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03화 (503/813)

〈 503화 〉 497 알소프의 재앙, 아드네빌라

* * *

백려강이 푸른색 별빛 로브 드레스를 입는 사이 환연은 내리는 겨울비 속에서 몸을 씻었다.

「아으~! 허벅지부터 하복부까지 환인한테 물려서 빨리고 핥아져서 냄새나! 침 냄새! 그리고 추워!!」

“애무받고 처음으로 절정에 오르면서 교성까지 질러놓고 내 탓을 하는 건가.”

손바닥에 빗물을 받아 씻게 도와주며 대꾸하자 환연이 발끈해서 그의 얼굴이 물을 뿌려댄다.

「그게 무슨 애무야! 과일 빨아먹는 것처럼 날 빨았으면서! 내장까지 죄다 빨려 나가는 줄 알았단 말이야!」

얼굴이 빨개진 채 씩씩거리는 걸 보면 진짜 그랬던 것 같다.

작은 동물은 생각 이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약하게 빤다고 빨았었는데, 그것도 강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에욱, 꾸읍, 이상한 비명을 질렀던 것 같기도 하고.

환인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랬군. 다음에 하게 되면 좀 더 약하게 하지.”

「……다음에 또 해주기로 약속한 거야?」

“그래.”

「……후응.」

그 약속 한 번에 조용해진 환연은 몸을 서둘러 다 씻고 달달 떨면서 옷을 챙겨입었다.

추워서 짜증난 것처럼 눈썹이 곤두서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분위기 자체는 부드럽다.

「그런데 백려강. 넌 몸이 뭐 바뀐 거 없어?」

환인의 목덜미에 달라붙어 그의 체온을 빼앗으며 묻자 낑낑거리며 등의 로브 단추를 채우던 백려강은 잘 모르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몰라?」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이게 정말 될까 싶은 게 떠올랐어요. 그런데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

무작정 숨기는 게 아니라 의견을 묻는 것이 그녀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는 느낌.

환인은 영체이면서 관절 가동 범위 이상으로 팔이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 등 단추를 끼워주며 입을 열었다.

“기술이 떠올랐다는 건가.”

「네……. 환인 님의 그, 사정을 받아낸 뒤에 머리에 조명 마도구가 켜지는 것처럼 팟­ 하고 생각났어요.」

“한기를 교환해서 생겨난 건지, 귀접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의문이군. 어떤 거지.”

「……여자에게 제 의지대로 빙의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마지막 단추를 채워주던 환인의 손이 멈추었다.

=우와, 와우, 우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그런 큰 사건이 있었어?!=

=드~디~어~. 연이두 반일년만에 드디어!=

=음……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달콤한 빵이라도 구워볼까요.=

비가 와서 훈련은 건너뛰고 아침 식사 준비 전, 새벽에 있었던 일을 들은 환인의 여자들은 백려강과 환연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강아, 영체로 하는 느낌은 어땠어? 언니한테 살짝만 귀뜸해줘 봐. 응?=

=…안느, 그런 건 왜 물어봐. 아무리 동생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인데.=

=그야 궁금한걸! 나도 죽으면 반드시, 기필코 영혼이 되어서 도령을 따라다닐 건데 미리…… 아얏! 앗따가!=

철썩, 찰싹! 쫘악!

=그놈의 주둥이! 입방정! 내가 몇 번이나 말조심하랬지!?=

분노한 이실리테의 손바닥이 안느의 등짝에 내려꽂힐 때마다 배구 선수의 강스파이크에 맞먹는 타격음이 터져 나온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이실리테를 말리는 역할의 유르파마저도 이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휴……. 안느 아가씨, 방금 발언은 진짜 아니었어. 응.=

철썩철썪!

=히약! 잘못했어! 려강아 언니가 생각 없이 말해서 미안해! 진짜 미안해!=

여자 친구들의 요란한 아침을 커피와 함께 감상하다 피식 웃은 환인은 촤아악—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마차와 연결해 길게 펼쳐놓은 천막 위에 고였던 빗물이 바닥에 흥건히 흐르다 바깥의 빗물과 섞여든다.

쏴아아아—

“…….”

확실히 이 비는 이상하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데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렬이 비가 내리는 지역에 들어선 것이 어제였다. 그리고 하루를 이동한 지금도 저 멀리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까지 먹구름이 끼어있다.

무엇보다 지금은 비가 이토록 많이 내릴 시기가 아니다. 우기는 반년 넘게 남아있고 때때로 비가 내린다곤 해도 이렇게 이틀씩 이어지지 않는다.

