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74화 (474/813)

〈 474화 〉 468 전견시???

* * *

=……이엘카타 님, 아무리 저택이라지만 그런 모습으로 다니시면 안 돼요.=

알몸에 이불만 두르고 거실로 나가려던 이엘카타는 지나가던 이실리테와 마주쳤다.

그녀의 황망하다는 시선에 이엘카타의 수치심 게이지가 빠르게 상승한다.

아니. 저기, 그게…….

=모습이 엉망이시니 일단 씻으시는 게 좋겠네요.=

이엘카타는 그녀에게 손목이 잡혀 욕실로 끌려가며 빈손으로 허우적거렸다.

앗, 저기. 환… 성자님에게 급하게 드려야 할 말씀이……!

회화 판도 없고 아공간 주머니도 사라져 회화 카드를 꺼낼 수도 없다. 당황해서 수화로 말을 걸어보았지만.

=저는 수화를 할 줄 모르는데…….=

난감해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이엘카타도 덩달아 난감해졌다.

어떡하지?

=저, 이엘카타 님?=

=……?=

=이엘카타 님의 옷과 아공간 주머니가 너무 더럽혀져서 지금 세탁과 정돈 중이에요. 매우 급한 용무가 아니시라면 일단 씻고 나오신 뒤에 일을 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엘카타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키는 모습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살짝 벌어진 이불 사이로 군데군데 키스 마크가 찍힌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고, 아까 닦았던 백탁액이 그런 허벅지를 타고 다시 흐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자신이 지나온 자리에 마치 흔적을 남긴 것처럼 점점이 떨어진 자국까지. 이엘카타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위급한 일이지만. 그건 미래에 벌어질 일. 몸을 씻을 정도의 시간은 있을 거예요!’

샤워기를 들어 몸에 물을 뿌려가며 한참을 씻던 이엘카타는 똑똑, 욕실 입구 쪽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서 이실리테가 고개만 내밀고 말한다.

=이엘카타 님. 옷은 문 옆에 두고 갈게요.=

=……!=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렸던 이엘카타는 부끄러움에 물든 얼굴로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창피함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 위에 쏟아붓고 몸을 씻어나간다.

그녀가 메이드처럼 일행의 가사 전반을 책임진다지만, 그건 새벽의 빛이 되신 님과 플뢰족의 공주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그런 거지 원래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다.

홀로 6급 이형종과 싸워서 이기는 검희님이신데…….

몸을 다 씻고 허벅지를 벌려 또 흘러내리는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이엘카타는 얼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속옷과 로브를 챙겨입었다.

‘늦었어요. 빨리 환인 님께 전견시로 본 것을 알려드려야 해요.’

자신이 잠든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적어도 3시간은 지났을 테니 빨리…….

그리고 욕실을 나간 이엘카타는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실리테에게 회화 판으로 글을 적어 보여준 뒤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빠진 물건은 없으신지 확인해보셨어요?=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눈앞에서 주인님의 흔적을 마구 흘리며 다니는 이엘카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던 이실리테였지만, 주인님의 손님이시기도 하고 안느의 이야기에 따르면 메리아놀의 고위 귀족 가문의 아가씨인데다 영혼사이기까지 한 분이다.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습에서 안좋은 감정이 풀어진 그녀는 이엘카타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주인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계신다.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아니 될 말.

=주인님. 이엘카타 님을 모시고 왔어요.=

“그래.”

노을을 받으며 서 있는 환인의 모습에 좀 전의 잠자리를 떠올린 이엘카타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지만.

[환인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지에 관해서입니다.]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억누르며 본론을 꺼내들었다.

“…역시 그랬군요.”

역시?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기울였던 이엘카타는 일단 의문은 접고 자신이 전견시로 본 것을 종이에 열심히 적어 환인에게 넘겨주었다.

중간중간 교양을 위해 배웠던 미술로 삽화까지 그려가며 예지를 전달하는 이엘카타.

그의 주변에 서 있던 연인들이 함께 보고 있지만, 그녀들도 예지의 등장인물이다. 관계자이니 제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적어나간다.

