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6화 〉 470 소녀가 졌소
* * *
영도에는 여섯 기관과 하나의 부서가 존재한다.
외교통상기관, 영사육성기관, 내정사무기관, 지역순행기관, 술식연구기관, 역사교육기관.
우선 외교통상기관.
이름대로 외부와 소통하는 영도의 외교부다. 타국 및 타 도시의 원조와 후원, 성불행 요청 업무 등을 담당한다. 윤년마다 돌아오는 승령천제 때가 가장 바쁜 시기.
영사육성기관은 내부에 두 개의 부로 나뉘는데 한 곳은 영혼사 각성을 목표로 하는 이들의 수행을 돕는 곳, 다른 한 곳은 영혼사로 각성한 사람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어엿한 영혼사로 만드는 영혼사 전문 육성 기관이다.
내정사무기관은 이름대로 국가의 내무부처럼 영도의 내정을 맡는다.
영사육성기관과 연계하여 영혼사로 각성하지 못한 수행자들을 영도와 영도 아래 도시 아드지의 직업을 알선하는 것도 내무기관의 업무 중 하나.
지역순행기관은 영도 인근 지역 순찰 및 치안 안정을 담당한다.
북쪽으로 이블팩션 접경지가 닿아있기에 격렬한 전투도 심심치 않게 벌어져 가열차게 단련되는 이들이며, 지역순행기관 소속 기관전투원들의 전력은 여느 대도시의 상급 기사단 못지않은 수준.
영도의 무력을 상징하며 영혼 기사 지원자들의 교육과 단련도 맡고 있다.
술식연구기관은 영혼사와 영혼 기사들이 사용하는 마도구와 마도기의 제작 및 제공, 대여하며 술법과 영혼술을 연구하고 필요한 영혼사들에게 가르치기도 하는 최중요 기관이다.
역사교육기관은 조선왕조실록처럼 영도의 역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기록하여 역사로 남기는 기관이다.
그러다 보니 영도와 관련되어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며, 영혼사도 영도의 일원이고 대륙 전체를 떠도는 영혼사들이기에 그들이 보고 듣는 것까지 모두 수집하는 명실상부한 대륙 역사의 결정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여섯 기관은 우열이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대등한 입장이다.
그리고 이 기관들의 위에는 현시대의 대성자 혹은 대성녀가 기거하는 필령궁이 있다.
유르파와 이실리테가 술식연구기관으로 떠나고 잠시 후.
영도의 내정사무기관에서 보내온 임시 저택 관리인, 중급 영혼사 이상인 이들에게 한 명씩 붙는 하우스 키퍼에게 여우 남매와 쿠에들을 맡긴 환인은 안느와 백려강을 데리고 비마르 영성의 역사교육기관으로 향했다.
필령궁과 인접한 역사교육기관의 외견은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이었다.
중요한 기록물이 다수이며 대성녀도 종종 방문하는 곳이기에 영도 내에서도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는 장소.
그러한 곳에 도착한 환인은 입구를 지키는 기관위병의 경례를 받으며 내부로 들어섰다.
=신분 확인 안 하네?=
조용하고 청아한 내부로 들어선 안느가 옆에서 걷고 있는 백려강에게 속닥이자 백려강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환인 님이 입고 있으신 검은색 로브 때문이에요. 저 로브가 영성급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거든요.」
=저거 하우스 키퍼로 온 튜티 씨가 가져온 그 로브지? 어쩐지 멋진 로브더라니.=
갈색 머리를 곱게 땋은 처녀를 잠시 생각한 안느는 회색의 영혼의 불길이 수 놓여 있어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검은색 로브의 뒷모습을 구경하다 시선을 복도로 돌렸다.
직사각형의 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지만 벽에서 은은한 위상력이 느껴지는 게 건물 전체에 술법이 부여된 듯한 느낌.
성벽이나 방어 구조물에 술법진을 새겨 방어력이나 내구도를 높이는 건 봤지만, 건물에 통째로 위상력을 퍼부어 만든 것은 처음 본다.
“이쪽이다.”
=응.=
바로 기관장인 비마르 영성에게 가는 건가?
살짝 긴장하면서 환인의 뒤를 따라간 안느는 잠시 후 평범한 10평 남짓한 집무실에 도착했고, 그 집무실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야 여기가 역사교육기관장의 집무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검소하네.’
