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498 알소프의 재앙, 아드네빌라
* * *
밤이 찾아오고 있어 어두운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다. 시야가 좋지 못함에도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보이는 청백색의 용은 말로 표현 못 할 위압감 그 자체였다.
쿠르르릉— 꽈과광!!
때때로 길고 긴 유선형의 몸체를 두른 벼락 줄기가 번쩍일 때마다 우렛소리와 함께 비를 뿌리는 먹구름에서 벼락이 내려친다.
그때마다 세상이 한순간 밝아졌다 어두워지니 용의 분노가 피부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70명이 넘는 인원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환인은 유르파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힛!? 아, 자기.=
얼마나 위축당하고 있었는지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크게 움찔하더니 환인임을 확인하곤 작게 한숨을 내쉰다.
“유르파. 망원의 술법을 외워두셨습니까.”
=아니, 요즘은 전투 쪽이랑 마도구 제작 쪽으로만 외우고 있어서…… 그래도 바로 써줄 수 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
방수 망토 안쪽으로 손을 넣어 허리께를 뒤적이더니 책을 꺼내려다 멈칫하는 유르파.
책이 비에 젖으면 곤란해 보여 마주 선 뒤 망토를 펼쳐 천막처럼 앞을 가려준다.
그의 배려에 유르파는 배시시 웃으며 바짝 붙어 =고마워.=하고 귓가에 속삭여주었는데 환인은 약간이지만 당혹감을 느꼈다.
훅 하고 끼쳐온 그녀의 부드러운 체향에 성욕이 불끈거린 것을 느꼈기 때문.
‘……혹시 유르파 때문인가.’
요즘 성욕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게 그녀 탓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 순간 그녀의 육체에 대한 갈증이 소폭 상승했다.
이 욕구가 비대해지면 언제고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녀를 사람이 적은 곳으로 끌고 가 무자비하게 범해버리겠지.
이 부분에 관해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유르파는 여느 종족 언어도 아닌 복잡한 문자가 가득 새겨진 책장을 파라락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서 멈추고는 해당 페이지에 손바닥을 짚은 채 중얼중얼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통역 현상도 발생하지 않는 독특한 음률과 음운의 목소리가 20초 정도 이어지더니 종이에 짚은 손이 녹색으로 물들고, 그 상태로 손을 든 유르파는 환인의 눈꺼풀 위를 살짝 쓰다듬어준 뒤 책을 덮었다.
=이제 됐어. 눈을 뜨고 망원이라고 말하면 될 거야.=
“……마술서 같은 건가 보군요.”
약간 눈이 시린 것을 느끼며 눈꺼풀을 문지르자 유르파가 책을 덮어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기가…… 음음음, 모아놓은 서적에 흥미로운 소설이 있길래 읽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었어.=
하드커버 안쪽에는 위상력을 끌어모으는 집적진을 새기고 책의 소재도 위상력 친화 소재로 사용해서 위상석 가루를 특수한 재료와 함께 곱게 개서 만든 잉크로 글을 쓰고 마무리로 어쩌구.
보통 아침에 외워 몸 안의 위상력 흐름을 설정해두지 않은 술법은 쓰고자 한다면 쓸 수야 있지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외워두면 짧은 단어만으로 발동할 수 있는 술법을 3분에서 5분 내외의 길고 긴 주문과 정신 집중을 펼쳐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책에 자신의 위상력을 공명시키면 즉발은 아니지만, 기존에 대비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술법을 쓸 수 있다는 것.
=안느 아가씨가 쓸 마술서도 만들고 있어. 성법은 술법에 비해 가짓수가 작다지만 그래도 많은 주문을 쓸 수 있으면 좋으니까.=
“그렇군요. 잘했습니다.”
환인은 그녀의 턱을 잡고 뺨에…… 뽀뽀를 해주려다 그녀의 하얗고 보드라운 목에 입술을 대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앗….=
이 육체는 내 것이라는 증표, 선명한 키스 마크를 목덜미에 남기자 유르파가 목을 움츠리며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포상에 흥분한 것처럼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엉덩이를 한차례 두드려준 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영혼 시야를 개방하고 망원 술법의 시동어를 외워 아드네빌라를 응시했다.
시야가 망원경처럼 크게 확대되며 아드네빌라의 모습이 비늘 한 장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보인다.
안구 대신 빛이 들어있는 듯한 눈을 반개한 모습.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자태. 별다른 움직임이 없음에도 벼락 줄기가 길고 긴 유선형 몸체를 이따금 휘감는다.
