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69화 (469/813)

〈 469화 〉 463 영도 에쉬누르

* * *

* * * *

작지만 정갈한 3평 정도의 수양실.

집기라곤 앉은뱅이책상과 한 뼘만 한 창문이 전부인 곳에서 이엘카타는 명상에 잠겨있었다.

‘기억하겠습니다.’

명상이 깊어지려 할 때마다 떠오르는 글귀가 그녀의 명상을 방해한다.

평소에는 두어 번 시도하면 글귀를 지나 명경지수의 상태에 진입하는데 오늘은 글귀에 목소리까지 입혀져 계속 깊은 명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깨어나고 있다.

여섯 번째 명상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 이엘카타는 집중력이 풀려 책상에 이마를 콩, 찍었다.

=…….=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영구 보존 술법이 걸린 녹색 깃털 한 장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게 들어온다.

이렇게 명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

‘더…… 사내다워지셨었지.’

2년 만에 재회한 님은 애틋해진 마음만큼이나 더욱 멋있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지에서 본 대로, 그의 옆에 서 있던 네 명의 여자들…….

님의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백려강을 떠올린 이엘카타의 입술 끝자락에 서글픈 미소가 떠오르는 동시에 강한 자기혐오가 그녀의 마음을 휘감았다.

‘결국 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셨군요.’

웨이포드 성에서 만난 백씨 가문의 차녀. 다른 종족의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반하고 말 것처럼 아름답던 그녀.

이엘카타는 늦은 나이에 영혼사로 각성하며 가문의 혈계술인 예지까지 개화한 특이한 사례였다.

보통 피를 통해 전승되는 계승술은 아주 어렸을 때 증상이 발현되며, 청소년기를 지나면 개화될 확률이 소수점 다섯 자리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각성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영혼사가 된데다, 어린 시절이 지나면 인자가 파괴되어 혈계술을 개화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나이에 예지 능력이 꽃피었다.

확률로 따지면 마른하늘에서 벼락을 연속으로 10번은 맞은 수준.

그 때문일까. 각성을 확인하고 며칠 뒤 가문에서 붙여놓은 감시인을 통해 반쯤 쫓겨나다시피 한 가문에서 연락이 왔다. 아니, 통보가 전해졌다.

[가문으로 복귀해라.]

이엘카타는 당연히 그 통보를 무시했다.

영혼사 각성에 실패하자 쓸모없다며 내치고서는 무슨 염치와 낯짝으로 돌아오란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그 탓에 웨이포드에서 영도로 이동하는 사이 긴박한 사건이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

가문의 혈계술까지 개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엘카타는 가장 먼저 자신과 님의 미래를 읽었다.

혈계 예지를 쓰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긴 시간 위상력을 다스려 혈계에 필요한 순수한 에너지를 모을 것. 이것은 수명이라든지 대체할 요소가 있어 당장 쓰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두 번째로는 예지할 대상의 신체 일부.

이건 머리카락으로도 가능하며, 님과 첫날밤을 보냈을 때 그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주워놓았기에 혈계술을 펼치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 외 예지의 정확성을 높이는 시간이라던가 이런저런 요소가 있지만, 예지를 쓰는 법은 어렸을 적 교육을 통해 숙지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세하게, 그리고 길게 볼수록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 결과는 최악으로 나왔다.

님과 자신의 육체, 영혼의 궁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인과의 파장 궁합이 극악이었다.

함께하면 둘 다 나락으로 떨어져 파멸을 맞이할 운명.

처음 본 예지에서 자신은 뾰족하게 깎인 나무에 회음부터 입까지 꿰뚫려 꼬치가 되어 죽어있었고 님은 마왕이 되어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에 얼어있던 이엘카타는 두 번. 세 번. 네 번. 급기야 수십 년의 수명까지 바쳐가며 수십 번 미래를 읽었지만, 그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자신의 잔인한 죽음. 그리고 님의 타락과 니오네브레스의 몰락, 파멸, 멸망.

니오네브레스를 멸망시킨 이후 님께서 무탈하게 살아간다면 모르겠지만, 니오네브레스가 파멸한 뒤에는 님도 소멸에 이른다.

이 세상을 떠받치시는 다섯 신님에 의해.

