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70화 (470/813)

〈 470화 〉 464 영도 에쉬누르

* * *

[저희 방문이 휴식 중 방해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느는 햇살처럼 찬란한 황금색 머릿결의 절세가인이 실로 정중한 예법에 따라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배에 손을 올리고 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 시선이 2m에 가까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인웅족 흑곰 남자에게 향했다.

주변을 세피아 색으로 물들이는 아우라라니, 신께 맹세코 저런 아우라는 처음 본다.

혹시 저 아우라가……?

=처음 뵙겠습니다. 영도 역사교육기관을 맡은 비마르 니아벨레입니다. 과분하게도 일곱 영성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헉.

…하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놀랐던 안느는 이윽고 자신의 남자가 누구인지 떠올리곤 불과 수 초 만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우리 도령이 훨씬 더 대단한데.’

위축되고 놀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대는 세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일곱 영성 중 한 분. 예의범절은 지켜야한다.

안느는 수습 신전 전사 시절 익혔던 예법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 안느입니다. 외람되오나 역사교육기관장님과 이엘카타 영혼사님께서 이렇게 방문해주신 연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비마르=니아벨레가 앞으로 나서서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역사교육기관의 설립 목적은 영도를 처음 방문하신 영혼사님들의 부족한 지식을 보충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문에 영혼술의 기초 및 전문, 심화 지식과 영도의 역사학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문해주신 환인 성자님께서는 이번이 영도의 첫 방문인바, 원래는 하급 기관원이 맡아 담당하는 일이나…….=

말단 기관원에게 감히 성자님의 안내를 맡길 수 없다. 그래서 기관장인 자신이 직접 왔다는 이야기.

=향후 교육 일정을 성자님과 상의하기 위하여 방문하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려강, 들어가서 성자님께 지금 시간 괜찮으신지 여쭈고 와.=

「네? 아, 네!」

무려 영성의 방문이다.

이만한 신분이라면 보통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택으로 안내해 응접실이나 접객당으로 모신 다음 주인 되는 사람에게 알리지만, 자신의 남자도 그에 뒤지지 않는 신분이며 무엇보다 저택에는 응접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도령이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냥 손님 왔다고 무턱대고 데려가서는 안 될 거 같단 말이야.’

자신을 바라보는 두 명의 시선에 안느는 흠잡을 곳 없는 미소를 빙긋 지어주었고 비마르와 이엘카타 또한 미소 띤 얼굴로 화답했다.

잠시 후 저택에서 날아온 백려강이 안느의 귀에 속삭였다.

「안으로 모셔오시라고 하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안느는 문에서 떨어져 두 사람에게 저택으로 안내해드리겠다고 말한 뒤 몸을 돌려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따라붙은 백려강이 안느에게 귀엣말로 묻는다.

「안느, 예법에 굉장히 익숙하시네요.」

=교단에서 배운 것도 있고…… 예법이라는 건 대체로 어디를 가나 비슷한 편이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한 백려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일행의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시선이 마주친 이엘카타에게 환한 미소로 손을 작게 흔든다.

이엘카타는 그녀의 해맑은 미소에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또다시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생각할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환인은 아까부터 꺼림칙함과 거슬림이 느껴져 생각에 잠겨 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대성녀의 행동에서 무언가 위화감과 거슬림이 느껴진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뇌 리소스를 주변 파악에 모두 쏟아붓기 시작한다.

거슬림과 위화감, 꺼림칙함은 보통 놓친 주변 상황에 이어지기 마련. 자신을 둘러싼 사건과 사고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고 있는 도시 호족 간의 분위기와 말썽의 흐름 등 하나하나 되짚어나가는 환인.

그리고 이엘카타와 대성녀와 면담에서 대성녀가 보였던 모습과 반응, 마지막으로 보인 행동에서 그 거슬림의 끄나풀을 낚아챘다.

‘이엘카타는 백려강에게 비교적 상세한 두 가지 선택지의 예지를 들려주었었지.’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미래가 바뀌는 불확정 예지. 바꿀 수 없는 고정된 미래가 아니라 수정이 가능한 예지는 말 그대로 천금과도 같은 능력이다.

