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화 〉 481 현친왕과 성제
* * *
다음 날 아침, 거실로 나간 환인이 목격한 것은 안느와 유르파, 백려강이 거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머리를 맞댄 채 무언가를 하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뒤로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 공식을 노트에 베껴놓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안느는 소인수분해, 백려강은 연립방정식, 유르파는 인수분해를 진행 중이다.
아무래도 물리학에 수학은 기본 중의 기초라는 걸 깨닫고 중학교 수학부터 익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가 틀렸습니다.”
=……앗!=
환인의 지적에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수정해서 정답으로 만드는 유르파.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들의 노력을 구경하고 있으니 이실리테가 따뜻한 차를 가져와 자신에게 먼저 건네주고 그녀들에게도 한 잔씩 나누어준다.
=이거 마시면서 해요.=
=응…… 고마워, 이슬이 아가씨…….=
차를 마시며 그녀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습득력에 역시나 차이가 보인다.
같이 공부를 시작한듯한데 유르파가 습득력이 가장 뛰어나고 차례대로 백려강과 안느다.
안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끙끙 앓으며 바로 옆에 앉은 유르파에게 조언을 들으면서 열심히 공식을 풀고 있다.
지루하다던가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닌듯하니 꾸준히 공부 하겠지만…….
=휴우…….=
옆에 앉아 한숨을 쉬는 이실리테를 돌아본 환인이 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자신감과 자존감이 조금 낮아진 듯, 이실리테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르파가 전자기학의 설명을 보면서 필요한 기초 학문과 전자기학을 익혀야 하는 핵심 이유를 깨닫고 그 중요성을 이야기했다는 것.
‘이 전자기학은 물리학의 하위 학문이야. 그리고 물리학은 자연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학문으로 보여. 이 물리학을 배우면 우리가 쓰는 능력이 현상에 미치는 과정과 결과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테니 결과적으로 능력의 발현이 안정화되고 정교해져서 위력이 크게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할 거야. 빛뿐만이 아니라 모든 속성에도 말이야.’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문과지만 고등 교육과정을 통해 이공계 지식도 어느 정도 익혀서 알고 있다. 그녀가 말한 것은 정론이라 할 수 있는 것.
‘문제는…… 이 수학이야. 사칙연산에서 시작해 미분방정식까지 우리가 지금 당장 머릿속에 쑤셔 박아야 하는 계산법이…… 후우우.’
평생 술식, 술법 공부에 매진해온 유르파가 암담함에 한숨을 흘릴 정도였다는 이야기에를 들은 환인은 말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전자기학을 평가하는 문장에는 이런 게 있다.
‘사람의 손으로 풀 수 있는 문제 중 가장 어려운 분야.’
고등학교 물리까지는 의무교육과 다름없어 어떻게든 교과서를 보며 공부하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일반 물리학에서 전자기학으로 넘어가는 구간은 난이도가 비명이 절로 나올만큼 급상승한다.
이곳 세계식으로 비유하자면 이제 미궁 1계층의 1층에 익숙해진 1~2급 모험가나 용병을 다짜고짜 3급 이형종이 출몰하는 2계층의 말단으로 내려보낸 격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을 공부한다고 끙끙거리는 그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의욕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갈 테니 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학뿐만 아니라 개념과 법칙을 외워야 하는 것도 산더미이니.’
환인도 지구에 다녀온 이후 나름 이 세계의 물리법칙에 대해 이해하려고 전문서적에 손을 뻗어 공부했었다.
그러나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영혼술은 이런 물리법칙과 전혀 상관없는 데다, 어중간한 지식이 오히려 영혼술의 집중에 방해되었기에 지금은 공부에서 손을 뗀 상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도려엉…….=
머리에서 푸식푸식 김이 나는 듯한 표정의 안느가 환인을 돌아보며 울먹인다.
겉만 보면 매 학기 성적우수 장학생을 할 것 같은 그녀지만, 속은 자기 키보다 더 큰 자이언트 워해머를 괴력으로 휘두르는 투사.
중학교 1~2학년 수준의 수학이 정상급으로 퍼져있는 이 세계의 지식수준을 보았을 때 그녀에게 이 공부는 고문이나 다름없을 거다.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군.”
