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화 〉 489 되돌아가는 길
* * *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성제 예하. 그리고 트라프로넨 영성님.=
여우 남매의 인도에 아침 훈련 장소로 다가온 현친왕은 어젯밤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반듯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환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얀 여우 머리에 여섯 꼬리여서일까. 조선 시대 관복과 일본의 신관복을 섞은 듯한 백색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덜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는 예의범절에 환인도 똑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야기는 어제 대강 정리가 되었을 텐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떤 연유로 찾아오셨는지요.”
=본국에 연락을 보내기에 앞서 일정을 조금 더 명확히 할 수 있을지 상의를 위해서입니다. 그 외 소소한 문제에 대하여 양해를 부탁드릴 일도 있고 말입니다.=
호천명의 부드러운 시선이 두 명의 수행원 중 야화에게 향한다.
어두운 감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야화를 조용히 응시하던 환인은 호천명에게 의중을 물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습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겸사겸사하여 이 아이도 말입니다.=
이어 주화에게 시선이 향하니, 환인과 호천명 두 명의 시선을 받게 된 주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수행원이 아니었던 겁니까.”
=수행원이 맞긴 합니다.=
“그랬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환인의 담담한 어조에 호천명은 드물게 방긋 웃으면서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성제 예하께서 알아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주어가 빠진 대화에 주변 인물들의 혼란이 가중된다.
호천명의 뒤에 있던 수행원들도 당황의 기색을 드러내는 것에 안느가 같은 호족이었던 백려강의 옆구리를 슬쩍 잡아당기며 물었다.
=려강. 지금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건지 알아? 루크랑 쪽 황실 예법이랑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네? 아…… 그게, 제 생각이 맞는다면 저 청랑족 분들은 입위 기사 신분일 거예요.」
=입위가 뭔데?=
안느의 질문에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백려강을 돌아본다.
「언니는 플뢰 공주셨다고 했으니까…… 황실 왕족 기사단이라고 하면 비슷할까요?」
=……저 여자들이 나중에 주도 성궁의 중추가 된다는 거야?=
「입위라는 가정하에 저 두 분은 아마 방계 왕족 혈통일 거예요. 그래서 직계 황족이신 호천명 친왕께서 직접 데리고 다니며 사회 교육을 하시는 걸 거고요. 그렇게 사회 교육이 끝난 입위 기사분들은 제대 후에 적성에 맞는 부서로 배치되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고 들었어요.」
=헐…….=
「친왕님도 신통술의 대가이시고, 저분들도 황족 혈통을 호위하는 분이시니까 수행원에 걸맞은 힘은 있으실 거예요. 아마 군부 쪽 인사로 예정되어있지 않을까요?」
백려강의 설명에 여자들의 표정이 괴이해졌다. 한마디로 친왕은 애들 보모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야기가 이어지자 여자들의 눈과 귀가 다시 백려강에게 향했다.
「저 두…… 사람은 아마 경험이 일천하여서 몇 번 문제를 일으켰다거나 했을 것 같아요. 하룻강아지 늑대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할까요. 이번 기회에 환인 님의 도움을 받아 버릇을 고쳐놓으실 생각이신듯해요.」
확실히 그런 거라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메리아놀의 왕족 기사단은 각 종족의 계승권이 없는 왕자, 공주들이 모여 메리아놀에 도움이 될 길을 찾기 위한 학업을 하는, 일종의 로열블러드 아카데미다.
입위 기사 제도가 그런 것과 흡사하다면 저 젊은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도령을 향해 으르렁거릴 수도 있겠지.
=…….=
슬쩍 옆으로 눈길을 준 안느는 이실리테가 수행원들을 향해 얼음장 같은 시선을 주고 있는 걸 확인하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속으로 얼마나 화를 삭이고 있는지 늘 따스하던 그녀의 손이 냉수에 오랫동안 담가놓은 것처럼 차갑다.
=참아야 해.=
=…알아.=
마음같아서는 주인님의 손을 더럽힐 것도 없이 자신이 대신 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이실리테였지만,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가 될 것이다.
