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9화 〉 493 알소프의 재앙, 아드네빌라
* * *
밤에 환인을 유혹할 속옷을 고르던 안느는 덜컹, 작은 진동과 함께 마차가 멈춰 서는 것을 느꼈다.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자 바깥에서 휴식이라고 전달하는 호위대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유리 언니.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고 해요.]
마부석 쪽과 연결되어있는 쪽창에 똑똑, 노크가 울리더니 이실리테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알겠다고 대신 대답해준 안느는 거울 앞에 서서 정성들여 고른 속옷을 자신의 몸에 대보기 시작했다.
흰색, 빨간색, 검은색, 회색, 베이지색.
가리는 면적이 넓은 것에서부터 끈으로만 이루어진 것까지, 속옷 차림으로 브래지어와 팬티 각각 8개씩 몸에 대본 안느는 =으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의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율이 언니가 만들어준 속옷이 야하기도 야하고 세련됐단 말이야.’
유르파가 만든 속옷은 면적을 최소한으로 해 몸매의 굴곡과 여성적인 선을 아름답게 부각한다.
환인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가림의 미학을 최대한 살리는 느낌.
그에 비하면 아드지의 최고급이라는 속옷 판매장에서 사 온 것들은 어딘가 투박하고 속옷이 아니라 옷 같은 느낌이 크다. 환인이 주로 입는 드로우즈나 트렁크 같은 감각이라고 할까.
안느가 속옷을 들고 고민하고 있자 시술 도구를 청소하던 유르파가 묻는다.
=왜? 아드지에서 사 온 속옷이 마음에 안 들어?=
=응……. 언니가 만들어준 거랑 비교하니까 너무 구식처럼 느껴져. 예전에는 이런 거 어떻게 입고 다녔나 몰라.=
=그럼 내가 수선해줄까? 새로 만드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걸 개량하는 게 더 편하긴 하니까.=
=진짜?! 그럼 부탁할게!=
새 속옷이 생기겠다며 희희낙락하던 안느는 불현듯 아랫배에 새겨진 문인에 시선을 빼앗겼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선을 살짝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지만, 아무런 느낌도 감촉도 없다.
문제는…….
‘앞으로 노출이 조금 있거나 얇은 옷은 못 입겠네.’
변해버린 아우라 형태로 인해 문인의 은은한 빛은 눈에 잘 안 띄지만, 작대기 두 개를 교차해놓고 조금 화려한 장식을 가미한 듯한 문인 자체는 확실하게 눈에 띈다.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면 시선이 쏠릴 것이다.
피부색 흡착포 같은걸 붙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유르파가 깜빡했다는 듯이 알려주었다.
=아 맞다. 안느 아가씨, 그 문인 주변으로 위상력을 막아서 흐름을 비껴내면 빛이 사라져서 눈에 잘 안 띄게 될 거야.=
말대로 했더니 자신의 흰 피부와 색이 흡사해져서 눈에 힘을 주고 찾지 않는 이상 잘 안 보이게 되었다.
안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르파가 웃으며 묻는다.
=그렇게 마음에 드니?=
=응. 이게 있으면 도령한테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아냐.=
=안느 아가씬 수목화 능력에 성술도 있잖니. 탁기 정화 능력이 없어도 자기한테 방해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건 그런데…… 율이 언니가 도령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요즘 닥치는 대로 책이랑 글이랑 긁어모아서 공부 중인 거랑 마찬가지야. 나도, 이슬이도 도령한테 전투력으로는 안 되니까 최소한 다른 쪽으로 도움 되고 싶어서 그래.=
=아…….=
안느의 솔직한 심정에 유르파는 위상석을 갈던 손까지 멈출 정도로 놀랐다.
저 달의 여신처럼 아름다운데다 희귀 직업에 수목화 능력까지 있는 안느 아가씨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이슬이 아가씨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 없다.
이실리테의 요리 실력은 현실의 조리법을 습득한 뒤로 지금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내정사무기관장이 직접 찾아와 그녀에게 요리 비법 전수를 부탁했으며, 그녀의 요리를 맛본 호천명은 황궁 숙수조차 당신에겐 한 수 접을 거라는 극찬을 남겼을 정도.
