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화 〉 486 알노르의 성제
* * *
* * * *
《…….》
휙 찰싹. 휘익— 찰싹.
대성녀는 기분이 언짢아진 고양이처럼 채찍 같은 기린 꼬리로 장판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면서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샤스라를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섞인 얼굴로 바라본다.
자신의 섣부른 예측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자신의 귀와 꼬리가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흐~음. 인체 구조는…… 혈도도……. 호오오…….=
각종 분석 마도구로 샤스라를 살피는 아야빗을 향해 대성녀가 긴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성제님의 그 특성은 아무래도 ‘인간화’에 집중되어있는 듯하군. 그다음으로 신체의 균형과 조화를 목적으로 하고 말이야.》
=효과를 보자면 저도 동감이에요. 말도 안 된다 싶은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단점이 존재하긴 했네요. 이게 단점인가 싶지만요.=
《무슨 뜻인가?》
=샤스라 영성에게만 단점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군.》
=대성녀님의 기린 귀랑 꼬리를 드러나게 만들고 샤스라 영성을 이렇게 만든 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대성녀님의 인간화는 비술이 아니라 선천 능력으로 변신하신 거잖아요? 샤스라 영성도 신체 일부를 변이시킨 게 아니라 변화시킨 거예요.=
변이??란 단순히 말해 괴이한 변고를 뜻한다. 변화는 말 그대로 성질이나 모양, 상태 같은 게 바뀌는 것을 뜻하고.
그러니까 샤스라는 자신의 모습을 잃게 만든 저주나 다름없지만, 무언가 초자연적인 신비로 인해 생명체로서 더 뛰어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
말없이 더더욱 침울해지는 샤스라의 표정에 대성녀는 위상력 검출 장치와 분석조사 외눈 안경을 접는 아야빗에게 물었다.
《샤스라 영성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겠나?》
아야빗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신체가 정말로 완벽하게 변화를 마친데다 이 상태로 영기와 조화까지 벌어져서 능력의 상승이 이루어졌어요. 어중간하게 시도했다간 돌연변이가 발생해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 될 확률이 90% 이상이에요.=
《확실히…… 이 상태라면 다음 대성녀는 샤스라가 맡게 될 테지.》
환인에게 안긴 여자 영성은 샤페, 아야빗, 샤스라 세 명.
그중 샤페는 회춘과 신체 조율이 이뤄져 미모의 상승과 각종 자잘한 선천 질병이 치유되었다.
아야빗은 샤페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회춘과 함께 위상력 감응이 한층 날카로워져 마도구 제조, 제작과 위상력 분석에 한층 더 예리해진 상태.
남자 영성의 자녀, 손녀들도 대충 비슷한 효과를 얻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아이는 회춘과 미모 상승을, 젊은 아이는 미모 상승과 능력 일부 상승 등.
그런데 샤스라만 유독 영혼술의 직접적인 상승과 외모의 극단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놀랍고 또 집중해야할 점은, 샤스라 영성은 사비족이 아니라 그보다 상위 인종이 된 느낌이라는 거예요.=
=……예?=
《으음. 역시…….》
=제가 상급 영혼사이던 시절 성불행을 다니던 중 벨티칼 권역에서 반인반용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는 용과 사비족 사이에서 태어난 것처럼 양쪽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죠. 지금 샤스라 영성과 흡사한 모습이었어요.=
차이점이라면 그는 용의 두상??이었고 샤스라는 뺨이나 관자놀이, 목 일부에 비늘이 나 있긴 하지만 겉모습은 타 종족 여자에 가깝다.
아야빗의 설명에 샤스라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대성녀실의 바닥에 절하는 것처럼 엎드려버렸다.
=아아……. 이 몰골로 선조님을 어찌 뵙는단 말인가…….=
=설마 교접으로 종의 변화까지 이루어지다니. 마음 같아서는 성제님한테 매달려서 1년은 영도에서 머무르며 육합등약을 연구하게 해달라고 조르고 싶은 기분이네요. =
그런 그녀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탐구자로서의 기질만 발휘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야빗을 대성녀가 나무란다.
