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97화 (497/813)

〈 497화 〉 491 영도를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

* * *

대성녀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이동한 곳, 그녀의 처소는 대성녀실의 바로 옆방이었다.

방안에 들어선 환인은 잠시 방 풍경을 둘러보았다.

양갓집 규수의 규방이라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곳은 없을듯한 장소다.

다수의 책이 꽂혀있는 책장, 책이나 두루마리를 올려놓는 서안과 경상, 장식장으로 이용되는 사방탁자에는 예술품으로 보이는 도자기와 항아리가 장식되어있고 의걸이장이 문갑과 머릿장 사이에 다소곳이 서 있다.

적색 위주의 가구 색에 황색 바탕의 방 배색이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안정된 분위기인데, 이제 중고등학생 정도의 외모인 대성녀의 방이라 하기에는 너무 예스러운 느낌.

환인은 대성녀가 품 안에서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걸 느끼고 내려주었다. 그러자 발개진 얼굴로 조금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돈한 대성녀가 한숨과 함께 작게 웅얼거린다.

《왠지 죄를 짓는 느낌이오. 이런 훤한 대낮에 합을 맞춘다니…….》

그게 어쩐지 좋아하는 오빠의 눈치를 살피는 여동생 느낌이라 환인은 작게 웃으며 귀족 소녀처럼 땋은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저는 모두의 영혼술 성장을 위한 합궁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대성녀님은 야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군요.”

《…?!》

먹던 아몬드를 빼앗긴 다람쥐처럼 연한 황금색의 눈동자에 배신감이 물든다.

이어서 빨개진 얼굴로 뺨에 바람을 가득 넣고는 앙증맞은 주먹으로 환인의 팔을 토닥토닥 때리기 시작하는 대성녀.

환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 공격을 받아주니 흥! 제법 앙칼지게 코웃음친 대성녀는 홱­ 몸을 돌리고 적목赤?으로 만든 반닫이 수납장에서 이부자리를 꺼내 깔기 시작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샤스라도 얼른 다가가 그걸 돕는다. 그녀들의 손에 의해 크고 무거운 솜이불이 바닥에 금방 깔리고 그 위에 바스타월처럼 두껍고 큰 수건이 한 겹 더 깔렸다.

그렇게 바닥에는 세 명이 나란히 누워도 남을 만큼의 이부자리가 완성되자 샤스라가 환인에게 공손히 부탁했다.

=성제님. 잠시 뒤로 돌아서 주십시오.=

그녀의 부탁에 환인은 수줍은 얼굴로 옷의 앞섬을 만지작거리는 대성녀를 보다가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섰다.

니오네브레스에 오고 나서 환인에게 생긴 취미는 아름다운 여성들의 탈의나 착의 장면을 감상하는 거였다.

군살 없는 매력적인 여체가 움직이며 옷을 갈아입거나 벗는 장면은 에로스의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훔쳐보기나 엿보기 같은 범죄는 아니다. 전부 여자친구들의 목욕이나 탈의 장면이었으며, 일부는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 보는 모습이었으니.

그랬기에 반인반룡의 미녀가 된 샤스라나 조숙한 소녀 같은 대성녀의 탈의를 못 보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그녀들은 경험이 미숙한 처녀에 정숙한 숙녀 같은 여성들. 자신이 고집을 피우면 수치심을 느낄 여성들이었기에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뒤이어 들려오는 사락사락 옷이 스치는 소리. 기감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으니 소곤소곤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성녀님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인가?》

=성제님과 또 방사를 벌이면 이번에는 본신에까지 영향이 갈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형태가 무너질 가능성이 없다곤 못할 겁니다.=

《……그 가능성을 생각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된다 하여도 소녀는 감내할 생각이다. 이제 후계인 그대도 있으니.》

=대성녀님…….=

《지난 시간 영도는 소녀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영산과 영도는 나 자신보다 중요한 곳이 되었지. 영도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기린의 형을 잃는 것쯤이야 대수겠나.》

“…….”

대성녀의 각오를 엿들은 환인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솔직히 말해서 환인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들과 섹스하면 그녀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상호 이익이었기에 부담 없이 성교를 제안한 것이다.