영도의 최고 지위인 대성녀의 주거지도 규모 면에서는 검소했지만, 이국적인 색채 덕분에 예술적인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이곳은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며 영도를 이끌어가는 영성의 집무실이 아니라 어디 이류 상단의 사무실이라 해도 믿을 지경.
약 10평 남짓한 방, 이전의 아메리카 흑곰 머리에 환인과 같은 검은색 영혼불길 로브를 입은 비마르가 창문을 등진 책상 앞에 앉아있다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환인 성자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폐를 끼치러 왔습니다.”
비마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환인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마주 인사한다.
=하하하. 폐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이…….=
“예. 그녀가 어제 말씀드렸던 제 영혼 기사입니다. 안느.”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 환인 성자님의 영혼 기사이자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 안느입니다.=
비마르가 방문했을 적 그를 안내했던 안느는 정중히 그에게 인사를 올렸고, 비마르도 두 손을 포개듯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를 받아준다.
“그러면 안느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비마르에게 안느를 부탁한 환인은 백려강과 함께 곧장 대서고로 향했다.
대서고라 해도 환인에게는 현실의 마을 도서관보다 못한 장서량일 뿐이지만, 책이라는 게 드문 니오네브레스에서는 충분히 대서고라고 할 수 있는 수준.
=…….=
“…….”
대서고의 사서에게 살짝 묵례하며 들어온 환인은 곧장 어제 보다 멈추었던 영혼사의 갈래와 탐구라는 대백과사전 두께의 책을 가져와 펼쳤다.
「환인 님. 저는 이쪽에서 계속 보고 있을게요.」
백려강도 세계와 영도의 비사(전 12권) 중 11권을 보러 간다.
역사교육기관의 목적은 영도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거다 보니 다른 기관의 문서와 자료 또한 보관하고 있다.
영사육성기관과 술식연구기관의 자료도 쌓여있기에 환인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한 영혼사와 영성의 기본과 기초 능력 파악에 주력하는 중이었다.
환인은 자신에게서 영기와 원기를 받아 직접 책장을 넘겨보는 백려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양장본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영도에 머무르려 하는 시간은 고작 한 달.
그도 속독술을 조금은 쓸 줄 알지만 그렇다고 하루에 10권씩 읽는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그냥 읽기만 하는 것도 아니니 이런 속도로 2천 권을 넘어가는 대서고의 자료를 모두 훑어본다는 것은 어불성설.
영도의 역사와 대륙의 숨은 비사, 영도와 사대 국가의 연관성까지 익히기에 한 달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랬기에 환인이 꺼내든 패는 백려강의 동원이었다.
자신이 영혼사와 영성에 대해 알아보고 있을 때, 6급 호족 가문의 차녀로서 정식 고등교육까지 받은 백려강에게 세계정세 파악과 정보의 수집을 지시한 것.
백려강이 책에 집중하는 것을 보며 환인 자신도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환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도를 여자 버전으로 그린 그림 주변으로 여섯 종류의 구슬이 그려진 페이지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영혼사의 능력 분류는 웨이포드에서 이엘카타에게 들은 것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1급은 영혼사로 각성한 직후.
2급은 대기 중에 영혼의 음?과 태양의 양?을 느끼게 된다. 이 두 가지가 훈기와 양기로 변해 몸에 차곡차곡 쌓이는 단계가 2급.
3급은 영혼을 볼 수 있게 된다. 숙련도에 따라 선명도에 차이가 있지만, 영성급이라 해도 자신만큼 선명하게 볼 수 없다. 기껏해야 흐림 필터를 씌운 정도.
영혼사 활동은 2급과 3급 사이부터 가능하다. 말을 듣지 않거나 난폭한 영혼을 벌하기 위해 술식연구소에서 나누어주는 영혼사의 지팡이로 양기를 움직여 영혼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4급은 영혼과 미약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등급.
5급은 영혼과 대화할 수 있으며 영혼이 가진 힘을 일부 빌릴 수 있게 되는 단계. 이때부터 아우라의 형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6급은 영혼의 기억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혼에게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이때부터. 6급부터를 상급 영혼사로 간주한다.
