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75화 (475/813)

〈 475화 〉 469 소녀가 졌소

* * *

융숭한 저녁까지 대접받은 이엘카타는 뭔가 둥실거리는 기분으로 저택을 나와 필령궁으로 향했다.

스윽…….

저택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언제나처럼 호위 네 명이 소리 없이 따라붙는다.

=…….=

뿌려지는 별빛과 달빛 속에서 천천히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자니 오늘따라 필령궁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영도에 도착한 이후 셀 수 없이 오갔던 길인데.

휘잉­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몸을 휘감고 가는 것을 느끼던 중 이엘카타는 깨닫게 되었다.

진득한 미련과 아쉬움이 때문이다.

심장이 철렁하는 미래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긴 했지만, 사랑하는 님의 품에 안겨 기절할 정도로 애정을 듬뿍 받았었다.

창피한 일이 있었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검희님이 손수 만든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까지 가족처럼 포근하고 온화한 분위기에서 먹었다.

특히 저녁의 식사는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식사를 했던 경험이 없는 이엘카타에게, 가족의 사랑에 굶주렸던 그녀에게 천상의 만찬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이 밥을 먹는 건지 행복을 먹는 건지 모를 정도.

큰 식탁에 둘러앉은 일곱 명. 남자는 사랑하는 님뿐이었고 모두가 여자였지만, 추한 질투와 시기는 참새 눈물만큼도 없던 그 분위기.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엘카타였지만…….

=…….=

……자신은 그 안에 결코 낄 수 없다. 사랑하는 님이 안전하려면 자신은 영도에 있어야 한다. 영도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분은 한 달 뒤 영도를 떠나시니 자신이 어떻게…….

온갖 상념과 미련과 후회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걷던 이엘카타는 어느 순간 자신이 대성녀실 앞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오게.]

멍하니 5초 정도 서 있었을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장지문을 열고 들어간 이엘카타는 15살에서 성장이 멈춘 소녀 모습의 대성녀가 끌끌 혀를 차는 걸 보게 되었다.

왜 저러시는 걸까 생각하던 이엘카타는 대성녀의 손에서 손수건이 둥실 떠올라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곤 그제야 자기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흘린 눈물을 닦고 참으려 했는데, 대성녀의 온기가 담긴 손수건을 쥐자 숫제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끅끅 소리죽여 흐느낀다.

이렇게 괴로워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백려강 님에게 사과만 하고 돌아올 걸 그랬어…….

《그건 아니지.》

닌실=아나그는 측은한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미소로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인생에서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지. 기쁨이 찾아오면 뒤를 이어 슬픔이 찾아올 수 있고, 화가 닥친 뒤에는 복이 다가오기도 하는 법.》

=…….=

《그와의 첫 실연에 자네는 가슴 아픈 경험을 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그와 재회하였을 때 첫 실연의 아픔을 능가하는 기쁨을 얻었을 것이야.》

그 말대로다.

사과하는 것이라면 차후에 백려강 님과 따로 만나 사과하면 될 일이지만, 사랑하는 님을 보기 위해 굳이 저택까지 찾아갔으니까.

《오늘 큰 기쁨을 얻었기에 훗날 찾아올 슬픔의 크기가 짐작되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이네. 그러나 기억하게. 영원한 헤어짐은 없어.》

하지만…….

《세상이 넓다고는 하나 영의 세계에서 보자면 이 세상은 하나의 집안, 자네가 세상을 품을 만큼 마음을 넓게 가진다면 결국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될 것일세.》

자신의 가슴에 안겨 훌쩍이는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닌실=아나그는 손을 내려 그녀의 날씬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만지는 그녀의 크림색 눈동자가 빛의 운무를 흘리기 시작한다.

《또한 육체의 거리는 멀어지더라도 그보다 더 강한 인연의 끈이 생겨날 터이니… 만남과 헤어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야.》

대성녀님…….

머릿속이 어지럽고 감정이 북받쳐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슬픔이 쏟아져나오던 가슴의 구멍이 조금 메워진 듯해 이엘카타는 손수건으로 눈물이 흘러넘친 얼굴을 닦고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신수의 힘이 담긴 대성녀의 고사리 같은 주먹이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딱콩!

=아윽…!=

《그렇다 하여도 괘씸하구나. 그리할 낌새가 보이긴 했으나 정말로 사모하는 분께 쪼르르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모든 걸 고해바치다니.》

거의 멈추었던 눈물이 정수리의 고통에 다시 찔끔 흘러나왔던 이엘카타는 머리를 만지다가 억울한 마음에 회화 판을 들어 글을 적었다.

[저는 일러바치지 않았습니다. 백려강 님에게 사과하고…… 전견시로 보았던 것을 알려드렸을 뿐인]

글을 적어나가던 이엘카타는 순간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백려강 님에게 사과만 했을 뿐인데 그분은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마치 옆에서 함께 본 것처럼 알아차리셨었다.

