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94화 (494/813)

〈 494화 〉 488 되돌아가는 길

* * *

* * * *

=…….=

목적으로 하였던 요주의 인물과 접견을 마친 호천명을 호위하며 밤길을 걸어 돌아가는 길.

호천명의 입위? 기사, 야화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땅만 쳐다보며 걸었다.

같은 입위 기사이자 그녀의 자매인 주화는 그러한 여동생의 모습이 못내 신경 쓰여 계속 힐끔거리며 눈길을 주었다.

좀처럼 포커페이스가 무너지지 않는 야화가 이렇게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다니.

‘아니, 내 실수로 명 공자님이 고개 숙이게 하면 나도 저럴 테지만.’

=야화. 그렇게 신경 쓰이느냐.=

고귀한 혈통의 증거인 순백의 여섯 꼬리를 느긋하게 일렁이며 앞서 걷던 호천명의 질문에 야화가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멈추질 않사옵니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능히 그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지니. 어두운 감정은 버리고 본연의 역할에 집중해야할 것이다.=

=예…….=

알고는 있지만 그 남자의 화술에 농락당해 명 공자님께 폐를 끼친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멈추질 않는다.

그녀 또한 라드세아와 역사를 같이하는 8급 대 호족 가문 출신의 영애이자 무사.

비록 성술사로 각성하였으나 그 기술만큼은 자매이며 전사로 각성한 주화 못지않으며, 검기??를 평생 연마한 그녀는 같은 청랑 무사단의 남자도 찍어누를 정도인 자존심의 화신이다.

주화는 야단났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명 공자님은 모르시지만, 쟤가 저럴 때면 꼭 큰일이 벌어졌었다.

일례로 같은 무사단 소속인 다른 8급 호족 가문의 차남을 ‘집안에서 남편을 모시며 애나 낳아 기를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검놀이나 하는 년.’이라는 앞담화에 반쯤 때려죽인 전적이 있을 정도.

앞서 걸어가는 호천명의 뒷모습을 살핀 주화는 여동생의 옆에 붙어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야. 안 돼. 사고 칠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이거 여왕 폐하께서도 예의 주시하는 일이니까.=

=……이해가 안 돼.=

=이해하려 들지 마. 아무 생각 하지 마. 명 공자님 말씀만 들어.=

=그 사람, 정말 강한 거 맞아? 기운이 안 느껴졌어. 무사로서 기질도 없었어.=

=야 이 미친년아. 우리를 월등히 능가하는 무사일 수도 있잖아!=

=그 남자가 스승님을 뛰어넘는 무사라고 말하는 거야?=

=…….=

주화는 꿀 먹은 곰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자매의 스승, 아스한=티난. 무직자의 몸으로 기술의 극에 다다라 홀로 6급 이형종을 도살하는 전설적인 인물.

그녀와 견줄 자는 라드세아 서부의 대도시, 파르히스트의 백천 근위무사단 단장 아렐=케드윈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스승님이지만, 자신들과 스승님 사이의 기량 차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약관을 넘긴 듯한 남자가 그런 기량의 극을 넘어섰다고?

일순간 멍해졌던 주화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아니아니. 이런 식으로 쟤한테 끌려다니다간 사달이 나도 된통 난다.

=그래서 뭐? 차기 대성자 후보를 영도에서 때려눕히겠다는 이야기야? 너 약 빤 거 아니지? 그랬다간 명 공자님한테도 엄청난 폐가 된다 너?=

=그 혼령주, 정말 그 남자가 쓴 걸까? 몸에 걸친 유물과 마도 장비를 제외하면 위상력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가? 혹시 대성녀와 영성들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야화의 혼잣말에 주화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년 이러다 진짜 크게 사고 칠 느낌인데.’

어떡하지? 이미 눈이 돌아갔다. 온건책을 동원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이야기다.

