에게서 느낀 백려강은 그녀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 나도 여러 가지 술법 지식을 알려줄 수 있는데…….=
부러운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품에서 그녀를 놓아준 환인은 자신에게 작게 웃어 보이고는 얼른 백려강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어서 네 명의 여자들이 서로를 껴안고 웃다가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다시금 웃음을 터트린다.
백려강의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이 빨개져 있는 것을 보면 약간 음담패설이 섞인 모양.
환인은 사이좋은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살짝 굳혔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쩌면 최상급 미궁 심핵 에너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드네빌라의 책자에는 에너지 활용 항목이 있었는데 소원의 규모에 따라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하급 소원은 간단한 재물 정도. 재물의 양에 따라 중급으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가장 쉬운 소원으로 분류한다.
그리모암의 유물이나 광창 나인볼그 같은 것은 상급으로 분류되고 죽은 사람의 소생도 상급 중에서 상위권에 매겨진다.
최상급은 예시가 없었는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환인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소원이 최상급일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을 포함해 차원을 이동, 지구로 영구히 귀환하는 게 자신의 소원이다.
한 명의 차원 이동도 간단하지 않을진대 여섯 명에 한 마리의 차원 이동이 절대 쉬울 리 없다.
처음에는 메리아놀로 가서 자신을 소환한 주범을 잡아 귀환하는 방법을 알아내려 했지만, 니오네브레스에서의 상식과 지식이 쌓여갈수록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을 메리아놀 근방으로 소환한 것도 아니고 삼림형 미궁 같은 곳에 떨어트린 놈들이다.
필시 차원 이동이 정상적으로 발동된 게 아닐 테고, 그 말은 즉 기술도 불완전하다는 뜻.
그런 놈들이 만든 기술에 목숨 걸고 차원을 넘을 생각은 환인에게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환인은 환연까지 끼어 재잘거리는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며 문양 에너지가 새겨진 가슴을 어루만졌다.
‘여덟 비경과 마경…….’
대서고에서 읽은 미궁기담, 니오네브레스에 존재하는 가장 유명한 미궁을 적어놓은 서적 내용을 떠올린 환인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염노의 계곡
풍천의 악산
수월의 고도
저토의 나락
빙루의 설산
뇌명의 언덕
흑암의 고성
광극의 사해
니오네브레스 주민들이 경외를 담아 비경과 마경이라 부르는 미궁의 정점들.
‘이중 최소 절반은 돌파해야 안정적인 심핵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을 터.’
상급 미궁은 최소 6급을 가리킨다. 그리고 최상급 미궁은 8급 이상이다.
아드네빌라가 준 책자에는 상급 소원에 상급 미궁 에너지가 5개 정도 들었다는 예시가 적혀있었는데, 최상급 소원이면 당연히 최상급 미궁의 에너지가 필요하겠지.
최상급이 아니더라도 몇 배나 더 많은 수의 상급 미궁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걸 모으기 위해서는 일행을 성장시켜야 한다.
“…….”
이실리테와 안느는 검희와 빛의 정령 기사가 되며 일단 바탕은 충분히 마련되었고 자신도 유일 직업을 알게 되어 성장 방향을 좀 더 확실히 정할 수 있게 되었다.
환연과 비상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백려강도 용인체를 얻으며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차후 목표를 여덟 미궁의 돌파로 정한다면 돈이 제법 필요하겠군.’
지금처럼 적당히 챙겨 입은 게 아니라 모든 장비를 최고급 마도기, 마도구나 유물로 바꿔야 할 거다.
환인은 타락한 바르둘을 물리치고 획득한 적청색 위상석과 6급 적색 위상석을 떠올리며 금화가 매우 많이 필요해지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많이 말이다.
다음 날 아침, 호천명은 환인에게 정식으로 도움과 협조 요청을 해왔다.
=용의 계약자이신 성제 예하께서 조금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다면 성궁에 크나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알소프 지역의 재활용 불가가 확정된 상황.
북부 전체 상권의 패망이 확정되었다. 누가 도시를 멸망시킨 용의 구역 근처에 살겠는가. 최소 500km 안쪽의 촌락, 마을은 전부 구 알소프 영역에서 멀어지려 하겠지.
거기다 사비족의 국가인 벨티칼의 동향도 어딘가 심상치 않은 마당.
큰 분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만큼 라드세아의 국력을 온존하기 위해 호족 간의 다툼을 막고 그들의 다툼으로 이어질 라드세아 백성의 사망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치와 전혀 맞지 않는 체질인 터라 그 요청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환인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다.
호족의 재산과 권력다툼에 끼어들다니, 백성이 죽어 나가는 것은 그 작자들의 문제인데 왜 자신이 끼어들어 골머리를 썩여야 하는가.
다급해진 호천명은 명예 8급 호족 위에 성궁의 보물고 개방까지 제안하며 환인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제 신분도 신분이며 여자친구들 또한 호족들에게 군침이 도는 먹잇감과 다를 바 없겠지요. 조금의 재물을 얻자고 미래의 분란을 떠안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호족들의 병신 다툼에 끼어들어 정신력을 소모하기 싫었던 환인은 바늘 하나 들어오지 않을 만큼 완강한 태도로 거절했다.
보상으로 귀중한 유물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주도쯤 되면 현실의 정치판과 다를 바 없는 중상모략과 음해가 난무하는 마귀 소굴일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유물을 구하고 말지.
결국 환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호천명은 시간에 쫓겨 여섯 백색 여우 꼬리가 축 처질 정도로 기운 빠진 모습으로 주야화와 함께 행렬을 떠나갔다.
주야화의 반응도 정반대였다.