문양 에너지로 영혼 시야를 강화해 몸체를 전부 살폈지만, 이전처럼 뭔가 기분 나쁜 것에 씌었다거나 비늘 사이에 꽂혀있진 않다.
하나 확실한 건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
‘단순히 용을 우습게 보고 퇴치하려 한 건가.’
이 세상에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이 제법 된다. 지능은 떨어지지 않아도 선민의식과 자존심에 멍청한 선택지를 고르는 인간도 제법 있고.
그랬기에 용을 상대로 싸우려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비가 일주일째 내리고 있다는 것은 아드네빌라의 분노가 그때부터 쭉 유지되고 있다는 거겠지.’
알소프를 밀어버리기 전에 보여주었던 행동을 생각해보면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 인간과 시간 개념이 다른 탓에 분노를 저렇게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도 이해되고.
아드네빌라가 화를 내는 이유.
아드네빌라가 일주일이 넘도록 분노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
아드네빌라가 화를 내게 만든 원인.
모두 이상하거나 거슬리는 점은 없다. 전부 납득가는 원인과 이유, 결과다.
그러나 이해가 가는 것과 저 상태인 용과 주도 라수비탄과의 교섭 창구가 되어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드네빌라가 이성적이고 사리에 맞춰 행동한다지만 기본적으로 인외의 신수.
기린의 모습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과 어울리며 사람의 삶을 살아온 닌실=아나그와는 본질에서 다르다. 아드네빌라는 인간을 배격하는 존재인 거다.
=성제 예하, 이곳에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때마침 행렬의 책임자로 따라온 영혼 심문관, 아지에라가 단단히 굳은 얼굴로 다가와 환인에게 간언을 올렸기에 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자리도 안전거리라 보기는 어려우니 뒤로 한참을 물리는 게 좋겠습니다.”
=성제 예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때 신통술의 일종인 기막??으로 비를 막고 있던 호천명이 살짝 곤란한 얼굴로 제지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외람되오나, 현재 알류겔 호수의 수위는 넘치다시피 하여 예년 평균 수위를 한참 올린 상태이며 호수와 이어진 강의 지류는 현재 물난리가 나 수만, 수십만의 이재민과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한 상태. 해왕의 분노는 한시라도 빨리 누그러트려야 하는 일입니다. 부디 마음을 돌려주시길 간청드립니다.=
=현친왕 전하. 영도 필령궁 소속 집행부의 상급 심문관 아지에라가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호천명의 개입에는 아지에라가 맞섰다.
=성제 예하께서는 당신의 목적에 의하여 방랑 성불행을 진행 중이시지만 원래라면 지금 즉시 대성녀님의 이양을 받아 대성자 위에 오르실 분이십니다. 저런 위험한 곳에 어찌 성제님 한 분만 보내신단 말씀이십니까.=
=아지에라 심문관께 한 가지 사실을 정정드려야할것 같습니다. 성제 예하께서는 감사하게도 교섭의 중간 완충 지역이 되어주시기로 하신 분. 그분이 가시는 길에 회담 당사자가 빠져서는 아니 될 말이지요. 성제 예하께서 가시는 길의 곁에는 저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려야 한다 사료되옵니다. 라드세아의 친왕이시자 대현자이시며 두뇌이신 분께서 어찌 위험에 몸을 던지신단 말씀입니까. 현친왕 전하의 옥체에 변이라도 생긴다면 라드세아의 문명은 족히 수십 년의 퇴보를 겪을 것이니 다시 한번 재고하여주시길 바라옵니다.=
=성제 예하께서는 가진 자의 의무를 언급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저 역시 가진 자이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 어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챙기겠습니까.=
=교섭이라면 어디까지 그 장이 원활하고 무탈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전 조율이 필요한 법. 송구하오나 이 사태의 발단을 집행부에서도 나름 조사하여보았사옵니다. 그리고 현재 해왕의 분노는 그로 인한 탓임을 확신한 마당. 현재 해왕의 상태는 원활한 교섭이 어려울 거라 짐작되니 해왕의 분노를 누그러트리기 위하여 해당 도시의 영주를 제물로 바친 이후라야 한다고 감히 조언을 드리옵니다.=
=…….=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 끝에 말문이 막힌 쪽은 호천명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해왕 아드네빌라의 분노는 상정 이상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눈앞의 군청색 머릿결의 심문관 말대로 인신 공양을 하여 분위기 완화를 시도해야 하지만.