그만한 능력이라면 당연히 사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가볍지 않을 거다.

이 세계의 직업 능력의 발동 방식 대체로 등가교환이다.

자신의 영혼술과 강령도 초기에는 몇 분에서 몇십 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았었고 영혼 구슬도 몇 개 가지고 다니지 못했었다.

영혼술에 익숙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죽을 뻔한 경험도 있다.

검희인 이실리테는 다중 검기를 쓰면 원기를 크게 소비하기에 자신의 원기 보충이 아니면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혼자서 5인분에서 10인분 가까이 식사해야 원기가 보충된다.

안느도 성술을 펼치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 정신 집중에 쓰는 시간이 적지 않고 유르파의 비술은 대체로 시약이나 시료 같은 소재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처럼 평범한 능력도 디메리트가 있는데 불확정 미래 예지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2년 동안 여러 번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니라는 건가.’

만약 여러 번 쓰는 게 가능했다면 자신은 비자룩스에서 대성녀의 서신이 아니라 영도의 영혼 기사들의 마중을 받았을 테니까.

‘……아니, 내가 이만큼 성장하길 기다렸을 가능성도 있겠지. 사용 횟수에 대한 가설은 다 취소해야겠군.’

여기서 대성녀와 나누었던 대화로 위화감이 이어진다.

아드네빌라와 대화할 때도 느꼈지만, 대성녀와의 대화에서도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었다.

그가 느낀 감정은 오직 진실뿐.

평범한 육성 대화였다면 그런 느낌 따위는 정보로서 쓰레기와 동일한 가치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사람에게는 통역 기관이라는 게 있다. 대성녀의 회화 방식도 그에 대한 연장선이라면 염두에 둘 가치는 충분하다.

게다가 여자친구들에게 확답받기로 대성녀는 기린이라는 진짜 신수였다. 기린은 대표적인 선 성향의 전설 속 생물. 거짓을 입에 담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여기에 이쪽이 내심을 꿰뚫어 보는 느낌을 받을 정도라면 통찰력도 뛰어날 터.

면담할 때 대성녀가 한 말이 전해진 감정 그대로 진심이라면 자신을 영도의 후계로 삼기 위한 밑작업일 가능성이 크지만…….

대성녀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가장 먼저 이쪽의 성격과 성향을 예지로 파악했을 것이다.

상대의 성격을 안다는 것은 상대가 할 행동 또한 예측할 수 있다는 뜻.

예지로 자신의 성격과 성향을 이미 파악했을 텐데 자신을 억지로 후계자로 만든다고?

이쪽이 그런 억지를 받아줄 만큼 말랑말랑한 성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자신을 대성자 자리에 억지로 앉히려 하면 크게 마찰을 빚을 텐데 그걸 강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속임수이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문제가 또 있으니.

“…예지가 가장 큰 변수로군.”

환인의 혼잣말에 열심히 가방 안감에 새길 술법진을 설계하던 유르파가 그를 돌아본다.

=응? 뭔가 말했니?=

“예. 이엘카타의 예지가 어떤 방식으로 발동하는지, 얼마나 자주 쓸 수 있는지, 어디까지 보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상 변수가 너무 많아 대응이 골치 아프군요.”

예지? 그러면…… 이엘카타라는 여자의 능력이 이 상황에 깊게 개입하고 있단 이야기인가?

=그럼 그 아가씨를 불러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보니까 자길 잊지 못한 눈치던데.=

유르파의 제안에 환인은 그녀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웨이포드에서 그녀의 처녀를 가져간 일. 그 후 그녀가 영혼사로 각성한 뒤 헤어지며 인연은 그걸로 끝인가 했지만, 파르히스트에서 다시 만나 편지를 교환하며 그녀가 자신을 마음 깊이 사모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 사모의 감정이 영혼사로서의 의무와 비교해 어느 정도 되느냐다.

사모의 감정보다 영혼사의 의무가 앞선다면 직접 불러 듣는 것은 최악의 수가 되니까.

그때 백려강이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 하는 말에 환인의 눈빛이 단숨에 깊어졌다.

