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86화 (486/813)

〈 486화 〉 480 현친왕과 성제

* * *

안느의 재각성은 이실리테의 재각성에 걸린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실리테 때와 같은 절차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면 이실리테의 검희 각성 때 안느가 이야기를 꺼냈을 테니까.

‘슬슬 마무리 단계인가.’

광채의 범위가 점점 축소되어가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위상력도 점점 가라앉는다.

팔짱을 낀 환인은 폭풍 속으로 언뜻언뜻 안느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확실히 연습과 훈련으로도 위상력이 증가하긴 하는군.’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령을 강령시켰다고 재각성에 들어가다니.

7급으로 오를 위상력은 이미 충족되어있었고 계기만 필요하던 차에 활발한 위상력의 유동에 정령 강령 요소가 더해져 희귀 직업으로 각성하게 되었던가.

환인의 생각을 들은 유르파는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재각성에 대한건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여러 연구자가 일반 직업 각성의 환경적 요인을 조사해 보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고 들었어. 그걸 생각하면 희귀 직업도 환경 같은 요인에 영향을 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환인의 옷깃에 들어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있던 환연이 말했다.

「저기서 정령의 기척이 느껴져. 아까 환인이 안느한테 강령시킨 정령의 기척이야.」

“빛의 중급 정령인가.”

「응.」

짧은 문답에 이실리테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안느가 정령 기사 직업을 얻을지도 모르겠어요.=

「정령 기사? 그런 직업도 있어?」

정령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환연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플뢰족, 그중에서 정령사의 자질이 강한 플뢰만 각성하는 희귀 직업이라고 용병 활동을 할 때 우연히 들었어. 주인님이 안느한테 빛의 정령을 강령시켰고 저기서 정령의 기척이 느껴진다면 정령 기사로 각성한 게…….=

말하다 유르파를 본 이실리테가 말끝을 흐리고 그녀를 힐끔거렸다.

생각해보니 유르파가 낸 의견을 자신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양새가 됐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유르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기하다는 듯이 이실리테에게 질문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어. 전방에서 직접 싸우는 사람들만 접할 수 있는 소문이었나 보네. 정령 기사라면 이름 그대로 정령을 부리면서 싸우는 거니? 혹시 루크랑이나 플라비우스족 전용 직업도 있을까?=

=어…… 루크랑 족만 각성하는 직업도 있긴 해요. 수사라고 해서 짐승으로 변신해서 싸우는데……. 다른 종족은 저도 모르겠어요.=

수사??인가. 대성녀가 말했던 유일 직업인 카락스의 암살자는 그런 수사 계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

「각성이 끝나가나 봐요.」

눈을 찌르던 광채는 완전히 사라졌고 가시화될 정도로 농밀하던 위상력의 소용돌이도 흩어져 산들바람조차 남지않게 되었다.

그렇게 드러난 안느의 모습에 백려강이 탄성을 질렀다.

「와아아. 아우라가 너무 아름다워요…….」

안느의 직업은 성투사, 투사와 성술사의 혼합직으로 이전에는 옅은 안개가 퍼져나오는 아우라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녀의 몸 주변으로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떠다니며 조명처럼 그녀를 밝게 비추고 있다.

=정말. 그냥도 예쁜데 저렇게 빛을 비춰주니까 빛의 여신 같은걸?=

그 여신처럼 아름다운 외모로 가만히 서있던 처녀는.

=…우욱.=

헛구역질하면서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었다.

문제가 발생한 건가 싶었던 여자들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며 묻는다.

「안느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안느 아가씨, 속 다쳤어? 약 줄까?=

세 여자의 걱정에 그녀들의 부축을 받은 안느가 고개를 들어 핼쑥한 얼굴로 말했다.

=정령이…… 너무 시끄러워서…… 속이 메슥거려…….=

=…….=

=…….=

재각성의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과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싶어 세 여자가 조금 떨떠름해 하고 있을 때, 환인이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덧붙이며 안느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올렸다.

“정령의 목소리는 뇌를 직접적으로 흔든다. 여러 정령이 동시에 떠들면 귀에 대고 수십 명이 고함치는 것처럼 괴로워지지.”

아. 이제 생각난다. 이제까지 두 번, 그가 갑자기 이마를 감싸며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지.

=그럼 그때도?=

유르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준 환인은 근처의 선베드에 안느를 눕히며 물었다.