=친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도령한테 직접 부탁한 거잖아. 저것도 친왕이 도령한테 빚 하나 지는 거야. 정 맘에 안 들면 나중에 비무 신청을 해서 때려눕혀도 되니까.=
역시나 안느의 설명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후우, 작은 한숨과 함께 북해의 빙산처럼 차갑던 이실리테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친왕께 빚을 지우는 일이니 수고스러움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괜찮은 겁니까. 저는 대련에서 손대중 같은 것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호천명도 방금 대련에서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연인인 여자의 명치를 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쳐날 리는 것이 정상은 아닐테니까.
그랬기에 상큼함이 느껴지는 미소로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특주 신성기를 착용 중이니 단번에 신체 절반이 증발하는 정도의 타격만 아니면 목숨은 확실히 부지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나올 뒷말 또한 황실 명예에 맹세코 제가 전부 책임질 것이오니,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친왕께서 직접 뒷바라지를 하는 인물이라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평범한 수행원이 아니었다고 하는 질문에 호천명은 약간이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성제 예하께서는 라드세아 황실의 혈통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아십니까?=
“아직 견식이 짧은 터라.”
=황실의 피는 최대 육촌 간 근친혼을 기준으로 그 농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피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 폐해가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그 때문에 약 200~300년 간격으로 외부에서 피를 유입하는데, 그 결합에서 후손을 보아 백미호족의 피를 이은 아이가 태어나면 직계, 다색계 여우나 기타 종족의 피가 발현하면 방계가 됩니다.=
직계는 태어나면서 9급 호족이 되고 방계는 8급 호족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업적으로 국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면 2차, 3차, 4차 방계로 급수가 계속 낮아져 최종적으로 4급 호족이 되어 성궁에서 방출된다.
그리고 성궁의 중추 가신은 8급과 7급 방계로만 이루어지는데 수행원인 주야화 자매는 50년 전의 1차 방계 혈통.
청랑의 외모를 타고났지만, 황실의 피가 짙은 탓에 어느 정도 신통력도 가지고 있어 성도의 핵심 지위를 맡게 예정되어있다는 내부 사정이 친왕의 입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루크랑 족은…… 어느 종족이든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루크랑 족은 자신의 혈통에 매우 강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자부심 탓에 이리저리 말썽도 많이 일으키는데 솔직히 골치가 매우 아픕니다.=
자신이 직접 손을 써도 되지만 그리되면 방계 가문 회에서 ‘즈언하!! 체통을 지키십시오 즈언하아!!’라며 극렬하게 쪼아댄다고.
이미 몇 번 시달려봤는지 하얀 여우의 눈매에 진한 정신적 피로가 묻어난다.
회사 근무 시절 후배가 친 사고를 해결하느라 받았던 스트레스를 상기한 환인은 그의 피로에 약간이지만 공감하며 후웅— 창 대용으로 쓰는 천칭을 한차례 강하게 휘둘렀다.
“그 묵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환인과 호천명 사이에서 기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대련을 빙자한 참교육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주화는 설마 이런 목적으로 왔을 줄은 짐작도 못 했는지 혼난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져서는 호천명의 옆에 얌전히 있었고, 야화는 음울한 눈빛으로 ‘네 거짓을 밝혀주겠다’라는 의지를 환인에게 내비치며 검과 방패를 들고 대련장에 들어섰다.
환인과 야화 두 명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자 손녀와 함께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과정을 지켜보던 트라프로넨이 끼어들어 선언한다.
=본인은 이번 대련의 공증인 자격으로 참관하게 된 영도 지역순행기관의 기관장, 트라프로넨 라드원이다. 각자의 가문과 명예를 생각하여 정정당당히 이 대련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면…….=
시작.
짧은 외침과 함께 물러나는 트라프로넨.
대련이 시작되었지만, 환인은 한 손으로 창을 늘어트린 채 가만히 서 있었고, 야화는 검을 뒤로 늘어트리고 방패를 내세운 프런트 실드 스타일로 몸통을 가리며 환인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방어쪽의 검방술인가.
연 모양 방패로 몸통을 가린 채 방패 위로 눈만 내민 태세.
그 상태로 이쪽의 작전과 스타일을 밝혀내려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는 야화의 행동에 환인은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악기로 심정을 둘둘 말고 있으니…….’