그랬기에 이엘카타는 백려강의 미래를 읽고 질투에 휩싸였다.

자신은 결코 님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슬픔과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녀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있었으니까.

비록 잠깐의 고통과 육신을 잃을지라도 사랑하는 님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있었으니까.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 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미래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엘카타는 자신의 추한 질투심에 마음속으로 몸부림치며 그녀에게 예지 결과의 절반만 알려주었다.

‘하나는 자신으로서도, 가문으로서도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이어가며 여성으로서 행복을 얻을 운명.’

‘하나는 멀고 괴로우며 춥고 아프며 힘들고 지치는 고난과 가시밭길. 그 끝에 있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행복인지도 알 수 없는 운명.’

겁을 집어먹고 평범한 고위 호족 가문 영애로써의 안전하고 평온한 삶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그랬는데 백려강은 자신의 공갈에도 불구하고 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선택했다.

이제 고난과 가시밭길이 곧 끝날 테니 그녀는 바라던 행복을 거머쥐겠지…….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엘카타는 진득한 자기혐오에 휩싸여 책상에 엎드린 채 백려강에게 사과하며 허덕였다.

똑똑똑.

[이엘카타 님.]

그러던 이엘카타는 장지문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하게 고쳤다. 가슴을 세차게 조이는 감정도 마음속 깊이 묻어 표정을 감춘다.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던 황색 로브의 소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엘카타 님. 대성녀님의 호출입니다.=

[손님]

[은]

[돌아가셨나요?]

=예.=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다시금 공손히 허리를 숙인 소녀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이엘카타도 녹색 깃털을 손수건에 소중히 감싼 뒤 품에 챙기고 수양실을 나왔다.

=…….=

대성녀실을 찾아 닌실=아나그와 마주 앉은 이엘카타는 조금 당황하고 허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나.》

샛노란 보름달이 미소짓는다면 이러할까.

남녀 성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대성녀의 미소에 이엘카타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회화용 술법 판에 위상력을 흘려 넣어 의문을 글로 옮겨 쓴다.

[그분을 대륙 항주감찰관으로 임명하시어 그분께서 바라는 것을 들어드리고, 영도도 그분의 도움을 받겠다 결정하신 것은 닌실 님이셨습니다.]

대륙 항주감찰관. 니오네브레스 전역을 범위로 하는 영혼 감찰 업무 담당 책임자다.

영혼 심문관이 3급 공무원이라면 항주감찰관은 고위 공무원. 일곱 영성 바로 아래 직급으로 권한도 영성 다음일 만큼 막대하다.

원래라면 실상은 어떻든 여덟 영성으로 내부 편제가 개편되어야 하지만, 영성은 영도에 머물러야 하기에 차선책으로 나온 것이 항주감찰 자리였다.

자신의 예지로 읽은 그분의 목표는 세계를 두루 돌아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

자신의 혈계술 숙련도가 낮아 그분의 모든 미래의 갈래를 읽지는 못했으며, 그분의 영격? 또한 실시간으로 드높아지고 있어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분의 미래를 보는 것은 100년의 수명을 바쳐도 불가능할 정도.

그랬기에 현재 알 수 있는 부분만 취합하여 대성녀님과 의견을 나눈 뒤 그분에게도, 영도에게도 도움이 되는 최선의 길을 도출해낸 것이 대륙 항주감찰관인데…….

그런데 갑자기 후계 선언이라니, 원래 예정과는 전혀 다른 일이지 않은가.

이엘카타의 의문에 찬 시선에 닌실=아나그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눈을 감았다.

《이엘. 너는 소녀가 얼마만큼 후계를 바랐는지 알고 있을 걸세.》

[그분의 자질이 그 정도였습니까?]

《영혼술에만 한정한다면 소녀조차 그의 발끝에 미치지 못하겠지. 그는 현재 흑옥을 제한 시간 없이 다루고 있을 정도이니.》

=……!=

영혼을 다루어 영혼술을 펼치는 것은, 최초에는 초대 대성자이자 새벽의 빛인 리시우라 뿐이었다.

그것이 세월이 흘러 연구되고 조사되어 영혼사의 승급과 재각성이 알려지고 영성이 나타나며 초대 대성자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생겼으니, 그것이 영성의 혼옥술이다.

