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6화 〉 490 되돌아가는 길
* * *
환인의 구 알소프 행은 필령궁의 대성녀에게 즉시 전해져 영도 차원에서의 이동 준비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선 아지에라와 또 다른 영혼 심문관이 행렬의 책임자로 지정되고 두 명의 영혼 기사인 11명이 전원 붙는다.
환인의 알소프 방문과 해왕 아드네빌라의 접촉, 그리고 대화까지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기 위한 역사교육기관의 상급 기관장 1명에 중급 기관장 6명이 더해지고 이들을 호위할 42명이 지역순행기관에서 파견되었으며 그들의 이동 중 의식주를 관리해줄 내정사무기관의 기관원 7명이 추가되었다.
다 합치면 69명이나 되며 이들이 타고 갈 마차만도 다섯 대에 쿠에는 63마리. 각자 소지품을 담은 아공간 주머니를 챙겼음에도 짐마차가 네 대나 따라붙는 대행렬이다.
그렇게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어서 출발하기 하루 전날.
야화는 오늘에야말로, 라는 다짐 속에서 환인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저거 또 왔어.=
내일 있을 출발을 위해서 이실리테와 함께 마지막 여행 채비를 점검하던 안느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야화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사흘 전, 도령에게 속이 시원할 정도로 얻어터진 다음 날 찾아와 도령에게 대뜸 고백을 박았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던가.
이실리테의 눈에서 냉기가 풀풀 피어나는 것을 본 안느가 얼른 소리쳤다.
=야! 너 왜 자꾸 찾아오는 건데!?=
=성제 예하를 뵙고 싶어서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친왕 전하의 수행원이면 수행원답게 친왕 전하나 모시지 왜 자꾸 여길 찾아오냐는 뜻이라고.=
안느의 답답해하는 지적에 야화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안느를 빤히 바라보다가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꺼냈다.
=환인 성제 예하께 한눈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다각도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본 결과, 제 신분과 능력이라면 환인 성제 예하의 처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며 그분에게 강한 연모의 감정을 품어서입니다.=
=그래도 우리 도령한테 거부당했잖아……. 거부당했으면 포기하라고…….=
=꾸준함과 끈기는 자신 있습니다. 환인 성제 예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말하던 야화는 자신의 앞으로 나오며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기세를 내뿜는 여자를 응시했다.
이실리테. 그 유명한 희귀 직업, 검희의 각성자이며 자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못마땅해하던 여자.
=야화 입위 기사님.=
=말씀하십시오.=
=주인님께 폐가 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회화를 꾸며주는 일체의 수식구 없이 직선적으로 말하는 이실리테.
=당신의 고백을 주인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찾아와 당신이 주인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방해하는 것을 저희는 묵인하거나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린 하인과 하녀는 대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인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우리마저도 어려워하는 와중에 당신 같은 고위 호족은 감히 말대꾸하거나 돌려보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겠지요.=
=…….=
안느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하는 이실리테가 왠지 무서워 침을 꼴깍 삼켰다.
폭풍 전야, 혹은 태풍의 눈처럼 뭔가 고요한 느낌.
같은 것을 느낀 야화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더 내디뎠다간 즉각 무력이 날아올 것 같다는 예감에서였다.
지위와 신분으로 압박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좋지 못한 수단이다.
눈앞의 인원족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루크랑 족’의 영혼 기사가 아닌, ‘환인 성제 예하 직속’ 영혼 기사로 인지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종족성은 아예 빠져있는 것이다. 방계 왕족인 자신의 앞에서 똑바로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
그런 여자에게 불호령을 내리거나 하면 관계성은 즉각 파탄 나겠지. 어쩌면 전투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분이 직접 정한 영혼 기사와 싸운다는 건 그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에 야화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명 공자님과 황제 폐하 외에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은 자존심을 굽히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길을 열어주실 겁니까.=
=정히 주인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정식 절차를 밟아주십시오.=
=…….=
서신부터 보내서 약속을 잡으라는 말에 야화는 그녀들이 길을 열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일이면 성제 예하께서는 영도를 떠나 알소프로 향하신다. 그리고 알소프에서 용무를 마치면 그 즉시 헤어질 텐데 가는 길에 그분과 독대할 기회가 있을까?