초장부터 독하게 두들겨 팬다고 항복을 선언하고 그럴 성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방패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안느를 통해 물릴 정도로 한 상태여서 상대에 대한 흥미도 없다.
게다가 저 자세는 지극히 방어적인 스탠스이니 이쪽이 가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대치 상태가 이어질 테지.
환인은 야화의 시선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는 것을 보며 작게 웃었다.
=하아압!!=
그 웃음이 방아쇠가 된 것처럼 땅을 박차 여섯 걸음 차이를 단번에 좁히는 야화.
스산한 살기와 함께 최단기 직선 돌격에 이은 섬광 같은 찌르기가 환인의 가슴을 향해 펼쳐진다.
그 속도는 성술사의 신체로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환인에게는 세 살배기 아기가 장난감 플라스틱 검과 방패를 들고 종종종 달려오는 것과 같은 정도.
툭
=윽?=
방패로 가려진 시선의 사각지대를 통해 스틱 끄트머리를 그녀의 발이 밟을 지점에 먼저 가져다 놓자 천칭을 밟은 발목이 꺾이며 넘어질 듯이 휘청이는 야화.
환인은 방패가 내려가 훤히 드러낸 턱을 천칭으로 쾅 강하게 후려쳤고, 턱이 90도 가까이 크게 돌아갔던 야화는 강한 뇌진탕 증세에 눈이 풀려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후들거렸다.
‘몸도 튼튼하군.’
턱뼈를 박살 낼 생각으로 휘둘렀는데 조금 부은 정도로 끝나다니. 신성구???를 갖췄다고 했는데 신체 능력을 크게 올리는 마도구 같은 건가.
생각하면서 환인은 자세가 풀려 온몸에 빈틈을 드러낸 야화를 말 그대로 개같이 두들겼다.
봉긋한 우측 젖가슴이 짜부라질 정도로 찌르고, 고통에 움츠러들면 옆구리를 후려쳐 몸을 비틀게 만든다.
그렇게 드러난 반대쪽 옆구리도 후려치는 한편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자 숙이는 갸름한 턱을 인정사정없이 올려 쳐 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만드는 동시에 목뼈에서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목젖을 찔러버린다.
=케윽.=
정도를 넘어선 고통에 오히려 정신을 차렸는지 눈물과 콧물, 침을 튀기며 두 손으로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려하는 야화였지만.
빠각!
=끄윽…!=
애초에 카이트 실드로 몸 전체를 가리는 것은 어불성설.
방패 아래로 드러난 정강이와 발등을 찍어버린 뒤 웅크리듯 주저앉는 야화를 중급 정령 강령에 그리모암의 혁대까지 끌어 올린 힘으로 방패째 걷어차 버렸다.
꽝, 수류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방패에 치여 수 미터를 날아가 뒹구는 야화.
=……어헉! 크헉, 끄으윽…!=
트라프로넨과 그의 손녀, 호천명과 주화는 멍청한 얼굴을 했다.
입위 기사라면 혼자서 4급 이형종 정도하고는 싸워 이길 실력자인데 이건, 이건…… 대련이 아니라 그냥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구도이지 않은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야화는 퉷, 피가 섞인 침과 함께 이빨 조각을 뱉고 악이 받친 눈빛으로 검과 방패를 세웠다.
그리고 성유물에 재생 능력을 높이는 데 쓰는 위상력을 제외한 전부를 쑤셔 넣는다.
부우웅— 몸이 터질 것 같은 힘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쾅, 땅을 박차고 한줄기 번개처럼 달……려드는 척 채찍마냥 궤적을 비틀어 다이나믹하게 검을 휘두르는 야화.
가문에 내려오는 절기로 그에 합당한 신체가 없다면 오히려 자신이 더 큰 피해를 입는 절정의 왜곡보법이 완벽하게 펼쳐졌지만, 환인은 떨어지는 낙엽을 쳐내는 것처럼 그녀의 검로를 읽고 대충 흘려넘겼다.
=이익…!=
뿌드득.
환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지나쳤던 야화는 재차 몸을 비틀다 못해 근육까지 비틀어 갈 지之자로 격렬한 신법을 펼친다. 그와 함께 검으로 찌르고 베고 방패로 후려치고 다리로 걷어차지만, 그 어떤 공격도 환인의 몸에 닿지 않았다.