혹시 영성 하늘 고래가 비구름을 몰고 근처로 온 걸까. 아니면 아드네빌라가 비구름을 모아다가 비를 뿌리고 있는 걸까.

정황을 보자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아드네빌라의 감정에 따라 비구름이 몰려와 비와 벼락을 뿌리던 것을 떠올리던 환인은…….

뚝­

꺄꺄하면서 기운 좋게 떠들던 여자 친구들의 대화가 일순 멈춘 것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기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수 망토와 여성용 챙이 넓은 방립을 쓴 야화가 있었다.

목적지는 자신.

자리에 앉은채로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근처에 도착한 야화가 방립을 벗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야화가 환인 성제 예하께 아침 문안 인사드립니다.=

“예. 호천명 친왕 전하께서도 기침하셨습니까.”

그녀가 다른 주제를 꺼내 시간을 끌지 못하게끔 호천명을 언급하자 살짝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열었다.

=…방금 기침하시어 아침 단장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의논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으니, 환인 성제 예하께 아침 식사 초대 의중을 여쭈시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참석하도록 하지요.”

이번에도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주제를 바로 끝낸 환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천명도 야화 때문에 가능한 자신을 부르지 않고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침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 부자연스러운 비 때문이겠지.

야화에게 잠시 기다리라 한 환인은 여자 친구들에게 다가가 안느를 불렀다.

“넌 나와 같이 가지. 이실리테, 아침은 너희들 먼저 먹고 있어라. 나와 안느 몫도 남겨두고.”

=응? 자기, 아침 식사하러 가는 거 아니니?=

“상위 호족들의 식사 동행은 정치의 연장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양껏 먹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도령 말이 맞아. 거기다 주도의 호족은 소식을 자부심으로 삼거든. ‘나는 이렇게 적게 먹어도 괜찮을 만큼 잘 산다.’, ‘난 값비싼 진미만 입에 넣을 정도로 미식에 일가견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말이야. 체면 때문에라도 막 먹진 못하지.=

=우리 같은 서민은 절대 이해 못 할 사고방식이네.=

이실리테의 감상에 여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하층민은 물론이고 마을, 촌락도 전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 많다.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무릅쓰고 방책을 나가 논과 밭을 일구거나, 괴물이나 야수가 살고 있을지 모르는 숲과 산 등지에 들어가서 들나물과 산나물을 채집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율캄의 그 소녀들도 먹고살기 위해 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나갔다가 난파당해 조난하지 않았던가.

그런 마당에 재료만 수십 은화에서 금화 단위로 들어가는 식자재의 식사라니.

“그럼 다녀오지.”

아침 식사 초대의 예법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투용 바지 차림의 법사복으로 갈아입은 환인은 방수용 후드 망토를 쓰고 행렬의 선두로 향했다.

안느도 호위에 걸맞은 배틀 트라우저와 배틀 코트로 환복한 상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호천명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환인은 야화가 줄곧 조용한 것을 깨닫고 앞서가는 그녀를 눈에 담았다.

영도를 떠난 뒤 이동 중 순찰이나 감시를 명목으로 하루에 몇 번이나 찾아왔던 그녀였다.

시종 마차 안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비상을 타고 돌아다니거나 마부석에 앉아있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성가실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전달하던 그녀였다.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직선적인 성격이니 밀당 같은 것은 아닐 테지.

“…….”

밀당이든 관심이 멀어졌든 가까이 오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환인은 여러 대의 마차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격조가 높은 마차에 도착해 담담히 출입문을 두드렸다.

야화는 자신에게 묵례한 뒤 마차 출입문 옆에 시립 한다. 여전히 이쪽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상태.

환인도 일체의 시선을 주지 않고 달칵, 미닫이처럼 열리는 마차 문을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1평 남짓해 보이던 바깥 외형과 다르게 30평 쓰리룸 정도 넓이의 내부.

유럽 귀족의 사저?? 응접실 같은 곳에 발을 내딛자 습기가 폭발한 듯한 바깥과 다르게 쾌적한 기온이 몸을 휘감았다.

‘공간 확장의 술이 공간 계열의 최고봉이라고 했지.’

처음 호천명의 마차를 본 뒤 돌아가서 유르파에게 말했을 때 그녀도 매우 놀라워했다.

이러한 공간 확장 술법은 보통 고정된 장소에 거는 거지, 움직이는 마차 같은 곳에 걸만한 게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공간 주머니도 공간 확장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그 안에는 살아있는 생물이 들어갈 수 없다는게 공간 확장과 차별되는 점이다.