살기등등한 저 영혼 기사들을 보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설마 본인이 아닌 제삼자의 개입으로 고백 전선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야화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성제 예하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조력이 절실하다. 명 공자님의 조력을 등에 업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명 공자님은 안돼.’
자신의 고백을 돕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죄를 받아주셨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분께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
‘주화도…… 안돼.’
성제 예하께 고백하겠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 자매다. 훼방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
마지막으로 외부인인 자신이 영도에서 다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돌파구는 자신이 직접 열어야 하는데…….
야화는 자신을 반쯤 적대하고 있는 여자 영혼 기사 두 명을 보았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뜬금없이 자신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야화의 행동에 거부감을 느낀 안느가 입을 열었을 때, 야화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미안합니다.=
=……어?=
=여러분들께도 민폐를 끼친 것에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습니다. 환인 성제 예하께 끼친 민폐와 무례를 뒤늦게 사과드립니다.=
=…….=
=…….=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떠나는 야화.
그녀는 남성을 공략하는 것은 성을 공격하는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는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고백은 성의 구조, 성벽의 높이, 수문장과 병력, 군량 같은 정보도 없이 공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짓이다.
‘그분의 주변부터 차근차근 공략해서 내 편으로 만든 뒤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고백해야 해.’
니오네브레스에서는 상위 1%에 해당하는 수준급의 깨달음이었지만, 환인에게는 눈에 훤히 보이는 고전적이고 진부한 방식일 뿐이었다.
=도령. 그 여자애 또 왔다 갔어!=
이실리테와 함께 뾰로통한 얼굴로 자신을 찾은 안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환인은 그녀의 생각을 곧바로 간파했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내일부터는 이런저런 선물을 가져와 너희들에게 선물하려 할 거다. 내게 고백하기에 앞서 너희들과 친해져 도움을 받을 생각인 거겠지.”
=…헐.=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선물은 모두 거부하라는 내 지시라고 하면서 그녀가 주는 것을 전부 거절해라. 날 핑계 삼으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겠지. 그리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연락하라는 것은 좋은 거절 방법이었다. 잘했다.”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 환인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던 이실리테는 그의 칭찬과 머리 쓰다듬에 입매를 실룩이며 좀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안느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도령은 진짜 그 여자애한테 관심 없어? 주도 8급 호족이고 방계 왕족이면 어마어마한 권력이랑 재산을 가졌을 텐데.=
“내게 이 세계의 지위나 재산 따위는 하등의 가치도 없다. 그딴 것보다 전혀 다른 세상까지 따라오겠다는 너희가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
=읏…….=
=…….=
불시에 보디 블로를 먹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힌 이실리테와 안느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대성녀님을 만나고 오지.”
=어, 엉. 다녀와.=
《드디어 내일 출발이군. 지난 한 달의 시간이 성제님에게 유익한 시간이었길 바라오.》
대성녀실에서 대성녀, 샤스라 영성 두 명과 마주 앉은 환인은 그녀의 덕담에 작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유익함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제게 지원과 원조를 아끼지 않고 많은 것을 주셨으니 대성녀님과 영성님들에게는 백 번 감사를 드려도 부족한 수준입니다.”
《그건 기쁘기 한량없는 이야기군.》
진심으로 기꺼운 듯 웃는 대성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환인은 정말로 반인반룡이 되어가는지, 머리에 한 쌍의 뿔이 자라기 시작한 샤스라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샤스라 님에게는 무어라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의도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저로 인해 종의 탈태를 겪으셨으니.”
그의 진심에 샤스라는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기다란 용의 꼬리로 바닥을 한차례 쓸었다.
대성녀실의 매끈한 바닥과 부드러운 비늘이 스치며 사라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난다.