=으으~. 난 그냥 학문 공부인 줄 알았는데 계산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야….=
아무래도 이제 한계인 듯 탁자에 엎드리며 한탄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앉아서 계속 공부만 하는 것도 지치겠지. 아침 훈련을 시작할까. 몸을 좀 움직이고 나면 의욕이 생길 거다.”
=응!=
좋아하면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안느.
유르파도 내심 힘들었기에 백려강과 함께 탁자 위의 노트와 필기구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샤워와 식사까지 끝낸 공부 조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고작 하루 만에 자포자기에 가까운 각오를 내비치는 안느가 가련하고 안쓰럽다.
=주인님. 준비 끝났어요.=
“그럼 우리도 가지.”
어제 오후 늦게 튜티를 통해 접견 시간을 맞춘 환인은 단정한 가죽 바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실리테와 함께 필령궁으로 향했다.
고요한 거리를 걷고 있으니 이실리테가 옆에서 묻는다.
=이제 주인님의 직업명이 결정된 걸까요?=
“그것도 있을 테고. 영도가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갈피를 잡은 거겠지.”
=갈피…인가요?=
대성녀도 그렇고 영성들도 다들 주인님을 홀대하지 않고 존중하신다. 그런데 어떤 자세를 정해야 할지에 보름 가까이 시간을 쓰시다니, 혹시 겉과 속이 다른 분들이신 걸까.
“대성녀님의 이야기대로라면 니오네브레스 전체를 통틀어도 유일 직업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영혼사 출신의 유일 직업이 등장하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혼란이 일어날 테지.”
대성녀와 영성들이 연일 회의를 이야기는 이유를 적당히 간추리고 핵심만 축약해 들려주는 환인.
“그 과정에서 영도가 피해를 덜 입고 내가 예언 속의 마왕이 되지 않을 길을 찾기 위한 회의였을 거다. 그게 어제 결론이 난 거고.”
=살짝… 이해는 가지만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해요.=
한 명의 강자가 전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이실리테는 용병 시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겪었다.
무직자에서부터 1~2급 직업자들이 대다수인 전장에서 적측에 5급이나 6급의 직업자가 출현하면 그 적과 비슷한 실력자가 아군 측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한 명을 막기 위해 3~4급 직업자 열댓 명이 달려들어야 했으니까.
막아낸다면 다행이지만 뚫리거나 밀리면 말 그대로 대학살이 벌어진다.
이실리테가 용병 활동을 했던 곳은 환인이 모습을 드러냈던 율캄보다 더욱 북쪽, 이블팩션 접경지와 붙어있는 장소.
때문에 거칠고 과격한 이들이 널려있는 곳에서도 험한 전장을 뒹굴며 몇 번이나 경험해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님은 영혼사이시고 성자님이시잖아요. 그런 분을 정치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환인은 부드러운 얼굴로 이실리테의 호박색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풍성한 포니테일을 툭툭 건드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진 자들의 욕심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너도 여행하며 배웠겠지.”
=네…….=
“가진 자 중에서도 독보적인 자들에게 그런 풍습과 관습적인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막연한 상상을 품고 영혼사들을 선망하는 일반 촌민, 주민, 시민들에게야 영도와 영혼사는 범접 불가능한 고귀 그 자체겠지. 하지만 실상을 비교적 상세히 아는 자들에게는…….”
그 또한 권력의 수단일 뿐.
지구에서도 과거 종교를 빌미로 권력을 쥐기 위해 정세를 뒤흔든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곳의 인간이라고 다를까.
환인은 자신이 해줄 뒷 말을 기다리는 이실리테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더러운 면을 굳이 들여다볼 이유는 없지. 그냥 그런 나쁜 놈들도 있나 보다 하고 넘기는게 좋다.”
=네.=
이실리테는 성자님의 영혼 기사라는 이유로 패용을 허락받은 검을 만지작거리며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찾아온 현친왕이라는 사람이 그런 더러운 권력의 앞잡이일 수 있다는 이야기지?
만약 그런 자들이 주인님을 건드리고, 주인님이 그자들을 공격하라 지시를 내리시면…….
‘…….’
설령 대상이 루크랑 종족 국가 라드세아의 황족이라 해도 가차 없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이실리테였다.
잠시 후 도착한 필령궁 앞 작은 광장에는 각 영성의 영혼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용히 대기 중이거나 하고 있었다.
환인이 그사이에 모습을 드러내자 영혼 기사들이 자세를 똑바로 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 공경을 표시한다.