《아야빗 영성. 연구도 좋지만 당사자의 앞이지 않나…. 좀 자중하게.》
=……으흠. 미안해요, 샤스라 영성.=
=아닙니다…….=
대성녀는 흘러내린 금속 느낌의 은색 머릿결과 그녀의 엉덩이 근처에서 자라난 기다란 은색 꼬리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그가 영도에 온 뒤로 한숨 쉴 일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다.
그때 샤스라가 아야빗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묻는다.
=야아빗 영성. 그럼 저는 이제 쭉 이런 몰골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겉만 봐서는 20대 초반의 소수인종 처녀 느낌이 물씬 난다. 하지만 약해 보이거나 얕잡아 보이지 않는 것은 영성으로서의 톤 변화 아우라에 약간의 빛에도 반짝이는 일부의 비늘 때문일 것이다.
=상위종으로 진화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사비족의 상위종은 용린족입니다. 이런…… 비리비리한 여자 모습이 아니고 말입니다.=
시무룩한 대답에 아야빗은 팔짱을 껴 젊을 적 탄력을 되찾은 젖가슴을 받쳐 올리며 말했다.
=샤스라 영성. 당신의 종을 비하하거나 할 의도는 없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요. 사비족의 진짜 상위종은 당신의 그 모습일 가능성이 커요.=
=……뭐라고요?=
종 전체를 모욕하는 말에 샤스라가 얼굴에 노기를 드러낸다. 하지만 아야빗은 눈치도 안 보고 검지와 중지만 세워 그녀에게 들이댔다.
=이 가설의 신빙성을 받쳐주는 것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대성녀님의 모습 변화, 다른 하나는 유르파 영혼 기사의 사례.=
흡정족의 상위종은 정현족이다. 그리고 그 정현족이 되기 위해서는 수백 년 치의 정기를 단련하고 또 단련해 말 그대로 순수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렇게 단련한 정기를 가지고 순수한 자연지기가 가득한 곳에서 그 정기로 뼈와 살을 (물리적으로)깎고 피를 토해가면서 몸 전체를 바꾸어야 가능한 존재 진화.
정현족 출신의 영혼사가 영도에 한 번 있었기에 특급 기밀로 분류되어 영도의 비고에 보존되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유르파 영혼 기사는 성제님과 꾸준한 교접만으로 정현족이 되었어요. 그게 뭘 뜻한다고 생각해요?=
=착오일 가능성은…….=
=그녀와 함께 문인을 연구하면서 수십 차례 확인한 사실이에요.=
그리 말한 아야빗은 영혼불길 로브를 걷어 올리고 바지 단추도 풀어 아랫배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어제 오후에 새긴 문인이 야릇한 형상으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
=성제님의 육합등약 특성…… 제가 붙인 이름이지만 아무튼, 육합등약은 상대를 더욱 올바른 모습으로 교정시켜주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뜻하는 사실은 하나뿐이죠.=
《샤스라 영성의 현재 모습이 사비족이 진화한 모습이라는 거군. 용린은 그 과정이고.》
=네. 샤스라 영성, 그 몸이 된 이후로 어디 아프다거나 결린다거나 그런 거 있어요? 없죠? 완전한 모습에는 그 어떤 부작용과 단점이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 완전한 신체니까.=
=…….=
사비족의 천적은 추위다. 그건 상위종인 용린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위상력이나 술법, 주술, 마도구 등으로 온기를 확보하거나 냉기에 저항하며 활동할 수야 있지만, 겨울이 오거나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사비족의 움직임은 굼떠지고 관절이 시리거나 굳어 활동이 어렵다.
하지만 샤스라는 한겨울의 혹한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 필령궁으로 오면서 그저 조금 춥다고만 생각했지, 몸이 굳거나 거동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손가락…… 하얀 살결 곳곳에 붙어있는 은비늘이 반짝이는 가느다란 손을 보면서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매끄럽게 잘 움직여…….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맨살로 나왔는데도 비늘이 아프지도 않고.’
