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3화 〉 487 알노르의 성제
* * *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을 때 상대가 원하는 것을 구해서 선물하는 것은 인맥과 친분 다지기의 기본이다.
‘제법이군.’
그랬기에 성술사의 아우라를 지닌 수행원의 손에서 그리모암의 유물이 나와도 환인은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했다는 것에 조그만 감상만을 느꼈다.
자신이 그리모암의 혁대를 비자룩스에서 얻었다는 건 나름 조사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헬루멘에서 완륜을 얻었다는 걸 알아내는 것은 다소 어려웠을 거다.
고위 호족의 행보는 기본적으로 기밀. 측근이나 휘하 직속은 친인척을 위주로 배치해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을 원천 차단한다.
더군다나 시하=사이지가 완륜을 구해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은 자칫 추문이 될 수도 있는 건수.
거기다 환인이 그리모암의 유물에 대해 외부인 앞에서 언급한 적은 극소수이며 그것도 정보의 비밀 유지에 자각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란 듯이 그리모암의 유물을 ‘우리 친하게 지내자’는 의도로 내놓다니.
친하게 지내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우리가 이렇게나 너에 대해 열심히 알아봤다’는 표시지만…….
환인은 이실리테에게서 고가의 흑단목 상자를 받아 뚜껑을 닫은 뒤 탁자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수행원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현친왕 전하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그와 별개로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
설마 이 선물을 거절할 줄은 몰랐던 수행원의 표정에 희미한 동요가 스치고 지나간다.
헬루멘의 영주, 시하=사이지가 주려 한 많고 많은 선물과 혜택을 대부분 거절했을 정도로 공짜를 경계하는 환인의 주관상 이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모암의 수파는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물건. 가치도 정해져 있지 않은 고가의 선물을 그냥 받는다는 것은 이런 선물은 독이 든 사과를 삼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대가 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나는 들어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걸 알지 못한 수행원, 야화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간청했다.
=성제 예하. 다시 한 번만 생각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라드세아에서 친선의 뜻으로 해온 선물을 되돌려보내는 행위는 그대와 결코 친분을 맺을 의도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되돌아온 선물은 파쇄하여 버리게 되며 보편적으로 극히 험악한 관계가 되오니…….=
환인은 단 한 번 미끼를 흔들었을 뿐인데도 덥석 무는 수행원을 보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것은 라드세아의 루크랑 호족들 사이에서 통하는 법칙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실수했다는 표정이 야화의 단정한 얼굴에 떠올랐지만, 늦었다.
“여긴 영도입니다. 저 또한 루크랑 족이 아닙니다. 이런 저에게 그러한 강요를 하는 것과, 현친왕 전하의 뜻을 알겠다 하였음에도 제 뜻을 무시하며 재차 권하는 모양새가 어떻게 비추어질지…… 당신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듯합니다.”
=…….=
“자리는 이만 끝내겠습니다. 당신의 주인에게 돌아가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전하십시오.”
밑밥을 깔아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무릎을 꿇은 채 꼼짝하지 않는 여자를 뒤로하고 온실 정원을 나왔다.
온실과 거리가 떨어지자 무표정과 무감정을 내세우고 있던 이실리테가 우려를 드러내며 묻는다.
=주인님. 만약 저 목걸이를 정말 부숴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리모암의 수파가 없어지면 유물을 전부 모으지 못하게 되잖아요…….=
“현친왕이 정말 똑똑하다면 목걸이를 부숴서 버리지 않을 거다. 그거야말로 나와 맹렬히 적대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될 테니까.”
=하지만…….=
환인은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실리테를 보곤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가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득 될 것 없는 도박이라고 생각하나 보군.”
=주인님은 공짜를 무엇보다 경계하시니까 거절하실 거라곤 생각했지만요……. 부술 가능성이 0이 아닌 것에…… 확률에? 기대는 건 막무가내…… 아니 도박… 으음.=
말하다 두서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이실리테는 자신의 말주변을 저주하면서 환인의 옆구리에 붙어 입술을 작게 오물거렸다.
“그러면 내기할까.”
=네?=
“나는 내일 안으로 현친왕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와 함께 모종의 이유를 덧붙여 목걸이를 준다는데 걸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목걸이를 주지 않으면 네가 이기는 거다.”
……주인님을 믿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수가 아닐까?