거기다 외모는 요즘 속된 말로 정말 물이 올라 안느 아가씨와 나란히 서 있으면 태양과 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그런 여자들이 자신감을 잃을 정도라니, 자기의 근접 전투술이 대체 어느 정도로 높길래…….
거울로 그런 유르파의 반응을 본 안느가 킥킥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힘이 빠져있었다.
=나랑 이슬이는 도령의 무력을 따라잡을 자신은 예전에 잃어버린 상태야.=
=그, 그랬어?=
=응. 그리모암의 허리띠랑 토너먼트 우승 상품 목걸이하고 강령을 쓰면 짧은 시간이지만 하급 직업자 정도의 육체 능력을 낼 수 있어.=
그 정도 육체 능력만으로도 7급은 될 것 같았던 괴물을 기예로 쓰러트렸다.
도령은 광창의 힘이 컸다고 했지만, 전투 직후의 여유를 생각해본다면 굳이 광창이 아니더라도 물리쳤지 않을까?
그 이야기에 유르파는 한가지 기억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맞아. 거기다 자기의 최대 화력은 무기술과 기예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
거대한 살덩어리 괴물을 일격에 쓰러트렸던 광선 공격을 떠올린 안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리모암의 유물은 4개를 모은 거나 다름없고 나머지 하나의 위치 정보도 곧 손에 들어와. 다섯 유물을 전부 모으면 7급 근접 직업자의 신체 능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 도령의 최대 약점이 보완돼. 그때가 되면 나나 이슬이는 정말 도령의 발치에도 못 따라가게 될 거야.=
거리가 떨어지면 방벽의 투검과 영혼술이 쏟아지고 붙으면 절제의 미덕이 묻어나는 절대 명중의 창술이 쏟아진다.
그런데 그 창술을 유물인 광창으로 쓰네?
=……빨리 이슬이 아가씨한테도 문인을 그려줘야겠다.=
=킥킥. 그렇게 해줘. 말은 안 해도 나만큼 안달이 나 있을 테니까.=
자신이 성체술을 완성한 뒤 정령 기사가 되고 사흘 후, 한밤중에 이슬이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안느. 주인님이야말로 진짜 천재야.’
‘응…….’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인님을 앞질러 나가는 건 어려울 거로 생각해.’
‘…그러니까 훈련을 대충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무슨 뜻이야?’
‘훈련은 지금처럼 열심히 할 거야.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에 신경을 쏟으려고.’
‘너밖에 할 수 없는…… 요리랑 도령 시중?’
‘유리 언니가 문인을 곧 완성하신다니까 그것도 더해야지. 외모도 한층 더 신경써서 가꾸고.’
‘그럼 나는 수목화랑 문인이랑 성술뿐인가.’
‘……수목화랑 성술을 ‘뿐’이라고 하는 건 너무하잖아.’
‘푸흣. 부럽지?’
‘이 나쁜 플뢰 같으니. 나 놀리니까 재밌지?’
‘꺅!’
그때 기억을 잠시 떠올렸던 안느는 피식 웃으며 팬티라기보다 뷰지 덮개라고 할만한 것에 망사레이스로 이뤄진 회색 브래지어 세트를 챙겼다.
뒤쪽은 티백 형태라서 도령이 칭찬하는 엉덩이가 훤히 보이니까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렇게 속옷을 챙긴 뒤 마차를 나가려 하자 유르파가 이실리테를 불러달라고 부탁해왔다.
=바로?=
=응, 바로. 원래 하루 이틀 기간을 둬서 안느 아가씨의 반응을 확인한 뒤에 시술하려 했거든. 근데 안느 아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로 해줘야겠어.=
=알았어.=
대답하며 마차를 나온 안느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환인을 피해 멀찍이 도망가는 비상의 모습이었다.
환인이 다가가면 뀻! 하고 후다닥 멀어진다. 그가 그런 비상을 쫓아가다가 되돌아오면 비상도 그를 따라오고, 환인이 다시 다가가면 뀃!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멀어진다.