겨울이 찾아오면 추위도 문제지만 건조함도 큰 문제다.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바짝 마른 비늘이 갈라지거나 부서지고 비늘끼리 부딪치며 피부가 찢어지는 일도 예사다. 그런데 지금은 최고급 보습제를 바른 것처럼 매끄럽기 그지없다.
마치 한여름 시원한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쾌적한 상태.
하지만 몸에 비늘이 거의 다 없어졌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하다. 거기다 전혀 사비족 같아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고.
샤스라는 우울한 얼굴로 한탄했다.
=사람으로 치면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감상입니다. 제 자신이 사비족이 아니게 된 거 같습니다.=
《그건 적응하면 될 일이라네. 소녀도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때 친우와 옷을 두고 종종 다투었었으니.》
=어쨌든 기운 내요. 샤스라 영성은 운이 좋은 거잖아요? 이 근방에 활동하는 사비족은 샤스라 영성의 일족 뿐이기도 하고요.=
=그렇겠지요…….=
하급 부족민이 이런 몰골이 되었어봐라. 추방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종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피의 사육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폭폭 내쉬는 샤스라와, 그런 그녀에게서 머리카락이라던가 비늘 조각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하는 아야빗을 잠시 바라보던 대성녀는 눈을 감고 다시 꼬리로 바닥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지금쯤 그는 현친왕과 만나고 있으시겠군.’
현재 각국과 여러 교단에서 유일 직업자의 탄생에 관한 문의가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중이다.
성제의 인상착의와 정보의 요구를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돌려 말하는 곳도 있고, 그를 이쪽으로 파견해줄 수 없느냐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곳도 있다.
유일하게 조용한 곳은 라드세아의 주도.
‘현친왕을 보내놓았으니 기다릴 뿐이라는 거겠지.’
지금은 차기 대성자 후보로써 모두 거절하고 물리치는 중이지만, 갈수록 압박은 심해질 것이다.
압박이 심해져보았자 그들이 내세울 수단은 없다. 기부금을 끊는다는 심술을 부릴 수 있겠지만 거기에 휘둘린 것도 300년 전의 일. 이쪽도 아드지를 통해 자생의 길을 이미 모색한 상태다.
게다가 기부금을 끊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되레 타국과 교단의 손가락질과 조롱, 비웃음만 살 것이다. 이득 될 게 없으니 그저 냉가슴 앓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을 터.
‘결국에는 성제님에게 직접 손을 뻗치겠지.’
대성녀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환인 성제라면 영도의 이름을 적당히 손에 쥐고 알아서 휘두르며 자기 갈 길을 갈 테니까.
‘문제는 이쪽이야.’
=싫습니다. 당신이 살점과 조직을 원할 때는 이상한 연구 실험을 할 때뿐이지 않습니까!=
=이상한데 안 쓸 테니까요. 영도의 미래와 기록을 위해 조금만……!=
=싫다니까요……!=
대성녀는 아야빗과 아웅다웅하는 샤스라를 응시하다가 결심을 굳혔다.
《샤스라 영성.》
=네, 대성녀님.=
《현재 심경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겠으나 그대 외에는 적임자가 없군. 차기 대성녀 후보 자리에 올라주게. 발표는 며칠 뒤에 하겠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하는 것으로.》
대성녀의 이야기에 샤스라가 즉시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다.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영도의 이름에 조금의 흠도 생기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여 자리에 걸맞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성제님께 향할 이목까지 그대에게 쏟아지게 될 것이야. 마음 단단히 먹길 바라네.》
=예!=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외교통상기관을 맡고 있던 샤스라는 뒷사정까지 모두 이해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대답했다.
겉모습이 무척이나 괴이하게 변한 것은 괴롭지만, 자신이 종족 상위종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이로 인해 신체 능력의 상승이 이루어졌고 영혼술 또한 대폭 상승해 혼옥 보관고의 용량이 60%가량 확대된 상태.