주화는 드디어 저들을 안 보겠다고 생각해 속 시원해했고 야화는 미련이 흘러넘치는 모습으로 몇 번이나 환인을 돌아보며 떠나갔던 것.
=후우… 드디어 갔네.=
=주화라는 애랑은 사이좋게 지낼 생각이 있는데 야화라는 애는 진짜…… 두 번 다시 안 보였으면 좋겠어.=
호천명 일행의 배웅을 위해 따라 나왔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속 시원하다는 투로 대화를 나눈다.
장래에 고위 호족이 예정된 인물을 앞에 두고 뭐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저 속만 썩였던 시간들. 그간의 한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다.
그녀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던 환인은 말없이 그녀들의 엉덩이를 토닥여서 달래준 뒤 마차가 있는 야영지로 돌아왔다.
야영지에서도 영도의 기관원들이 철수 준비를 하느라 한참 바삐 움직이는 중이다.
=자기.=
이전처럼 몸매를 완전히 숨기는 펑퍼짐한 로브가 아니라 영혼일 적 백려강이 입은 것과 비슷한 회백색 로브 드레스를 입은 유르파가 역사교육기관의 상급 기관원과 대화를 나누다 다가왔다.
=친왕 전하는 잘 갔니?=
“예. 이제 볼 일은 없겠지요.”
=다행이다.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깔끔하게 포기했나 보네.=
=우리 도령도 절대 무시 못 하는 분이 됐잖아. 용의 계약자에 영도의 차기 대성자 후보에 유일 직업자이기까지 하니까.=
자기 일인 양 으스대는 안느의 이야기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후후 웃던 유르파가 아 참, 하며 들고 있던 수정구를 그에게 내민다.
=아지에라 심문관님이 자기한테 드리라며 받은 거야. 대성녀님 직통 수정구라고 해. 통신 횟수는 5회.=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영도로 향해야 할까 했는데 이게 있으면 그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응? 영도는 왜? 영도에 볼일이 남았니?=
“아드네빌라에게 받은 책자는 평범하게 알려지면 곤란한 내용이 다수였지 않습니까. 대성녀님께 알려드린 뒤 직접 판단을 내려달라 하려 했었습니다.”
=…이슬아. 저 말뜻은 정리하기 귀찮으니까 대성녀님한테 떠넘기는…….=
=야… 조용히 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은 환인은 한창 분주한 야영지를 잠깐 돌아보다가 마차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먼저 출발하지.”
=어? 도령 지금 바로 가게? 아지에라 님하고 인사도 안 하고?=
“그래. 그냥 떠난다.”
여자들은 잠깐 서로를 돌아보다가 얼른 자기 자리로 움직였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마부석으로, 유르파는 마차 안으로.
그는 이런 식으로 대인관계를 허술하게 끝마칠 사람이 아니다. 그냥 떠나는 거라면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그 이유를 여자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지에라 님이 도령을 잊으려 애쓰는 중이긴 하지.’
‘그분이 힘드실까 봐 그냥 떠나시는 거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놓았으니 먼저 출발해도 문제는 없겠네.’
새벽같이 출발 준비를 끝마쳐놓았기에 출발은 금세 이루어졌다.
환인은 비상의 등에 올라탄 채 마차를 먼저 보내놓고 멀리서 동료 영혼 심문관과 대화 중인 아지에라를 먼발치에서 시선을 주었다.
“…….”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집중되고 있어서일까.
아지에라가 무심결에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에 작게 고개를 숙인 환인은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비상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정말, 너무 하신 분이시네요…….=
늘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는 아지에라였다.
* * * *
《…그 청해의 마룡이랑 계약을 맺다니, 하아아…….》
이 일이 어떤 나비 효과를 일으킬 것인가.
옅은 황금빛 소녀의 장탄식에 대성녀 후보로서 알아야 할 것을 습득 중이던 샤스라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대성녀님. 환인 성제님은 틀림없이 그 알류겔의 해왕에게도 절대 밑지지 않는 계약 조건을 받아내었을 겁니다. 걱정은…….=
《샤스라 영성. 소녀의 걱정은 그것이 아닐세. 그 방탕한 남자라면 마룡마저도 휘두를 인물이니까.》
=그러면 무엇이 대성녀님의 근심을 자아내는 것입니까?=
《몇 시간 전에 이엘이 다시 전견시 발동에 성공하였어. 그 내용이 자못 심각하여서…….》
=…제가 알면 곤란한 것입니까?=
《……아니, 아니야. 자네라면 알아야겠지.》
으음, 작기 신음을 흘린 대성녀가 입을 연 것은 차 한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성제의 후손과 관련된 예지일세. 이는 알고만 있고 절대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그 말과 함께 흘러나온 내용은 샤스라의 손을 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인지 모른다지만…….
=예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걸 알 수 없기에 문제라는 것일세. 시간의 흐름을 예상해보자면 성제가 수명이 다해 죽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일 듯한데, 예언 당사자가 죽은 뒤에 발생하는 문제라니…… 너무나도 막연하고 막막하여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손을 놓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닌실은 샤스라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영도가 사라지고 영혼사마저 맥이 끊겨 세계가 혼돈과 혼란 속에 빠져드는데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하지?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할줄 알고?’
전견시에서 이엘카타가 보았던 니오네브레스 대륙은 그 형태마저도 달랐다.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변동인가, 그게 아니라면 천만, 억 단위의 시간이 흘러 지각이 분리된 후의 일인가.
어느 쪽이든 걱정이 마를 날이 없음은 예약된 길인 듯하여 대성녀의 입에서는 시름에 잠긴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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