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85화 (485/813)

〈 485화 〉 479 영도 에쉬누르

* * *

아드지에 호천명 9급 호족, 라드세아에서도 세 명뿐인 대호족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튜티를 거쳐 내정사무기관을 통해 즉시 대성녀에서 전해졌다.

라드세아 여황제의 친동생. 타고난 수완과 지성으로 누이를 보필하며 주도의 문학과 예술을 견인한다는 라드세아의 현친왕??王.

그가 왕림했다는 것은 여황제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

직후 외교통상기관에서도 호천명 친왕의 방문 사실과 대성녀 접견 요청이 정식으로 접수되었고, 대성녀는 심각한 얼굴로 벌써 10일 넘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대회의를 소집, 영성들과 10번째 회의를 가졌다.

《…성자님과 현친왕이 직접 마주쳤지만, 성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는군. 전달받은 이야기에 따르면 성자 또한 그의 목적을 간파한 듯하였다는 이야기일세.》

=…….=

=…….=

이미 할 이야기는 지난 아홉 번의 회의에서 다 나온 상황. 단 한 명의 미참석자도 없는 자리에서 영성들은 심유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다.

대성녀는 복잡한 심경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 상황의 심각성은 자네들도 인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이제 용단을 내려야 해.》

기운이 더욱 정순해졌는지 이전보다 더 온화하고 상냥한 아우라를 뿌리는 대성녀의 촉구에 역사교육기관장인 비마르가 곰처럼 중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희 영성 일동은 녹색 성자님만큼이나 다음 대의 대성자에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는 사실에 한치 이견도 없습니다.=

영도의 무력과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순행기관장 트라프로넨이 치타 특유의 귀염상인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야 그렇지. 교만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아. 아랫사람을 깔보지도 않고 우연히 거둔 고아 남매를 거둘 정도의 자비심도 훌륭하지. 품행……은 색을 조금 밝힌다지만 그 또한 사내의 풍류. 거기다 다들 보았었지? 아랫도시에서 솟아오른 혼령주 말이야.=

그의 이야기에 다섯 영성들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인다.

처음에는 영도와 영혼사의 존재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이 드디어 미쳐서 다 같이 죽자고 습격해온 건가 했었다.

그리고 그 빛기둥이 혼령주라는 걸 깨달았을 땐 자신만 빼놓고 다른 영성들이 모여 혼령주를 펼친 건가 하고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성자님이 홀로 펼치신 혼령주였단다.

=그거 한 방에 아드지에 쌓여있던 묵은 혼력, 너무 자잘한데다 넓게 퍼져있어 차마 손대지 못하고 50년 넘게 이어져 오던 게 단숨에 정화되었어. 게다가 튜티 양 말로는 그만한 혼령주를 썼는데도 평온의 파동을 쓴 것처럼 멀쩡했다며?=

《…….》

트라프로넨은 진지하고 무거운 눈빛으로 팔짱을 끼며 자신의 결론을 내놓는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고 생각해. 대성녀님, 만약 성자님을 차기 대성자로 확정 짓고 유일 직업자로서 성제의 호칭을 공표했다간 훗날 문제가 생겨도 확실하게 생긴다고 봐.=

《트라프…….》

=대성녀님. 저도 트라프로넨 영성의 의견에 동감이에요. 성자님은 차원 방랑자, 언제고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확고한 생각을 품은 분이세요. 그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알릴 수 없는데…….=

샤페=메이로의 발언에 대회의장이 다시금 침묵에 잠겨 들었다.

성자가 차기 대성자로서 바깥 활동을 한다면 그건 영도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혼 계통의 유일 직업자이자 영혼사들의 정점에 선, 시조 리시우라를 능가하는 영혼사.

그야말로 수억 명의 팬층을 거느린 초대형 인플루언서나 다름없다.

그런 인물이 선행을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선한 영향력과 시너지를 일으켜 몇 곱절로 불어나 영도와 영혼사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에게 감화된 호족과 귀족, 족장들 또한 영도를 떠받치는 기둥의 한 축이 될 게 틀림없겠지.

비자룩스, 헬루멘, 프라버의 영주만 봐도 명백하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이다 보면 영도?가 영령국?國으로 탈바꿈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두절되어 증발했다고 가정해보자.

십중팔구 어디선가 사망했다고 여길 테지만 처음 몇 달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후 몇 달은 분노해서 감히 성제님을 누가 살해했는지 찾아다닐 것이다.

성제가 죽었다는 사실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내비치며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우울해져서 성제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수용하겠지.

그 이후에는 몰락뿐이다.