“…….”

그렇게 모든 것을 전달해준 이엘카타는 놀란 감정을 드러내리라는 예상과 달리 차분히 예지를 읽는 그의 모습에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역시’라고 하셨지. 그 말은 짐작하고 계셨다는 걸까?

생각하던 이엘카타는 시작된 환인의 이야기에 살짝 긴장을 드러냈다.

“그러면 이 예지를 메리아놀의 엘위드리스 가문도 읽었겠군요.”

[네. 예지감 부서가 대응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전견시로도 환인 님과 네 분 연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 전견시라는 것이 예지술의 최고등급 기술인가 봅니다.”

[네. 1급부터 5급의 예지술 중 5급에 해당하는 술입니다. 엘위드리스 가문에 새로운 전견시 사용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은퇴하여 심산유곡에서 은거 생활 중이신 전전대 가모님 한 분뿐. 그분은 대외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셨으니…….]

예지에 등장한 이름리아와 가문의 귀족들을 상대로 검증 예지를 시작하겠지만, 전견시보다 떨어지는 4급이나 3급 예지술 정도로는 엘위드리스가 멸망하는 장면, 그리고 이름리아와 대화하는 몇 마디 정도밖에 유출되지 않을 거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이쪽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다는 이야기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 아냐? 그 혼령주라는 것도 이엘카타 아가씨라서 알아본 거라며.=

안느의 질문에 이엘카타는 공손히 대답했다.

[혼령주는 영성이신 분, 그리고 대성녀님의 직속 집행부 승보관 이상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엘위드리스 가문이 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겠지요.]

[하지만 현 엘위드리스의 가주이신 프슈드 오울 님은 희소한 예감의 보유자. 직감의 영역에서 이번 예지와 저의 관계성을 넘겨짚을 가능성과 그로 인한 추적의 손길을 생각하면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판단됩니다.]

=음…….=

이야기를 옮겨적은 것을 들여다보던 안느가 골치 아픈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 예지, 예언은 싫어. 예지의 대응, 예지의 대응의 대응, 그 대응의 대응을 대응하는 걸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거 같다니까…….=

=이엘카타 아가씨. 그럼 엘위드리스 가문이 우리 자ㄱ… 성자님의 정체를 간파하고 이쪽을 공격해올 수 있는 건가요?=

[맨정신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급을 괴멸시키는 인물에게 싸움을 건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더욱이 그 인물은 현시대의 성자님이자 새벽의 빛으로 판명이 난 분. 그분께 싸움을 거는 것은 곧 영도를 적대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4대 국가 전부와 싸우겠다는 뜻과 마찬가지예요.]

=그치만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들은 맨정신이 아닌 작자들이라고 하잖아.=

이실리테와 유르파, 백려강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하는 얼굴로 안느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으으으~ 답답한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벅벅 긁던 안느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어서 미안해. 나, 메리아놀의 플뢰 족 공주야.=

=……뭐어?=

=엑? 진짜?=

「헐. 근육 공주였어?」

「와아.」

그녀가 플뢰족의 꽤 높은 신분이라는 건 그녀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평범한 인물이 땅신 교단의 다섯뿐인 추기경 중 한 명과 의자매일 리가 없으니까.

그 외에도 그녀의 신분을 짐작할만한 지식이나 발언이 몇 차례 있기도 했고 이엘카타를 보자마자 그 정체를 읽은 점이나…….

하지만 플뢰족의 급수 높은 귀족의 자녀 정도로 생각했지, 설마 공주였을 줄은 몰랐던 여자들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안느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잠깐 놀랐던 여자들은 금방 놀람을 떨쳐내고 본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녀가 공주라고 해서 이제까지의 관계성에 변화가 있을 리 없다는 믿음 덕분이다.

유르파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안느 아가씨 말대로면 원로가 날뛸 가능성도 있겠네.=

=어? 어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지금 엘위드리스 가주는 엄청 냉철한데다 지금 가주의 권한이 가장 막강할 때라서…… 원로원이 그런 짓을 저지르게 둘 거 같진 않아.=

[안실라 공주님 말씀대로입니다. 프슈드 오울 가주님은…….]