=이슬아. 율이 언니가 문인 새겨주겠대. 얼른 들어가 봐.=
=아, 응.=
안느에게 고삐를 넘겨준 이실리테는 자신의 가슴골에 들어와 있는 환연도 그녀에게 넘겨준 뒤 마차로 들어가 버린다.
「으~ 추워어~.」
곧바로 자신의 가슴골로 들어오는 환연의 움직임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떤 안느는 괜한 심술에 팔을 모아 가슴을 조였지만, 오히려 좋다는 듯이 흐헤에, 반쯤 녹아내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근데 가슴 주머니가 작아서 이실리테만큼 안 따뜻해.」
=……너 나와.=
「농담이야.」
농담 두 번 하면 사람 가슴에 대못 박히겠네.
속으로 불퉁거리던 안느는 환인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표정을 풀면서 물었다.
=비상이 삐진 거 아직 안 풀렸어?=
“그래. 바람의 정령과 남매들하고 잘 놀기에 놔두었던 건데…… 실수했군.”
=저렇게 삐진 티를 내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어때? 저러다 버릇 잘못 들면 고치기 어려울 거야.=
딴청을 부리며 환인을 따라온 비상에게 시선을 주는 안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비상과 눈싸움을 하는 환인을 볼 수 있었다.
큐웃~!
환인의 강렬한 시선에 비상이 머리를 한껏 낮추고 위협하듯 날개를 퍼덕인다.
“……내가 비상에게 한 행동은 너만 빼놓고 한 달간 이실리테와 유르파, 백려강하고만 잠자리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 예시에 안느는 그게 그거랑 같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돌림은 확실히 섭섭하긴 하겠지만…….
“비상은 어리다. 지성은 여우 남매들보다 높을지 몰라도 아직 감정이 여물지 못하지. 자신만 따돌려지는 거로 생각하고 토라졌을 거다.”
=음…….”
“귀찮다고 저대로 내버려 두면 삐진 게 실망으로 바뀌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겠지.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저렇게 도망가는데 어떻게 해?=
“처음에는 내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술래잡기할 만큼 마음이 풀린 상태이니…… 며칠만 더 고생하면 되겠지.”
=도령도 고생이 많구나…….=
환인은 그녀의 위로에 후, 작게 웃고는 무슨 대화 중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오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에게는 고마울 따름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내주니 말이다.”
=싸워대면 도령은 진절머리내면서 우릴 다 두고 떠날 테니까.=
무서워서 어떻게 싸워? 하고 천연덕스레 대답하는 안느에게 백려강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환인은 잠깐 멈칫했다가 물었다.
“…언제 또 술자리를 가질까.”
=풉. 아하하. 우리가 감정을 속에 담아두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그런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있어도 내가 몰래 귀띔해줄 테니까.=
“그건 다행이군.”
환인도 슬쩍 웃다가 ‘또 안 쫓아오나?’하고 꽁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비상과 자신의 거리를 쟀다.
방심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서인지, 어제까지만 해도 30m 안으로 다가오지 않던 비상이 지금은 15m까지 접근한 상황.
이 정도면 충분히 잡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환인은 그리모암의 혁대와 강령술까지 동원, 몸을 돌려 번개같이 튀어 나갔고 비상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날아오르지 않은 채 환인에게서 도망쳤다.
정말 싫었다면 날아서 도망쳤을 테지.
환인은 비상이 자길 잡아주길 바라는 거라고 확신하며 전력으로 몸을 날려 비상의 날갯죽지 깃털을 낚아채는 동시에 윈드밀을 돌듯이 등에 올라탔다.
뀨웃~!
몸을 흔들거나 떨쳐내지 않고 환인을 등에 태운 비상은 간지러운 듯이 웃으며 그대로 날아올랐다.
흡사 하늘의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지상이 순식간에 멀어지며 시야가 푸른 하늘로 뒤덮인다.
마지막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어지러운 곡예비행을 펼치는 비상.