정석은 명 공자님한테 얘 정신 나갔다고 고해바친 뒤에 주도로 송환하는 것.

하지만 그랬다간 피붙이 자매의 경력을 자신의 손으로 뭉개버리는 셈이다. 당연히 자매 사이도 멀어지겠지.

=~~.=

그렇다고 저걸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직무유기다.

단순히 명 공자님 얼굴에 먹칠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먹칠도 큰 문제), 영도와 라드세아 간에 마찰 분쟁까지 날 수도 있는 일인 거다.

꼭지가 반쯤 돌아간 여동생의 모습에 주화는 으~ 속으로 앓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극약 처방을 꺼내 들었다.

=너, 지금부터 내 눈 밖으로 벗어나지 마. 한순간이라도 안 보이면 명 공자님한테 방금 있었던 이야기 다 말씀드릴 거야.=

=…….=

=그런 눈으로 본다고 무서워할 줄 알아?=

무섭다. 눈 흰자위가 번들거리는 게 미친년이 따로 없다.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뒀다가 일어날 일이 더 무섭다.

=무사단에서 르구긴을 반쯤 패 죽였던 일 하고 지금 네가 상상하는 일을 저지르는 건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의 문제야. 네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지켜만 볼 생각은 없다는 걸 알아둬.=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환인 성제의 꼬투리를 잡아서 가짜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속셈이잖아.=

=…….=

=넌 평소에는 똑똑하면서 한번 눈 돌아가면 천치가 아닌가 싶을 만큼 지능이 떨어지니까. 아무튼 절대 하지 마.=

자신의 으름장에 여동생이 고개를 돌리는 걸 본 주화는 속으로 십년감수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한동안은 얌전하게 있겠지.

한동안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명 공자님한테 말씀드리자.

그렇게 급한 일을 정리하고 나자 그녀의 가슴 속에 고갤 숙이고 있던 의문이 천천히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자신도 성제를 근거리에서 봤었지만, 야화의 말대로 그에게서는 단련한 무사의 느낌이 전혀 풍기질 않았었다.

거기다 성제씩이나 되면 존재감이라든지 기세라든지, 초월자에 가까운 무언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어.’

거기다 아우라도 없으니 눈 돌아간 여동생이 저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혼령주를 쓴 건 확실하다. 그 자리에 영성의 아우라를 지닌 인물은 아무도 없었고, 영도의 수많은 시민이 그에게 모여들어 축복을 간청하였으니까.

‘무엇보다 영성급 인물에게만 붙는다는 내정사무기관의 상급 기관원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어.’

그게 그의 능력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 말은 자신들의 인지를 월등히 초월한 인물이라는 뜻인데, 이제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그만한 실력을 갖출 수가 있는 건가?

뭐 100번 양보해서 약관의 나이에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가능하다고는 본다.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을 테니까.

그러나 무술과 영혼술, 두 분야의 정점이라고 하면…….

‘모르겠다.’

머리 복잡한 분석과 계획 구상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그쪽은 명 공자님께 맡기고 나는 야화의 감시랑 명 공자님의 호위에만 집중하면 돼.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찜찜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한겨울의 밤이었다.

* * * *

=자기, 밤새 조사해봤는데…….=

다음 날 아침,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온 환인은 유르파가 약간 피로한 얼굴로 어제 검사를 부탁했던 마도구와 유물, 마도기를 가져와서 내미는 걸 받아들었다.

=파르히스트 토너먼트 우승 상품이랑 그리모암의 수파는 같이 쓰면 안될 거 같아.=

“반발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까.”

=반발이라면 반발인데……. 보통 유물은 마도구랑 별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거든? 그런데 그리모암의 목걸이랑 신체 강화 목걸이는달라. 정확하게는 신체 강화 목걸이의 에너지가 유물에 흡수되어버려. 같이 쓰면 신체 강화 목걸이 쪽이 얼마 못 버틸 거야.=

그 외에는 반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노화 방지 마도구는 그리모암의 완륜하고 같이 끼거나, 방벽 마도기와 같이 껴도 괜찮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환인이 즐겨 쓰는 것은 신체 근력을 한순간 5배까지 올려주는 그리모암의 혁대와, 그보다는 못하지만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주는 목걸이 두 개다.