전견시로 본 것을 알려드렸을 때도 놀라거나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담담히…….

멍한 얼굴로 대성녀를 바라본 그녀는 에휴, 쯧쯧 하고 혀를 작게 차는 걸 볼 수 있었다.

《홀로 이 세상에 떨어져 고작 2년 만에 그만한 위치에 도달한 성자님일세. 그만한 사람이 평범한 오성을 지녔을 리 있나. 자네의 말과 행동거지에 이쪽의 목적과 의도까지 전부 간파하였을 테지.》

=…….=

《이래서야, 소녀가 졌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나.》

제대로 된 지성 겨루기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패배 선언을 해야 할 판국이다.

대성녀의 장난기 섞인 한숨에 자신의 실수를 그제야 눈치챈 이엘카타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다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긴 해도 그 속에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됐네요.’라고 생각하는 게 훤히 보여 닌실=아나그는 괘씸함에 그녀의 볼을 꼬집어 응징했다.

이엘카타가 다녀간 이후, 환인이 영도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 서로 입을 맞춘 것처럼, 대성녀를 제외한 여섯 영성이 차례대로 환인을 방문해 인사하고 돌아갔다.

누군가는 호기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와 경의를 품고 떠났으며.

누군가는 의구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와 믿음을 품고 떠나갔다.

갑작스레 나타난 새벽의 빛을 믿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와의 만남 이후에는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왼팔의 어깨까지 뒤덮은 혼고??의 빛은 비교적 두꺼운 옷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렬했으며, 청색 영혼을 계약조차 맺지 않고 실체화할 수 있게 도와주어 곁에 두는 남자.

검은 악령의 영혼을 무려 여덟이나 흑옥으로 만들어 사역하며, 정령마저 혼옥으로 만들어 다루는 그 숫자가 물경 111개.

대성녀조차 스무 개 남짓한 혼옥을 다루는 마당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신의 힘에 휘둘리거나 힘에 취한 모습 없이 줄곧 예의가 발랐으며 어딘가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것처럼 학문적인 지식과 시야 또한 높기 그지없다.

알려진 그의 행보 또한 선행과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야성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냉철한 이율배반적인 분위기와 그런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단정한 외모까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그를 만난 영성들은 그에게 강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쪼르릉­ 짹짹

=……으~.=

유두가 비치는 얇은 티셔츠에 작은 끈팬티만 입은 모습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구겨져서 자던 안느는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아침햇살과 새 소리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산 중턱 공동 안쪽인데…… 왜 햇빛이 들어오는 거야…….=

동쪽에서 해가 뜨지만, 동쪽이 막혀 있으니 직사광선은 없어야 정상일 텐데.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처녀 귀신처럼 은발을 늘어트린 안느는 잠깐 그렇게 있다가 더듬거리며 침대를 정리했다.

그리고 모델처럼 늘씬한 다리를 휘적거리며 팬티차림 그대로 욕실로 향한다.

=안느 아가씨 좋은 아침.=

조금 썰렁한데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나 욕실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세안 중이던 유르파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엉… 언니도 잘 잤어…?=

=응. 아가씬 피곤해 보이네?=

하품하면서 탈의실 겸 세면장의 비어있는 세면대를 차지한 안느는 세안 준비를 하면서 조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30분 정도밖에 못 자서 그래…….=

=생각할 게 많았던 거니?=

=그런 거도 있고.=

머리띠로 앞머리를 정리한 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얼굴에 촤악­ 끼얹는다.

얼굴을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듯한 냉기에 으흐, 몸서리친 안느는 잠이 확 깨는 걸 느끼곤 빠르게 얼굴을 씻고 유르파가 만들어준 화장품으로 기초화장을 하며 말했다.

=한 달 뒤에 도령이 엄청 강해질 거라고 예고했잖아. 그 뒤에 메리아놀로 향할 거고.=

=그치.=

=좋은 일로 메리아놀에 가는 게 아니다 보니까 이래저래 좀 심란해져서 뒤척였던 거야. 어젯밤에 도령이 짐승처럼 덮쳐서 그런 것도 있고.=

=확실히 어제 자기는 조금 과격하더라……. 안느 아가씨가 첫 번째였으니까 가장 힘이 좋을 때 상대했지?=

=응. 영성들이랑 차례차례 면담한 거에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

자궁을 짓이길 듯이 거칠게 들어오던 지난 밤을 떠올린 안느는 다시 자궁이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히히 웃었다.

그의 넘치는 힘을 처음 받아들일 때가 제일 좋다. 자신을 이보다 더 원할 수 없다는 듯한 그 느낌이 중독적이라고 할까.