유리 언니에게 듣기로 친왕은 여황제의 동생을 부르는 호칭이라 했다. 그런 사람이면 자존심도 엄청 강할 테니 방금처럼 면박을 준 상태라면 오히려 화를 낼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훤히 보이는 이실리테의 표정에 환인이 웃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내기는 성립이라고 봐도 되겠지. 내가 이긴다면 부끄럽고 야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사랑 고백 노래를 부를 걸 요구하지. 네가 이긴다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나를 들어주겠다.”
야하고 부끄러운 옷을 입고 춤추면서 노래하는 건…… 창피하지만 주인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니 그전에 주인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정도니까 내가 이길 확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 이변이 일어나서 내가 이기면…….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는 손해될 게 없다는 생각에 이실리테는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여 내기 제안을 수락했다.
내가 이기면 주인님한테 데… 데…… 데이트해달라고 말씀드려봐야지.
=아가씨들. 밖에 호천명 친왕이 와있는 거 알고 있니? ……그런데 이슬이 아가씨는 왜 이렇게 시무룩한 거야?=
=도령하고 내기했다가 속공으로 졌대. 그보다 이 밤늦은 시간에 웬 방문이래? 친왕 정도 되면 예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자기랑 내기라니,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한 거람?
유르파는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이실리테를 바라보다가 백려강의 목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호천명 친왕님은 라드세아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알려진 분이니까요. 오히려 예법에 능숙해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선택지를 고른 게 아닐까요?」
=자기가 뭔가 신호를 보냈고, 친왕이 그 신호를 눈치채고 찾아왔다는 거네?=
「네. 환인 님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분이시니까요.」
확실히 예의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것보다 그쪽이 일리가 있다.
잠깐 환인과 친왕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해진 유르파였지만, 고개를 흔들어 궁금증을 털어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면 나중에 다 이야기 해줄 테니까.
유르파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로브를 뒤집어쓰며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환인의 주문을 전달한다.
=자기가 무기 챙겨서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얼른 준비들 해.=
=어? 어딜 가려고?=
=가는 게 아니라 친왕의 수행원 둘이 응접실에서 대기 중인데, 우리도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으래.=
=앗.=
뒤늦게 수행과 보좌가 해야 할 규범을 떠올린 안느가 풀죽은 이실리테를 챙겨서 장비를 장착하기 시작했을 때.
“…….”
=…….=
환인은 달빛과 은은한 조명등의 불빛이 어우러지는 밤의 온실 정원에서 호천명과 단둘이 마주 앉아있었다.
환인도, 호천명도 이실리테가 내려준 차를 마시며 찌륵찌륵 풀벌레가 우는 소릴 조용히 듣기만 한다.
그렇게 찻잔 속의 차를 다 비웠을 무렵. 조용히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환인 성제께서는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치미는 궁금증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저쪽에서는 그저 평범한 집안의 외동일 뿐입니다.”
=놀랍군요. 성제님과 같은 분을 몇몇 뵌 적이 있습니다만 그들과는 전혀 달라서, 혹시 다른 장소에서 오신 분이 아닐까 했습니다.=
“개체의 차이는 다양한 법이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도 특별하신 분 같아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호천명은 손으로 깍지를 끼고 실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의 입위 기사가 저지른 결례에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대한 사죄의 표시입니다.=
호천명의 풍성한 소매 안에서 나온 것은 그리모암의 수파가 들어있는 흑목단 상자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그 상자를 잠시 바라본 환인은 전혀 변하지 않은 담담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중한 일인가 봅니다.”
친왕이 직접 찾아왔을뿐더러 이토록 귀한 물건을 자꾸만 주려 하니 그 속이 보인다는 의미에 호천명은 약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었습니다. 니오네브레스에 도착하시고 두 해 만에 현재의 위치를 이루신 분이셨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빈 찻잔을 하얀 털로 뒤덮인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리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1년. 하다못해 반년만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겠지요.”
자신과 마주 앉아있음에도 자료로 받아본 성향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태도.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약간 살구색에 가까운 피부. 흠잡을 데 없는 루크랑어 구사 실력.
말투에 시끄러운 성조의 흔적은 없다. 받침 발음이 어색하지도 않고 음의 발음도 평이하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출신이겠지. 그 나라도 황족은 없다 들었는데…….’
호천명은 이때까지 보아왔던 차원 방랑자들의 비굴하고 속없는 모습과 그들의 습성을 떠올리다가 모두 정리했다.
참고할만한 것은 없다. 저쪽 세계에서 어떠하였든 눈앞의 남자는 현재 자신과 맞먹는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였고 언행과 품행 또한 거기에 걸맞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행동할 뿐.
=이후로도 인연이 아니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애초 목적은…….=
소매에 다시 손을 넣는 호천명. 그 손에서 흑목단 상자가 하나 더 나와 탁자 위에 올려진다.