문제라면 호르손 그자는 상왕의 가계. 해당 영주를 제물로 바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친왕인 자신이 나선 이유도 정치적 요소가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모암의 유물을 두 개나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상황을 최대한 무마하기 위한 상왕 가계의 발 빠른 협조가 있어서였다.
작위를 몰수당한다고 하여도 권역의 지배력은 공고할 것이니 몇 년 대리인을 내세워 민심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자리를 되찾으면 되니까.
그러한 마당에 어찌 인신 공양을 진행할 수 있을까.
호천명은 표시 나지 않게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집행부 심문관이라 하였던가. 필시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제지에 나선 것이겠지.
‘영도의 구성 핵심이라 부르는 집행부다운 대처다.’
호천명은 이때까지 진실의 1~2할가량을 숨기는 대신 그 자리를 선물과 뇌물로 채워 환인 성제와 사이 가까워지기 위해 진심과 성의를 다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한다면 이때까지 쌓은 실낱같은 인맥마저 망가질 테지.
어쩔 수 없다고 여긴 호천명이 아지에라의 제안에 수긍하려 하였을 때 후우우 불쾌, 짜증, 허무, 심란 등의 심정이 느껴지는 긴 한숨이 그와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성제와 친왕, 상급 심문관이 있는 자리에 누가 불경스럽게도 저런 한숨을 쉰단 말인가.
살짝 분노한 아지에라와 호천명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환인이 정말 드물게도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매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희미한 감정의 표현만 하며 담담함을 유지하던 그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놀란 아지에라가 더듬거리면서 그를 불렀다.
=화, 환인 성제 예하? 무언가 불쾌하신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지에라 님의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그에 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
“아드네빌라가 절 직접 지목해서 다가오라고 하는군요.”
헉, 하고 어느새 주변에 모여있던 영도의 상급 기관원들과 영혼 기사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아지에라도 실눈을 크게 뜨고 환인을 보는 상태.
“아지에라 님은 행렬을 이끌어 30분 거리까지 물러나십시오. 친왕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빨리 와라.》
=…예? 아… 바라던 바입니다.=
=서, 성제 예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아지에라 님, 반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즉시 물러나십시오. 너희도 행렬을 따라 물러나 있어라.”
《뭐 하고 있나. 얼른 오지 않고.》
=주인님만 보낼 수는 없어요!=
=도령?!=
=성제 예하!=
“아드네빌라는 악룡이 아니다. 이전부터 날 지목한 것과 지금도 날 호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너희는 다르다.”
화를 내고는 있지만, 말 거는 목소리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짜증과 투덜거리는 느낌만 담겨있다.
그것이 과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까.
희망 회로를 가동해봐도 회의적이다. 정말 성룡??이라면 알소프의 죄 없는 시민들 수십만 명까지 단숨에 몰살시키지는 않았을 테니.
환인이 단호한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아지에라와 여자친구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있을 때, 아드네빌라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나 참.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여전히 느리기 짝이 없어.》
“…….”
계속해서 날아오는 아드네빌라의 목소리에 환인은 그날의 골치가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저번에 들으면서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 여전히 골을 잡아 흔들고 감정을 쥐락펴락하려는 느낌이다.
환인은 자신의 찌푸림을 화를 내는 것으로 알고 긴장하는 기관원들에게 강하게 호령했다.
“뭣들 하고 있습니까. 당장 물러나십시오.”
=읏…….=
아지에라는 환인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로 느끼고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그의 여자들은 분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골치가 아프다는 걸 꿰뚫어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지켜볼 거야.=
“안느.”
《대체 언제쯤 올 생각인 거냐.》
=도령을 불렀다는 건 이미 이쪽을 다 봤다는 거잖아. 해왕이 마음먹으면 30분 거리나 여기나 똑같다고 봐.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래.=
“그리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해라.”
그게 여자친구들의 마지노선임을 알게 된 환인은 그리하라고 허락을 내리고 여자들의 뒤에서 자신을 보며 서성이는 비상을 손짓해 불렀다.
비상은 전에도 타고 갔으니 이번에도 봐주겠지.
그리고 주야화에게 만약 자신이 해왕에게 당할 경우 이후 대처를 지시하는 호천명을 향해 말을 걸었다.
“친왕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예. 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가시죠.”
=갑시다.=
쏴아아아아—
《좀 빨리 와라. 속이 터져서 원.》
쿠르르릉…….
