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화 〉 471 소녀가 졌소
* * *
대성녀의 뒤에는 은근히 반가움을 내비치는 이엘카타와 며칠 전 인사를 나눈 영사교육기관의 기관장, 사슴 귀의 영성이 있었다.
볼일 때문에 먼저 와있다가 자신의 도착 소식에 나와보기라도 한 걸까.
세 명의 여자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니누를 다시 실체화시켰다.
마지막에 멋대로 혼옥으로 변해버려 변화를 모두 확인하지 못해서였다.
푸화아악—
흑옥을 꺼내 의식을 집중하자 최루탄이 터진 것처럼 흑옥이 시커먼 안개로 변하더니 삽시간에 사람의 형태를 갖춘다.
그 실루엣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아인?人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두 다리로 서 있긴 하지만 구부정한 자세. 몸은 여자의 굴곡이 드러나는 가녀린 체형인데 팔다리는 꼬챙이처럼 길고 뾰족하다.
온몸이 검은 기운에 뒤덮여 맨살은 보이지 않지만, 유일하게 얼굴만 검은 기운이 뜯겨나간 것처럼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시작된 하얀 빛의 균열이 부푼 가슴과 어깨, 팔, 등 뒤로 이어진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흑과 백의 대비가 강렬한데 거기에 마약 중독자처럼 흐릿한 두 눈이 더해지자 기묘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니누와 마주하고 있던 백려강이 침을 꼴깍 삼키며 환인의 뒤로 슬그머니 숨을 정도.
「그으으으—…….」
환인은 낮게 그르릉거리는 니누를 잠시 살펴보다가 다른 들개 전사단의 악령을 꺼냈다.
그 악령도 니누와 여러모로 상태가 흡사했다.
악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계약 의사를 비치자 긍정의 뜻을 나타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번에 영기를 밀어 넣지 않고 천천히 주입량을 늘려본다.
「으… 끄으…….」
정수리를 통해 영기가 흘러 들어가고 있으니 변화도 천천히 이어진다.
머리 쪽의 검은 연기가 흩어지듯이 사라지며 아이돌로 데뷔하면 크게 흥할듯한 순진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고 거기서부터 순백의 빛이 검은 연기로 뒤덮인 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과 같은 균열이 그녀의 몸 일부를 뒤덮지만, 균열은 니누와 완전히 흡사하지 않았다.
균열의 굵기는 니누보다 얇았으며 균열의 끝이 감자 뿌리처럼 멍울지기 시작한 것.
「끄으으으…….」
좀비의 신음같은 소리에서 계약이 끝난 것을 확인한 환인은 마찬가지로 10%가량의 영기가 소모된 것을 파악했다.
‘악령은 여덟. 하나에 영기를 10%씩 불어넣으면…….’
팔짱을 낀 환인은 아인 전사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서 있는 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젯밤 여자친구들을 몇 시간씩이나 괴롭힌 덕분에 영기는 100%에 가까이 확보되어있다.
여덟과 전부 계약하면 영기가 20%까지 줄어드니 평소였다면 그런 상황은 피했겠지만.
‘상관없겠지.’
이곳이 영도여서일까. 영기의 회복 속도가 다른 곳의 몇 배나 된다. 20%까지 감소하더라도 조금 휴식하며 영기를 받아들이면 50%까지는 금방 회복할 터.
환인은 대성녀 일행이 다가오는 걸 기감으로 느끼며 여덟 악령과 전원 계약을 맺어 흑옥으로 만들었다.
「아으으….」
「하아아아…….」
「으…….」
계약을 끝마친 여덟 전원의 형상은 개체 간의 몸매와 얼굴을 제외하면 다들 대동소이했지만, 균열이 마치 지문처럼 모두가 다르다.
‘불어넣어 준 영기가 많아지면 저 하얀 균열에 변화가 생기는 건가.’
그것도 확인해두어야겠다. 지금은 영기가 바닥이니 나중에.