그랬는데 대성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그 이타적인 각오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이 내놓은 결론은 하나였다.

“닌실.”

《…어, 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조선 시대의 속옷 같은 속살이 비치는 속적삼에 속속곳 비슷한 것을 입은 대성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당신의 각오를 들으니 무르게 생각하고 있던 저 자신이 창피할 지경입니다.”

《으, 으응?》

환인에게 있어 영도는 자신의 여정 중간에 거쳐 가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여서 선의 아래 적당히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대성녀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였었다면 방금 그녀의 각오에 환인은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애증이라도 자신이 속한 단체에 소속감을 느끼기 마련. 대성녀의 각오 또한 그러한 소속감의 발현으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시종 진지하게 대하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해주었고 자신을 도와주려 했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혜택은 물론 영도의 수장 자리까지 물려 주려 했었다.

그녀의 행보를 보면 수장 일이 힘들고 고되니까 대충 떠넘기고 유유자적 살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수장직에 걸맞은 인재가 나타났으니까 양보하고 밑으로 내려가려 한 거다.

“당신의 각오와 마음가짐에 감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환인은 그녀에게 존중을 표시하며 진심을 담아 약속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니오네브레스에 머무는 동안 영도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세계 어디에 있든 즉시 날아와 도움이 되어주겠습니다.”

《그…게 가능한 것이오? 성제의 목적지는 종족 연합 국가라 하지 않았소.》

영도와 종족 연합 국가 사이의 거리는 수천 킬로미터, 유럽에서 한국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그만큼 먼 곳에서 바로 날아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냐 의구심을 품는 대성녀에게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은 녹색 쿠에 여왕의 자질이 있습니다. 대륙 반대편에 있다 해도 날아서 며칠이면 도착할 수 있겠지요. 초장거리 공간이동진을 이용한다면 시간은 더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대성녀는 멍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다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이마를 가져다 대며 눈물을 살짝 글썽였다.

《성제님이 그리 말씀하고 또 약조하시니… 온갖 근심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오. 고맙고 또 감사하오.》

그 모습이 진심으로 안도한 모습이어서 환인은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물리적인 근심거리가 있는 겁니까.”

지난 한 달 동안 알아본 바로는 영도에 끼칠 물리적인 위협은 근방에 출몰하는 이블팩션의 괴물들 정도뿐이었다.

그 괴물들은 대략 2~4년 주기로 한 번씩 대규모 침공을 해오는데, 자신이 처음으로 니오네브레스에 발을 디뎠던 해에 침공이 한 번 있었다.

뭘 말하랴. 율캄의 류히 자매가 어업 도중 휘말렸던 해일, 그게 이블팩션의 괴물들이 호수를 건너다 호수 주인의 심기를 상하게 해 일어났던 해일이다.

시기를 생각해본다면 이번 겨울이 끝나고부터 긴장을 해야겠지.

그리 생각하는 환인에게 대성녀는 설마 그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제님 문제인 게 당연하지 않소. 이제 서서히 그대의 소식이 알려질 텐데 대륙의 4/5를 차지하는 타국의 정보외교부가 얼마나 못살게 굴지……. 거기에 성제님의 예언도 신경 쓰여 밤마다 배가 아플 지경에 이엘의 예지를 생각해도 신경 쓰여 요 며칠 잠을 못 잘 지경이었소. 성제님의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나올 자들이 성제님의 성질을 건드려 사달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었다. 대성녀가 환인의 성격을 파악할 정도로 말이다.

할 말이 없어진 환인은 푸념하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대성녀를 바라보다 그녀를 끌어안고 뺨이며 목덜미, 쇄골을 핥고 깨물며 공격을 시도했다.

《응얏!?》

그리고 예상대로 화들짝 놀라서는 낑낑거리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애쓰는 대성녀.

그 틈에 그녀의 속적삼 옷고름을 풀고 속속곳의 허리끈도 잡아당겨 풀어버리니 약간 미성숙한 육체의 곡선을 희미하게 드러내던 속곳이 그대로 흘러내리며 알몸이 되어버린다.

《힛!? 자, 잠깐… 응앗.》

삽시간에 알몸이 되어버린 대성녀는 나름 그의 손을 잡고 저항하려 했지만, 몇 수나 앞을 읽은 환인에 의해 푹신한 이부자리로 엎어지고 말았다.