10평 정도 되는 넓이의 공간 확장을 거는데 필요한 실 재료비만 해도 금화 천 개 단위라고.

=성제 예하. 망토를 받아들겠습니다.=

문을 열어주고 옆으로 비껴나 있던 주화에게 후드 망토를 건네주자 청결 마도구를 꺼낸 주화는 비와 진흙이 묻은 환인의 복장을 정화해주었다.

=호위님은 이쪽으로.=

안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화와 함께 보낸 환인은 서구식 소파에 앉아 서신을 읽는 호천명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하하. 비가 오는 날의 아침은 그에 걸맞은 운치가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 비는 그러한 운치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웃으며 환인에게 상석의 소파를 안내해준 호천명은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그의 앞에 돌려놓는다.

“…….”

3장에 이르는 서신의 내용은 환인의 예상대로였다.

주도에서 조사하기로, 현재 알류겔 호수 북부를 뒤덮은 비구름의 중심 발생지는 알소프라는 것.

이미 알류겔 호수의 북부는 비구름에 하늘이 가려졌고 서부의 프라버까지 뻗어나가는 중이라는 것.

그로 인해 광범위한 지역에 수해와 침식이 발생하고 있으며 기후 변화에 심대한 영향이 가고 있는 바, 봄의 경작 준비에 크나큰 차질이 생길 지경이라는 보고.

서신을 내려놓은 환인이 간단한 소감을 입에 담았다.

“머저리 같은 인간이 해왕의 심기를 제대로 자극했나 보군요.”

환인의 적나라한 비아냥에 호천명은 진심으로 속 시원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성제 예하께서는 언제나 제 막힌 가슴 속을 뻥 뚫어주십니다. 성도의 그자들이 성제 예하의 절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이런 골치 아픈 일일이랑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높은 자리에 있는 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법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서신에는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나와 있지 않군요.”

편백 향이 물씬 풍기는 부채를 펼쳐 부치며 하하 웃은 호천명은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류겔 호수 북동부에는 호르손 정글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와 가까운 곳에 소도시가 하나 있는데, 프라버와 여러모로 지형 조건이 비슷한 곳입니다. 그 도시의 주인이 이번 알소프가 망하며 영도와 이어지는 순례길 및 교역로가 붕 뜬 것이 무척이나 탐이 났나 봅니다.=

“프라버와 조건이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프라버는 중급 도시인 반면 그곳은 소도시라는 게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예. 참으로 박쥐 같은 인간이지요.=

“…….”

설마 사비족의 국가와도 붙어먹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히스론드와도 무언가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요. 환인 성제님께 드릴 문의는, 앞으로 약 하루거리인 알소프까지 행렬의 속도를 높여도 될지에 대한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구 알소프에 도달하여 해왕과 교섭을 진행하고싶은 터라.=

“호르손 가문에 대한 처벌은 이미 추진중이신가보군요.”

=예. 사건에 개입한 경위에 따라 작위 몰수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합니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그런 놈들을 내버려 두고 이쪽만 고생시킨다면 알 바 아니라고 할 테지만, 할 일을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식이라면 일정을 재촉하는 정도야 감수할 생각이 있는 환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비가 벌써 칠주야간 이어지고 있어 걱정이 컸는데 안심이 되는 기분입니다.=

호천명은 그렇게 말하며 짝짝, 손바닥을 두 번 쳤고 그 신호에 주화가 가지런히 정돈된 가정식 앞치마 차림으로 다가와서 살짝 허리를 숙였다.

=주화. 조식 준비는?=

=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면 성제 예하와 대담도 끝이 났으니 바로 준비해다오.=

=예, 전하.=

호천명의 부드러운 지시에 주화는 소파 옆 간이 탁자를 들어 」자 형태로 앉은 환인과 호천명의 사이에 내려놓은 뒤 작은 문장을 꾹 누른다.

그러자 차자작— 탁자가 넓어지고 확장하며 식사에 어울리는 」자의 바 형태로 탁자가 변화했다.

이어 주화는 일식집에서 쓰는 초밥통 같은 것과 삼단 목재 합을 가져오더니 바 안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 두건을 정갈히 쓰고 소매를 걷어 올린다.

그리고 두 손에 정화 술법을 건 다음 준비해온 것을 차곡차곡 펼치기 시작했다.

환인은 설마… 하면서 그것을 지켜보다가 초밥통 같은 것의 뚜껑이 열리며 안에 샤리, 초밥용 흰 쌀밥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확신했다.

“초밥입니까.”