영기가 20%까지 감소한 탓에 몸에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대성녀, 닌실=아나그와 이엘카타, 샤페=메이로 영사교육기관의 기관장을 돌아본 뒤 그녀들에게 차분히 고개 숙여 인사한다.
“오셨습니까.”
《…….》
인사를 건넸지만 대성녀와 두 명의 시선은 일렬로 주르륵 늘어선 여덟 영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대성녀는 입이 살짝 벌어져 곱고 하얀 치아가 드러나고 있을 지경.
그 이유를 깨달은 환인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흑옥을 여덟이나 동시에 다루는 건 대성녀도 무리인가 보군.’
기록실의 서적에도 영성에 관한 서술은 상세하지 않았다. 애초에 영성은 영도의 최중요 핵심 인사이자 직업. 일류를 넘어 특급 장인들도 자신의 기술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구두로만 전하는데 영성은 오죽할까.
게다가 자신은 현재 일반 기관원들 사이에서 영성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새벽의 빛이다. 새벽의 빛에 관한 자료는 그렇지 않아도 적은 영성의 1/10도 안 되는 수준.
대성녀와 영성에게 이것저것 캐물을 수도 있지만, 환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한 명 정도는 적대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전원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대성녀가 조금 정치적인 성향이 있긴 하지만 기본 바탕은 우호다. 질문한다면 성심성의껏 알려주겠지만, 환인은 신세 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냥 평범한 상식 수준의 지식도 아니고 영혼술의 궁극에 이르는 영성, 거기다 한발 더 나아가 시조라 불리우는 사람의 직업인 새벽의 빛에 대한 지식을 청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빚이 생긴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대성녀는 첫날 면담 이후 접근하지 않았다. 이엘카타를 통해 자신의 계획과 의도가 드러났을 거라 예상해서겠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빚을 지는 것은…….
아무튼, 환인은 흑옥 영혼을 쳐다보느라 기본적인 예의조차 까먹은 듯한 대성녀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정신을 차린 대성녀는 아, 뒤늦게 작은 탄성을 흘리고 가슴에 손을 올린 뒤 환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환인 성자님. 영도에서 잘 쉬셨는지 모르겠소.》
앉은 모습에서도 느꼈지만 이렇게 마주 서 있으니 대성녀의 어린 외모가 새삼 와닿는다. 키도 140cm 남짓한데다 가녀리기까지 하니 왜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하지만 대성녀는 대성녀.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실내 훈련장이었는데 그녀가 도착하고 나자 따스한 햇볕이 드는 아로마테라피 공간처럼 변했다.
환인은 그녀의 아우라 범위를 인지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성녀님과 영성님들의 배려 덕분에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안심되는 이야기로군. 비마르 영성에게 듣기로 기록실에서 한동안 두문불출하였다 들었는데…… 오늘 영교기관의 훈련장을 찾은 것을 보면 성과가 있었나 보오.》
말하면서 시선이 다시 들개 전사단의 여덟 영혼으로 향한다.
저들에 관해 묻고 싶다는 의도가 보이지만 환인은 일부러 한차례 튕겼다.
“부족한 상식을 간신히 습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보다 대성녀님 같은 분께서 연락도 없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아—…. 별것은 아니고 샤페 영성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 방문해있던 차에, 성자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존안을 뵐까 했소.》
환인이 입을 열면 그를 바라보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면 시선은 다시 흑옥의 영혼들로 향한다.
자신이 모르는 지식을 갈망하는 중학생 소녀 같은 모습에 환인은 웃음을 잃지 않고 물었다.
“제가 어떻게 여덟이나 되는 흑옥의 혼과 한 번에 계약한 것인지 궁금하신가 봅니다. 이전에도 흑옥을 다루었던 거 같은데 오늘 갑자기 계약한 것도 의문이신 듯하고 말입니다.”
