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84화 (484/813)

〈 484화 〉 478 영도 에쉬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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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솟구친 거대한 빛기둥은 아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드지뿐만 아니라 순례의 길, 그리고 순례의 길 너머 조천도시 엘스너펠에서도 그 웅장함이 목격되었으며.

=저 빛기둥은…… 아드지에서 펼쳐진 것인가.=

아드지를 향해 순례의 길을 따라 바삐 달리던 세 명의 일행도 목도하였다.

일행의 선두, 칠흑같은 쿠에의 등에 올라타있던 인호족 남자의 혼잣말에 그의 뒤를 따르던 회색 쿠에 탑승자들이 대답한다.

=방향을 보자면 아드지가 확실한듯합니다.=

=역대 발현된 혼령주의 규모 중 가장 컸던 것이 둘레 30여 미터에 높이 300m였습니다. 하지만 저 혼령주는 폭이 200m가량에 높이는 하늘을 찌르고 있군요. 저 규모를 보자면 대성녀님,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영혼술의 소유자가 펼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성녀님이 아드지에 내려가셨을 리 없으니 녹색 성자님의 힘이겠군.=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다행히도 아직 영도를 떠나지 않으셨나. 서두르세. 누님의 어명을 한시바삐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인 여섯 꼬리의 여우 머리 남자는 그와 반대로 온통 검은색의 쿠에에게 박차를 가해 아드지를 향해 달렸다.

그를 수행하는 푸른 늑대 혈통의 인랑족 여성 둘도 남자를 쫓아 회색 쿠에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평온의 빛기둥, 회색 혼령주를 사람들 앞에서 펼쳤던 환인은 빛기둥이 어느 정도 걷혀 시야가 돌아온 뒤, 튜티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어깨를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정말 어깨를 건드려주는 것으로 충분한 겁니까.”

=네, 성자님. 아드지의 시민들은 대륙의 누구보다 영혼사님들을 존경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성자님은 그런 영혼사님들 중에서도 정점이신 영성님. 가벼운 신체 접촉만으로도 이들은 크나큰 마음의 위안을 얻을 거예요.=

“그렇군요…….”

튜티의 설명을 듣고 다음 차례인 여성의 어깨를 건드려주었다.

=아아, 성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환인에게 어깨를 다독여진 인묘족 여성, 척 봐도 걸치고 있는 옷이 고급인 게 근처 저택의 안주인이 틀림없을 여자다.

그런 여자가 흡사 선망하고 연모하고 흠모하던 연예인과 스킨십을 한 열혈팬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도시까지 안내해주었던 우브의 설명을 들었을 때 환인은 아드지를 거대한 팬클럽의 도시 같다고 평가했었다.

‘정확한 평가였군.’

갑작스러운 팬미팅이라고 하면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진다.

어차피 얼굴은 유르파가 만들어준 안면 인식 저해 후드 망토를 걸치고 있어 보이지 않는 상태.

저택을 보러온 것은 이 집의 주인이 성자라는 걸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기에 환인은 차분히 시간을 들여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여 나갔다.

문제라면 한 명을 다독이면 그 뒤로 10명이 늘어나는 이 상황이라고 할까.

웅성웅성.

도시 곳곳에서 혼령주를 목격한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

환인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자신만해도 이정도인데 다른 유명한 영성들은 어떨 것인가.

=다른 영성님들은 이렇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저는 어째서 이렇습니까.”

=그분들은 영혼사일 때부터 영도에서 활동하신 분들. 때때로 도시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셨기에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아드지 시민의 특징이라면 이름 알려지지 않은 영혼사는 물론이고 유명한 영혼사에게 받는 축복을 일종의 도시민의 의무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 보는 영혼사라면 조심스레 다가가 축복을 해주실 수 있는지 묻고 축복을 받길 망설이지 않는다.

축복을 받은 영혼사에게 기부금을 내는 풍습도 정착되어있다.

축복을 받고 기부금을 낸 영혼사가 성장해 상급 영혼사가 되고 특정 기관에 들어가 이름을 드높이면 마치 자기일인양 축복받은 사람이 기뻐한다는 이야기.

‘마! 내가 인마, 그분이 영혼사님 시절 때부터 어? 축복받고! 기부금도 드리고! 어!? 대단한 분이 되실 거라고 믿었다고 인마!’

하지만 무작정 보이는 영혼사에게 다가가 축복을 청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엄격한 룰이 존재하는데 같은 영혼사에게는 한 번 이상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 한 번 축복을 받은 사람은 뒤에 받을 사람을 배려해 두 번 받지 않을 것 등이 있다.

그 때문에 아드지로 내려와 축복을 하면 할수록 모이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이야기였으니, 영성으로서 처음 도시로 내려온 환인에게 고급 저택가 앞 15m 도로가 인파로 미어터지는 이 상황은 예견된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브가 도시에서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게 좋다고 했던 거군.’

하지만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하면 족히 수만 명이 모인 셈인데 이들에게 하나하나 축복을 주다간 밤을 새워도 부족하지 않을까.

그런 그의 심정을 읽은 듯이 환인의 뒤에서 엄숙하게 기부금을 수령하고 인명록을 적던 튜티가 남매 둘이 사이좋게 든 상자에 기부금을 옮겨 넣으며 환인에게 속삭였다.