=아야빗 영성의 분석에 따르면, 저는 사비의 종을 탈피하여 보다 상위 인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능력의 현격한 상승이 이루어졌고 종내에는 차기 대성녀 후보가 되었으니…… 환인 성제님께 백번 감사를 드려도 부족한 수준이지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샤스라의 대답에 환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고, 샤스라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약간 붉어진 얼굴을 감추었다.
《그 일에 대해서 말인데, 우리는 성제님과 샤스라 대성녀 후보를 동시에 내세워 세상에 알릴 거요. 홍보의 중심은 샤스라 대성녀 후보가 될 것이고 성제님에 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빈곤하게 퍼질 테지.》
잠시 환인의 안색을 살핀 대성녀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그래도 괜찮겠소? 정체를 숨기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밝혀야 할 경우는 있을 것이고, 그때 높아진 이름과 명예가 제법 도움이 될 텐데 말이오.》
“문제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저와 제 일행의 능력만으로 사건 사고를 헤쳐나왔으니까요. 앞으로도 똑같을 뿐입니다.”
《하긴. 그대는 저 해왕에게 인정받을 정도이니까.》
잠깐 고개를 주억인 대성녀는 한결 편해진 안색으로 질문을 덧붙였다.
《아야빗 영성에게 들었소. 정체를 감추는 마도기를 받았다고.》
“예. 이전까지는 인식장해의 후드 망토를 쓰고 다녔었습니다. 그것을 아야빗 영성께서 지적하시더군요. 앞으로도 정체를 숨기고 다니려면 그 정도는 부족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이전에 비해 성제님을 알아볼 사람은 늘어날 것이오. 그것을 대비해 인식장해 마도구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외형 변화 마도구에 아우라 은폐 마도구라면 충분히 도움 되겠지.》
잠깐 생각하던 대성녀는 큼지막한 소매에서 작은 금실은실 주머니를 꺼내 환인에게 염동력으로 전달해주었다. 주먹만한 주머니 하나와 그보다 작은 주머니 다섯 개다.
만져보자 속에 가루 같은 게 든 것처럼 무척 폭신하고 부드럽다. 입구를 살짝 열어보니 다이아몬드를 잘게 갈아서 넣은 것처럼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투명한 가루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게 보인다.
“이것은?”
《소녀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전송의 가루요. 미궁에서 그 가루를 뿌린다면 가루가 뿌려진 범위에 있는 모든 것이 미궁 밖으로 전이되는 효과를 지녔지. 성제님은 미궁에도 관심이 깊다 들었소. 위급할 시에 제법 도움이 될 거라 자부하오.》
“제법이 아니라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효과를 지닌 물품을 찾던 중이었으니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한 것이었다니 마음이 흡족하군.》
그렇게 작게 웃은 대성녀는 두 손을 다소곳이 다리 위에 올리며 물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시오. 대성녀로서 가능한 한 전부 들어드리겠소.》
“그렇습니까? 그러면 출발하기 전에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설마 대성녀가 백지수표 같은 것을 내밀줄이야.
환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어떤 부탁을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의 대성녀에게 요구했다.
“출발하기 전 대성녀님과 한 번 더 정사를 치르고 싶습니다.”
《……무, 뭐. 뭐라?》
“한 달 전 대성녀님과 정사를 하며 얻은 정화 효과는 제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혼옥 보유량이 111개에서 132개가 되었을 정도니까요.”
《뭣!?》
=예에??=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갯수에 두 여자는 매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성녀는 한 번, 그가 무수한 영혼 구슬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때문에 그가 엄청난 혼고??를 지니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숫자는 몰랐는데 132개라니.
게다가 자신과 정사를 하는 것으로 21개나 늘었다고?
《성제…… 그대는 대체 얼마나 많은 영혼을 성불시켜온 것이오? 소녀와 정사로 혼옥 보유 개수가 21개나 늘어날 정도였다니…….》
“정확히 세보지 않았기에 잘은 모르지만 일천은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작 2년 동안 1천의 영혼을 성불시켰다고? 1천이면 일반 영혼사의 반평생 성불행과 비슷한 성과인데?