기초화장을 끝낸 안느는 세면장 한쪽의 캐비닛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과 언니의 옷, 이슬이 옷이 차례대로 가지런히 걸려있는 걸 보곤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이슬이 얘는 언제 세탁까지 했담? 요 며칠 유리 언니 따라다니느라 시간도 없었을 텐데.

=방수 화장품이 얼마 안 남았네……. 아드지에서 재료를 구할 수 있으려나…?=

아침 훈련복으로 챙겨입은 안느는 손가방을 뒤적거리는 유르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언니, 나 먼저 간다.=

=아? 응. 나도 곧 따라갈게.=

이전과 변함없는 그녀의 태도에 안느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탈의실을 나왔다.

며칠 전, 자신은 그녀들 앞에서 숨기고 있던 정체를 밝혔다.

밝히기 전에 꽤 많이 고민했고, 밝히면서 걱정과 긴장감을 품었었다. 이후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랬는데…….

뭔가 기쁘면서도 오묘한 기분에 으음. 팔짱을 끼고 조금 심각한 얼굴로 정원으로 나간 안느는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서 벌써 환인과 대련하고 있는 이실리테를 볼 수 있었다.

카각, 드드득­ 콰직 퍼버벅!

유르파의 강화술이 부여된 목조 대검과 목조 창이 공기를 가르며 1초에 수십 번, 허공에서 무자비하게 얽힌다.

간혹 공방을 뚫고 타격이 들어가지만, 맞는 것은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이실리테뿐.

창에 얻어맞더라도 왼팔이라 허벅지, 옆구리 가장자리 등 최대한 전투를 길게 이어가기 위해서 크게 지장이 없는 부위를 내어주는 이실리테지만.

=합!!=

이실리테도 마냥 맞지만은 않고 무게만 20kg이 넘어가는 중량화, 내구 강화술법이 걸린 대검을 젓가락처럼 휘두르며 환인의 공세를 막고 흘려낸다.

멀찍이 백려강과 비상이 잔디밭에 주저앉아 그 장면을 호기심 강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고 환인이 거둔 여우 남매도 입을 헤 벌리고 정신없이 쳐다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쟤들도 벌써 일어났네.’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지르는 여우 남매를 잠시 바라보던 안느는 다시 이실리테에게 시선을 주면서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에 이실리테의 동작이 새겨진다.

어느새 자신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환인과 이실리테의 동작을 분석하고 있는 안느다.

때로는 나비처럼, 때로는 벌처럼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환인에게 검격을 퍼붓는 이실리테.

‘이제 육체 굴레의 제약을 거의 벗어 던졌네.’

도령은 여러모로 변칙적인 존재니까 넘어가고.

보통 7급이 되어 승급을 눈앞에 두면 중력의 제약에서 벗어나 거의 탈 인간급의 동작을 보일 수 있게 된다.

위상력이 신체와 완벽한 비등을 그리면서 몸무게 정도의 무게는 물리법칙을 반쯤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늘을 막 날아다닌다거나 하진 못하지만, 대충 30m 높이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쯤은 가벼운 충격으로 끝낼 수 있는 수준.

이실리테는 현재 5급이라지만 희귀 직업인 검희다. 희귀 직업자의 등급은 현재 등급에서 보편적으로 +1이나 +2등급 정도 높게 보니, 이실리테가 곧 5급을 넘어 6급에 오른다는 이야기.

‘나도 빨리 성체술을 완성해서 실전을 시작해야 하는데.’

안느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대련을 지켜보다 환인이 허점을 드러내자마자 훈련용 목제 전투 망치를 들어 올리며 번개같이 뛰어들었다.

=아야야.=

대련이 끝난 뒤 안느는 정원석에 걸터앉아 고통을 호소하며 옷자락을 들췄다.

아까 기합을 넣으며 뒤를 공격하다가 “공격 직전에 지르는 기합은 자신의 공격 타이밍을 알려줄 뿐이다.”라며 호되게 반격을 당해서일까. 젖가슴에 푸르딩딩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진짜 창이었으면 심장이 꿰뚫려서 즉사했겠네.=

율이 언니 말대로 훈련용 목제 장비로 바꾸길 잘했다.

혀를 내두르며 손에 치유의 빛을 끌어내 멍이 든 부분을 주무르고 있으니 이실리테가 조금 인상을 쓰며 다가와 부탁한다.

=안느, 나도 어깨랑 가슴하고 옆구리 좀 치료해줘. 멍 때문에 아침 준비하는데 지장이 생기겠어.=

=이리 와. 먼저 해줄게. ……우와, 멍이 시꺼멓잖아!=

=주인님이 목제 창으로 무기를 바꾼 뒤에 더 무자비해지신 거 같…아얏! 아파!=

=당연히 아프지. 좀 참아.=

안느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그녀의 젖가슴과 내장이 전부 들어는 있는 걸까 의심스러운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으며 치유술을 걸다가 힐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이실리테가 고개를 기울이다가 =왜?= 하고 묻는다.