《…소,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여덟 흑옥을 이렇게 꺼내두었다는 것은 여덟의 흑옥을 동시에 다룰 수도 있다는 뜨……읏……?》
=헉.=
=……!=
대성녀와 이엘카타, 샤페=메이로는 환인의 왼팔에서 갑자기 백 수십 개의 영혼 구슬이 나와 빙글빙글 도는 장면에 입을 쩍 벌릴 만큼 놀랐다.
아무리 회색 혼옥이라지만 그걸 백 개 넘게 동시에…… 잠깐, 저거 혼옥은 맞긴 한 건가? 크기도 그렇고 색도 조금…… 기존 혼옥과 다른듯한데?
“저는 이것들을 혼옥이 아니라 영혼 구슬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쪽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혼옥, 흑옥이지요.”
늘어서 있던 들개 전사단을 흑옥화시켜 들어 보이자 세 여인의 눈에 혼란이 깃든다.
《잠깐, 환인 성자님. 그 말씀은 저…… 당신의 손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 혼옥이 아니란 말씀이시오?》
“혼옥이지만 혼옥이 아닙니다.”
환인은 영혼 구슬의 절반, 중급 정령 구슬은 제외하고 하급 정령 구슬만 모두 해방했다.
한꺼번에 풀려난 색색의 정령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일부는 ‘이제 됐어.’ 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일부는 ‘좀 더 놀아줘~.’하며 환인의 머리카락이며 로브 자락 사이로 기어들어 간다.
=영혼이…… 나오지 않아…?=
혼옥이 사라졌음에도 나타나는 영혼이 없자 인록족의 샤페=메이로는 의아함에 중얼거리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대성녀와 이엘카타를 발견하곤 재차 미간을 좁혔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두 분의 눈에는 뭔가가 보이는 걸까?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정령? 지금, 그대는 정령을 혼옥…이 아니라 영혼 구슬로 다루고 있었다는 거요?》
“정령도 혼령과 마찬가지로 령입니다. 아니 될 게 있겠습니까.”
《그 무슨 말이 안 되는……! 정령은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요! 그런 그들을 부린다는 건 자연을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혼령과는 대분류 자체가 다른 것이오!》
“하지만 저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그의 손에 남아있던 정령들이 다시 영혼 구슬로 변화하는 걸 본 대성녀는 표정이 망가졌다.
부정하자니 눈에 그 증거가 있다. 긍정하자니 이제껏 쌓아온 상식이 무너진다.
대성녀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며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에게 혼돈이 느껴지긴 하였으나 설마 상식까지 파괴하는 자였을 줄은…….》
환인은 그런 대성녀의 조그마한 푸념에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성녀님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장난을 쳐버렸군요.”
《…….》
귀여워? 내가?
이엘카타와 샤페=메이로의 표정이 조금 괴상해지고 대성녀도 해괴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환인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아이들…… 정령들은 재미있다며 절 도와주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었지요. 혼옥이 아닌 영혼 구슬이라고.”
《으음. 정식 계약을 맺지 않고 정령들에게서 힘을 빌리고 있단 말씀이시군. 새벽의 빛은 그런 것도 가능한 거였나…….》
“그보다 저분들의 수업을 저희가 방해하고 있는 듯하니 자리를 옮겨서 더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 말씀대로군. 샤페 영성, 응접실로 안내해주시겠나.》
=예. 이쪽으로.=
아무래도 영도는 검소가 특징인가 보군.
오래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고풍스러움이 묻어나는 단출한 응접실.
환인은 대성녀, 샤페=메이로, 이엘카타, 백려강과 탁자 하나를 두고 빙 둘러앉아 입을 열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기록실을 열람하였을 뿐이지만, 영혼사와 영성에 대해서는 기록물을 통해 어느 정도 익혔다고 생각합니다.”
영성과 영혼사하고도 다른 특징은 새벽의 빛이라는 희귀 직업 때문이라고 대충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환인은 이 기회에 이들과 관계를 한층 개선하면서 그 의문을 풀어보려 했다.