처음 꺼낸 목걸이 유물이 담긴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상자를 본 환인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이 두 가지 선물로 성제님의 호의와 친분을 사 라드세아로 영입할 의도였습니다.=
설마 하는 생각이 환인의 머릿속에 찰나의 순간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러하였는데 간발의 차이로 기회가 사라졌으니 아쉽고 아쉬울 따름이지요.=
“황제 폐하께서 저의 어디를 그렇게 고평가하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성제님의 업적을 보고도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라면 수장의 자격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녀님은 운이 좋으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가만히 앉아있었는데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예지와 예언이라는 편법과 영도라는 배경을 세웠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접촉해온 대성녀다. 아랫사람을 시킨 것도 아니고 당사자가 직접 연락을 해왔으니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봐야겠지.
환인은 달이 머리 위를 지나 산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호천명에게 본론을 꺼내 물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역시 알소프 때문입니까.”
역시 짐작하고 있었나. 아니라고 하며 화술토론을 시도해볼까, 일순간 생각했던 호천명은 생각만으로 두고 품에서 고전적인 두루마리 같은 것을 꺼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눈앞의 남자는 간 보고 건드리며 화술을 시도하려 하면 그대로 판을 깨버린 뒤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릴 성격이다.
이때까지 배경이 약해 원래 성미를 드러내지 않았던 듯한데, 대성녀와 영도라는 지붕에 유일 직업이라는 배경까지 달았으니 행동 또한 거침이 없어지겠지.
=알소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해왕 아드네빌라, 그녀는 라수비탄의 사절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일과 관계없는 자들의 의견에 따를 생각은 없다. 이 건으로 나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한 명뿐일지니. 관계없는 자들은 혓바닥을 놀려 귀를 더럽히지 말고 떠나라.》
=현재 알류겔 동부의 호르네오 강하 마을을 차지한 벨티칼 사비족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라드세아는 최대한 빠르게 이번 아드네빌라 사태를 마무리 짓고 그의 대응에 집중하고자 하지만, 해왕의 반응이 곤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에 환인 성제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하오니.=
자리에서 일어난 호천명은 두루마리를 촤라락 펼쳐 환인이 읽을 수 있도록 잡는다.
=부디 바쁘신 걸음을 하시어 조기 종결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시길 학사전의 수장 호천명이 간청합니다.=
“…….=
환인은 용이 되어 승천할 것처럼 웅혼하면서도 여성의 수려하고 섬세함이 느껴지는 필적의 글을 읽다가 눈을 감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용이 설마 했는데 진짜 날 걸고넘어졌군.
두루마리에는 대략적인 현황과 요청, 그리고 의뢰를 받아들여 줄 경우 지불할 보상이 적혀있었다.
이름난 알류겔 호수 인접 도시 군주들이 알소프가 있던 땅을 탐하느라 헤뷜트의 확장에 관심을 주지 않고 있다.
빠르게 아드네빌라를 물리고 그 자리의 주인을 정하고자 하니 도움을 요청한다.
호천명을 도와준다면 황제의 이름으로 사례를 하겠다.
=사례란 다름이 아닌 그리모암의 수파와 그리모암의 양화, 그리고 라드세아에서 호족의 간섭과 개입을 방지해줄 황도의 명예 고위 호족 작위입니다.=
원래는 수파로 관계성을 다지고 도움을 요청한 뒤 사건을 해결하면 남은 유물과 부츠와 작위로 보상을 추가하려 했다는 것.
=덤으로 그리모암의 모자 위치도 알려드릴 겁니다.=
그리모암의 유물 두 가지를 모으고 남은 하나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제법 재물을 썼다며 빙그레 웃는 호천명이었다.
호천명이 수행원 두 명과 돌아간 뒤.
“…….”
환인은 온실에 남아 자신의 앞에 놓여진 그리모암의 목걸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죄의 뜻이자 친교의 의미이지만 선지급 의뢰비이기도 한 유물.
눈은 유물을 향하고 있지만, 머리는 이후의 경우를 복잡하게 셈하는 중이다.
상황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방금 대화로 이해했다. 호천명을 돕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는 일이다. 그를 따라가서 아드네빌라와 호천명이 하는 대화에 옆에 서 있을 뿐이니까.
다시 말해 아드네빌라가 선언한 것은, 자신과 알소프 사이의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들이 끼어들어 왈가왈부하지 말라 이거다.