영성의 첫 단계는 신체에 혼옥??의 보관고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혼옥은 영성의 근본토대로, 죽은 자의 혼을 계약에 따라 거두어 사역하며 혼으로 할 수 있는 무수한 일을 가능케 해준다.

생전 영혼의 힘을 일정 시간 부여한다던가 생전 영혼의 기술 전수를 한다던가 생전 영혼의 비기??를 쓸 수 있게 해준다던가.

두 번째 단계는 혼옥의 보관고를 만든 이후 혼옥 생성의 숙련도를 올리는 시기다.

처음에는 작은 곤충처럼 사람의 혼력이 100이라면 1이나 2 정도 되는 미물의 혼, 너무 미미하여 혼의 형체조차 없는 영혼을 다루어 혼옥을 생성시켜나간다.

이 단계가 가장 지난하며 긴 시기다. 자질에 따라 첫 혼옥의 생성에 10년 이상이 걸릴 정도.

세 번째 단계는 보유 가능한 혼옥의 개수를 늘려나가는 시기다. 알려지기로 시조 리시우라가 생전 보유한 혼옥은 167개.

네 번째 단계는 사역 가능한 혼옥의 종류 확대에 도전하는 시기다. 평범한 회옥??에서 순차적으로 청옥?, 흑옥??, 적옥赤?, 명옥??으로 올라가며, 비전에 따르면 명옥으로 펼친 저주는 상급 영혼사의 사망으로 벌어지는 영식을 능가한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영도의 시조이자 시초, 최초의 새벽의 빛이신 리시우라의 추측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최초의 빛인 리시우라 님마저 적옥을 다루시는 데서 멈추셨지.》

=…….=

《알고 있나? 리시우라 님이 처음 흑옥의 단계에 들어서셨을 때의 연세.》

[일백하고도 스물여섯 이셨습니다.]

《그래. 백스물여섯에 흑옥의 단계에 들어서셨고 백아흔아홉에 적옥의 계에 오르셨네. 그런데 성자께서는 이제 스물일곱 남짓한 나이에 흑옥을 다루기 시작하셨다네. 그뿐이랴. 지식과 주관도 뛰어나며 앞일을 내다보고 사리를 분명히 하는 총명함까지 있었지.》

후후후. 닌실=아나그는 소녀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보고 말았는데도 덜렁 항주감찰을 내어드릴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 하여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은…….]

《질색팔색하실 때까지 조르고 조르다가 화를 내실 지경에 가서야 풀 죽어 시무룩한 모습을 보여드리며 원하는 것을 내어드려야지……. 그래야 여느 사람들보다 감정이 희박한 그분께서 조금은 언짢음과 조금은 맥없음을 느끼며 약간 양보를 내어주시지 않겠느냔 말일세.》

이엘카타는 글을 적다가 닌실=아나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다 지워버린다. 그리고 의문을 새로 적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분의 감정 색이 옅으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마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처럼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는 듯하였네.》

이엘카타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 회화 판에 글을 적었다.

[그러다 그분께서 화를 내지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괜찮네. 성자님의 분노 기준점은 이미 파악하였으니.》

이쪽 마음대로 그를 휘두르려하지 않을 것. 그의 여자들에게 간섭하거나 터치하려 들지 않을 것. 그의 여자들의 안위에 손대지 말 것.

[정말 그것이면 괜찮습니까?]

《그래. 그걸 영성들에게 알리고…… 특히 그의 영혼 기사이자 연인인 여자들에게 무례는 절대 범하지 말라고 하게. 한쪽은 헬루멘 영주의 가호를 받는 검희이고 다른 쪽은 땅신 교단 추기경의 동기이자 종족 연합 국가의 공주이니까. 그리고 성자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찾아 공손히 부탁드리라고 경고하고, 거절한다면 미련 갖지 말고 포기하고, 허락한다면 소녀를 대하듯이 공경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달하게.》

[네.]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이엘카타를 잠깐 응시하던 닌실=아나그는 조막만 한 두 손을 마주 잡고 꼼질거리며 아쉬움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하지만…… 참으로 아쉬워. 이 세상, 자자손손 영구대대로 성자님의 자질을 뛰어넘을 영혼사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터인데……. 그가 대성자에만 올라준다면 소녀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뒤를 받쳐줄 것인데…….》

아쉬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혼잣말에 이엘카타는 자신이 보았던 그분의 미래를 떠올렸다.