저 깨끗하고 깔끔한 목재 합 안에는 네타, 초밥용 재료가 가득 들어있겠지.

환인의 질문에 호천명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성제 예하께서 니오네브레스에 도착하신 지 2년이 넘었다 들었습니다. 지금쯤 향수가 진하게 느껴지실듯해 비교적 지구인 분들께 익숙한 초밥을 준비하였는데… 마음에 드실지 긴장되는군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환인의 입에서 나온 진담에 호천명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러면 안느 영혼 기사님도 오셔서 같이 자리하시지요.=

=감사한 제의이십니다만 두 분의 담화에 방해가 될까 저어됩니다.=

=하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권유와 거절, 이어서 환인에게 재권유가 이루어지고 환인도 그에 응하자 그제야 안느는 환인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는다.

주화는 긴장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한편, 다른 쪽으로 긴장을 세우며 허리를 숙였다.

=이실리테 영혼 기사님과 비교해 손색이 있는 재주입니다만, 성제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보겠습니다. 시작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곳의 생선에 대해 잘 모르니 주화 님께 맡기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러면 본인은 무지개 은어부터 시작할까. 안느 영혼 기사께서는 메리아놀 출신이시니 초밥에 익숙하실 듯한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육식을 멀리하는 몸이라…….=

초밥이 준비될 때부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안느가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환인을 위해 밑 준비까지 마친 정통식인 듯한데 채식용 네타 준비도 되어있을까?

=채식 초밥 또한 준비되어있습니다. 맡겨주신다면 성심껏 쥐어보겠습니다.=

=아……!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안느는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9급 호족이 대충 먹을 리 없으니까) 초밥을 기대하며 환인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도록 자세를 단정히 했다.

환인은 시의적절하게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의 흰살생선에서 시작해 진하고 무거운 붉은 살 생선으로 이어지는 초밥을 즐겼다.

맛은 지구의 초밥과 차이점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쌀은 한식과 일식에 어울리는 단중립형이었으며 네타는 지구에서 맛보지 못했던 강한 감칠맛의 생선회나 오징어, 문어 같은 두족류가 나왔다.

연어알과 비슷하게 생긴 초록색 생선알로 이루어진 군함말이도 나왔었고 종류를 알 수 없는 달걀로 만든 폭신한 계란 초밥에 송이와 비슷한 향과 식감의 버섯과 채소로 이루어진 초밥, 여기에 고추냉이와 흡사한 노란색 향신료까지.

지구에서 한 끼에 20만 원씩 하는 오마카세 초밥집 여러 곳을 다녀본 환인의 입에도 맞는, 제대로 된 초밥이었다.

=그러셨습니까…! 설마 프라버 어장 육성 그 기초 도안의 발의자가 성제 예하셨을 줄이야. 이 천명, 예하의 풍부한 식견에 참으로 감탄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쪽으로 약간의 지식이 있었기에 조언을 드렸던 것뿐, 실제 계획은 프라버의 실무진이 노력을 많이 하였지요. 무엇보다 상황이 도시의 업종 변경에 적합한 시기였던 것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 계획은 기초가 가장 중요하며 핵심이 되는 어족 육성과 양성의 정보는 니오네브레스, 그것도 해안과 마주하지 않은 도시에서 나올법한 구상이 아니었습니다. 성제 예하께서는 한 몸에 지닌 품격에 비하여 겸손이 과하시군요. 하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번째 입안을 헹구는 강렬한 새싹 풍미의 차가 나왔을 때 호천명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환인 성제 예하께서는 지구의 수준 높은 사회 전반의 지식을 갖추고 계시는군요. 라드세아 입장에서는…… 비단 저희뿐만 아니라 타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간절히 바라오던 인물상입니다.=

높은 식견에 뛰어난 영혼술, 여기에 강력한 전투술과 거기에 걸맞는 품위까지.

야망이 있다면 일국의 왕이 되고도 남을만한 인재다. 하지만 차원 방랑자 출신이 왕이 될 수는 없는 세계. 왕족이나 황족과 결혼시켜 인맥을 맺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호천명과 다르게 환인은 역시 지구에서 가져온 방대한 양의 현대문물과 지식을 더욱 조심해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밝혀진다면 니오네브레스가 뒤집혀도 두 번은 뒤집힐 테니까.

“하지만 괜찮은 겁니까. 메리아놀은 전세계에서 차원 방랑자를 자국으로 모아 격리한다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의 지식이 니오네브레스에 전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간절히 바라는 인재상이라니.”

