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화 〉 477 영도 에쉬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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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겨울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거실에서 영혼술 서적을 탐독하던 환인은 책을 덮고 폐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의 메마른 냉기가 난방 마도구가 뿜어내는 포근한 온기 사이사이 스며들어있는 게 느껴진다.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결론은 똑같군.’
영혼사는 비전투 후방 직업이다.
후방 지원 직업조차 아니다. 전투와는 성술사보다도 연관이 없는 직업이다.
영사육성기관장 샤페=메이로의 허가 아래 특급 영혼술 서적을 반출해서 이틀간 글자 하나 놓치는 일 없이 낱낱이 살폈지만, 상급 영혼사는 물론 영성과 새벽의 빛도 비전투직업이라는 사실만 재확인했다.
영혼사의 기술은 영혼과 소통에 집중되어있다. 유일한 공격 수단은 영환?, 영기를 모아 고리처럼 만든 뒤 쏘는 것 하나뿐.
산탄이나 일점 집중이나 압축 포화처럼 바리에이션이 있지만 영환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일반 영혼사는 영체 상태의 혼에게 타격을 주는 정도밖에 안 되며, 상급 영혼사 정도는 되어야 살아있는 인간에게도 영적 타격을 줄 수 있다.
승급직인 영성이 되면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도 절멸시킬 수 있다지만, 다른 승급직에 비교하면 전투 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치유에 특화된 성술사조차도 승급직인 제성??이 되면 빛 속성의 단일, 광역 공격을 퍼부을 수 있고 대상이 불사자나 되살아난 시체, 미궁의 악령이나 잡귀 같은 대상이면 속성 법술사를 능가하는 화력을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5급 영혼사가 되면 영혼의 힘 일부를 빌려 버프를 걸 수 있지만…….’
그건 1~2등급 강화 비술사와 비슷한 수준. 영성이 되어야 간신히 5급 강화 술사 정도로 간주되는데 그마저도 혼옥의 특징인 죽은 영혼의 특기 부여 때문이지, 신체 능력 강화 효과가 뛰어나서 5급 강화 술사에 비견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혼령주도 온전히 공격 기술이라 보기 어렵다.
기초는 영혼의 광역 정화이고 여기에 청옥이나 흑옥, 적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져 공격용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톡, 톡, 톡.
고급 하드 커버의 책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리던 환인은 겨울이 빠르게 찾아오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환인이 지난 2주 동안 역사교육기관의 기록실에서 영혼술과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은 이유는 자신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낸 결론이란.
‘일반 직업자들과 나는 출력 자체가 다르다.’
이능력을 총합해 출력으로 계산했을 때 직업이 없는 일반인은 0.1, 평범한 2급 직업자의 출력은 1이라고 볼 수 있다.
승급자는 대강 15 정도. 다중 검기 두 자루를 꺼낸 이실리테는 22정도일까. 검 한 자루가 늘어날 때마다 출력이 7씩 늘어날 거라고 본다.
안느는 무기술과 기교가 성장해서 약 16이겠지. 여기에 성체술을 완성한다면 5에서 15정도는 성장할 거라고 본다.
그녀에게 가르쳐준 전투법은 기초 신체 능력이 받쳐주면 받쳐줄수록 위력을 내는 능력이니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몇일까.
‘영혼술까지 제외한 맨몸이라면 12. 장비와 기술을 전부 동원하면 대강 210.’
그의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만났던 특출난 인물들의 면면이 흘러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는 단연 해왕 아드네빌라다.
최소 출력이 500으로 짐작되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용.
잠시 아드네빌라의 아름다운 동체를 떠올리던 환인은 생각하던 것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웠다.
재미 삼아 내본 거라 신뢰도와 정확성은 70%도 안 된다.
애초에 직업마다 특성이 다르며 제 실력을 낼 수 있는 환경 요소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전투력 측정이니 정확도가 높을 수 없다.
사박사박.
부엌 쪽에서 인기척을 느낀 환인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발 여우 귀의 소녀, 이아라가 은쟁반에 차를 담아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다.
깔끔하지만 흑색과 백색으로 이뤄진 투박한 아동용 하녀복에 안느와 비슷한 은발은 하녀 머리띠로 단정히 묶어서 가린 7살 남짓한 소녀.