“정령이 지금도 계속 귀에 떠들고 있나.”

=지금은… 평범하게 재잘거리고 있어.=

“정령과 무언가 의식으로 연결되었을 수도 있겠군.”

=도령한테는 안 들려……?=

“그래.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

안느는 자기 이마에 손을 올리며 끄으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정령의 목소리만큼은 자신보다 더 잘 듣는 환인이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있다니. 지금도 어떻게 자신과 계약이 된 건지 묻는 빛의 정령의 목소리에 뇌가 반죽되는 느낌인데…… 어떻게 된 거지?

안느가 혼란스러운 눈빛을 드러내자 유르파가 픽— 웃으며 그녀의 뺨을 쿡 찔렀다.

=희귀 직업자가 되신 기분이 어떠니? 7급 정령 기사 안느님.=

=……!?=

축 늘어져 있던 안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더니 벌떡 일어나 자기 몸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얼굴을 들어 환인을 애처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환인이 옆에 앉아 어깨를 보듬어주자 그대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오열을 억누르듯 으으으, 신음을 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며 물었다.

“신체 콤플렉스 외에 가슴에 맺힌 한이 있었나 보군. 그게 정령이었나.”

=응…….=

「아.」

그때 무언가 기억이 난 것처럼 짧게 탄성을 지른 백려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네 쌍의 눈에 어색하게 웃으며 안느를 향해 눈짓했다.

예민한 곳을 찌르는 이야기가 될 거 같은데 괜찮겠냐는 눈짓이다.

“괜찮다. 안느가 직접 이야기할 상태가 아닌 듯하니 네가 말해봐라.”

「네에. 우리 라드세아의 황족 혈통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통술이 있어요. 황가의 인물이라면 당연히 신통술을 쓸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메리아놀의 플뢰 황족 혈통에도 비슷한 게 있어요.」

「그게 정령술이야?」

「응. 안느 언니는 플뢰 종족의 공주님이셨다고 했잖아. 그런데 정령술을 못 쓰셨다면 이엘카타 님보다 더한 차별을 받으셨을 거라고 봐.」

「흠. 거기다 안느는 예전에 엄청 떡대였다고 했지? 고귀해야 할 왕족 혈통에 이단도 보통 이단이 아닌 인간이 생긴 셈이었겠네.」

「안느 언니가 황족 신분을 내려놓고 방랑을 떠나신 게 이해가 돼.」

그리고 안느의 부모님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도.

‘그런 이물질이 가문에 발현되면 보통은 죽여서 없애지, 여행을 떠나게 두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었다간 어디서 황족의 피를 뿌리고 다닐지 모르는 일이지 않나. 그냥 죽여서 치워버리는 게 혈통 관리 측면에서 쉬운 일이다.

같은 것을 간파한 환인은 말없이 그녀를 좀 더 따스하게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울음을 그친 안느는 눈 주변이 빨갛게 부은 얼굴로 웃으며 이실리테와 함께 정령 기사의 특성을 파악해나갔다.

=음. 재각성으로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약간 더 늘어난 거 같아. 그 외에는 변화가 없고……. 하지만 성체술 덕분에 신체 능력을 2배 가까이 늘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같은 조건이라면 이슬이도 힘으로 이기겠네.=

대련을 끝내자는 안느의 신호에 조금 눈이 빨개진 이실리테가 한숨을 폭 내쉬며 두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처음 안느 너랑 대련했을 때 느낌이야. 엄청난 힘에 몸이 휘둘리는 느낌. ……그보다 눈이 너무 아파. 빛의 정령이라서 시야 공격에 특화된 거야?=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하지만 빛의 정령은 불의 정령보다 더 파괴적인 정령이야. 앞으로 얘랑 친해지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한 위력의 공격도 할 수 있게 돼.=

=무시무시하다면 얼마만큼? 주인님의 문양강화 영혼폭발만큼?=

=어…… 그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도령의 광창 있지? 그것도 빛의 특성을 이용한 건데 그런건 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명쾌한 설명에 이실리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이 프라버에서 획득한 광창의 위력은 그야말로 절륜 그 자체다. 강철 따위는 두부처럼 잘라버리고 위상력 저항이 높은 합금도 가볍게 꿰뚫어버리는 위력이니까.

그걸 정령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공격력만큼은 자신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런데 둔기로 그런 절삭 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 건가?

‘그건 안느가 알아서 하겠지.’