지금 영도에서 영혼술의 수준을 놓고 보면 대성녀님에 이어 자신이 두 번째인 게 확실한 상황이며 이런 겉모습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어당길 것이다.
성제님께 향할 이목을 돌리기에 제격인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샤스라 영성. 대성녀 후보가 된 것 축하해요. 그러니까 살점 조금만……!=
=끈질깁니다. 좀 떨어지세요……!=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성녀에게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나려던 샤스라는 팔을 잡고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아야빗 영성에게 질색하며 도망쳤다.
* * * *
도마뱀 인간에서 용 인간이 되어 넋이 나간 샤스라를 잘 달랜 다음 돌려보낸 환인은 바로 욕실로 이동했다.
가능성이 작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호천명의 수행원이 오후에 다시 찾아왔던 것.
샤스라의 몸에 첫 번째 사정을 한 직후에 찾아왔던 수행원은 현재 1시간 넘게 대기 중이다.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니 아직 별채 쪽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중이겠지.
=왜 찾아온 걸까요? 이번에는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찾아온 것 같던데요…….=
욕실에서 속옷만 입은 이실리테의 시중을 받으며 정사의 흔적을 깨끗하게 씻은 환인은 적당히 격식을 차린 옷을 챙겨입으며 대답했다.
“슬슬 만나줄 단계라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
=……?=
뭔가 신호가 오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런 기미는 안 보였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이실리테가 내놓은 결론은 ‘머리 좋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뭔가가 있었나 보다.’였다.
“이실리테, 너도 옷을 갈아입고 와라. 같이 들어가지.”
=넷.=
이실리테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간 사이 환인은 거실의 창가에 서서 겨울의 황색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호천명이 이쪽에 우호적이라는 건 확정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직 명확하지 않아.’
정말로 단순하게 영성을 뛰어넘는 실력자라 생각해서 이쪽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접근한 건가?
이쪽이 다음 대의 대성자가 될 거라 생각했고, 영도 출신이 아닌 타지 출신의 인물이어서 친 라드세아 성향으로 만들기 쉬울 거로 생각해서?
그럴 리 없다.
호천명의 방문이 이빨 사이에 낀 김처럼 신경 쓰여 튜티를 통해 외교통상기관에 정보를 요청했다.
알류겔 호수와 인접한 사비족의 국가 벨티칼의 동향과 구 알소프를 두고 벌어지는 알류겔 호수 인접 도시, 마을의 분위기 등.
그 결과…….
‘벨티칼은 알소프를 먹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 기회에 알류겔 호수 동부 일부에 불과한 영향력을 주변으로 좀 더 넓힐 의도가 느껴졌지만 그뿐이었지.’
프라버는 지금 해적으로 변해버린 알소프의 해군 잔당을 소탕하고 자신이 전해준 양식 사업에 집중하느라 알소프 쪽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협만을 구성하는 아크렛 반도를 완전히 삼켜 프라버만을 온전히 자신만의 영역에 둔 이후 안정화와 수산물 양식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수정구 통신으로 연락을 받은 게 며칠 전이었던 거다.
현명한 판단이다. 알소프까지 먹으려다간 지배권역의 경계가 너무 길어져 방위비 지출이 바닥이 빠진 항아리에 물을 들이붓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러면 구 알소프는 어떻게 되었느냐.
오히려 호수 북동부의 작은 소도시와 좀 큰 마을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주도에서 물밑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또 그런 자들을 막기 위해 주도의 별장에서 머문 덕분에 살아남은 알소프 측 생존자가 사방팔방으로 로비를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알소프에 있던 지하 미궁이 가라앉으며 생긴 곳에 아드네빌라가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환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설마, 정말로 아드네빌라가 나까지 끌어들인 건가.’
아드네빌라가 그 자리에 머물고 있고, 거의 한 달이 지난 마당에 토벌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건 아드네빌라의 행위를 라드세아는 정당방위로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한 상황에 그 자리를 차지하려 다투는 주변 도시와 마을의 반응도 이상하고 호천명이 찾아온 타이밍 또한 수상쩍기 그지없다.