=아, 나 공주 자리는 박차고 나왔으니까 공주라는 단어는 빼줘. 이름도 그냥 안느라고 해주고.=

=진짜 이름이 안실라였구나. 그래서 안느나 안이라고 불러달라는 거였네.=

이실리테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안느는 약점 잡힌 얼굴로 떨떠름해 하다가 이엘카타의 글귀로 눈을 돌렸다.

[안느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현 가주님께서 가문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차기 가주인 이름리아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너랑 걔랑 사이 엄청 나쁘다고 들었는데. 그거 때문이야?=

[저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어떻게든 매장하고 싶어 해요.]

매장이라는 섬뜩한 단어에 이실리테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왜 그런 건가요? 그 정도로 미워하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대답은 안느가 대신해주었다.

=별 이유 없어. 그냥 보편적이고 평균적이지 않은 것은 불순물처럼 여기는 게 플뢰의 습성이자 문화거든.=

=그…런 거야?=

=내가 바뀌기 이전의 모습을 이슬이랑 율이 언니는 알 거야. 그 정도면 거의 플뢰들 사이에서 역적 같은 존재거든. 이엘카타 아가씨도 마찬가지로 혈계술이 당연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혈계술도 못 써, 영혼사 각성에 도전했는데 영혼사로도 각성 못 했어. 뭐…… 눈 밖에 날 여지는 많지.=

[그리고 저는 가주이신 프슈드 오울 님과 평민 신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입니다. 전대 가주님과 고명하신 고위 가문 출신의 전대 가모님 사이에서 난 이름리아에게 저는 눈엣가시였겠지요.]

안느와 이엘카타의 대화에 다른 여자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플뢰족이 그렇게나 적나라한 차별주의자들이었어?

친구들과 자신의 남자가 자기 정체를 알았음에도 별 반응 없다는데 속으로 안도한 안느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런 것도 고위층 한정이야.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적용 안 되는 이야기니까, 이런 걸로 플뢰족 전체를 재단하진 말아줘.=

=으, 응…….=

연이어 찾아온 충격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으며 대화가 끊긴다.

그때 줄곧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이쪽이 움직여야 할 일은 없을 듯하군요.”

입을 열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친구들에게 작게 웃음 지어 보인 환인은 소파의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견시로 보아도 이쪽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고, 이쪽의 정체를 유추할만한 것은 가주의 예감뿐. 고삐 풀린 망아지가 엘위드리스 가문에 있다지만 현 가주는 그 망아지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면 당장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 해?=

안느의 의문에 환인은 검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했다.

“한 달.”

=응?=

“우리는 한 달간 이곳 영도에 머무른다. 그사이 문제가 터진다면 영도의 비호 아래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태연함을 넘어 담대한 대답에 여자들이 살짝 놀라는 사이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달 뒤에 문제가 터진다면, 그때는 항주감찰관이든 새벽의 빛 후계자 자리든 그걸 가지고 메리아놀을 압박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저쪽은 이쪽의 행적을 읽을 수 없다. 가장 심각하면서도 유일한 문제인 예지가 해결된 셈이니…….”

이제부터 한 달, 환인은 영혼술과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 에너지에 대해 고찰과 훈련, 수행을 고강도로 진행할 예정이다.

예상일 뿐이지만, 한 달 뒤 2단계가 된 문양의 힘을 영혼술… 혼옥술이라 부르는 것에 제대로 접목한다면 이엘카타가 전견시로 본 예지만큼은 못 할지라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수준은 될 거라고 환인은 믿고 있었다.

“그러니 한 달 내에 소식이 날아들든, 한 달 뒤 엘위드리스 가문의 습격을 받든, 우리는 그때 가서 행동 방침을 정하면 된다.”

얼핏 허술해 보이기까지 한 계획이지만 이 자리에서 그의 발언을 허투루 들어 넘기는 여자는 없었다.

그가 그렇다고 말했으니 그 말대로 이루어질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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