비에 씻겨나가고 흘러내려 울퉁불퉁한 진흙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중에도 쉼 없이 날아드는 아드네빌라의 목소리.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거기에 동조하듯 시커먼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노을이 질 시간이지만 비구름 탓에 주변 사위는 완전히 캄캄해져 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아드네빌라만 선명하게 보이는 상황.
환인이 양 눈 사이를 꾹꾹 누르며 피로감을 드러내자 밤눈이 밝은 쿠에에게 달리는 걸 모두 맡긴 호천명이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도 해왕의 염사가 날아오고 있습니까?=
“예. 계속 다그치는군요. 그보다…… 지금 제 머릿속에만 울려 퍼지는 이 소통 방식을 염사라고 부르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염화와 다르게 염사는 눈에만 보인다면 거리를 무시하고 의사를 보낼 수 있어 최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 혹은 존재의 격이 한 차원 높은 이들의 회화에 사용됩니다.=
염화?는 니오네브레스의 주민들이 쓰는 것일 테고, 닌실이나 아드네빌라가 쓰는 것이 염사?인가.
“그 위의 회화 방식도 있습니까.”
=전설로 내려오지만, 신언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신위에 오르거나 신위를 목도한 분들만이 쓸 수 있으며 목소리만으로도 만물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천통언이라 하더군요.=
신언??…… 지구에서 들었다면 사이비의 웃기지도 않는 포교라 생각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표정이 굳어진다.
염사만으로도 강제로 감정이 친화되는 기분인데 그 신언을 듣는다면…….
문득 환인은 자신이 신언을 들어본 적 있다고 깨달았다.
천정의 세계를 보았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그 목소리…….
‘고개가 숙여지는 게 아니라 머리가 떨어지겠군.’
그때 자신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육신이 있는 현실에서 그 목소리를 직통으로 들었다간 뇌가 녹아내리든 영혼이 육신과 단절되든 해서 죽을 거라고.
큐삣!
콰르르르— 눈앞에 폭 20여 미터의 흙탕물이 몰아치는 강을 발견한 비상이 바람의 막으로 비를 막으면서 훌쩍 하늘로 솟구쳤다.
이대로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좁혀 아직도 멀쩡히 서 있는 구 알소프의 성벽을 넘을 셈.
=깃털과도 가벼워질지니.=
호천명의 짧은 말이 끝난 직후 회색 쿠에도 쿠에~ 짧은 날개를 파닥거려서 날아오른다.
비상과 비교하면 학과 참새만큼이나 차이 나는 비행이지만 일단은 비행.
그렇게 날아올라 빗속을 가르며 성벽을 넘은 순간, 환인과 호천명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성벽을 기준으로 성벽 바깥은 비가 한창 내리는 중이지만, 무슨 술수를 썼는지 성벽 안쪽은 물 한 방울 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던 것.
게다가 300㎢가 넘을 듯한 거대한 공터를 무서울 만큼 투명한 물이 마치 거울마냥 고요하게 채우고 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풍경이다.
=으음. 이만한 청경의 술이라니……. 역시 용인가.=
환인은 호천명의 자그마한 혼잣말을 들으며 비상의 고삐를 당겼다.
“비상, 내려가자.”
꾸우!
찰박 소리를 내며 착지한 비상은 다리에 잠기는 물의 감촉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참방거리며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반복하지만, 호천명이 타고 온 회색 쿠에는 착지하자마자 누가 봐도 겁먹은 것처럼 움츠러들어 호천명이 이랴, 하고 다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운. 왜 그러느냐.=
꾸, 꾸으…….
목덜미를 쓰다듬어봐도 폭발한 것처럼 일어난 깃털만 만져질 뿐.
하는 수 없이 쿠에의 등에서 내린 호천명은 환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에 같이 위를 보았다가 하얀 미간을 좁혔다.
‘해왕이 없어?’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해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분명 밤이 다가오고 있을진대 주변이 어두우면서도 밝다.
개기일식이 벌어진 것처럼 낮과 밤이 동화되어 회색으로 세상을 채우고 있는 느낌.
‘반 차원……인가.’
이 장소에 벌어진 현상을 눈치챈 호천명의 하얀 여우 얼굴에 그늘이 진다.
“기이한 공간이군요. 마치 누군가가 점거한 곳 같습니다.”
=…환인 성제 예하의 직관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곳은 반 차원, 현실과 반전 세계 사이에 반쯤 걸쳐진 독립된 공간입니다. 흔히 영역이라고 부르는 곳이지요.=
“아드네빌라가 이곳에 영역을 펼쳤다는 겁니까……. 곤란하게 되었군요.”