환인은 다리로 비상의 몸을 단단히 고정한 뒤 온몸을 휘감는 겨울의 찬바람을 느꼈다.
한겨울의 설산에 조난당하면 이런 추위이지 않을까.
옷깃을 좀 더 여민 환인은 손을 뻗어 폭신폭신한 깃털로 뒤덮인 비상의 목을 쓰다듬었다.
“영도에 있을 때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쿠흥!
나빳어! …라며 나무라는 비상의 목을 토닥여주니 롤러코스터처럼 급강하, 길게 늘어선 행렬의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치다가 다시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오오오~
우와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감탄사에 비상이 우쭐하는 것을 보며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환인.
쿠에~ 쿠웃. 쿠흥!
담에 또 그러면 가출할 거라고 흥흥거리는 비상의 투정에 환인은 쓰게 웃으면서 부탁했다.
“그러지 마라. 네가 가출하면 나는 밤에 잠도 못 자게 될 거다.”
……꾸으—
하는 수 없지— 라고 작은 투정을 부린 비상은 이내 아무 말 없이 가슴 시리도록 차갑고 푸른 겨울 하늘을 한동안 날아다니며 그동안 부족했던 비행 성분을 만끽해나갔다.
환인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비행에 어울려주면서 하얀 입김을 흘렸다.
여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겨울의 하늘이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친 겨울 비행을 끝마치고 내려온 환인은 냉기가 깃든 입김을 푹 내쉬었다.
겨울 혹한기 훈련 때 얼기설기 엮어놓은 텐트에서 핫팩도 없이 밤을 보낸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다.
=도령, 이거 마셔.=
“고맙다.”
이동 중인 행렬에서 자신들의 마차 곁에 붙자 마차 고삐를 쥐고 있던 안느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수통을 내밀었다.
병뚜껑을 열자 정종 계열의 데운 술향기가 달콤하게 퍼져 나온다.
“으음.”
한 모금하니 얼어붙은 내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에 작은 신음이 절로 흐른다. 두 모금 정도 더 마신 환인은 몸에 적당히 열기가 퍼져나가는 걸 느끼고 안느에게 돌려주었다.
“좀 낫군.”
술병을 돌려받은 안느는 조금 파리해진 환인의 입술을 바라보다 비상의 머리에 꽁 하고 알밤을 먹였다.
꾸우?
=도령이 맨날 놀러 다니느라 너랑 안 놀아준 것도 아니잖아. 그걸 가지고 삐져서 도령 힘들게 투정이나 부리고.=
뀨우… 쀼삣! 쿠엣!
척 봐도 불만 가득한 소리였기에 환인에게 해석을 요구한 안느는 그 내용을 듣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너희는 밤마다 재미있게 놀았으면서! ……라니.
뻬헹!
이어서 메롱! 하듯이 부리를 한차례 털고 환인을 등에 그대로 태운 채 행렬의 선두로 달려가 버리는 비상.
달아오른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안느는 들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렸다.
=어휴 저거 진짜. 도령 말대로 몸만 다 컸지 아직도 애라니까.=
「이러나저러나, 비상이한테는 환인만 가족이라서 그럴걸.」
환인이 비상을 쫓아다닐 때 흔들리고 춥다며 그의 안주머니에서 안느의 가슴골로 자리를 옮겼던 환연이 나른한 얼굴만 바깥으로 내민 채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우리는 대화가 안 통하니까…….=
평범한 쿠에라면 먹을 것과 기승으로 유대감은 쌓을 수 있겠지만, 비상은 똑똑한데다 자존심도 높아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렵다.
쿠에쿠에거리며 말을 걸어왔다가도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그럼 그렇지’라며 돌아가서 친밀도를 쌓기 어려운 거다. 게다가 등을 허락하는 것도 도령뿐이고.
=쟤랑도 좀 친해지고 싶은데.=
안느는 입을 다물고 행렬의 선두에서 걷고 있는 비상에게 시선을 주었다. 등에 환인을 태우고 얌전히 걷고 있는 게 좀 전까지 티격태격한 것이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모습이다.