레드릭 얼터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실리테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지금은 네 파트너랑 사이가 아직 친밀해지지 않아서 쓸 수 있는 게 제한되어있는 거겠네.=

=응. 네가 다중 검기를 수련하는 것처럼 나는 얘랑 친해지도록 노력해야지.=

뿌듯함이 보이는 얼굴로 9살 남짓한 여자아이 모습의 빛 정령을 쓰다듬는 안느.

환인은 근처에서 그녀들을 지켜보다가 주머니에서 빛의 정령석을 전부 꺼내 안느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쓴다면 그 녀석과 어느 정도 빠르게 친해질 수 있겠지.”

=앗. 고마워, 도령!=

기뻐하면서 손가락 악력만으로 정령석을 잘게 부숴 가루로 만든 안느는 손바닥에 그 가루를 조금 올려놓고 빛의 정령에게 내민다.

「~~♪」

환연과 비슷한 크기의 빛 정령이 그녀의 손바닥에 앉아 정령석의 가루를 몸에 바르고 얼굴에 묻히며 기뻐하는 걸 구경하던 환인은 안느가 싱글벙글하는 걸 보며 잠시 생각했다.

‘역시 알려주어야겠군.’

빛이라는 광대무변한 힘을 다루게 된 마당에 고작 한다는 생각이 복사열을 활용하는 거나 섬광탄을 터트리는 거뿐이라니. 아깝지 않은가.

환인은 그녀의 상상력의 한계를 넓혀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조금 아쉽군.”

=응? 뭐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빛의 정령석 가루를 흡수하며 기뻐하는 정령의 모습에 흐뭇해하던 안느가 그를 돌아보았다.

“빛의 정령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고, 그 능력을 100% 활용하기 위해서는 니오네브레스보다 지구 쪽의 환경이 더 어울리니까.”

=……그런 거야?=

“안느, 너는 빛의 성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어? 음…… 일단 주변을 밝힐 수 있고 어둠의 상극인데다 빛이 뭉치면 굉장한 힘이 되는 거?=

안느의 대답에 이어 유르파도 자기 생각을 추가한다.

=빛을 잘 조작하면 남의 눈에 안 보이게 될 수도 있어. 속도가 소리보다 더 빠르기도 하고.=

=엥? 진짜?=

전혀 몰랐다는 안느의 반응에 유르파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둥과 번개가 칠 때 생각해보렴. 주변이 번쩍한 뒤에 우르릉, 소리가 들리잖니. 그게 소리보다 빛이 빠르다는 증거야. 아, 번개도 일종의 빛이라고 뇌술사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하고 있어.=

=오…….=

좋은 걸 알았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는 안느. 환인은 다 적길 기다려주며 그녀의 정령에게 눈길을 주었다.

키는 환연보다 조금 더 작은 15cm 정도. 외모도 어려 보이기에 환연보다 작은 키가 제법 어울린다.

금색과 백색 사이의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단발에 옷은 빛으로 만든 듯한 오프숄더 원피스. 신발은 신고 있지 않은 대신 왼쪽 발목에 빛의 띠 같은 걸 묶고 있다.

그런 몸을 아우라처럼 옅은 빛이 감싼 상태.

「…….」

환인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빛의 정령이 빛을 키우더니 빛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때 안느의 필기도 끝났기에 환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느 너와 유르파가 말한 것은 빛의 특성과 활용이었다. 다시 묻지. 빛의 성질에 대해서 알고 있나.”

=……?=

“그 반응을 보니 모르는듯하군. 빛은 일종의 전자기파다.”

=저, 전자기파? 그게 뭔데?=

“전기장과 자기장이 공간상으로 방사되는 파동을 뜻한다. 빛은 가시광선 영역의 전자기파를 말하지.”

노트를 꺼낸 환인은 가로로 긴 막대를 그린 뒤 여섯 개의 칸으로 나누었다.

가장 왼쪽부터 감마선, X선,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 전파를 기입한 뒤 아래쪽에는 왼쪽으로 갈 수록 파장이 짧고 높은 진동수를 가지며 오른쪽으로 갈수록 긴 파장과 낮은 진동수라고 적는다.

그리고 가시광선의 한가운데 세로로 선을 그리는 환인.

“이것이 전자기파, 빛의 종류다.”