두 가지를 같이 쓰면 근력이 한순간이지만 중급 직업자 버금갈 정도로 증폭된다. 여기에 정령 강령까지 하면 이실리테와 안느하고 무기를 직접 부딪쳐도 버틸 수 있는 근력과 내구력을 얻을 수 있다.

그랬는데 수파를 끼면 신체 강화 목걸이를 못 낀다니.

“알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아이템을 다 착용한 환인은 날밤을 새웠음에도 좋은 향기가 나는 유르파를 끌어안고 진한 키스를 해주었다.

쿵, 벽에 밀어붙여져 가슴과 엉덩이를 난폭하게 주물러지며 숨 막히도록 깊고 길게 이어지는 프렌치 키스.

그 뜻하지 않은 포상에 유르파는 피로가 싹 날아간 얼굴로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운동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

이미 아침 훈련 준비를 끝냈던 환인은 사슬 부분이 이리저리 뾰족뾰족한 느낌의 목걸이를 잠시 살펴보았다.

뭔가 판타지 코스프레를 할 때 전사나 암살자가 목에 걸면 어울릴듯한 디자인.

‘강화가 아쉽긴 하지만 신체 강화 목걸이를 벗어야겠지.’

목걸이는 안느에게 돌려주기로 할까.

마도구와 유물을 차례대로 착용한 환인은 신체 강화 목걸이 대신 그리모암의 수파를 목에 걸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일단 겉보기에 두드러지는 변화는 없다. 그러나 패시브 효과로 힘을 조금 강하게 해주는 그리모암의 혁대와 마찬가지로, 손톱을 세워 피부를 조금 세게 찍어도 붉은 자국조차 나지 않을 만큼 피부가 질겨졌다.

아니, 신체가 단단해졌다.

“흠.”

그리모암의 수파를 발동하자 피부의 감각이 조금 둔해진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팔뚝을 살짝 그어봤지만,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마침 훈련 채비를 마친 안느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기에 그녀를 불러 마당으로 나간 뒤 방패를 들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방패 위를 주먹으로 온 힘을 다해 후려쳤다.

콰앙!

=어엇, 도령 손.=

“괜찮다.”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이 정도면 5층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할 듯한 신체 강도.

그 후 유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수파의 내구력과 지속력 테스트를 진행한 환인은 이윽고 찾아온 후유증에 헛웃음을 지었다.

=어때?=

“몸이 무겁군. 물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전신 근육통을 주던 혁대와는 또 다른 느낌. 몸이 저릿저릿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감상을 들은 안느가 그의 전신 근육통을 성술로 치료해주면서 요구했다.

=도령. 그럼 혁대도 써봐. 혁대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게 수파랬잖아.=

“음.”

그녀의 요구대로 그리모암의 혁대를 발동한 뒤 지속시간 한계인 5분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찾아온 근육통.

5분을 전부 채우면 전신 마비에 빠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하던 근육통이 평범하게 근력 트레이닝을 하고 난 뒤 정도로 감소했다.

이 정도면 혁대를 쓰고나서도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을 수준이다.

=진짜? 단점 상쇄가 상당하네. 1분 정도로 적당히 끊어서 쓰면 사용 후유증은 거의 없다는 뜻 아냐?=

“맞다. 앞으로 전투에 제법 도움이 되겠군.”

중간부터 백려강, 유르파와 함께 유물 테스트를 구경하던 이실리테가 환인의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마사지를 해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친왕이 부탁을 들어주면 신발도 주고 모자의 정보도 준다고 했으니까.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으는 것도 머지않아 이루겠네요=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적이 되려나?=

운동에 앞서 스트레칭을 하던 유르파의 감상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유일한 단점으로 꼽는 게 부족한 신체 능력이다.