검은 천칭에 의해 걷어내어지거나 튕겨 나가기 일쑤였고 방패와 각선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길쭉한 다리는 허공을 때릴 뿐이다.
“한심하군.”
2분 정도 공격을 받아준 환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렇게 감상평을 남긴 뒤.
뻐벅, 투콱! 콰직. 으득! 뚜두둑!
팔꿈치, 무릎, 허벅지, 옆구리, 어깨, 측두부, 정강이.
보는 사람의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자비하게 야화의 전신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허점이 드러나면 허점을 후려친다. 허점이 드러나지 않으면 허점이 드러나도록 후려친 뒤 두들겨 팬다.
모든 약점과 습성을 파악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일방적인 구타.
=끄, 끄어…!=
회피고 막기고 통하지 않는 폭력에 정신이 반쯤 나간 야화는 무의식적으로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꽈광!!!
간신히 들어 올린 방패는 마치 6급 이형종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박살 나서 흩뿌려졌고, 방패를 차고 있던 왼팔도 트럭에 치인 것처럼 복합 개방 골절을 당했다.
=…아아악!!=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 야화는 이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며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그리고 압도적으로 승부가 나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라고 생각하며 의식을 끈을 놓으려던 야화는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며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
눈앞의 남자, 성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따스하고 포근한 회색빛의 파문. 평온의 파동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손가락.
남자답게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이마의 중심을 쿡, 찌른 순간 야화는 머릿속에 냉수를 한 바가지 퍼부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지고 맑아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덩달아 온몸에서 올라오는 고통까지 선명해진다.
=흐윽.=
“기절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선명해진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길고 곧은 지팡이가 아로새겨지고, 야화는 가슴을 채우는 미지의 감정에 크게 헐떡였다.
이게, 이게 두려움? 내가, 남자한테 두려움을 느낀다고?
콰직!
=끄악…!!=
갈비뼈가 산산이 조각나는 고통에 야화는 비명을 지르며 멀쩡한 오른팔로 검을 휘둘렀지만,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를 뿐이다.
이어 으적 골반이 으스러지는 고통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야화는 풀썩 주저앉으려다 쇄골을 얻어맞고 관성에 뒤로 몸이 뒤로 돌려졌다.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가슴 속을 채우던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다.
쩍! 으적, 콰직!
그리고 견갑골, 척추, 꼬리뼈가 차례대로 박살 나는 느낌에 몸을 비틀며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뼈를 부수지도 않았는데 아프다고 우는 건가.”
부서졌어. 부서졌어요. 못 움직이겠어요.
멱살이 잡힌 것처럼 몸이 홱 돌려진 야화는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 뒤로 도깨비 같은 그림자가 일어나는 환상을 보며 조건 반사적으로 검을 찔렀다.
“그래. 그래야지.”
나지막한 이야기와 동시에 야화는 아랫배에서 일어난 충격에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웅크렸다.
아랫배가, 자궁이 마치 날붙이에 꿰뚫린 듯한 고통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쾅 뇌가 쥐어짜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쏟아지는 물리적인 고통들.
야화는 어느 순간 제삼자의 시점으로 모두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흐느적거리듯이 움직이며 무의식의 반사로 검을 휘두르는 자신. 그런 자신의 몸 곳곳을 찌르고 후리고 두들기는 남자의 지팡이.
자신이 보아도 남자의 동작에 낭비는 없었다. 딱 필요한 정도로만 움직여 의도한 만큼의 피해만 준다.
동작과 동작의 연결이 아름답게 이어지며 자신의 몸뚱이에 고통의 낙인을 새기는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
술법사와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궤를 달리하는 이 압도적인 기량이라니.
자신의 검기 따윈 어린아이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의 무술이라니!
뭐만 하면 여자 주제에, 계집 따위가 같은 말로 떠들기만 하는 주도의 병신 같은 남자들과 다르다.
자존심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건 곧 강자의 자긍심.
자신의 몸뚱이를 두들겨 패는 환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야화는 가슴에 가득한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여상한 얼굴로 묵묵히 할 일만 한다는 듯이 길이 2m에 이르는 길고 곧은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도.