=……???=

그걸 본 안느의 눈이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파는 뭐고 감마선은 뭐란 말인가. 파장과 진동이라니, 빛이 떨리기라도 한다는 걸까?

=어…… 자기? 그러니까 전자기파가, 전기……의 일부라는 걸로 이해하면 돼?=

“저 역시 자세하게 아는 것이 아니지만, 전기란 전하와 관련된 현상 일체를 뜻하며 자기 현상과 상관이 깊어 전자기력으로 묶이고 이것을 공부하는 물리학을 전자기학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틀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

이제는 유르파의 눈도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실리테는 진작에 자신의 지식수준을 벗어난 대화이며, 자신과 상관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차를 내리러 간 상황.

“능력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빛은 어째서 생기는가. 빛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빛을 어떻게 다루게 된 것인가. 빛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여러 색이 입혀지는 걸까. 빛의 구성 요소는? 빛의 성질은? 빛의 특성은?”

=…….=

=…….=

“다중 검기나 신비술 같은 술법은 내가 조언이나 도움을 줄 수 없지만, 과학에 기반한 빛의 작용과 이용이라면 약간은 도움을 줄 수 있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 거란 예상에 여자들이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린다.

환인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꺼내 기동시키며 말을 이었다.

“빛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다. 요약하자면 복사열로 불을 내거나 화상을 입히고 물체를 증발시킬 수 있다. 네가 처음에 썼던 것처럼 섬광을 터트려 상대방의 시각을 마비시키거나 실명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가시광선 상의 빛을 조율해 방사선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상대의 신체에 영구적으로 손상이 남는 피해를 강요할 수도 있지. 그 손상은 태어날 후손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전자기파를 잘 활용하면 전기를 쓸 수도 있겠지. 유르파가 말한 것처럼 빛의 굴절을 이용해 투명화를 쓸 수도 있고 사막의 신기루도 빛의 현상으로 인한 일인 만큼 환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빛의 이해가 높아진다면 광속 불변의 원리와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시간 지연 현상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겠지. 신비를 접목한다면 신체를 광자화하여 초고속으로 움직이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느와 유르파, 백려강은 절반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몇 가지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효과여서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자기? 그 방사선이라는 거…….=

“방사선에 대한 거라면 이걸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환인은 노트북을 꺼내 현대에 있었던 두 차례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다.

=웁.=

=…….=

피폭당한 사람의 끔찍한 상태와 그 후유증을 본 여자들의 안색이 핼쑥해진다.

특히 안느는 빛이 이렇게나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자각한 상태라 약간이지만 두려움까지 묻어나는 중이었다.

여자친구들의 반응을 확인한 환인은 영상을 멈추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겁을 준 것 같군. 이 방사선과 관련된 것은 쓰고 싶다고 해서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더해져야 시도할 수 있을 정도지.”

=으응.=

“선택은 안느 네가 할 일이다. 단순히 빛의 복사열만 이용한 파괴를 주력으로 삼을지, 빛의 성질을 이해하고 심화에 들어가며 더욱 다양한 빛의 힘을 다룰지 말이다.”

환인은 용량이 20기가에 가까운 전자기학 관련 폴더를 열어주었다.

조용히 노트북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수백 개의 파일을 살피던 안느의 눈빛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도령. 나 이거 며칠만 빌려주면 안 돼?=

크라빈 마을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이실리테, 유르파와 함께 한글을 공부한 안느다.

이제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전자기기의 활용은 현대인과 다를 바 없이 잘한다는 걸 아는 환인은 말없이 노트북을 덮고 안느에게 넘겨주었다.

=……앗! 자기, 나도 안느랑 같이 좀 보면… 안될까?=

「저, 저도요!」

“안될 게 있겠습니까. 부서지지 않게만 조심해서 다뤄주십시오.”

=응. 그리고 남들이 못 보게 조심 또 조심할게. 아가씨들, 우리 들어가서 볼까?=

=응.=

「네!」

환인은 노트북을 소중히 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가 근처 의자에 앉아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계기는 주었으니 그걸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건 그녀들이 할 일이겠지.

성공하든 실패하든, 공부하는 도중 포기하게 되든 환인은 그녀들의 결과를 수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감마선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안느는 죽음의 마녀로 불리지 않을까.’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웃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티포트와 찻잔, 과자를 가지고 나오는 걸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이실리테가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주인님, 다들 어디 갔어요?=

“그녀들의 학구열에 불이 크게 붙은 것 같더군.”