=아냐. ……음, 아닌 건 아닌데…….=

때마침 환인이 짜준 버피, 스쿼트, 플랭크, 크런치 15세트를 끝마친 유르파가 땀범벅이 되어 할딱이며 다가온다.

탈진한 것처럼 털퍼덕, 옆에 주저앉았다가 벌렁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는 유르파에게 시선을 준 안느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엊그저께 말이야. 내가…… 숨기고 있던 정체를 밝혔잖아.=

=응.=

=그거 기분 나쁘지 않았나 해서…….=

=그게 왜 기분 나쁜데?=

이실리테의 진짜 모르겠다는 태도에 더해 유르파도 헥헥거리며 말한다.

=후이, 며칠…… 안느 아가씨가, 눈치 보던 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후아.=

=그야 나만 과거를 숨기고 있었잖아. 이슬이 너도, 율이 언니도 전부 솔직하게 말했고 도령도 다 이야기했었는데…….=

그녀들은 결코 밝고 건강한 유소년기를 보내지 않았다.

이실리테는 암울하다고 할 만큼 어두운 어린 시절에 환인과 만나기 전까지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고 유르파도 의미는 다르지만 비슷한 삶을 보냈었다.

그 백려강도 새장 속 새처럼 자라다가 결국 도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지 않았나.

하지만 자신은 말도 못 할 만큼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고작 외모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돌며 온갖 우울한 척이란 우울한 척은 다 했지.

꽁.

안느는 자기 머리를 쥐어박은 이실리테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바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네.=

=……으잉?=

=주인님이 언제고 말해줬던 거 기억 안 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최대의 기만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뿐이라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운 내라고 격려해줄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이야.=

=…….=

=너도 그 일로 죽을 만큼 고뇌했고 가문을 나올 수밖에 없었을 만큼 힘들었잖아. 네가 겪은 고통이랑 나하고 유리 언니하고 려강이 겪은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거야. 해서도 안 되는 거고.=

이실리테는 그런 지적을 남긴 뒤 아침을 준비하겠다며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는 창피함이 밀려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 행동에 유르파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슬이 아가씨가 참 좋은 말을 했어. 그치?=

=……응.=

=우리도 들어가자. 난 아침 먹기 전에 좀 씻어야겠어.=

=어어….=

안느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가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슬이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자신의 고민과 걱정은 배부른 사람의 투정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실리테, 유르파, 백려강, 이엘카타.

그녀들이 겪은 일은 말 그대로 목숨이 위험했거나 위험할 수도 있는 일들 뿐이었으니.

하지만 마음가짐은 확실하게 변했다.

자신은 환인의 여자인 안느이자 이슬이, 율이 언니, 려강의 친구인 성투사 안느라고. 공주 따위가 아니라고.

아침 대련 뒷정리까지 마친 뒤 아침 식사 후, 환인은 안느를 불렀다.

“안느. 어제 비마르 씨와 대화하다 네 성체술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다.”

=응? 비마르 영성님이랑?=

“그래. 혼옥술의 강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네 성체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자초지종을 들은 비마르 씨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시더군.”

=어, 어떻게?=

“과거에 영혼사이면서 무투술에 진심이었던 분이 계셨다고 한다. 그분을 부르는 호칭이 영혼 수도사, 너의 성체술과 비슷한 개념을 바탕으로 맨손 무술을 단련한 분이셨다고 했지.”

=오.=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에 안느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때 외출 채비를 마친 유르파와 이실리테가 다가와 환인에게 인사했다.

=자기. 그럼 오늘도 술식연구기관에 다녀올게.=

=언니와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육보시를 위한 문인 연구 및 계량을 위해 며칠째 기관에 출퇴근하고 있는 유르파. 그리고 그런 유르파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호 목적으로 따라가는 이실리테.

환인의 경고대로 흡정족에서 종족 진화를 이루어 정현족이 된 유르파의 자궁 문신을 분석하고 조사하는 일에는 남자가 제외되어 여자들, 그리고 성별이 모호한 곤충계 소수 종족인 아드섹트들로 연구진이 꾸려졌다.

술식연구기관장도 여자이고, 문인 개량의 길이 열린 만큼 그녀가 직접 남자는 연구진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확답을 해주었지만 언제 말이 바뀔지 모르는 일.

환인은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 이실리테를 붙여 함께 보내는 중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당장 자신에게 알리라고 말이다.

그녀들을 배웅한 환인은 백려강과 함께 안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당연히 같이 가야지!=

이론이 거의 완성되긴 했지만 한걸음이 부족해서 실전 단계로 못 넘어가고 있었는데!

잘하면 자신도 영도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안느는 기쁜 얼굴로 탈의실을 향해 뛰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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