=음…….=

예상 이상으로 예민한 부분을 찌르는 질문이었나. 작게 침음을 흘리는 호천명을 보던 환인은 돌아온 대답에 눈썹을 강하게 찌푸렸다.

=이 니오네브레스는 다섯 신의 가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호는 고도의 기계 장치에 대해 크게 간섭하기에 과학이 일정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법칙으로 지정되어있지요.=

“…그렇습니까.”

=약 3만 년 전, 문명이 한 번 멸망한 이후로 그러한 법칙이 생겨났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메리아놀은 세상이 다시 멸망하지 않도록 그런 차원 방랑자분들을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마을에 모으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

=미흡한 제 견식으로 보기에 환인 성제 예하께서는 니오네브레스에 지구의 과격한 사상을 퍼트리지 않을 분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말씀을 드린것이지요.=

환인이 대답없이 가만히 있자 주화도 호천명의 눈치를 보며 초밥 쥐는 것을 잠시 멈춘 상태.

그것을 깨달은 호천명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으며 주화에게 진한 맛의 붉은살 생선 초밥을 요구했다.

경색되었던 분위기가 풀리며 다시 초밥이 나오기 시작한다.

환인은 새우를 닮은 초밥을 즐기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고도의 기계 장치에 간섭이라니. 노트북 정도는 고도의 축에도 못 낀다는 건가.

지구인의 소환은 시간대가 모두 다 다른 건가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자신과 비자룩스에서 만난 임세희의 시간대가 같은 것은 단지 우연이었고 수많은 시간대에서 무작위로 소환된다면?

‘……그럴 리 없다.’

이쪽의 신비에 대한 분야는 니오네브레스 토산이다. 그 외 기술력은 지구에서 전해진 것이 많은데 그 기준은 근현대와 현대로 보고 있다.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기술로 보였던 것.

노트북과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가 잘 작동하는 건 단지 우연인가, 아니면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 운이 좋아서 그 간섭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던가.’

1시간에 걸친 조식, 조식치고는 꽤 무거운 편이었지만 호천명과 아침 식사는 줄곧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식사의 말미에 환인에 대한 인재 욕심이 살짝 드러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뒤로는 일체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음식 재료의 유래라던가 식문화에 대한 발전 같은 소소한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다.

=이야, 진짜로 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고마워. 이슬이도 무척 고마워할 거야.=

=그, 그러면 저도 그분의 조리법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특히 그분의 불고기전골의 육수 제조법이 궁금한데…….=

=응. 도…… 성제님이 무척 만족해한 초밥 조리법이니까 육수도 알려줄 거라고 생각해.=

마차를 나와 후드 망토를 쓴 채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환인은 가슴 속에 무거운 주제가 하나 더 들어찬 것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정의 추적자, 고도의 전자 기기에 간섭한다는 이 세계의 법칙, 그리고 자신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메리아놀의 수괴들.

=흐흥~ 도령도령, 이거 봐. 주화 그 아가씨가 초밥의 진수를 전부 적어줬어. 이걸 이슬이한테 주면 언제라도 맛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을 거야.=

환인은 초밥 레시피를 쥐고 싱글벙글 웃는 은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멋대로 전골 레시피를 알려준다고 약속했는데 괜찮겠나. 요리사에게 레시피란 무술가의 비전서나 다름없는 건데.”

=……어, 어? 진짜? 진짜로?=

흠칫하고 어깨를 떤 안느는 이윽고 그럴 리 없다며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저 주화라는 아가씨도 비전서를 막 전달해준 거잖아! 이슬이라면 이 조리법의 가치를 알아보고 육수 조리법을 주화 아가씨한테 전수해줄 거야!=

기운차게 말을 끝낸 게 무상할 정도로 잠시 후 =전해주겠지?= 하고 소심하게 되물으며 그의 손을 잡는 안느.

=도려엉.=

“알았다. 나도 이야기를 거들어주지.”

=와! 역시 도령뿐이야!=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잠깐 놀린 것일 뿐, 처음부터 환인이 나설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초밥 레시피는 안느가 자신을 위해 거래를 시도한게 아닌가.

환인은 영도 기관의 기관원들이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든 말든 안느의 손을 잡고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한나절 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구 알소프의 전경이 보이는 산언덕에 도착한 환인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우, 우와……. 저거 뭐야. 용이 엄청 화난 거 같은데…?=

안느의 중얼거림대로 알소프가 있던 자리의 상공 100m. 그곳에 아드네빌라가 몸에 수십 가닥의 벼락을 감은 채 강한 백색 아우라를 뿌리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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