=환인 성자님. 대성녀님과 여섯 영성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궁 입구에 나와 있던 궁내 시녀가 곱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제가 늦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영성들은 아침 일찍 출두해서 대성녀와 함께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고, 환인은 오히려 약속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알려주는 시녀.
환인은 길을 안내하겠다며 비켜서는 시녀를 보곤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다녀오지.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 주인님.=
가만히 서서 환인과 시녀가 궁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이실리테는 근처에서 요리 레시피라도 연구하면서 기다릴 요량으로 몸을 돌린 순간.
우르르—
스물이 넘는 인파가 자신을 똑바로 보며 달려오는 모습에 순간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올렸다.
=워워, 진정해! 공격하려는 거 아니니까, 응?=
하이에나 귀와 얼굴에 다소의 상처를 새긴 거친 외모의 6급 전사 여자가 손을 황급히 흔들고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방금 들어가신 분, 환인 성자님 맞으시지? 당신은 그분의 영혼 기사인 이실리…테, 맞고?=
=……그렇습니다만.=
와 하는 소리와 동시에 스물댓 명이 그녀를 둘러싸고 질문과 감상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드지에서 올라온 혼령주를 봤었다. 그거 정말로 성자님이 혼자 펼치신 거냐.
성자님이 유일 직업자이시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정말이냐.
차기 대성자님이 되실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들은 게 있느냐.
해왕 아드네빌라를 정말 홀로 막아내셨느냐…….
이실리테가 당황해서 굳어있으니 그들을 좌우로 밀치며 세 명의 기사가 그녀에게 접근했다.
=아~ 다들 뭐 하는 거야. 이실리테 양이 당혹스러워하는 거 안 보여? 다들 물러나.=
이야기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실리테는 유르파를 따라 술식연구기관을 들락거리며 안면을 익힌 아야빗=우마크레 영성의 영혼 기사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필 라이스 씨.=
=이실리테 양.=
시선이 마주쳐서 살짝 목례를 하자 그들 중 리더를 맡은 사자 귀의 여기사도 미소 짓는 얼굴로 손을 흔든다.
=미안해. 이 사람들도 나쁘고 성급한 사람들이 아닌데. 영혼 계통의 유일 직업자이신 분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다들 몸이 달아서 말이야.=
종종 점심 식사도 같이하면서 친분을 쌓은 사이기도 하고, 자신과 유리 언니를 배려해주고 챙겨주기도 한 사람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죄송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없어요. 여러분들께서도 모시는 분의 개인 사정을 함부로 밝히는 분들이 아니실 테니 양해해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완곡한 거절에 약간 정신을 차린 영혼 기사들은 조금 뻘쭘해 하며 물러선다.
=흐흐흐. 거봐, 안될 거라고 했지?=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덥수룩한 필=라이스가 낄낄 웃으니 그녀와 친분이 있는 기사들이 우우, 야유를 보냈다.
필=라이스는 그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니, 그녀의 근처에서 하얀 말의 귀와 꼬리를 한 영혼 기사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물으신다 해도 대답해드릴 수 없는 질문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만…….=
=괜찮아요! 저기, 아드지에서 펼쳐진 혼령주 말이에요. 역시 성자님이 펼치신 거 맞죠?=
=…….=
주인님도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서 혼령주를 펼치셨다고 했으니까…… 이건 대답해줘도 괜찮겠지?
이실리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영혼 기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우와, 그걸 진짜……. 영력이 상상을 초월하시는 수준인데?=
=그럼 알려진 것도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겠네.=
=그러니까 라수비탄에서 현친왕을 보낸 거겠지.=
=현친왕은 왜 왔대?=
=보나 마나 성자님을 꼬드기는 게 목적 아니겠어?=
=나 참. 언제는 우릴 못 괴롭혀서 안달이더니.=
=뭐 호족들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 바꾸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아.=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라드세아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이실리테는 역시 주인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일단의 여성 기사들이 그녀를 재차 포위하며 감탄사를 흘리기 시작한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와~ 검희의 아우라는 이번에 처음 보는데 엄청 예쁘네.=
=그러게. 마치 빛으로 짠 예쁜 드레스 같아.=
=응? 코트가 아니고?=
=야, 이게 어딜 봐서 코트야.=
=내 눈에도 코트보다는 드레스로 보이는데…….=
=그보다 이실리테 양이라고 했지? 실례가 안 되면 몇 급인지 물어봐도 될까?=
=……5급입니다.=
=5급! 그런데도 아우라가 엄청 진하네?=
=저기. 헬루멘의 영웅 기사단과 대련에서 총합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게 정말이야?=
=헬루멘 영주가 직접 후원 의사를 비쳤는데 거절했다는 것도 진짜니?=
=다른 기사님은 오늘 안 오셨어? 그 엄청 키 크시고 은색 머리카락에 대단히 예쁘신 분 말이야.=
=그녀는 일이 있어서…….=
여자 기사들의 질문 공세에 이실리테가 당황해서 더듬더듬 대답해주고 있으니 그녀들 너머로 남자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날아든다.