「환인 님, 밖에 이엘카타 님과 영도 역사교육기관의 비마르 니아벨레 영성님이 오셨어요. 안느가 어떻게 할지 여쭈어보라고 해서…… 어떻게 할까요?」

“두 분 다 이쪽으로 모셔와라. 유르파,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응. 그분들 앞에서 이런 작업 모습을 보여주면 안되겠지. 난 이슬이 아가씨랑 같이 있을게.=

늘어놨던 제작 도구를 챙겨 재빨리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유르파. 백려강도 다시 정원 입구로 날아가 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흐트러진 옷차림을 고친 환인은 창문 너머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에 익숙한, 금실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거대한 흑곰 머리 남자의 뒤를 다소곳이 따르는 이엘카타.

가녀린 절세가인을 응시하던 환인은 그녀의 앞에서 걷고 있는 흑곰 머리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모피 색만큼이나 까만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게 진한 갈색으로 보일 만큼 주변을 세피아 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저런 형식의 아우라가 영성의 아우라인가 보군.’

영성이 주변 3m를 뒤덮을 정도라면 대성녀는 뭘까. 족히 수십 미터를 희미한 금빛으로 물들였던데 기린이라는 종족과 연관이 있는 건가.

잠시 후 안느가 통통, 문에 노크하더니 5초 후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척 봐도 고위 예법에 따라 비마르와 이엘카타가 들어올 길을 만들어준다.

=성자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상대가 영성이라고 예법을 갖춰주는 건가. 환인도 그에 맞춰 두 사람에게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가 환인입니다. 비마르 니아벨레 님, 그리고 이엘카타. 어서 오십시오.”

환인의 인사에 비마르는 회색으로 물든 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오오, 탄성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어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

=이토록 휘황찬란하며 고귀하고 거룩한 영기라니……! 이 비마르, 영도의 새로운 빛이 되실 환인 성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의 찬양에 멈칫한 환인은 그의 시선이 일순간 자신의 왼팔로 향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환인은 예의를 차린 미소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영혼사로서 각성한 지 이제 2년이 넘은 신출내기일 뿐입니다. 대선배와 다름없는 영성께서 그러시면 심히 곤란하여 도망치고 싶어지니 그만 일어서주시지요.”

슬쩍 협박을 곁들이며 그의 두텁고 곰의 털로 뒤덮인 손을 잡아 일으킨 환인은 이엘카타에게 특히 부드러운 눈빛을 보낸 뒤 두 명을 거실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처음에는 비마르가 유달리 저자세로 감격에 겨운 모습을 계속 보여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먼저 그를 진정시키는데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러던 중 얻은 정보에서 환인은 어째서 그가 이토록 자신에게 자세를 낮추는지 알게 되었다.

‘왼팔의 빛이 혼옥의 보관고였다는 건가.’

자신이 이때까지 영혼 구슬이라 부르던 것의 정식 명칭이 혼옥이며 왼팔을 삼킨 빛이 혼옥 보관고라는 것, 그리고 그 보관고의 크기가 클수록 혼옥술, 자신이 영혼술이라 부르는 것의 효과와 위력이 올라간다는 것, 보통 일반적인 영성의 보관고는 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일 뿐이라는 것까지.

영도의 시초이자 첫 새벽의 빛인 리시우라라는 사람의 보관고가 왼쪽 가슴을 뒤덮을 정도였다는데, 그 정도 면적이면 자신의 왼팔을 뒤덮은 빛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덕분에 비마르의 보관고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보관고는 승모근의 아래쪽에 아기 주먹만 한 크기였다.

빛도 옷을 두 겹 정도 걸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도.

물론 11개의 혼옥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환인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하나같이 구슬의 남은 유지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짧은 것도 한 달 이상이며 긴 것은 10년이나 된다. 무엇보다 전부 사람의 영혼.

=저는…… 이때까지 살아오며 환인 성자님의 혼옥 보관고만큼이나 크고 반짝이는 광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옷으로도 감출 수 없을 정도에 왼팔을 전부 뒤덮는 경지라니…….=

‘대성녀는 악령의 구슬까지 꿰뚫어 보았는데 이 사람은 그런 능력은 없나 보군.’