지금도 영도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은근히 견제하는 도시가 널려있고 각국의 주도 또한 알게 모르게 영혼사를 압박하고 있다.

특정 지역에 성불이 수년째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주었으면 한다.

어느 지역은 가뭄과 역병이 창궐해 오랫동안 승령천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쪽을 해결해주었으면 한다.

이런 식으로 위험 요소가 모호하게 있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장소에 영혼사들을 보내려 은근슬쩍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국에 영도의 국가 승격을 반길 자들이 있을까.

도시의 승급이 이루어져 국가가 되었다면, 그 계기가 된 인물이 사라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혼재와 영혼의 본질을 알고 있을 각국 수뇌부는 대성자의 사망을 언급하며 이때다 하고 영도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온갖 정치질을 할 것이다.

정치 쪽에 발생할 문제도 문제지만, 성제에게 쏠린 대중의 관심이 그의 사망(루머)를 통해 고스란히 충격으로 치환되어 영도에 쏟아지는 것도 문제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게 내버려 두다니, 영도의 영성님들과 영혼 기사님들은 대체 뭘 하신 거야?

아아, 성제님이 돌아가셨어! 그런 분을 돌아가시게 할 정도의 재앙이 세계에 퍼질 거야!

이때까지 탄탄하고 굳건한 영도의 역사에 큰 위기가 다가올 것이다.

본인이 직접 수정구를 깎아 만든 수제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아야빗=우마크레 영성이 베이지색 토끼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대성녀님. 이제 숨기고 있으신걸 알려주셔야 한다고 봅니다. 성자님께 차기 대성자의 칭호를 내리고 전면적인 영도의 지지와 지원을 하려는 이유가 그분을 가리키는 예지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해요.=

《…….》

아무리 성자의 발자국에 죽음이 피어날 수 있다는 예언이 나왔다하여도 대성녀가 주장하는 방침은 한 명에게 과한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야빗=우마크레가 그걸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성자님이 영도에 남아 차기 대성자로 교육을 받는다면 그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응할 테니까.

대성자/대성녀는 영도 최후의 보루다.

자애신님의 은총으로 시대마다 대성자나 대성녀에 어울리는 사람은 한 명씩 꼭 나타났으며 영성 또한 5명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 영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

불규칙한 주기로 세상에 혼재의 대범람이 일어나기에 그 일이 벌어질 경우 즉시 달려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재앙에 맞설 때 성자님 같은 분이 중심에서 굳건히 자리하고 계신다면 그 얼마나 든든할까요. 성자님이 대성자를 계승하신다면 이유가 어쨌든, 어떤 문제가 생기든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할 거예요.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떠날 분이시라면 이야기는 다르죠.=

아야빗 영성의 이야기에 다른 영성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마음이 ‘드디어’ 하나로 뭉친 것을 읽은 대성녀는 휴우,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다들, 지금부터 소녀가 하는 이야기는 누구의 앞에서도 꺼내서는 안 됨을 명심하게. 아니, 이 자리에서도 입 밖에 꺼내지 말게. 그리고 나가거든 그 사실은 잊어버리고.》

=……?=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저렇게 으름장을 놓으시는 걸까. 영성들은 그리 생각했지만, 대성녀님은 허튼소리를 하는 분이 아님을 믿고 있었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들도 눈치챘겠지. 열흘 전, 소녀가 갑자기 변모한 것을.》

말하며 머리 위의 뿔 같은 기린 귀를 만지고 엉덩이 뒤에 난 기린의 꼬리를 살짝 흔드는 대성녀.

《성자님과 동침하게 되면 씨앗이 뒤늦게 싹을 피우듯 능력이 만개하게 된다네. 그 때문일세.》

=……?=

=……!=

영성들은 일순간 의문과 의아함을 품었다가, 곧 그 사실이 시사하는 것을 깨닫곤 얼굴을 굳혔다.

《능력이 강할수록 동침 후 얻게 되는 효과는 더욱 커져. 약하더라도 얻는 능력이 없다고는 못하네.》

=혹시 집행부의 이엘카타 양이 뒤늦게 영혼사가 된데다 혈계술을 얻은 것도 그 일의 연장선입니까?=

이때까지 입을 꾹 닫고 있던 외교통상기관의 샤스라=슈아우트가 사비족 특유의 무표정한 도마뱀 얼굴에 희미한 경악을 띄운 채 묻는다.