‘아, 그래서인가.’
여러모로 환인의 특별함을 재차 납득한 대성녀는 두 뺨이 복숭아처럼 붉어진 얼굴로 허벅지를 모았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교접…을 요구해오다니. 조금 짐승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짐승 같은 남자였던 건가.
“문인을 지닌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과도 정사를 치렀었지만 몇 개 늘어난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습니다. 대성녀님과의 정사가 특별한 것이었지요.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환인의 재차 요구에 대성녀는 난감해져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가능한 한 전부 들어주겠다는 말 따위, 안 할 걸 그랬어.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꺼낸 상황이고, 성제는 자신의 이후 일과까지 알고 요구한 게 틀림없다.
《성제. 그대는 정녕 이상 성욕자임이 틀림없소…….》
완곡한 의미에서의 허락으로 인지한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저를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모르게 놀리는 듯한 대답에 약간 심술이 난 대성녀가 눈을 뜨며 무어라 말하려 한 순간,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에 히얏 비명을 작게 지르고 말았다.
……이 남자는 또!
자신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린 것을 깨달은 대성녀는 어이없어하며 긴 꼬리로 그의 등을 찰싹찰싹 약하게 때리며 성을 냈다.
《그대는 대성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리고 소, 소녀는 정사를 허락한 적이 없소만!?》
“그렇습니까. 저는 소극적인 긍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
그,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대성녀는 작게 땀을 흘리며 당황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여자 한 명을 발견했다.
혼자 당할 수는 없다는 심정이 대성녀의 조그만 가슴을 채운다.
《샤스라 영성, 소녀를 도와주어야겠소!》
=예엣!? 제, 제가 어째서! 저는 문인도 없습니다!=
《아니! 그대도 업이 정화되어 상위 종족이 되었으니 소녀와 비슷한 체질이 되었을 것이오! 소녀가 돕는다면 그대 또한 소녀처럼 정화의 능력을 발휘하겠지!》
=하지만……!=
왜 자신을 갑자기 걸고넘어진단 말인가.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샤스라였으나 대성녀는 결코 혼자 당할 생각이 없었다.
《설마, 샤스라 영성은 성제님을 돕기 싫다는 것이오?》
대성녀인 내가 이러는데 대성녀 후보인 너만 혼자 빠져나가겠다고?
모난 놈 옆에 있다가 정을 맞은 느낌에 샤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억울했지만, 이 심정을 토로할 곳이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체념한 채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닙니다. 성제님과 대성녀님을, 돕겠습니다…….=
환인은 두 사람의 촌극을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다가 물귀신처럼 샤스라까지 끌어들인 대성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처소로 가자며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스라는 이번에 성제님과 몸을 섞으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그를 뒤따르며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다음날.
영도에서 끝내야 할 일을 다 마친 환인 일행은 대행렬이 된 이들을 이끌고 새벽에 소리 없이 조용히 영도와 아드지를 빠져나왔다.
가는 길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천 도시를 지나 동? 로아팅스 정글을 따라 남하하는 코스.
영도로 향할 때와 다르게 일행이 10배 이상 늘어났지만, 환인 일행은 신경 쓸 일 없이 매우 평온하고 안락한 여행을 만끽했다.
소소한 일은 대부분 내정사무기관에서 파견된 기관원들이 해결해주었고 괴물과 짐승의 습격에 대한 방비, 대처는 지역순행기관의 호위대 및 영혼 심문관의 영혼 기사들이 책임졌다.
환인 일행이 하는 일이라곤 몸이 녹스는 일 없게 아침저녁으로 간단한 대련을 하고 밤에는 자신들의 마차 주변에서 야영하며 마차를 지키는 일 정도뿐.
환인이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구원 마도구를 쥐고 원기의 파동과 평온의 파동을 펼쳐 행렬의 컨디션을 관리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일 없이 한가로운 시간이 이어진다.