단련하지 않은 일반인들에 비하면 월등하지만, 근접 직업자와 비교하면 1~2급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강화 마도구에 정령 강령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는데 만약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으면…….

‘다중 검기의 숙련도를 빨리 올려야겠어.’

‘으~. 그러기 전에 빛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유물을 다 모으게 되면 영원히 그의 뒷모습만 보게 될 것 같아 이실리테와 안느는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쥐면서 일어났다.

주인님/도령이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으기 전에 자신들의 직업 특기를 단련해서 그와는 다른 분야에서 힘을 쓸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훈련을 시작하려 했을 때, 그녀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여어, 성제님.=

“트라프로넨 영성님. 일찍 오셨군요.”

=오늘이 기대되어서 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정도였거든! 그러다 보니 약속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왔는데…… 방해됐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침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그리모암의 혁대와 수파를 발동시킨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어 훈련을 개시하기 곤란했는데 때맞춰 잘 와주었다.

환인은 트라프로넨 영성과 그의 손녀, 이틀 전 몸을 섞었던 아가씨에게 목례한 뒤 여자친구 둘을 불러 자초지종과 자신의 의도를 설명해주었다.

=응. 이해했어. 그럼 이슬이가 나보다 기술이 뛰어나니까 나부터 먼저 할게.=

=오, 자네가 정령 기사로 재각성 했다는 처자구만. 이름이 안느였나? 잘 부탁하지!=

=한 수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실력 테스트나 다름없지만, 트라프로넨은 기분 나빠하긴커녕 오히려 더 즐거워하며 팔꿈치까지 뒤덮는 건틀릿과 무릎까지 보호하는 각반 차림으로 나선다.

=난 다른 건 안 쓰고 신체 능력으로만 하겠네.=

=저도 같은 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대련.

쿵!

시작하자마자 날아온 지르기를 방패로 흘려낸 안느는 예상 밖으로 팔까지 전달된 무게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뭐지. 술법사 계통의 타격력이 아닌데.

강령을 했다고 보기엔 강령 특유의 현상, 눈에서 흐르는 옅은 빛무리가 없다.

다른 건 안 쓴다고 했으니 마도구를 쓴 것도 아닐 텐데, 정말 이게 단순한 육체 능력인가?

격투 계열답게 쏟아지는 주먹과 발차기가 빠르고 예리하지만, 안느는 차분히 그 공격을 모두 막거나 흘리거나 피하면서 트라프로넨의 근력과 체력을 가늠하고 위상력 감응으로 그의 위상력 수치를 눈여겨본다.

=방어가 굉장히 뛰어나구만! 순행기관의 그 누구보다 단단한 게 흡사 성벽 같은 느낌이야!=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하며 하단 쓸기를 훌쩍 뒤로 물러나며 피한 안느는 작게 감탄했다.

마도구와 마도기는 가지고 있지만 안 쓰고 있다. 말 그대로 맨몸 상태라는 말. 그럼에도 신체 능력이 이 정도라니, 트라프로넨 영성도 특이체질인 게 틀림없다.

‘4급 투사 정도인가?’

거기다 기술도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게, 평생을 부단히 단련해온 무사라는 느낌.

여기에 강령으로 자신을 강화하고 마도 장비의 도움을 얻는다면 어지간한 승급 직업자와 맞먹는 힘을 낼 거라고 안느는 분석했다.

그때부터 안느도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령 기사가 되며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힘이 더욱 강해졌다. 굵은 철심을 박은 워해머도 이쑤시개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지는 상태.

안느는 성인 남자의 상체만 한 워 해머를 솜사탕처럼 휘두르면서 트라프로넨을 압도해나간다.