《며칠 전에는 전견시로 성자님의 미래를 보았네. 엘위드리스 가문이 도시째로 적흑의 혼령주 여섯에 집어삼켜져 모래더미가 되는 광경이었지.》

=……!=

=……?!=

《지금은 라드세아의 주도 라수비탄에서 현친왕, 여황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호천명 대호족이 짐승기사단의 기사 둘과 함께 도착하였네. 성자님은 어째서인지 메리아놀에 원한이 많아 보여. 거기다 해왕 아드네빌라의 관심도 받았으며 천정의 주시와 영성경의 관심까지.》

대회의장에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는다.

《성자님은 현재 니오네브레스의 태풍이 되어가는 중일세. 영혼사 계열로서 이름을 드높이고 계시지.》

=……성자님께 문제가 생기든 생기지 않든,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다는 뜻입니까.=

비마르의 무거운 혼잣말에 대성녀도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성자님은 무척이나 이성적이야. 지금 그대들이 생각한 그런 이성적이 아닐세. 애초에 감정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 지극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사람의 감정을 학습하여 감정보다 이성이 몇 배나 강한 분이지.》

=어!? 살성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분이라는 뜻이야?!=

놀란 고양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치타 머리의 트라프로넨이 경악해서 소리친다. 그에 대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흉성의 별 아래에서 태어나셨지만, 교육으로 감정을 습득하였고 영혼과 감응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가슴에 받아들이는 중이시네. 성자님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쏟아붓는 무상의 애정과 사랑 또한 그분을 변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

=아아… 대성녀님이 읽으신 미래를 저도 이제 알겠습니다. 정치의 못난 판 속에 성자님이 들어가시면 살성의 기질이 자극받을 수 있는 데다, 정쟁에 그분의 연인들이 희생되기라도 하면…….=

《그분의 휘하에 들어간 여덟 흑옥이 마왕의 발판이 되어줄걸세. 엘위드리스 가문의 소멸 미래 예지도 그 연장선이라고 소녀와 이엘은 확신하고 있지.》

살성이란 흉성으로 알려진 하나의 별자리 아래 감정 없이 태어나 사람의 악의에 쉽게 물드는 존재를 가리킨다.

어떻게 성장하여도 피를 쉽게 부르는 성격으로 성장하여 곧 내에는 수천의 생명을 잡아먹어 버리고 자신까지 죽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살성??.

영성들은 드디어 대성녀의 우려와 걱정을 100% 이해했다.

동침하면 능력을 성장시켜주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영혼 계통의 유일 직업이라니. 게다가 살성의 기질도 타고났다고?

만에 하나 그가 타국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즉시 대전쟁의 빌미가 될 거다.

=문제가 벌어질 경우 이래도 우리 탓 저래도 우리 탓으로 몰아갈 네 곳 국가의 반응을 예상해보건대, 성자님은 무조건 영도의 비호 아래 두어야 합니다. 그편이 영도가 리스크와 리턴을 함께 잡을 방도일 테니까요.=

외교기관의 기관장으로 타국과 도시의 외교를 담당하는 샤스라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핵심을 간파한다. 이어 역사교육기관장인 비마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녀님께서 차기 대성자의 호칭과 함께 혜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성자님께 문제가 생겼을 때 전력으로 움직이려면 그에 합당한 지위가 필요한데, 차기 대성자라는 호칭만큼 알맞은 것도 없겠지요.=

=벌과 상이 함께 다가오는 느낌이군요……. 아무튼,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것은 성자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이겠네요.=

=그보다는 현재 접견과 방문 신청을 넣은 라드세아 현친왕의 대응이 우선이겠습니다. 내무기관장님, 별채의 준비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특급 귀빈 전용은 항상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고 있습니다. 즉시 방문한다 하여도 무방…….=

대성녀, 닌실=아나그는 그제야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후속 대처를 준비하는 영성들을 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환인에게 그 동침 특성을 밝혀도 되는지, 영성들에게 기밀 엄수를 당부할 테니 그들에게 알려 설득에 사용해도 될지 허락은 미리 받아두었었다.

그걸 바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영성들에게 결정적인 타이밍에서 위기감을 심기 위해서였다.

환인이 어떠한 인물인지 영성들이 각자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야기를 꺼내보았자 개인의 주관과 지식에 의한 판단을 내리게 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환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때마침 라드세아의 현친왕이 방문한 게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현친왕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의 방문 신청이 아니었다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자가 떠나기 전날까지 일을 끌었어야 했을 터.

대성녀는 기관장들의 의견을 들으며 생각을 마무리한 뒤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면 내무기관장은 현친왕이 머물 별채의 정돈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외교기관장은 예외 없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현친왕의 입도를 허가하도록. 순행기관장은 아드지와 영도의 주변 위상력 밀도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마차를 타고 영도로 돌아온 환인은 임시 주택에 도착해 남매와 함께 정원에 들어섰다.