일단 호감 다지기부터.
“그 덕분에 저는 한가지 결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용히 환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대성녀가 묻는다.
《어떤 결심이시오?》
“저는…… 솔직히 말해 여러분들이 이만큼 환대해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몇 분은 갑자기 나타난 저라는 존재를 못마땅해하실 거라 생각했고, 영성이신 분들 사이 알력과 파벌도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지요.”
《이곳을 보지 못한 이들이 의례 생각하는 것이군.》
이런 경험이 몇 번 있는 듯 대성녀의 여상한 대답에 작게 웃은 환인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 다름없는 저를 인정해주시고 대우해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결심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가진 영혼사로서의 능력을 알려주는 것.
“여러분들이 저에게 믿음을 주셨으니 저도 그 믿음에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하오만.》
저만한 남자가 하는 말이면 단순한 것일 리 없다. 좀전의 흑옥 다수 활용과 관계있는 이야기일까.
“사실 기록실에서 자료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저도 제 자신이 영혼사인지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환인 성자님께서는 누구보다 어엿하신…….=
사슴처럼 맑은 눈동자에 아름다운 회색, 갈색 머리카락이 브릿지처럼 나 있는 처녀(107세) 샤페=메이로의 이야기를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저는 빛의 강을 걸은 직후부터 영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곤충이나 벌레처럼 작고 약한 생명을 제외한, 동물이나 짐승, 괴물, 사람의 혼을 모두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들과 계약을 맺지도 않고 힘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
=……!=
“그 힘을 바탕으로 혼재였던 한 소녀를 구해 승천시켜준 뒤 영혼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혼과 감응도 할 수 있었으며 영혼에게 강제력으로 지시도 내릴 수 있습니다. 당장 그때부터 영혼 구슬을 다룰 수 있었는데 이런 제가 영혼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닌실=아나그가 대성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영혼사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오. 영혼의 안녕을 위하여 영혼을 위무하고 승천으로 이끄는 자는 누구나가 영혼사라 할 수 있지. 다만……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백성들을 등쳐먹는 악독한 인간들 때문에 영혼의 위무는 영혼사가 하는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일 뿐. 환인 성자님은 누구보다도 영혼사다우시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직업자로서의 영혼사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앗. 으, 음.》
환인의 웃는 얼굴 딴지에 닌실=아나그는 볼을 살짝 붉히며 입을 다문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샤페=메이로가 진중하게 물었다.
=환인 성자님은 처음부터 새벽의 빛이셨던 것입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린덴 촌락…… 그곳에서 여러분들이 새벽의 빛이라 부르는 직업으로 재각성하지 않았나 추측 중이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아우라 무발현자여서 알아볼 방법이 없더군요.”
=새벽의 빛으로 각성하신 것도 아니실진대 그러한 능력이 생겼다면, 빛의 강까지 경험하셨다면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겠습니다…….=
이야기만 들으면 일반 직업인 영혼사, 영혼사의 상급직인 영성, 영혼사의 희귀 직업인 새벽의 빛까지. 영혼 계열의 직업 특징이 모두 나타났으니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새벽의 빛이 아니었고 중간에 재각성을 했다면…….
영사교육기관장으로써 영혼사에 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한 샤페=메이로는 한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유일 직업…….=
《으음.》
대성녀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신음을 흘렸고 환인도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희귀가 있다면 유일도 있는 게 당연지사. 하지만 자신이 그 유일 직업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영혼사.
영혼사의 승급직인 영성.
영혼사 계통 희귀 직업인 새벽의 빛.
그렇다면 영혼 계통의 유일 직업은 무엇일까.
환인은 여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유일 직업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는 모습에 새삼 자신의 체질이 아쉬워졌다.
위상류의 위상력 거부 현상만 어떻게 한다면 아우라를 드러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이런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될 텐데 말이다.
이엘카타와 백려강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걸 느끼며 환인은 더더욱 표정의 가면을 단단히 쓰고 대성녀에게 말했다.