=여……기요….=
그렇게 다가온 소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올려진 은쟁반을 들어서 환인에게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단단히 긴장하고 있는 모습.
환인은 책을 내려놓고 말없이 찻잔을 들어 가져온 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긴장으로 굳어있던 얼굴이 살짝 풀어지더니 꾸벅, 환인에게 폴더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돌아간다.
순례의 길에서 부모를 잃은 남매는 환인이 거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충 보육원에 넣은 뒤 대리인을 내세워 남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다달이 은화 2닢씩 후원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10년이 걸린다 해도 해도 금화 3닢이 채 안되는 돈.
두 번 다시 영도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3금화를 한 번에 맡겨놓으면 문제는 없으니까.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안느의 조언 덕분이었다.
=도령. 그러지 말고 아르하고 아라를 입주 하인, 하녀로 고용하는 게 어때?=
보육원 같은 곳에 아이들을 맡긴 뒤 무작정 후원해주는 것보다, 제대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쪽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과 미래를 생각하면 더 좋다는 의견.
그즈음 대성녀가 영도와 아드지 양쪽에 저택을 마련하길 권했었다.
주거지를 장만해서 자신의 행적에 관심이 많은 자들의 시선을 흐리는 대외적 위장 효과를 노리자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성녀를 제외한 영성들은 영도와 아드지 양쪽에 저택을 한 채씩 가지고 있었다.
영도의 저택에는 영성이 가족들과 머무르고 아드지의 저택은 영성의 영혼 기사들이 비번일 때 쓰는 곳으로 활용한다.
저택도 직접 구하는게 아니라 말만 하면 영도의 내정사무기관이 알아서 마련해준다. 영성의 혜택 중에는 주거 지원도 있기 때문이다.
아드지의 시민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입지 조건은 근처에 영성이나 상급 영혼사의 저택, 주택이 있는 곳으로 꼽기에 원하는 장소에 집을 구하는것도 쉽다.
그렇게 해서 아드지에 방 12개의 작은 저택과 영도 필령궁 근처의 방 8개짜리 소형 저택이 환인의 수중에 들어왔고, 집 관리에 남매를 채용한 것이다.
지구였다면 아동학대니 뭐니 인권단체가 벌떼같이 일어나 환인의 인생을 말살시키려 했겠지만, 이곳은 다른 차원인 니오네브레스.
오히려 7살 때부터 영성의 저택 관리인으로 교육받는 것은 굉장한 출셋길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현재 아르 아라 남매는 하우스 키퍼인 튜티의 교육과 지도아래 입주 하인, 하녀로써 해야 할 일을 배우는 중이다.
좀전의 차 시중도 그런 교육의 일환.
차를 거의 다 마셨을 즈음 튜티가 영도 소속임을 드러내는 영혼 불길 문양의 회색 숄을 두르고 나타났다.
=환인 성자님. 아드지에 저택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허락하신다면 가서 저택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예? 아, 바쁘신 시간을 빼앗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닙니다. 집주인이 영혼사라는 걸 집 주변 주민들에게 확인시켜주어야 아이들이 지내기에 안전해질 테니까요.”
튜티는 성자님의 이야기에 살짝 감동했다. 설마 거두어들인 고아 아이들의 안전까지 생각해서 움직이신다니…….
=곧 준비하겠습니다.=
튜티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서둘러 아르 남매를 찾았다.
원래는 자신 혼자 내정사무기관 소속임을 증명하는 회색 영혼불꽃 숄을 걸치고 갈 생각이었는데, 성자님이 같이 가신다면 남매도 데려가 눈도장을 찍는 게 맞다.
남매를 부른 튜티는 재빨리 어린아이용 케이프를 입힌 뒤 거실로 나가 환인을 아래 도시 아드지로 안내했다.
영도 소속 마차를 타고 내려와 저택에 도착한 환인은 생각보다 더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저택을 볼 수 있었다.
“여기입니까.”