튜티는 중간에 내정사무기관에 보고를 올려야 해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먼저 사라진 상태.

정원에 들어선 환인은 그사이 일과를 마쳤는지 정원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실리테와 안느를 발견했다.

=도~령~!=

그를 발견한 안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환인의 품에 뛰어든다.

엉겁결에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은 환인은 진정하라는 듯이 엉덩이를 다독이며 물었다.

“기뻐 보이는군. 성체술을 완성한 건가.”

=응응! 출력이 아주 약간 낮아졌지만 대신 정령 강령의 호환성을 완벽하게 접목했다고 자신해!=

“과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열심히 했다는 걸 어필하는 안느. 장신의 모델 같은 그녀의 애교에 환인은 최고급 비단실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어느 정도일지 기대되는군. 바로 테스트해보지.”

=저어……. 성자님, 이거는 어떻게 해요…?=

상반신만큼이나 큰 나무 상자를 든 아라가 은색 여우 귀를 뒤로 납작하게 눕힌 채 조심스레 묻자 뒤따라온 이실리테가 기부금이 든 상자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건 뭐니?=

=성자님이… 아드지에서 축복식을 하시고 받으신 기부금이에요….=

언제 아드지로 내려가셨지? 설마 혼자 다녀오신 건가? 가실 거면 자신들을 데리고 가시지…….

이실리테의 그런 눈빛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상자를 거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남매에게 지시한 뒤 일부러 혼자 내려간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슬슬 엘위드리스 가문 쪽이든 주도 쪽이든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크라빈의 미궁을 돌파한 데 관심이나 불만을 가진 다른 가문이든, 누군가가 찾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아. 그래서 아드지로 내려가서 혼령주를 펼쳤던 거구나.=

“그래. 아니라 다를까 주도의 9급 호족이란 인물이 다가오더군.”

솔직히 천정이라는 곳에 소속된 누군가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엑?=

=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둘 사이로 유르파와 백려강이 환연과 함께 다가오는 게 보여 그녀들에게도 손짓해 불렀다.

“그 일로 조만간 대성녀님이 호출할 듯하니 당분간 외출은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다오.”

=나야 성체술을 완성해서 이제는 하이넬 상급 영혼사님께 갈 일은 없긴 한데…….=

=우리도 문인 연구 복원이 끝나서 술식연구기관에 갈 일은 더 없어. 그런데 자기, 9급 호족의 이름은 듣지 못했니?=

“호천명이라고 하더군요. 현 여황제의 친동생인 친왕이라 들었습니다.”

「네? 호천명 현친왕 그분이 직접 찾아오셨어요?」

백려강이 매우 놀라자 검은색 원피스 드레스에 따스한 회색 케이프를 두른 유르파도, 금방이라도 성체술을 선보일 것처럼 들썩거리던 안느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환연은 자신과 이실리테만 모르는 거 같아 그녀의 어깨로 자릴 옮긴 뒤 백려강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뭔데. 그게 누군데 그렇게 놀라? 너희만 알지 말고 우리도 좀 알자.」

「앗. 그, 열여덟 살에 호족의 신통술을 대성하고… 스물다섯 살에 주도의 학사전 학장이 된 천재 중의 천재예요. 황제 폐하께 현자의 글귀를 하사받아 현친왕이 된…… 그러니까 신통술과 학식으로 라드세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분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흠. 그런 인간이 직접 찾아왔단 건 여황제가 그만큼 환인을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겠네.」

=자기를 중용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지배자들이 보기에 자기만큼 군침 도는 인재는 없을 테니까.=

여자친구들의 수군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환인은 짝짝, 작게 손뼉을 쳐서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그와 만나본 소감은… 말하자면 상당히 지능적이고 지성적이라고 느꼈다. 그도 나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테니 이런저런 술책과 계책을 가져왔더라도 폐기하고 정공법으로 나올 거라고 본다.”

=정공법? 직선적으로 공격해올 거라……는 뜻은 아니겠지. 절차를 밟아서 들어온 뒤에 도령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할 거란 말이야?=

“그래. 그의 접근을 두고 대성녀님과 영성분들이 커트할 게 있다면 커트할 것이고 괜찮다면 그가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할 테지. 그렇다고 해도 각자 떨어져 그가 우리 개개인을 파악할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거기다 현친왕의 방문으로 지지부진하던 대성녀와 영성들의 회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을 거다.

결론이 나게 되면 그 일로 필령궁에서 자신들을 호출할 테니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하려면 모여있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

환인의 알아듣기 쉬운 설명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나 먼저 할래! 도령!=

“그래.”