저택의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쪽을 잠시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차와 간식을 세팅한 뒤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너는 가지 않는 건가.”

쿠키 하나를 들어 환연에게 주며 묻자 이실리테가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멍청해서 아까 주인님이 하신 말씀의 절반도…… 아니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주인님의 시중을 드는 거랑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서 제가 가진 힘을 단련하는 것만… 생각하려고요.=

혹시 이런 자신에게 실망하시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한 이실리테는, 자신의 손을 잡고 당기는 힘에 얼굴을 붉히면서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넌 지식이 조금 얕을 뿐, 절대 멍청하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지혜로우니 문제가 될 것은 없지.”

=…….=

이실리테는 대답 없이 그의 가슴을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빨개진 얼굴을 감춘다.

환인은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 이실리테의 포근한 체취가 품 안에서 솔솔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고즈넉해진 분위기를 느긋이 음미해나갔다.

오후 늦게 돌아온 튜티는 정원 한쪽에서 피어나는 분홍색 분위기에 잠시 해야할 일을 잊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영웅호색이라는 단어가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는 분이실까. 그리고 절세가인,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분이 또 계실까.

튜티는 환인을 수행하고 호위하는 네 명의 영혼 기사들 중 이실리테를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무려 검희다. 대륙 어디를 가도, 4대 국가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우대받고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며 원한다면 어느 한 곳에 자리 잡아 최고의 지위와 권력을 쥘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성자님이 불편함 없이 지내실 수 있도록 섬기는 데 온 힘을 다한다.

요리를 비롯한 가사 전반도 자신이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라는 것도 가산점이 높은 부분.

‘거기다 오직 성자님만을 사모하시니…….”

성자님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저 모습을 보라. 그야말로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그때 이실리테가 환인의 무릎에서 일어나 찻잔과 티포트를 챙겨 저택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튜티는 속으로 살짝 아쉬움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만약 그녀의 주의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이실리테의 귀가 빨갛게 변한 것을 눈치챘을 테지만.

‘다행히 대성녀님의 전언을 바로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두 분의 로맨스를 방해하지 않고 지체없이 하달받은 지시를 수행할 수 있다는 데 안도하고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자님.=

“다녀오셨습니까.”

=네. 그리고 대성녀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듣겠습니다.”

환인의 대답에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세를 똑바로 한 튜티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을 때, 튜티의 담담하면서 곧고 절도가 느껴지는 목소리 대신 조금 어린 소녀틱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성녀의 목소리다.

《오래 기다리게 하여 송구할 따름이군. 영성 대회의가 방금 마무리되어 그 결과를 알려드리고자 하니, 접견을 원하는 시각을 튜티에게 알려주어 전해주시길 바라오.》

《또, 아드지에서 라드세아의 현친왕과 조우하였다 들었소. 그의 방문 목적은 구 알소프 권역의 차지를 위한 아귀다툼 및 그대의 정보 수집과 그대의 회유가 제1 목적이 분명할 터.》

《현친왕의 영도 방문 신청은 내일 오후에 허가가 날 것이오. 그가 입도한다면 즉시 성자님과의 면회를 신청할 테지.》

《영도는 성자님의 선택을 존중하겠소. 만나는 쪽, 만나지 않는 쪽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조하여줄 터이나…… 현친왕은 라드세아의 두뇌라 할 정도로 특별한 인물. 만나든 그렇지 않든 조심에 조심하실 것을 당부하는 바이오.》

《이상, 일곱 영성의 수장, 닌실 아나그였소.》

이야기가 끝나자 튜티가 눈을 뜨고 묻는다.

=바라신다면 다시 전언을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전언을 전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든 모레든 괜찮습니다. 현친왕과 마주치지 않을 시간에 접견을 부탁드리고 싶다 전해주십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환인은 튜티가 곱게 허리를 숙인 뒤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친왕 같은 거물이 날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소멸한 알소프에 똬리를 틀던 아드네빌라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소프가 소멸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주도의 인사가 아드네빌라와 접촉해도 몇 번은 접촉했을 시간.

‘…아니겠지.’

알소프가 있던 자리를 두고 아드네빌라와 사비족의 국가인 벨티칼, 그리고 라드세아 삼파전이 일어나고 있을리는.

“…….”

알류겔 호수의 동부는 사비족의 영역이라는 게 이빨 사이에 낀 김 조각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환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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