=네, 성자님. 주변에는 아드지의 재력가들과 인사들이 많이 거주하며 건너편 거주구에 트라프로넨 라드원 영성님의 저택이 있기에 주변 치안과 안전 또한 보장되어있는 곳입니다.=
쿠에 네 마리가 이끄는 영도의 검은색 영혼불꽃 무늬 마차가 나타나서일까. 주변 저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흑색 영혼불꽃 문장이잖아……. 어느 영성님께서 오신 거지?=
=하지만 여섯 영성님들은 다른 거주구에 저택을 마련하셨는데? 영성님들 중에 이사하신다는 분이 계셨나?=
=야, 야야. 그분이다. 이번에 새로 나타나신 녹색 성자님! 그분께서 우리 거주 구역에 저택을 마련하시는 거야!=
=헉. 그러고 보니까 보름 전에 녹색 성자님이 도착하셨다는 소문이 돌았잖아…… 진짜야?=
웅성거리던 주민들이 순식간에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 내무기관 아가씨 말일세. 어깨 숄을 보면 상급 기관원용 숄이잖나. 대화하는 사람은 누구이길래 저렇게 태도가 정중하지?=
=혹시 저분이 녹색 성자님이시라거나…….=
=에이, 이 사람. 저 사람은 검은색 머리카락이잖소. 녹색 머리카락이 아니오.=
=응?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니신다고 녹색 성자님이라 부르는 거 아니었소……?=
주변 저택의 고용인들, 그리고 저택의 주인들이 무수히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운 저택에서는 창문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어 구경하기도 한다.
환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택으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구조는 심플했다. 지상 2층에 지하 1층, 다이닝 룸 하나와 부엌 하나, 욕실 둘, 화장실 셋에 12개의 방.
모든 방에는 난방 및 냉방 마도구가 설치되어있고 상·하수 또한 청소용 액체 괴물인 스림이 서식하고 있어 청소나 청결에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정원은 약 100평 정도로 작은 텃밭과 과수도 심겨 있어 조경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
=성자님, 마음에 드십니까?=
“자주 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훌륭하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면 내무기관에 연락을 넣어 거래 체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르 아라 남매는 앞으로 이 궁궐 같은 저택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설레는지 은색 여우 꼬리를 잠시도 쉬지 않고 좌우로 흔들며 기뻐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환인 입장에서는 아직 어린 둘이 이 저택 전부를 관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애초에 이 세계의 아이들은 지구인과 비교해 훨씬 튼튼하다.
튜티가 알아서 잘 가르치겠지 하고 금방 신경 껐다.
=아, 그러니까 검은 머리 그 남자가 성자님이라면 왜 곁에 영혼 기사가 한 명도 없으시냐고. 그 사람은 성자님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내무기관 상급 기관원이 계속 정중하게 대했잖아! 상급 기관원이 정중하게 대하는 사람이 성자님 말고 또 있겠냐고!=
=맞아맞아! 저 저택을 보러 온 분이 영혼사님이나 상급 영혼사님일리는 없잖아!=
=하지만……!=
=그래도……!=
튜티와 남매를 데리고 저택을 나온 환인은 주변에서 자신의 정체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작은 소란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 튜티가 나서려 했지만, 이런 상황이 되길 원했던 환인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지했다.
‘적당히 모였군.’
이쪽으로 향한 시선만 500쌍이 넘는다. 녹색 성자가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저들을 통해 금방 퍼져나갈테니 이후에는…….
이후 계획을 생각하던 환인은 주먹을 가볍게 쥔 뒤 가슴께까지 올렸다.
=서, 성자님?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앞으로 살아가야할 곳입니다. 한 번 정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네? ……앗.=
환인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튜티는 ‘이래도 되나?’하며 망설였다.
영성의 혼령주는 그녀도 여태까지 한 번도 못 본 기술이었기에 살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그녀의 머릿속에 1,000페이지 분량의 예절 작법서가 파라라락 넘어갔지만, 아드지에서 혼령주를 펼쳐서는 안 된다는 항목은 없었다.
튜티는 설렘을 억누르며 아르 아라 남매를 데려와 잠시 후면 굉장한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속삭였다.
그 상태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적당히 모이길 기다렸던 환인은.
“…….”
평온의 빛기둥을 비교적 약한 힘으로 펼쳤다.
두쿠우우웅—
=으허억?!=
=어어!?=
심장을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빛의 기둥이 삽시간에 주변 수백 미터를 집어삼키면서 하늘 높이 솟구친다.
웅웅거리면서 하늘을 꿰뚫은 채 퍼져나가 나가는 거대한 빛의 파문.
아드지 상공을 뒤덮은 회색 구름이 그 빛의 파문에 떠밀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조금 우중충한 겨울의 색으로 물들어있던 도시에 밝고 화사한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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