7급은 영혼과 동조 할 수 있다. 아우라가 확연히 변모해 후광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8급 이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나는 각성 직후부터 4급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영성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지.’
대성녀인 닌실=아나그는 자신을 새벽의 빛, 영성이라 했다. 영도에서 가장 높은 이가 그리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영성이라고 보겠지.
하지만 환인은 순순히 납득하지 못하고 의문의 씨앗을 심었다.
아드네빌라는 자신의 정체와 연유를 꿰뚫어 보고 그에 걸맞은 추리와 판단을 내놓았었다.
다른 차원의 이질적인 존재로서 우연히 각성하여 반 억지로 니오네브레스에 편입된 이레귤러라고 말이다.
그러나 같은 신수라고 여겨지는 닌실=아나그는 자신을 영혼사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신수도 그 격과 지식의 차이가 있는 걸까.
환인은 팔짱을 끼고 여자 알몸을 그린 인체비례도를 응시하면서 아드네빌라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아드네빌라가 해준 이야기는 평범한 생명체로서는 접할 수 없는 세계의 진리와 비밀이었나.’
백려강이 현재 읽고 있는 ‘세계와 영도의 비사?史’는 환인이 부탁해서 보고 있는 책이다. 혹시 읽다가 다른 차원에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되면 알려달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권이 남을 때까지 차원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차원간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 세계에서 아는 사람이 매우 극소수라는 것.
‘대성녀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드네빌라와 나눴던 회화를 대성녀에게 이야기해줘야겠다는 판단이 안 선다.
‘그런 건 그렇다 치고.’
환인은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백려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기록실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영성의 혼옥에 관해서였다.
자신의 영혼 구슬은 구슬화의 유지 시간이 영혼 구슬 개수에서 곱하기 2시간이다.
하지만 비마르를 필두로 다른 영성들의 혼옥 보관고에 든 영혼 구슬들은 하나같이 한 달에서 수년까지 다양했다.
궁금한 것은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느냐였다. 그리고 며칠간의 확인 끝에 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성은 사람의 영혼과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계약된 영혼은 혼옥이 되어 영성의 힘이 되어주는데, 이 혼옥은 한 번 쓰더라도 영혼이 성불하지 않고 계속 구슬로 남으며 구슬의 유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용도를 달리해 쓸 수 있다.
쓰는 방식도 영성에 따라 다르다.
비마르 영성은 생전 6급 빛의 법술사 영혼과 계약을 맺어 그녀의 능력을 끌어다 쓸 수 있다.
빛의 술법을 익히지도 않았으면서 6급의 빛 술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근접직 영혼과 계약을 맺은 영성은 자신의 영혼 기사에게 계약한 혼옥을 부여하여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괴물이나 짐승의 영혼은 쓰지 않아. 아니, 아예 그런 언급이 없다.’
어째서일까. 이 부분은 자신의 검증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튼, 계약 방식은 간단하다. 상대방과 의사를 교환한 뒤 상대에게 영기를 나누어주면 끝.
자신이 이때까지 영기를 나누어 준 영혼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멀쩡한 영혼은 구슬로 만든 적이 거의 없었던데다 있어도 영기를 넣어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들개 전사단은 영기도 넣어주었었고 그녀들의 한기도 갈취했었다. 그녀들의 복종 의사에 따라 그녀들을 영혼 구슬로 만들기까지 했었지.’
그래서 2주 넘도록 영혼 구슬이 유지되고 있고 검은 영혼 구슬에 남은 유지 시간이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 맞아떨어진다.
환인은 옆에 쌓아둔 책 중 한 권을 꺼내 어느 페이지를 펼쳐 그 글귀를 읽었다.
[영성은 영혼사와 달리 등급으로 그 힘을 구분하지 않는다.]
혼재 보관고를 만들면 영성의 시작, 혼옥을 만들면 영성의 초입, 그 후로 혼옥의 개수에 따라 숙련도를 나누는 식이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본인은 몇 급의 영성, 누구누구요.’가 아니라 ‘혼의 구슬을 몇 개까지 다루는 누구누구요.’라고 한다.
간단한 분류지만, 그 힘도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영혼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영혼이 상대가 아니더라도 보유한 혼옥의 힘으로 6급 직업자 정도는 간단히 제압해버릴 수 있다.