=큭?! 으그극!=

그런 안느를 상대하는 트라프로넨은 철로 이루어진 성벽을 때리는 느낌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어딜 공격해도 방패에 막히거나 흘려 내지거나 피해버린다. 그렇다고 방패를 부숴버릴 기세로 주먹질을 퍼부어도 느낌상 정타로 들어가는 것은 스무 대 중에 한 대?

거기다 약간만 틈을 드러내도 바위마저 가루로 만들어버릴듯한 워 해머가 윙—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들이닥치니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정도였으면 자신은 순행기관장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심해라!=

대련인 만큼 예의상 경고를 한 트라프로넨은 수인화를 발동, 다릿심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로 종횡무진. 1초에 대여섯 번씩 안느의 전후좌우를 무차별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퍽­

……음?

=앗, 할아버님. 머리 괜찮으세요?=

트라프로넨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손녀를 보곤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드러누워 있는 거지? 분명 큰 키의 영혼 기사와 대련 중이었는데……?

그의 눈빛에서 혼란을 읽은 손녀는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이유를 짧게 설명해주었다.

=안느 경의 워 해머가 할아버님의 측두부를 정확하게 타격했어요. 할아버님은 그 일격에 기절하셨고요…….=

=끄응.=

이제야 생각난다. 수인화로 속도를 올려 공격하다가 반격에 당했지…….

콰각, 퍼버벅! 투콱, 퍽, 쩌저정—!

징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트라프로넨은 뒤늦게 고막으로 흘러들어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여자의 무시무시한 공방전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고속의 공방인지 무기가 이리저리 휘어지고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렇게 한 5초간 무기를 거세게 맞부딪치던 두 여자는 눈 깜짝할 사이 떨어지더니 휘두른 무기로 견제를 하다가 재차 맞붙는다.

콰과광­ 쩡, 콰득, 퍼버벅­ 쿠궁­!!

=뭐냐, 저거.=

=두 분 기사님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기예나 기교 없이 반사신경, 동체시력으로만 싸우고 계신 거예요.=

=아니 그건 나도 알지.=

마치 10년, 20년 동안 합을 맞춘 것처럼 일견 무용과도 같이 아름답게 무기를 교환하는 두 여자.

어지간한 무사라면 보자마자 전의를 잃어버릴 정도의 맹공 속에서도 이마에, 얼굴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다. 눈도 고요함을 담아 서로를 응시하는 중.

저정도면 대련이 아니라 춤사위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억!?=

저 예술과도 같은 대련 사이에 끼어드는 그림자를 목격한 트라프로넨은 대경해서 입을 쩍 벌렸다.

자살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저 정교한 합에 끼어들다니!? 그랬는데 그 그림자의 주인이 성제이지 않은가!!

이어서 벌어진 광경은 소매로 두 눈을 비비지 않고는 못 버틸 장면이었다.

천칭을 든 환인이 난입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1:1에서 2:1로 전환해 환인에게 협공하는 두 여자.

그런 공격을 죄다 흘리거나 되돌리며 난격과도 같은 봉술이 두 여자의 몸과 팔다리 관절에 꽂히며 퍼버벅, 둔중한 타격음이 피어난다.

=허, 허어. 허어어…….=

자신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여유라곤 한 점도 없는 모습으로 환인에게 공격을 퍼붓는 안느를 본 트라프로넨은 어째서 성제가 그런 조건을 내걸었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안느에게 제대로 된 유효 타격을 한 번도 먹이지 못했는지도.

=이거이거…… 나는 종이 상자 안의 고양이였구나…….=

기술이 차이 나도 너무 차이 난다.

보아하니 무술의 체계를 잡지 않고 개인의 반응 신경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연마하는 실전 전투법인 듯한데, 저만큼이나 전투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맹세코 처음 본다.

보통 반사신경 단련은 어느 정도로 끝내고 투법과 무기술을 배우기 마련이다. 왜겠나. 반사신경은 단련한다고 해도 단련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그런 단련을 앞에서 이끌어줄 스승이나 사부, 선생의 존재도 거의 없고.