=거, 너무 여자들만 질문하는 거 아니오? 우리 남자들한테도 좀 기회를 주지.=
=뭐야. 이실리테 양은 성자님을 사모하시거든? 꿈 깨시지?=
=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우리는 순수하게 직업관과 무예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
왁왁하는 주변 소음 속에서 이실리테는 영성의 영혼 기사라는 존재의 환상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사교적인 성격도 아닌 터라 스무 명이 넘는 인파의 관심이 매우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안느도 데려올 걸 그랬어…….’
그녀가 있었다면 앗핫핫 호탕하게 웃으면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을 텐데.
후회막급 속에서 이실리테는 쏟아지는 대련 신청과 질문에 간신히 대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라는 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오.》
밖에서 이실리테가 영혼 기사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사이, 대회의장에 당도한 환인은 먼저 와있던 여섯 영성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본론을 들을 수 있었다.
《영혼술 계통의 유일 직업자, 그대를 성제로 인정하며 우리는 그대의 직업과 윤리관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그대를 차기 대성자 후보로 대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오.》
“…….”
《성제의 뜻은 곧 영도의 뜻임이며 성제를 향한 적대는 영도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전력으로 대응하겠소. 환인 성제께서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여주시길 당부드리겠소.》
환인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이어질 대성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수용하겠다 한 것은 유일 직업의 발표였지, 영도의 수장 후계라는 자리까지는 아니었다.
만약 중간에 대성녀와의 정사가 없었다면 자신을 구속하려는 수작으로 인식했겠지. 하지만 그것은 대성녀가 본인의 입으로 하지 않겠다 이야기한 상황.
예상대로 대성녀가 곧 설명을 덧붙인다.
《그대는 목적이 있어 대성자의 후계로 있을 수 없다 이야기해주었었지. 사실 이를 두고 의견이 많이 오갔었소. 그대의 능력과 성정을 생각해본다면 부여되는 권한에 이견은 없으나, 그대의 목적인 귀환을 염두에 둘 시 차후 발생할 혼란이 명약관화하여 그 점이 우려된다는 것이 좌중의 의견이었소.》
“이해합니다.”
《……음. 허나 그러한 이유를 들어 그대를 보호해줄 장치 없이 영도에서 내보내는 것은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주었소.》
환인은 대충 대회의장에서 이루어졌던 회의의 흐름을 읽었다.
지난 14일의 시간은 대성녀가 영성들의 긴장감과 마찰을 끌어내기 위한 시간이었을 거다.
그리고 현친왕이 나타난 것을 기회로 삼아 타국이 자신을 노릴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사태를 밝혀 그들의 위기감을 폭발시킨 거겠지.
자신과 동침한 여성의 능력이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개선되고 상승하는 특성.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린에게 그러한 여론 조성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친왕의 방문으로 영성들의 긴장감이 고조되지 않았다면 한 달을 꽉 채워 설득에 썼겠군.’
역사교육기관장, 곰 머리의 비마르 영성이 잠깐 망설이다가 진한 호기심을 담아 묻는다.
=성제님. 정말로…… 성제님과 동침한 여성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다른 다섯 영성도 호기심과 관심을 잔뜩 담으며 바라본다.
환인은 잠깐 망설이는 척, 시간을 들였다가 대성녀를 힐끔 눈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대성녀님의 저 모습이 대답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오오…….=
=으음.=
“그리고 제 영혼 기사, 안느가 어제 빛의 정령 기사로 재각성 하였습니다. 이것도 여러분들의 판단에 도움이 되겠지요.”