=줄이 늘어질 경우 축복식은 하루에 1시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 모래시계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힘내십시오.=

‘…팬 사인회 조공식인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환인은 완벽하게 자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짚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날 때마다 아라가 조막만 한 손으로 모래시계를 번쩍 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 사십 분 남았어요오……!=

=삼… 삼십 분 남았습니다아…!=

=이십 분 남았어요오…!!=

=십분 남았습니다아…!!=

그렇게 1시간이 지나 환인이 730명의 어깨와 손을 잡아주었을 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축복식이 끝났다.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 삼삼오오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줄이 끊긴 처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잘 아실 분들께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맞아맞아. 바로 앞에서 줄이 끊긴 안타까움은 이해하지만,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라고.=

=그래. 오늘만 기회인건 아니잖아?=

=읏…. 죄송합니다앙.=

튜티의 엄격한 지적과 그녀의 뒤에 서있던 시민들의 위로에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사과한 뒤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나갔다.

“…….”

축복회가 끝난 거리가 한산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물론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고 꽤 많은 수가 남아 환인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귀, 시구 등을 적고 있다.

튜티의 말로는 저런 창작물과 그림 등이 신문사에 전달되거나 판매되어 온 도시에 희소식으로 퍼진다고.

어쨌든 일정이 끝났기에 마차에 올라 영도로 돌아가려던 환인은 그 순간 어떤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

눈처럼 하얀 여섯 여우 꼬리. 먼지 한 올 묻지 않은 눈처럼 하얀 여우 머리. 키는 2.3m 정도이며 그 자세가 곧고 부드럽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척 봐도 평범하지 않은 외모의 인호족 남자가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마차에 오르려던 환인은 그 인사에 그를 향해 몸을 돌린 뒤 그와 그의 뒤에 서있는 여자 둘을 빠르게 살폈다.

‘남자는 아우라가 없군. 뒤에 인랑족 여자 둘은 5급 전사와 성술사.’

주변의 수근거림이 환인의 고막에 닿았다.

=어? 여섯 꼬리의 백여우잖아.=

=백여우는 라드세아의 황제 혈통 아니야…?=

=입고 있는 옷은 백염혼의 털로 짠 거야. 진짜 황제 가문인가 본데?=

=흐익, 한 단에 100금화나 한다는 괴수 모피? 그런 사람이 왜….=

환인이 입을 떼기 전, 튜티가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신해 상대한다.

=먼 곳에서 오신 귀인이시군요. 내정사무기관 상급 기관원이자 환인 님의 임시 시중인인 튜티 로아세람입니다. 귀인께서는 어인 일이신지요.=

=소신은 주도 라수비탄 성궁의 학사전 책임자이자 여왕 폐하의 손과 발이 되는 호 천명이라 합니다. 비자룩스와 린덴의 구원자이자 알소프의 주시자이신 녹색 성자님께, 여왕 폐하께서 손수 쓰신 서찰과 전언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호천명 9급 호족께 여쭙겠습니다. 그 서찰과 전언에 정치적인 요소가 있는지요.=

=여왕 폐하께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생인지라, 밀봉된 서찰의 내용은 유추하지 못하며 전언은 안부와 함께 성자님께 전할 인사 및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시종일 정중하고 엄숙한 호천명의 답에 튜티도 예법에 한 치도 어긋남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 성자님과의 사적 접촉은 지양하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식 배현은 영도의 외교통상기관을 통하여 주시길.=

새하얀 여우 머리의 호천명은 조금도 찡그리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실례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녹색 성자님의 범접 못 할 위용에 가슴설레어 그만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그것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본 환인은 호천명이 굉장히 지능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접근 자체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복잡하고 귀찮은 외교 통관 의례를 건너뛰고자 하는 데다, 귀찮게 훼방 놓을 영도를 배제하고자 하는 걸 읽은 것이다.

환인은 호천명의 사과에 자신도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살짝 묵례하듯 인사한 뒤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호천명 9급 호족은 아무렇지 않은데 그의 호위로 보이는 여자 둘이 미세하지만 움찔하는 것이 환인의 기감에 걸려들었다.

역시,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환인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마차 문을 닫는다.

기감에 튜티가 마부석으로 오르는 것, 그리고 아루와 아라가 쪼르르 마차 후면 보조석으로 올라가 앉는 것이 느껴진다.

[출발하세요.]

[옛.]

튜티의 지시에 마부가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세 명의 시선은 여전히 이쪽으로 고정되어있다.

마차 내부의 커튼조차 젖히지 않고 기감으로 그걸 전부 읽은 환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황제의 동생이라고 했었나. 자기 절제가 제법이군.’

성궁 학사전 학장이라는 것은 주도 아래 모든 도시와 마을에 편찬한 지식을 퍼트리는 위치나 다름없다.

거기다 여황제의 동생.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만한 위치다.

그럼에도 그를 무시하고 마차에 오른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튜티가 저들을 몰랐다는 것은 저 셋이 아드지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말은 그 잠깐 사이 자신이 펼친 혼령주를 보고 달려왔으며, 자신이 축복식을 진행하는 사이 저 계획을 생각해냈다는 뜻.

만약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오면서 상황을 예측해놓고 그대로 움직였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지능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라드세아의 여황제가 직접 적은 친서를 고작 세 명이, 그중 한 명은 여황제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저 호천명이라는 호족의 접근 자체가 기밀을 요구하는 것이겠지.

전언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려한 것으로 보아 예상이 다르지 않다면 프라버와 헬루멘의 소식일 것이다. 어쩌면 파르히스트도 있을 수 있고.

서찰은 높은 확률로 알소프의 소멸 건이겠지. 그것들을 바탕으로 주도 라수비탄에 자신을 초대할 것 같은데…….

‘어쨌든.’

의외인 것은 엘위드리스 가문이 아니라 주도에서 보낸 사람이 먼저 도착했다는 것이다.

전견시로 엘위드리스 가문의 몰락과 소멸을 예언한 지 보름이 지났음에도 그쪽에서 접근이 없다는 건 이쪽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작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환인은 라드세아의 여황제(이제야 알았다)가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불러들일지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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