그러한 요소를 모두 설득하는 것은 아드네빌라가 자신을 그 사정에 끌어들였다는 가설뿐.
예를 들어.
‘성자 환인이라는 인간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어봤더니 제법이더군. 그 인간의 의중에 따라 이 땅을 내어줄지 말지 정하겠다.’
……라고 한다면 라드세아 주도에서 친왕이 직접 찾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해왕을 호족이 건드려 분노하게 했고 그 결과 중급 도시 하나가 삽시간에 지워졌다면 그 사실을 쉬쉬하기 위해서라도…….
=주인님.=
생각하던 환인은 이실리테의 부름에 생각을 끊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얕보이지 않도록 얼마 전 아드지에서 맞춘 상급 일상복, 귀족이나 호족 가문의 식객 혹은 기사들이 즐겨 입는 반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
그녀의 반짝이는 호박색 머리카락과 흡사 톱 아이돌의 군무용 제복 같은 흑색과 황색조의 바지 정장이 그녀의 코트와 흡사한 아우라하고 어우러져 여장군 같은 느낌이다.
=……주인님?=
“잘 어울리는군.”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갈까.”
갑작스러운 칭찬에 가슴이 두근거린 이실리테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매를 두 손으로 누르며 환인의 뒤를 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제 예하.=
별채 쪽 응접실이란 꽃과 작은 수목이 피어있는 실내 정원이었다.
그곳에서 인형처럼 앉아있던 푸른 늑대 귀에 푸른색 단발, 청색 제복을 입은 여자가 자신의 입장과 동시에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환인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닌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실내 정원을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환인은 현대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수십, 수백 번 들은 형식적인 대답을 여자의 이야기에서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앉으라 손짓한 환인은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수고스럽게 몇 번이나 방문하셨다 들었습니다. 전언을 남기셨다면 이쪽에서 연락을 드렸을 텐데요.”
자기소개조차 없이 시작된 대화였지만, 상대는 오히려 당연하단 듯이 반응했다.
=그런 교만한 행동을 성제 예하께 어찌 드리겠습니까. 현친왕 전하의 지시에 따라 성제 예하께 봉납할 물품이 있어 부득이 예하께서 발걸음하시게 하였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리는 수행원.
환인이 고개를 들라고 하니 그 상태로 고개만 들어 이야기를 꺼낸다.
=현친왕 전하의 입위 기사, 야화가 성제 예하께 바칠 봉납품을 꺼내려 합니다. 허락하여주시겠습니까.=
“…허락합니다.”
환인은 옆에 시립한 이실리테에게 눈짓으로 야화라는 기사가 품에서 꺼내는 고급스러운 목제 상자를 받아 확인하라 지시했고, 이실리테는 그녀가 두 손으로 받쳐 든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상자를 확인해보았다.
딱히 함정의 느낌은 없다.
천상의 장막에 깃든 기능인 위상력 감응에 숙달되어 이제 갑옷 없이도 쓸 수 있게 된 위상력 감응으로 상자 전체를 훑었지만, 그냥 평범한 흑단 나무 상자다.
별다른 함정이 없음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환인에게 상자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이 시대의 평범한 목걸이와 다르게 무언가 약간 이방의 문물이 섞인 듯한 느낌의 목걸이.
환인은 부지불식간에 목걸이의 정체를 간파했다.
=현친왕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아드지와 궁성 앞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죄이자 보다 친분을 나누기를 희망하며 성제 예하께 바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은 강체의 수파, 고대 영웅 그리모암이 사용한 유물입니다.=
그리모암의 수파??. 신체 내구도와 체력을 올려주고 혁대의 사용 후유증인 체력과 신체 내구 저하를 상쇄해주지만, 대신 순발력을 낮추는 유물,
영도에 도착한 이후 알게모르게 단서를 찾던 그리모암의 다섯 유물 중 하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