=예…….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
회색 구름의 음영을 보다 보니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진 호천명은 신통력을 발휘해 몸과 마음에 정신 장벽을 치고 그것을 환인에게도 펼쳐주었다.
=신통술, 정신 장벽입니다. 마음에 방벽을 세워 타의에 의해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막아주지만 위광에는 효과가 없으니 조심하……?=
그에게 친 정신 장벽이 바닥에 떨어진 푸딩처럼 뭉개지는 것을 느낀 호천명이 눈을 크게 뜬다.
“저는 위상류 체질이라.”
=하, 하지만 신통력은 위상류에도 통하는…… 서, 설마 위상역쇄류입니까!? 그 어찌… 위상과 역쇄를 함께 지닐 수 있는 자는 영물 뿐일 터인데…….=
“친왕 전하.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래도 저쪽에 아드네빌라가 있는듯하니 저쪽으로 가시지요.”
=……예.=
대답하지 않고 길을 앞장서는 환인의 뒤를 따라가며 호천명은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남자, 성제는 어떤 인물인가. 마치 양파처럼 까도 까도 무언가가 계속 나오는…….
‘혹, 본인이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유일 직업. 유일 직업에 못지않은 전투 자질. 타 차원의 인물. 여기에 사람은 지닐 수 없다고 알려진 위상역쇄류를 소지했다.
기린인 닌실=아나그의 전면적인 비호를 받으며 해왕이라 불리는 용의 인정을 받은 남자.
한 명의 사람이 거머쥘 수 있는 요소를 아득히 초과하지 않았나.
역량에 맞지 않는 큰 존재를 품으려 하는 것은 100% 문제를 일으킨다.
지위와 능력이 높고 강할수록 되돌아오는 반작용 또한 크기 마련. 환인 같은 인물을 휘하로 삼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본인이 바라지 않더라도 역천이 벌어지겠지.’
호천명은 자신을 배려해 녹색 쿠에의 등에서 내려 걸어가는 환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뒤따라간다.
“…….”
그 시선 속의 감정을 느낀 환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성벽을 넘자 아드네빌라의 염사는 날아오지 않고 있지만, 시선은 여전히 느껴진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노골적인 시선이 꽂히니 정말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다.
호천명이 주도로 돌아간 뒤에는 또 어떤 귀찮은 일이 찾아올까.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으면 이런 귀찮은 일을 멀리할 수 있을까.
첨벙거리며 수면을 걸어 나가던 환인은 어느 순간 한쪽 수면, 위치로 보자면 이 넓은 공터의 정중앙에 마치 침대처럼 모여있는 물을 발견했다.
아직 유르파가 걸어준 망원이 풀리지 않아 안력을 돋우자 물의 침대 위에 모로 누워있는 하얗고 파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멀어서 성별까진 정확히 알 수 없다.
“저쪽인듯합니다.”
=…예, 저기에서 위광이 느껴집니다.=
위광이라니. 그런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는데.
설마 하며 비상을 돌아본 환인은 아까와 다르게 딱딱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비상의 부리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이제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꾸, 뀻!
“명령이다. 기다려.”
꾸으…….
호천명이 타고 온 쿠에는 알아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몸을 사리는데 비상은 왜 이렇게 겁이 없을까.
자신과 삼림형 미궁을 돌파하며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인가.
비상을 남기고 다시 여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환인과 호천명.
잠시 후 사람의 겉모습이 어느정도 분간되기 시작한다.
100% 물로 이루어진 침대 위, 백색과 푸른색의 의복. 한푸와 비슷한 것을 걸치고 모로 누워있는 여자.
흡사 하얀 깃털 구름과 푸른 하늘의 색을 섞은 듯한 여자와 거리가 점차 줄어들수록 호천명의 얼굴은 긴장을 넘어 딱딱해지기 시작했고 환인도 서서히 본능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여자의 외모가 어떤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환인도 더는 다가가지 못하겠단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
《느려!》
성별을 알 수 없던 좀 전과 다르게 짜증 섞인 여자 목소리의 호통을 들을 수 있었다.
정신을 부여잡고 강제로 감화시키는듯한 불쾌한 느낌. 하지만 용의 상태일 때보다는 덜하다.
덜하다지만 불쾌한 것은 매한가지.
환인은 아드네빌라가 아닌 다른 신수의 염사도 경험했다. 이 감각은 아드네빌라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
“시끄럽습니다.”
환인의 입에서는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