그리고 영도를 빠져나온 지 3일째인 오늘.
안느는 마차 안에서 희고 하얀 아랫배를 유르파에게 훤히 드러낸 채 문인 시술을 받으면서 물었다.
=율이 언니. 아르하고 아라는 잘 지내겠지?=
=자기가 10금화나 예치해놨고 튜티 씨한테 자금 활용을 맡겨놨으니까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문제없을 거야.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저택 관리인을 하겠다면 쭉 안정적인 생활을 하겠지.=
저택의 유지비는 하나도 들지 않는다. 1년에 두 차례씩 내정사무기관에서 저택보수보강 지원이 나오기 때문.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의 생활비와 임금이지만, 10금화면 30년은 쓸 수 있는 거금이다.
설령 그 돈이 바닥나더라도 30년이나 저택 관리일을 열심히 했다면 내정사무기관에서 남매의 경력을 참고해 고용한다던가 일자리를 만들어줄 터이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환인의 저택인 만큼 다른 영성들도 신경 써줄 터이니 신변상에 문제도 없을 것이고.
=근데 좀 놀랐어. 설마 그 아이들이 망설임 없이 저택 관리일을 맡겠다고 할 줄은…….=
출발 전날 밤, 환인은 아르핀과 이아라를 불러 장래에 대한 선택지를 주었었다.
하나는 영사교육기관에 수행자로 들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저택 관리인으로서 영도와 아드지 양쪽의 저택을 튜티와 함께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전자는 남매가 원한다면 환인이 직접 영사교육기관에 추천서를 적어주겠다고 했는데 남매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것처럼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환인의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뭐, 생각 없이 정한 것도 아니고 튜티 씨랑 잘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하얗고 작은 팬티만 입은 채 개구리처럼 벌린 다리 사이에서 그녀의 아랫배에 문인을 새기던 유르파는 하얀 피부를 살살 잡아당기고 모아보면서 위상석 가루가 피부와 잘 흡착되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색도 양호, 은백색 색소침착도 잘됐고……. 응, 끝났어.=
자기 다리 사이에서 유르파가 빠져나가는 걸 본 안느는 고개를 숙여 배꼽 아래 자궁 부분 쪽을 내려다보았다.
얼핏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조금 복잡한 문양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안느는 살짝 설렌다는 듯이 도구를 정리하는 유르파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내 몸으로도 도령의 탁기를 정화해줄 수 있는 거지?=
문인 시술은 2주도 전에 가능해졌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성을 점검한다고 이제야 시술을 해준 것.
유르파는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닦으며 웃었다.
=응. 그 효과로 네 몸의 탁기도 정화되어 한층 더 건강해질 거야. 또…… 피부에 색소를 침착시켜 그렸지만 영구적인 건 아냐. 최소 한 달, 길게는 석 달에 한 번씩 덧씌워 그릴 필요가 있으니 알아둬.=
=씻거나 뭐 그런 거 신경 쓸 건 없어?=
=위상석을 가루로 만들어서 특수 약재랑 개어 만든 시료로 그린 거라 물에 씻기거나 하진 않아. 시간이 흐르면 문인은 그냥 사라질 뿐이니까 남아서 몸에 해를 끼치는 것도 없을 거고.=
=만약 여기 상처를 입으면?=
=그땐 문인이 깨어져서 문인 자체가 없어질 거니까 그때 가서 새로 그리면 돼.=
그런가. 그럼 부담 없이 도령이랑 야한 일을 해도 되는 거지?
우흐흥 웃은 안느는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환인을 불러서 아랫배에 그려진 문인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다.
‘조금 아쉽지만, 밤에 도령이랑 단둘이 되면 보여줘야지.’
마침 오늘 밤이 자신의 잠자리 차례니까 보여줄 시간은 많을 것이다.
안느는 콧노래를 부르며 속옷 상자를 꺼내 오늘 밤에 입을 야한 속옷을 정성껏 고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