얻어맞으며 흉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몸뚱이도.
하혈이 시작되어 바지를 빨갛게 물들이는 모습마저도 그의 무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때 보고서로 본 그의 업적이 일일이 눈앞에 나열되기 시작했다.
보잘것없는 힘으로 네 명의 여자를 데리고 6급 삼림형 미궁을 탈출한 것.
강화될 대로 강화된 타락한 바르둘을 물리치고 수천 마리의 합성 괴물을 해치운 것.
재앙화 된 혼재마저 강제 정화한 것
프라버를 갱생시킬 정도의 정치적, 사회적 식견.
알소프를 맞상대할 정도로 강한 담력.
알류겔의 해왕에게도 인정받을 정도의 품성에 별것 없는 전사와 투사를 거두어들여 검희와 정령 기사로 키워낸 능력까지.
문무겸비에 훌륭한 지위와 그에 걸맞은 예절, 격식도 충만하다.
명 공자님 같은 남자가 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눈 앞의 남자는 명 공자님보다 더 뛰어난 남자였다.
=……끅! 우웩!=
순간 부유감 가득한 제삼자의 시선이 끊어지며 무겁고 답답한 육체의 굴레로 돌아온 야화는 왈칵, 피를 한움큼 토해냈다.
덕분에 조금이지만 가슴이 시원해진 것을 느끼며 야화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에 애써 힘을 주며 똑바로 세운다.
이런 남자에게 저열한 질투와 의심을 한 것을 사과해야 한다. 바쁘신 명 공자님을 귀찮게 한 것도 사죄드려야 한다.
전신이 엉망진창이 된 가운데 다리는 부들부들, 어깨는 바들바들 떨린다. 그럼에도 복합개방골절을 일으킨 왼팔 대신 오른팔만 들어 가슴에 올리며 환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제…가, 져씁. 니다. 쿨럭. 서…엉제 예…하, 제 잘……못을, 용…서…….=
풀썩.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눈이 돌아간 채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야화는 기절 직전에 본 환인의 약간 풀린 표정에 안심하며 의식을 끈을 놓았다.
야화가 대련에서 입은 상처를 현대 의학으로 진단한다면 전치 20주가 넘을 중상에 영구적인 후유증까지 남는다고 나왔을 것이다.
=야화. 야.=
=……?=
=너 괜찮아? 너무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다거나 그런 거 아냐?=
=난 멀쩡해.=
그러나 호천명의 신통술에 성술사인 자신의 능력을 더한 야화는 고작 하루 만에 부상 대부분을 떨쳐낼 정도로 회복되었다.
비록 화장실에 가면 아직도 피오줌이 흐르고 질과 항문에서 피가 쏟아지지만, 이건 치유되어가는 과정이다. 호위 임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입위 기사 정복을 챙겨입던 야화는 자매의 의심에 찬 눈초리를 정면으로 받으며 문제가 있냐는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 시선에 억울해진 주화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토로한다.
=아니이. 미친년처럼 성제 예하를 의심할 땐 언제고 지금은 태도가 180도 싹 바뀌었잖아. 이런데 내가 의심 안 하고 배겨?=
너 때문에 나도 성제 예하한테 지릴만큼 얻어터졌는데!
=주화. 게닌 기억나?=
=그 열등감만 비대한 쓰레기를 잊을리 있냐.=
=우리를 거품 낀 쓰레기 병신년들이라고 했었어. 그리고 내가 환인 님께 한 행동은 게닌이 한 것과 같은 일이었어.=
=…….=
=그걸 깨달았어.=
=……고작 대련 한 번으로?=
=잘못을 깨닫는데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촤악 깔끔하게 다려진 제복 상의를 걸친 야화는 전신 거울로 옷맵시를 확인하고 방을 나섰다.
=야, 야! 어디 가는데?!=
=명 공자님한테 잘못을 사죄드릴 거야. 그리고 환인 님한테도 가서 정식으로 다시 사죄드릴래.=
=뭐어어? 진심이야?!=
=…절반은 진심이야. 남은 절반은 환인 님께 고백하고 싶다는 마음.=
=에엑!?=
주화는 혼란이 극에 달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야화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