그렇다고 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는 이래저래 트러블이 많이 생길 것 같으니, 대충 머리 좋고 상황 대처 잘하는 인간(자신)을 옆에 끼고 보상 적당히 받아 챙겨서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뜻.
아드네빌라가 보여주었던 환상, 몸부림치느라 잘 꾸며놓았던 바닷속 둥지가 엉망진창이 된 걸 떠올리던 환인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걸 도우면 본적도, 마주친 적도 없는 호족들이 억하심정을 품을 거라는 점인데.’
환인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다 치우고 자신이 편한 것 위주로 몇 가지 조건을 떠올리며 그리모암의 수파를 챙겼다.
이쪽을 이용하려 한다면 자신도 이용할 뿐이다.
때마침 달칵 온실과 저택을 이어주는 문이 열리며 여자친구들이 들어온다.
=자기? 어두운 데서 뭐 하고 있어?=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할 것도 있고 부탁도 있으니 방으로 돌아가지요.=
=응? 응.=
여자친구들의 방으로 이동한 환인은 호천명과 나눈 대화,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질 일과 해야 할 일 등을 설명해주자 각자 놀라거나 진지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거 원한 관계가 꽤 생길 것 같은 의뢰인데 괜찮겠니?=
=그래도 해야지 별수 있어? 그리모암의 유물을 두 개나 주고 마지막 유물 위치도 알려준다잖아.=
=황제 폐하의 의뢰인데 그걸 거절해도 문제가 커질 거 같고요.=
「명예긴 해도 호족 작위를 주신다고 하셨으니 대다수의 호족은 신경 안 써도 될 거예요.」
여자친구들의 의견에 환인은 담담히 자신의 뜻을 밝혔다.
“호족 작위는 거절할 생각이다.”
「네? 어째서…….」
=으잉? 왜?=
“얼마 후에 발표하겠지만, 나는 일단 차기 대성자 후보다. 그런 인물이 타국의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자국 내를 활보하면 그것만으로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영도에서도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 이들이 생길 테고. 그러니 지위는 차기 대성자 후보 정도면 충분하다.”
=아… 확실히 그러네. 그쪽은 생각 못 했어.=
「저도요…….」
“아무튼, 가까운 시일 내로 출발하게 될 것 같으니 그때까지 여행 준비를 해놓도록. 그리고…….=
환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틀간 선물로 받은 물건들을 전부 꺼내 여자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기술서와 전문서, 미용과 관련된 마도구와 호신용 마도구들, 영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값비싼 약초와 채집물들.
약초와 채집물은 유르파에게 주고 전문서는 백려강에게, 무술 교리서는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미용 및 호신용 마도구와 마도기 일곱 점은 적당히 필요한 사람이 쓰고 필요 없는 것은 팔기로 한다.
그리고 4개의 5급 위상석이 쓰인 노화 방지 팔찌는…….
=노화 방지 마도구는 당연히 자기가 써야지!=
“그러나 유르파는.”
유르파는 환인이 꺼내려는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정현족이 되면서 수명도 늘었고 훨씬 젊어졌으니까. 게다가 그런 게 없어도 자기랑 사랑을 나누면 노화가 무지막지 늦춰지니까 나는 물론이고 아가씨들도 필요 없어. 자기 거야. 반론하기 없기.=
=맞아. 애초에 도령 쓰라고 준거잖아. 그걸 우리한테 준다니, 언어도단이야.=
“하지만 내게도 몸에 좋은 약이 있지 않나.”
말하면서 안느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아랫배를 쓰다듬어주니 잠시 눈을 끔뻑이던 안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거의 사나흘에 한 번씩 안느의 정수를 섭취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었다.
그 효과는 무척이나 강렬해서, 어지간히 술을 마셔도 숙취에 걸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이 개운했으며 정력 또한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올랐다.
얼굴 피부가 땡기면서 주름이 지는 듯한 느낌도 사라졌고 피지 분비도 급속도로 줄어들어 아침에 일어나도 아기 피부처럼 촉촉하고 매끈해 피부 나이 또한 굉장히 젊어진 상태.
그러나 그의 여자들은 막무가내였다.
=도령의 수명은 우리보다 훨씬 짧잖아. 그러니까 써서 나쁠 건 없어.=
“…알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쓰도록 하지. 다만 그전에 확인부터 해야겠군.”
환인은 착용 중이던 반지 마도구에 그리모암의 완륜과 유르파가 만들어준 방벽 마도기를 풀고 노화 방지 마도구까지 유르파에게 건네주며 위상력 반발 작용을 시험해달라고 부탁했다.
=알았어. 급한 거니까 내일 아침까지 분석해놓을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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