‘그런데 저 아가씨들은 그런 스승을 가지고 있군. 자질도 충분하고.’

만약 저들이 살기를 품고 달려든다면 자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트라프로넨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 넓은 장소에서 맞붙는다는 가정……을 해보다가 접었다.

의미 없다. 저 아가씨들도 고유 기술과 필살기는 쓰지도 않고 기본 신체 능력만으로 싸우고 있잖아.

좀 전, 시끄럽게 무기가 부딪치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드문드문 울려 퍼지는 자루 두들기는 소리 외에는 휭­ 후웅­ 무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픈 것도 잊은 트라프로넨은 불현듯 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저런 무술의 대가와 매일같이 대련할 수 있다니. 아가씨들이 부러워 죽겠구만.=

뻑!=아윽!=

짧은 타격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호박색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튕겨 나가고 3초 뒤, 콰광!! 방패가 찌그러진 게 아닐까 싶은 굉음과 함께 자신과 대련했던 안느라는 기사가 방패를 놓친 채 풀썩 쓰러진다.

방금 뭐였지? 성제님의 봉이 방패의 한 점을 연달아 5번 두드렸던 거 같은데?

같은 지점을 눈 깜빡이는 찰나의 시간에 두드리면 저런 위력이 나오나?

자신이 두드릴 땐 강철처럼 굳건하던 방패가 팔 째로 홱 젖혀진 조금 전의 장면을 잊지 못한 트라프로넨은 체면도 다 내려놓고 환인에게 달려갔다.

=아야야야……. 또 못 막았네….=

안느는 성술로 왼쪽 어깨와 팔꿈치를 치료하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성체술로 몸을 더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었는데도 강격을 막지 못하다니.

강격의 원리는 그녀도 들었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고 있었다. 그건 이실리테도 마찬가지.

같은 자리에 같은 방향으로 점점 강한 힘으로 충격을 연달아주면 반탄력이 돌아오다 더 강한 힘에 휩쓸려 날아가서 되돌아오기에 그걸 몇 번 반복 하면 처음보다 수백 배는 더 강한 위력이 발생한다……는 데, 그거 사람이 쓸 수 있는 거긴 한가?

저거 봐. 트라프로넨 영성님도 설명을 다 듣고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하나도 이해 못 한 얼굴이잖아.

=안느, 나도 치료 좀…….=

왠지 모를 기시감에 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시커멓게 멍든 그녀의 명치에 치유술을 걸어준다.

걸어주면서 탱글탱글한 밑가슴을 콕콕 찔러보다가 그녀에게 뺨을 꼬집힌 안느는 우연히 담벼락 너머, 정원수 사이로 얼굴 하나를 발견하곤 눈썹을 살짝 굳혔다.

=이슬아. 저기 저 사람, 현친왕 아냐?=

그녀의 뺨을 꼬집고 있던 이실리테도 뒤늦게 그 얼굴을 발견하곤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린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너희가 환인이랑 싸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있었어.」

「계속 지켜보시길래 대련을 중단시켜야 하나 했어요.」

가까이 다가온 환연과 백려강에게 시선을 돌린 안느는 저기서 트라프로넨에게 무언가를 강의하고 있는 환인을 보면서 물었다.

=도령은 알아?=

「응. 알려줬더니 알고 있었대.」

=그럼 상관없겠네.=

담벼락 너머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현친왕이 대문으로 향하니 저택에서 어린아이 하녀복과 하인복을 입은 꼬마 여우 남매가 뛰어나와 호다닥 대문으로 달려간다.

그나저나…….

현친왕의 수행원인 인랑족 여자 둘. 그중 한 명이 어째서 도령을 향해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풀풀 피우고 있는 걸까.

안느는 대문을 통해 현친왕과 수행원 둘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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