환인은 111개의 영혼 구슬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려줄지 말지 고민했지만, 감격하던 그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꺼낸 본론에 일단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환인 성자님. 현재 성자님께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입니다.=

“예. 저도 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도의 역사교육기관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처음 방문한 영혼사 분들의 교육을 맡는 기관이지요. 환인 성자님도 그에 해당하기에 안내를 위하여 제가 찾아왔습니다.=

그런 비마르가 제안한 교육 방식은 세 가지.

하나는 수업을 받는 수습 영혼사들과 함께 커리큘럼에 따른 일정을 따라가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

하나는 전담 교사가 붙어 개인 교습을 진행하는 것.

마지막은 기록실의 서적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며, 그때 생긴 의문과 궁금증을 배정된 영혼사에게 물어서 해결하는 것.

셋 다 장단점이 있지만, 환인은 큰 고민 없이 기록실 서적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기로 했다.

정해진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넓고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얻을 수 있지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며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

가뜩이나 시선을 받기 쉬운 상황에 놓여있는데 그런 교육 일정 과정에 참여하면 이하생략.

기록실 서적을 통한 지식 습득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지만, 지식 습득 범위와 순서가 제멋대로라 습득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역사교육기관의 기관장인 비마르가 직접 담당이 되어 하루에 한 번씩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시간을 가지겠다 약속했다.

개인 교습 쪽은 앞의 두 가지를 반반씩 섞어 장단점이 가장 적은 방식이지만, 이 경우에는 현재 환인이 경계하고 있는 대성녀 측의 접촉이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배정된 전담 교사가 대성녀의 발언에 휘둘린다면 이하생략.

환인의 결정에 비마르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궁금증은 모아두셨다가 그날 저녁 시간에 저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기록실 방문 허가증은 내일 기관원을 통해 전달해드릴 테니 그때 이용 시각을 말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흥분을 가라앉힌 비마르는 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지만, 자신이 영도에 도착한 지 이제 하루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배려했는지 아쉬움을 머금고 돌아갔다.

남은 것은 이엘카타뿐.

비마르를 배웅한 뒤 거실로 돌아온 환인은 3인용 소파에 죄인처럼 앉아있는 이엘카타를 잠시 바라보다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역사교육기관장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다.

건너편 주방 입구에서 이쪽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는 안느와 백려강을 한 번 쳐다본 환인은 그녀의 무릎 위에 모여있는 이엘카타의 손을 잡았다.

움찔. 환인에게 손을 잡힌 이엘카타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무언가 북받친 듯 어깨를 잘게 떨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합니다. 저는 당신이 보낸 편지를 모두 고이 보관하고 있었을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만큼 격하게 고개를 도리질 친 이엘카타는 품에 지니고 있던 녹색 깃털, 비상의 가슴 솜깃털을 꺼내 자신도 줄곧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준다.

“보관하고 있었군요. 이건… 영구 보존 술법입니까.”

깃털에 걸린 술법을 단번에 꿰뚫어 본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엘카타의 조금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목소리는 금언 수행 때문에 못 듣는다고 해도 얼굴은 그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년 동안이나 보지 못해서 당신의 얼굴을 잊을 것 같으니까요.”

「난봉꾼.」

품속에서 환연의 자그마한 비난이 들려왔지만 환인은 무시했다. 이엘카타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자신과 시선을 마주한 이엘카타의 얼굴, 청초 가련해서 들판에 핀 꽃 한 송이 같은 그 자태를 오랜만에 본 환인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까. 혹시 저 때문입니까.”

슬픔과 괴로움에 물든 그 얼굴을 보며 묻자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이엘카타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회화 판을 꺼내 힘없는 손짓으로 글귀를 적었다.

[저는 백려강 님에게 저지른 죄를 사과해야 해요.]

적는 중에 그녀의 조금 뾰족하지만 부드러운 눈매에 눈물이 한 방울 맺힌다.

뭘 적은 건가 궁금해하면서, 조금은 그와 그녀의 로맨스에 질투하면서 다가온 두 여자는 회화 판에 적힌 글귀를 보곤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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