대성녀는 몸을 가리는 대신 자신에게 다가오는 환인을 향해 귀여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작은 동물처럼 위협했다.

《으~! 당신이란 사람은……! 할 말이 없을 때 이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려 드는 것은 나쁜 버릇이오!》

“그렇습니까. 당신이 속옷만 입은 채로 있는 모습이 워낙 선정적이어서.”

《그렇다고 속곳을 훌렁 벗겨버리는 것이 어디있단 말이오!?》

환인의 변명에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르는 대성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현월의 방에서는 처음이라 당황해서 고스란히 당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환인은 자신의 팔뚝을 갈비처럼 앙앙 무는 대성녀를 조금 곤란한 듯이 바라보았다.

뭐, 억지로 제압하고 덮치면 스위치야 올라가겠지만 그 과정에 무드고 뭐고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과 기척을 죽이고 있던 샤스라에게 시선을 준 환인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샤스라 영성님. 이리 오셔서 잠깐 도와주시겠습니까.”

=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예, 닌실의 손을 꼭 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성녀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속옷처럼 붕대로 가슴을 칭칭 묶어 가리고 끈 속옷 같은 것을 입은 청초한 은색 처녀는 씩씩거리는 대성녀를 곤란한 표정으로 보면서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손목을 잡는다.

《~~! 샤스라 영성, 그대도 성제한테 서운함이 있지 않나! 소녀를 잡을 게 아니라 저 남자를 잡아서 혼내주어야지!》

=절 억지로 끌고 오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어찌할까요, 하듯이 곤란한 것처럼 반문하는 샤스라.

《…….》

좀 전의 환인처럼 할 말을 잃은 대성녀는 샤스라의 안색을 살피려했지만, 그녀의 큼지막한 가슴 탓에 아래에서는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시선을 내려 환인을 보자 미소 지으며 옷을 벗는 얄미운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순간 대성녀는 깨달았다.

《내 무덤을 내 손으로 판 격이구나……!》

이것도 저 남자의 술책이었겠지! 이이~.

어느새 알몸이 되어 다가오는 환인을 향해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두 다리로 방해하려 한 대성녀였지만, 그의 손에 발목이 턱­ 잡혀 다리가 활짝 벌려지고 만다.

두 손은 샤스라에게, 두 다리는 환인에게.

사지를 붙잡힌 대성녀의 불만 가득한 얼굴에 환인은 달래듯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십시오. 당신 덕분에 샤스라 영성도, 영도도 제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말이라도 못했으면 밉지는 않았을 것이오.》

“말재간이 없었다면 영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욕심 많은 호족에게 붙잡혀 재능을 낭비하고 있었겠지요. 제가 이곳에서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닌실 덕분입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게 진짜 얄밉다. 그랬기에 대성녀, 닌실은 그리움이 가슴 속을 채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수백 년 전에 사별한 그 친구만이 이 남자처럼 자신을 평범하게 대해주었었다.

그녀가 수명이 다해 하늘로 올라간 뒤 얼마나 외로웠던가.

영도에서 자신은 닌실=아나그가 아니라 대성녀였고 영산의 주인일 뿐이었다. 다시는 친근함을 담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알몸으로 바둥거리는 것을 멈춘 닌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손목을 손자국이 남지 않게 잡은 샤스라에게 말했다.

《샤스라 영성. 이제 그만 놓아주어도 되네. 어째 맥이 빠지는군.》

=…….=

《……샤스라 영성?》

돌아오는 대답도 없고 손도 놓아주지 않는 샤스라를 조금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본 닌실은 환인이 그녀와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질 일도.

《자, 잠깐. 히윽!》

스르륵­ 자신의 옆구리를 훑는 환인의 손길에 부르르 몸을 떤 닌실은 시선을 더 내렸다가 강철 기둥처럼 꼿꼿하게 선 그의 중심을 목격했다.

조금 과장 보태서 자기 팔뚝만 한 길이와 굵기.

저게 전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면 저번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은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팔까지 잡혀있으니 치태를 꼼짝없이 보이게 되겠지.

닌실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환인의 손이 아랫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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