혼옥을 다루며 얻게 되는 영혼의 강제력을 산 사람에게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영도로 오는 순례길에서 촌민 한 명에게 했던 영혼 추출이 그 예다.
그런 능력을 영성은 원거리에서 언령만으로도 행할 수 있으며 숙련도가 높아지면 말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
탁.
‘영혼사의 갈래와 탐구’라는 책의 마지막장까지 읽은 환인은 하드커버의 표지를 덮었다.
기록실의 장서를 살펴 골라낸 21권의 책 중 마지막 권. 이것으로 영혼사와 영성의 능력에 관해 고찰해놓은 책은 전부 읽었다.
“…….”
전부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 도움은 복습이라는 의미에서의 도움이었지, 영성이라는 직업을 심층 탐구해 비전이라던가 미래를 구상, 유추한 책은 없어 장래에 대한 도움은 아니다.
유일하게 도움이 된 것은 혼령주 항목.
이엘카타가 전견시로 보았다던 혼령주. 그걸 들었을 당시에는 필살기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알고 봤더니 이미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프라버에서 썼던 평온의 기둥이 바로 혼령주였던 것.
‘이때까지는 빛기둥을 펼치면 영혼 구슬이 평온의 빛기둥에 휘말려 성불하거나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영혼 구슬을 재료로 문양 에너지까지 끌어 썼던 것이 빛기둥이었다.
평범한 회색 영혼 구슬로 사용한 게 그만한 위력이라면 악령인 흑옥으로 쓸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시 그 위력을 예상해보니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한 가지 풍경이 그려진다.
‘부패한 땅이 되어버리겠지.’
환인은 나중에 이엘카타를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녀가 전견시로 보고 알려준 덕분에……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알아냈겠지만 그녀 덕분에 좀 더 일찍 혼령주에 대한 걸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백려강. 지금부터 영사육성기관으로 가서 기술을 연습할 생각이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앗. 저도 따라갈게요.」
“그래.”
「……던 거예요. 그러니까 영도가 이때까지 외세의 침입도 없이 잘 지내왔던 건 다른 국가들이 영혼사님을 존중하기에 무사했던 게 아니고, 영도도 다른 국가들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했기 때문인 거였죠!」
“일반적인 배려와 존중은 무력에서 나오는 법이지.”
환인의 담담한 대답에 프라버에서는 알지 못했던 영도와 국가 간의 이야기에 흥분해서 종알거리던 백려강에 살짝 슬픈 미소를 지었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시기 하다못해 싸우기까지 하는 걸까요……?」
“그건 관점이 잘못되어있다.”
「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식물에 괴물까지…… 생명체라면 누구나가 생존본능과 투쟁본능을 가지고 싸우지. 사람들만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다.”
「…….」
“그 투쟁은 대다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에서 나온다고 본다. 여행하며 몇 번 본 적 있을 텐데. 동물들이 먹이를 두고 다투는 것.”
「그것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것도,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도, 영역을 두고 다투는 것과 침입자를 쫓아내기 위해 싸우는 것도 전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에서 나오지.”
「하, 하지만 식물도 다툰다고요……?」
“양분을 빨아들이기 위해 뻗는 뿌리, 광합성을 더욱 많이 하기 위해 뻗는 가지. 그것들도 전부 투쟁이다. 지혜가 없고 지성이 없는 그런 동물들도 남을 시기해서 싸움을 일으키는데 하물며 욕심이 가득한 인간이라면.”
후, 하고 냉소적인 웃음을 흘린 환인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려강.
그런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학교 건물 같은 영사교육기관에 도착한 환인은 자신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는 기관위병에게 살짝 목례하며 들어섰고, 곧장 운동장 같은 필드를 지나 영혼사 단련장으로 입장했다.
대학 체육관 같은 건물 내에는 마침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1~2급 정도로 보이는 아우라의 영혼사 세 명이 교관, 교수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과 수업을 진행중이었다.
족히 300평은 되는 실내, 대낮처럼 밝은 내부를 둘러본 환인은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혼옥 보관고에서 중급 정령 구슬 세 개를 꺼내 실체화시켰다.
「어~? 여긴 어디야~?」
「기분 좋은 기운이 가득해!」
「와아~!」
환연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물과 바람, 빛의 중급 정령 셋이 신기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말이 안 통하는데 가능할까 싶지만, 환인은 일단 강제력을 약하게 담아 물었다.