달칵.
그때 마차 지붕의 천장이 열리며 이실리테가 나와 마부석으로 내려왔다.
얼굴에 홍조가 살짝 올라와있는 게, 아랫배에 문인을 새긴 것이 조금 부끄러운 모양.
=다 끝났어?=
=응.=
단답형에 수줍음이 느껴진다.
그녀에게 고삐를 넘겨주고 자리를 교대해준 안느는 살짝 그녀의 옷자락을 들쳐 배를 들여다보……려다가 기겁한 이실리테에게 찰싹, 이마를 얻어맞았다.
=뭐 하는 거야!=
=내 배에 새긴 거랑 같은 건가 싶어서. 잠깐만 보여줘~.=
=미쳤어…?! 딴 사람들이 있는데…!=
다시 옷자락을 들치려는 행동에 기겁해서 찍어누르며 작은 목소리로 호통치는 이실리테.
그게 귀여워 짓궂은 행동을 한다는 걸 그녀는 언제쯤 눈치챌까.
잠깐동안 그녀와 티격태격한 안느는 킥킥 웃으면서 좀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진짜로? 주인님이 우리가 사이 나쁜 건 아닐까 걱정했단 말이야?=
=응. 진짜.=
=……내가 너 자주 때리는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
=그럴 리가. 도령이 신경 쓸 일 같은 건 없다고 잘 설명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부터 돌아보는 이실리테다. 거기다 예쁘고 요리 잘하고 힘도 센데다 순진하기까지 하다. 이런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한단 말인가.
그걸 설명하려던 순간이었다.
쿠광! 콰드드드득—!
로아팅스 정글 쪽에서 순간 살기가 느껴지더니 나무가 부서지고 쓰러지며 굉음이 울려 퍼지며 커다란 괴물 도마뱀 무리가 숲에서 뛰쳐나왔다.
키에에에엑—!!
……쏜즈 리저드다!
괴물의 습격이다!!
호위대!!
집채만 한 도마뱀이 한 마리, 그보다 작은 게 세 마리.
어깨와 등줄기, 꼬리에 상아색의 굵은 가시가 뾰족뾰족 나 있는 갈색의 거대 도마뱀. 꼬리에 난 수십 개의 가시는 휘두르면 전방으로 쏘아지는 데다 가시의 끝에는 독이 흐르고 있어 꽤 위험하고 성가신 부류다.
안느가 쏜즈 리저드 무리를 발견하고 마부석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쏜즈 리저드네. 저 정도로 크면 5급인데…… 정글에서 먹을 게 없어져서 나온 건가?=
=주인님을 따라 서고에 다니다가 들은 건데, 알소프가 망하면서 교역로 관리가 허술해지고 토벌도 중단되어서 근방에 괴물이 자주 출몰하고 있대. 가도 전체가 위험지역으로 변했다고 해.=
=먹잇감을 쫓다가 빠져나왔나 보네. 그거 때문에 현친왕이 찾아온 건가 보다.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북부 교역로 자체가 끊어질 판이니까.=
=응. 조천 도시에서도 빨리 해결해달라고 계속 재촉하나 봐.=
저런 5급, 4급 괴물이 뭉쳐져서 출몰하는 거면 순례자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대형 상단도 움직이기 어렵다. 중, 소형 상단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이동해야 할 테고.
쿠와아아아—!!
행렬을 살피는 쏜즈 리저드를 향해 호위대와 일부 영혼 기사들이 달려가자 사나운 포효가 터져 나온다.
쿠쾅, 꽈과광! 퍼벙— 두두두……!
영혼 기사 여섯 명과 호위대 스무 명이 네 마리의 쏜즈 리저드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며 대충 괴물의 강함을 가늠해본 안느는 자신의 가슴골에 들어가 있는 환연을 뽑았다.
=너 이슬이한테 가 있어.=
「저 인간들한테 안 맡기고 직접 싸우려고?」
=명색이 도령의 영혼 기사인데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우리 둘 중 하나는 나가서 손을 보태야지.=
흉갑을 벗어놓은 경장갑 차림이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꺼내든 안느는 성체술을 펼쳐 몸 안의 위상력을 가속하며 입을 열었다.