“아무튼, 대성녀님이 의문시하셨던 것은 이런 겁니다.”
검은 영혼, 악령을 거두긴 했으나 당시에는 영성의 혼옥 계약 같은 것은 몰랐으며 그녀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정에 알소프의 영주가 그녀들에게 큰 원한을 사는 일이 있었다는 것.
그걸 해결해주었지만, 그녀들은 악령으로서 원한을 내려놓고 성불하는 것이 아닌 속죄행을 위하여 자신에게 혼마저 맡겼다는 것.
자신은 그녀들을 영혼 구슬로 만들어 혼옥 보관고에 담아 지니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방금 훈련장에서 보았다시피 제대로 된 계약 방식을 알게 되어 그녀들과 정식으로 혼옥의 계약을 맺었다는 것.
대성녀는 조금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성자님도 공부하셨다니 아시겠군. 영혼과 계약은 자신의 영기를 영혼에게 대가로 넘겨주며 맺는 것이기에 한 명의 영혼과 계약해도 며칠은 피로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성자님께서는 여덟 영혼과 동시에 계약하고도 멀쩡하시군.》
거기에 일반적인 영성이라면 많아도 셋, 보통이 두 명의 영혼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거늘 여덟이라니…….
“…….”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환인은 대성녀의 이야기에 이 순간 자신이 유일 직업이라는 걸 강하게 체감했다.
수십, 수백의 영혼을 한 번에 성불시켜도 별로 피곤하지 않으며 영혼 구슬과 혼옥을 대량으로 다뤄도 영기에 큰 소모는 없다. 영혼 여럿에게 명령도 내릴 수 있으며 동시에 여럿에게 강령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영기의 양은 일반 영혼사의 약 50배. 영성과 비교해도 수십 배 수준이다.
여기에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 상대의 영기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까지…….
영혼사와 영성과 새벽의 빛의 장점을 모두 가진데다 특별한 능력까지 있는 셈이니 유일 직업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지경이다.
“확실히…….”
환인이 조그맣게 꺼낸 이야기에 여자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그를 쳐다본다.
이어질 말을 재촉하는 듯한 그 모습에 환인은 아드네빌라에게 했던 짓을 이야기했다.
4중첩 영혼 화살을 그에게 쏘자 기겁하며 피했다는 것.
그땐 별생각 안 했는데 신수 격인 용이 피하고서는 역정을 낼 정도라는 건 용의 위상류와 역쇄류를 꿰뚫고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만한 위력을 평범한 직업이 낼 수 있을까?
환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대성녀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드네빌라가…… 성자님의 공격?을 피했…다고?》
“샤페 메이로 영성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래도 저는 유일 직업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희귀 직업을 얻은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엘카타와 백려강이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샤페=메이로도 납득간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안주머니 속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성녀는 단단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환인 성자님. 소녀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시오? 필령궁에서 잠시 자리를 가졌으면 하오.》
“설마 또 저에게 후계자 자리를 받으라 강권하실 생각이십니까.”
순간 표정이 무너졌던 대성녀는 볼멘 표정으로 이엘카타를 째려보았다가 조금 처량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설마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선언해야 할 줄은 진정 생각도 못 하였는데…….》
“…….”
환인이 좀 더 확실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처럼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니 입매를 실룩거리던 대성녀는 슬쩍 손을 내려 애써 자신과 눈을 피하는 이엘카타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면서 말했다.
《소녀가 졌소. 성자님에게 다시는 대성자가 되어 영도를 이끌어달라 하지 않을 테니 필령궁으로 와 소녀와 잠시 자리를 함께 해주셨으면 하오. 아무래도 성자님의 직업에 대하여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부탁이오.》
“제 직업을 확실히 할 수단이 있는 겁니까.”
《우리 일족에게 대대로 전해져오는 비술이 있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응접실의 여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그만 일어설까요.”
=네, 성자님.=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