“혹시 너희들 중 나와 계약하고 싶은 정령이 있나. 대답해주었으면 좋겠군.”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모르겠어! 웅얼웅얼해!」
“…….”
하급 정령처럼 꽥꽥거리지 않아서 귀는 아프지 않지만, 역시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환인은 이제 자기 안주머니를 침낭처럼 쓰고 있는 환연을 꺼내 자신이 하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
자다 억지로 깨워져서인지 조금 토라진 표정을 짓던 환연은 그를 삐뚜름하게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차피 안 되는 일에 또 힘쓰네 하는 분위기.
「야아. 너희들 중에 이 사람이랑 계약하고 싶은 애들 있어?」
「싫어.」
「안해.」
「…….」
차례대로 바람과 물과 빛의 정령의 대답이다.
마지막 빛의 정령은 환연의 질문을 듣자마자 재미없다는 듯이 사라져버리기까지 했다.
환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 버릴듯한 정령 둘을 다시 영혼 구슬화해서 왼팔의 혼옥 보관고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환연은 백려강의 어깨에 앉아 핀잔을 준다.
「환인은 정령 친화력이 없다니까. 친화력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정령이 하는 말을 듣는지 모르겠지만, 계약 시도는 헛고생이야.」
그러니까 정령은 날 통하는 걸로 만족해— 라는 뉘앙스에 환인은 후 하고 웃었다.
“내가 정령과 계약해도 널 버리는 일 같은 건 없으니 안심해라.”
「……! 그, 그런 거 아니거든!?」
「앗, 그런 거였나요?」
「아니라니까!!」
환연이 갸아악 지르는 소리가 컸는지 저쪽에서 수업하던 수습, 견습 영혼사들과 교사가 이쪽을 쳐다본다.
수업을 방해할 의도는 없었던 환인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고 화났음을 어필하는 환연을 달래면서 들개 전사단의 두목 격인 니누의 검은색 영혼 구슬을 꺼내 들었다.
‘나는 영혼 구슬과 혼옥을 구분해야겠군.’
정령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동물이나 괴물의 혼과도 계약은 불가능할 거다. 여기에 앞으로 얻는 혼옥까지 전부 뭉뚱그려서 영혼 구슬이라 하면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
그보다 앞으로는 능력 있어 보이는 직업자를 발견하면 계약을 시도해보아야 할까. 직업자의 혼을 종류별로 수집하면 상당히 도움될텐데.
니누의 영혼 구슬을 실체화시킨 환인은 여전히 인외 귀신처럼 두 팔, 두 다리로 대지에서 엎드린 검은색 사람 형태의 니누를 응시한다.
「흥……. 그런데 쟤들은 왜 저렇게 소란이야?」
「환인 님이 흑옥을 꺼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환연과 백려강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린 환인은 니누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로 판단되는 부분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물었다.
‘니누. 나와 정식으로 계약하겠나.’
들개 전사단들 모두 혼옥화 되어있는 것으로 판단 중이지만, 일단 책에서 나온 대로 정식 계약을 시도해본다.
「으… 끄…….」
대답조차 못 하게 되었는지 신음으로 하겠다는 뜻을 전해오는 니누.
환인은 머리 부분에 손을 올리고 일단 영기를 10%가량 쭈우욱 밀어 넣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온통 검은색 아지랑이에 뒤덮여있던 얼굴 부분, 그중에서도 눈 쪽이 열리며 하얀빛의 선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뒤덮어간다.
그 순간 환인은 무언가…… 정신 일부가 니누와 연결된 것을 느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일단 양쪽에게 평등한 계약은 아니다. 영혼사가 영혼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듯한 느낌.
「서…엉자……님께…… 충…성을…….」
그렇게 말한 니누는 제멋대로 혼옥화되어 환인의 손에 내려앉았다.
“이게 혼옥인가……. 더 커졌군.”
500원짜리 동전만 하던 검은색 영혼 구슬이 작은 탁구공 크기가 되었고 유리처럼 반들거리던 표면에 코로나 같은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야아~! 환인, 대성녀가 왔다니까!」
흑옥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환인은 환연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고.
“…….”
흑옥에 시선을 고정하며 다가오고 있는 대성녀를 볼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