흥분해서 자신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안느를 따라 정원 한편의 훈련장으로 나간 환인.

자신의 앞에서 긴장을 풀며 심호흡하는 안느를 문양 강화 영혼 시야로 가만히 응시한다.

=흡!=

이윽고 준비가 끝났는지 짧은 기합과 함께 전신에 힘을 주는 안느. 그러자 그녀의 몸 안을 느긋하게 흐르던 위상력이 갑작스레 빨라지며 위상력의 통로도 한층 넓어지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평소 위상력이 흐르지 않던 몸 구석구석까지 돌고 있다.

“위상력을 스스로 통제하는 건가. 제법이군.”

=도령이 했던 말에서 힌트를 얻었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강해질수록 몸으로 낼 수 있는 힘이 세진다는 거 말이야. 그 말대로 위상력을 가속할수록 낼 수 있는 힘이 늘어나.=

쿵, 진가가 함께 주먹을 내지르자 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원풍이 격하게 일며 잔디와 흙먼지를 강하게 뿌린다.

한순간이지만 마하를 넘었다는 그 표시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혈압과 맥박, 체온을 측정했다.

“혈류 변화는 없군. 위상력으로 신체만 강화한 건가.”

=응. 저번에는 심장과 혈관까지 강화해서 도령의 강령에 효과를 못 받은 거잖아.=

환인의 강령은 기본적으로 혈류를 가속해 신체 활력을 드높이는 식이다. 거기에 신비 요소가 곁들여져 전체적인 신체 능력의 향상으로 이루어지는 것.

“위상력의 흐름을 가속하고 빈틈없이 몸 전체를 순환시켜 위상력으로 신체만 강화하는 건가. 이런 거라면 강령을 해도 신체 부담이 특히 강해지거나 하지는 않겠군.”

=…….=

구상이야 오래전부터 했다지만 본격적으로 만드는 데 7개월이나 걸린 성체술의 요지다. 그걸 무슨 답안지 보는 것처럼 보자마자 요점을 파악하다니.

“요점은 간단하지만 그걸 현실로 끌어내는 데 부단한 노력이 들었겠지. 고생했다.”

그의 칭찬에 멍하니 서 있던 안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조금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꾹 쥐었다.

=난 준비 됐어.=

“바로 중급 정령을 강령하지. 그 정도 조절이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거다.”

=응!=

그녀와 상성이 맞는 바람과 빛의 정령 중 빛의 중급 정령을 불러들여 그녀의 몸에 강령시키는 환인.

번쩍—!

이변은 그 순간 일어났다.

환인이 빛의 정령을 그녀의 몸에 밀어 넣은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휘광이 그녀의 몸을 감싸더니 그 기세를 키워나가면서 위상력 또한 폭풍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세에 놀라 환인의 등 뒤로 숨었던 환연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는 어? 하고 말한다.

「환인. 저거 이실리테가 겪은 거랑 비슷하지 않아?」

“내가 봐도 같아 보이는군.”

환인도 좀 더 거리를 두며 말하자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굳어있던 유르파와 백려강이 그의 양쪽에 붙으며 묻는다.

=자기, 저게 희귀 직업 각성 현상이란 거니?=

「그럼 안느 언니도 희귀 직업자가 되는 건가요?=

“그럴 겁니다. 안느가 저 현상에 대해 잘 아는데 본인이 저 상태라서…… 확인은 그녀가 정신을 차린 뒤에 해야겠군요.”

「어쩜. 한 파티에 유일 직업자랑 희귀 직업자가 둘씩이나…….」

「흐음. 그렇지 않아도 먹음직스러운 떡인데 이제는 못 먹는 떡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쿡쿡 찌르는 인간이 늘어나는 거 아냐?」

=환연? 그거 떡이 아니라 감…….=

「알아. 그래도 감보다 떡이 더 맛있잖아.」

이실리테는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에도 끼지 않고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눈이 멀듯 한 하얀 휘광과 푸른색 위상력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검술과 다중 검기 훈련을 할 적이면 알게 모르게 뒤에서 자신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던 안느였다.

물론 대련이나 훈련에 힘을 빼고 봐주었던 적은 없다. 안느가 불쌍하다거나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검희의 기감으로 안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낄 때마다 왠지, 자신만 편법을 쓰는 것처럼 강해진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던 그녀였다.

그랬는데 안느도 희귀 직업자가 되면…….

흥분이 심장을 감싸며 기분 좋은 느낌이 그녀의 머리와 가슴을 채워나간다.

이실리테는 자신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것도, 그런 자신을 환인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빛이 줄어들고 위상력의 폭풍도 잦아져 가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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