=루모, 힘을 빌려줘.=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 속에 숨어있던 빛의 정령이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등으로 스며들어 가고, 이어서 안느의 아우라가 더욱더 강렬해진다.
이전에는 몸 주변에 반짝이는 빛 가루가 떠다녔다면, 지금은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한 것처럼 빛에 휘감긴 모습.
=다녀올게!=
쿠웅!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안느의 두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굉음과 함께 시속 100km 속도로 쏘아져 나간다.
그게 전력을 다한 속도가 아닌지, 작은 쏜즈 리저드의 가시 발사를 가볍게 좌우 횡이동으로 피해버리는 장면에 이실리테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속도가 나랑 비슷하네. 힘은 처음부터 나보다 강했고…….’
대련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보지 못했던 부분이 속속들이 보인다.
천벌의 망치를 또 다른 방패처럼 활용하며 쏟아지는 가시를 죄다 흘려버리고 막는 패링.
척 봐도 사람을 수십 미터는 날려버릴 듯한 꼬리 치기를 방패로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블록. 열받아서 휘둘러오는 앞발을 정확한 타격점에 맞춰 튕겨내 버리는 리포스테.
주인님같이 바람처럼 물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꽤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게 보이지만, 자신도 저만한 수준이기에 이실리테는 손바닥과 발바닥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저기 끼어들어서 레드릭 얼터를 휘두르고 싶은 기분.
쿠쾅, 콰과광, 투쾅—
헤드에 빛이 맺혀 평소보다 3배는 더 커진 천벌의 망치가 종횡무진 휘둘러지며 쏜즈 리저드를 짓이겨나가니 영혼 기사들과 호위대는 한결 편하게 좀 더 작은 세 마리의 쏜즈 리저드와 싸우지만.
뀨우우우우—!
쿠와아아아아악—!!
갑자기 시커먼 회오리가 일어나 쏜즈 리저드 세 마리를 휘감자 놀라서 뒤로 물러난다.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폭풍에 기겁한 호위대와 영혼 기사들이 멀찍이 물러서자 회오리가 더욱 강해지더니, 빨아올리는 힘에 버티지 못한 괴물들이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
이어진 것은 환인을 등에 태운 채 날아오른 비상의 섬뜩한 난도질이었다.
녹색 날개를 한차례 펄럭일 때마다 짙은 에메랄드색 바람의 칼날이 반원을 그리며 1초에 대여섯 개씩 쏟아진다.
사람 크기만 한 반원 형태의 칼날이 작은 쏜즈 리저드의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가자 급기야 쫘자작—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몸통과 사지가 찢어져 나간다.
세 마리가 그렇게 공중에서 산산조각나 피를 뿌리고 있을 때 지상에서의 싸움도 끝을 맺었다.
쿠구구궁!!
안느의 천벌의 망치가 대장 쏜즈 리저드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내려찍은 충격에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간 것.
백여 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는 마차가 작게 들썩일 정도였으니 그 충격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수준이다.
웅성웅성.
전투를 지켜보던 행렬 쪽은 물론이고 영혼 기사들과 호위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퍼져나간다.
=과연 성제님의 영혼 기사이시군. 그보다 방금 회오리는 뭐였지? 혹시 성제님이 놀아주던 녹색 쿠에의 힘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지역순행기관에서 따라오신 분 중 술법사는 불과 땅의 5급 법술사님뿐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회오리는 족히 6급의 위상력 파동이었지…….=
=……성제님 일행은 탈것마저도 범상치 않군요…….=
안느의 강함은 익히 예상했다는 반응이지만 비상의 활약에 충격이 크다는 모습이다.
=…나보다 비상이가 더 관심을 많이 받네…….=
시무룩해져서 돌아온 안느의 반응처럼 그 이후 구 알소프에 도착할 때까지 이틀. 환인은 비상의 알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문의를 네 번이나 받았다.
그걸 전부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