=허어!=
=빛의 정령 기사라니…….=
=으음!=
영성들이 감탄하고 있을 때 귀여운 표범 머리의 남자, 트라프로넨이 턱의 하얀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 검희에 정령 기사, 희귀 직업자를 두 명이나 곁에 두시게 된 거야? 와우, 우리 순행기관에서 영혼 기사를 더 붙여 드리려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는걸.=
“트라프로넨 영성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대답에 외교기관의 사비족 샤스라가 진중한 모습으로 조언을 주었다.
=성제님. 그 사실은 부디 계속 감추어두시길 당부드립니다. 각국의 욕심 많은 지배자는 성자님의 영혼술보다 그 특성을 더 탐낼 것이니 말입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약간 딱딱하던 분위기가 환인의 정중한 태도에 온화해지며 두런두런 몇 마디의 담소가 오간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성녀가 빙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렇군. 성제, 어떻소. 아야빗 영성도, 샤페 영성도, 샤스라 영성도 매력적인 여인이지 않소. 그녀들과 오붓한 밤을 한차례 보내시어 그 특성의 은혜를 내려주는 것은? 영도의 저력이 높아지면 그만큼 그대의 지원이 더욱 충실하져 그대에게도 도움이 될텐데 말이오.》
=어~ 잠깐만. 대성녀님, 그건 너무한 거 아냐?=
《트라프, 무엇이 너무하다는 것인가? 그녀들은 현재 짝이 없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보는데. 마음도 있어 보이고 말일세.》
대성녀의 미소에 세 명의 여성 영성이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걸 본 트라프로넨은 뺨을 부풀리면서 투덜거렸다.
=아니 남자는 안된다는 점에 불공평하다는 이야긴데…… 아, 그러면 손녀딸을 추천하면 되는 건가? 성제님, 어때? 내 손녀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아드지에서 벌써 10만 명에게 축복을 내렸을 만큼 선하고 참하고 착한 영혼사야. 귀여워서 은총을 내리기에 모자라지 않을 거거든?
=
=크흠. 그런 거라면 본인의 딸도…….=
“…….”
영성들의 제안에 대성녀가 방긋방긋 웃는 것을 목격한 환인은 이것이 차기 대성자 후보로써 의무 대부분은 빼고 권리만 주는 대가라는 걸 눈치챘다.
환인은 여섯 영성 중 세 명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나이가 비록 100살 내외일 만큼 있는 편이지만, 외모는 하나같이 30대 중후반의 성숙하고 매혹적인 미시나 20대 후반의 농익은 처녀처럼 매력적인 여자들이다.
한 번 교접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여성들.
문제라면 도마뱀을 두 다리로 일으켜 세우고 사람처럼 팔다리를 길게 만든 사비족 여자인 샤스라인데.
“알겠습니다. 다만 당사자의 마음 없이 진행되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오! 본인이 받아들인다면 괜찮다는 이야기로군? 과연 수 세기 만에 등장한 유일 직업자다운 호탕한 배포야. 하하하!=
내 금방 예쁘게 치장시켜 보낼 테니 기대하라며 웃는 트라프로넨에 이어 다른 영성들도 제각기 생각이 있는 얼굴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말일세. 샤스라 영성은 사비족이라 플뢰를 닮은 성제님의 외모를 보면 미적 관점이 꽤나 다를거 같은데 괜찮나?》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환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의 결여에는 미추 여부 또한 포함된다.
환인에게 있어 도마뱀 인간, 예쁘다고 할 만큼 은회색 비늘이 가지런히 빛나는 데다 인간과 비슷한 눈을 지닌 샤스라는 일반인이 흑인이나 동남아인처럼 인종이 조금 다른 사람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상뿐이다.
“남자만 아니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으음. 정말로 사내대장부로군.》
거짓은 1%도 들어있지 않은 환인의 대답에 대성녀와 영성들은 다른 의미로 그가 사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기린이 사람의 탈을 썼을 뿐인 자신도 그토록 뜨겁게 안아준 사람인데.
남모르게 속으로 수긍한 대성녀는 샤스라를 비롯해 장성한 자녀까지 둔 여자 영성들의 부담마저 사라진 걸 눈치챘다.
한층 영도의 저력이 상승하겠군. 속으로 생각하며 짝짝, 두 차례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킨 대성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겠소. 30분 후 현친왕의 접견이 있을 터이니 환인 성제께서는 그만 돌아가 주시고, 영성들은 관심이 있다면 남고 아니면 성제님과 함께 퇴실하시오. 이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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