거의 대다수 지분을 차지하는 세계 멸망의 길.

‘이제 약관을 지나 확립에 이르는 나이에…….’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미래 예지의 충격에 어째서 그런 게 가능한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엘카타였다.

그랬는데 닌실=아나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과연, 그 정도니까 세상을 멸망으로도 몰고 가실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

자신은 결코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떠올린 이엘카타의 표정이 시무룩해지고,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보는 닌실=아나그였다.

* * * *

=이번에야말로 우리 마차를 잃게 되려나?=

=축소화 비술로 축소해서 가져가면 되잖니.=

=하지만 그 비술도 무한히 가는 건 아니라며……. 꽁지 빠지게 도망치면 몇 날 며칠을 달려야 할 텐데 중간에 비술을 걸 시간이 있을까?=

=으음…….=

대성녀와 오찬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온 환인의 여자들은 일단 영도에서 도망친다는 가설을 핵심으로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할 텐데 어쩌면 좋지…….=

「이실. 식량은 저번처럼 사냥으로 충당하고 식수는 환연의 물로 보충하면 되니까. 식량과 식수는 며칠 분만 빼놓고 다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부피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게 식량이랑 식수니까요……. 유리 언니. 역시 소형에 무게 감소가 없는 가방은 다 처분하는 쪽이 나을 거 같아요.=

=그렇지? 나도 카턴 마을을 떠나기 전보다 비술이 더 성장해서 대용량에 무게 감소도 30%까지는 쉽게 넣을 수 있게 됐으니까 이 기회에 한 번 싹 정리해야겠어. 자기한테 허락받고 올게.=

현재 아공간 가방과 보존 가방은 500mL 용량의 보존 식수 주머니에서부터 프라버 군용 수송 가방인 10m*10m*6m에 무게 감소 70%의 초대용량 보존 가방까지 20개가 넘어간다.

용도별로 보자면 옷 가방*6, 작업 도구 가방(유르파 마도 제작용, 이실리테 무두질용), 마차 수리 재료 가방, 생활용품용 가방(청결용, 세탁용, 요리도구용), 식자재 가방*3, 식수 가방*2, 환인의 비장의 수단이 담긴 특제 상자 등등.

=식자재 가방은 보존용 가방으로 통합해서 하나로 만들자. 아니, 아예 싹다 보존 가방으로 만드는게 좋겠네.=

=보존 가방이 아공간 가방보다 재료가 더 많이 들잖아. 괜찮아?=

위상석이 담긴 자루 주머니를 들여다보던 안느가 묻자 유르파는 작업도구 가방에서 가방 패턴 두루마리 뭉치를 꺼내며 대답한다.

=지금 보유한 위상석은 2급 11개, 3급 13개, 4급 18개, 5급 6개야. 이 정도면 5m*5m*3m에 무게 감소 50% 보존용 아공간 가방 50개는 만들 수 있어. 자기도 위상석 보유의 2/3까지는 써도 된다고 했으니까 충분해.=

=응? 적색 6급 위상석은 이미 썼어?=

=그건 자기가 보관하고 있어. 이건 내가 마도구랑 마도기 제작용으로 가지고 있는 거야.=

안느는 수십 종류의 가방 패턴을 살피는 유르파를 옆에서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아, 으음. 그나저나 우리 자금이 되게 많긴 하네. 5급 위상석 6개만 해도 최저가 222금화인데.=

금화는 500닢 가까이 있던가?

그 혼잣말에 몇 가지 도면을 골라낸 유르파가 작업 도구 가방에서 보존용 아공간 가방 제작 재료를 하나씩 꺼내며 말했다.

=우리 정도 되는 파티면 금전적인 문제는 거의 없다고 봐야지? 어디 4급 미궁 하나 찾아서 날 잡고 사냥만 반복해도 1~3급 위상석이랑 소재가 막 쏟아질 테니까.=

=……우리가 미궁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게 크라빈 마을이 마지막이었지?=

=응. 그때부터 이런저런 일이 쉬지 않고 연달아 일어났잖니. 그러고 보니 회복 담당 동료를 구하는 일은 어느새 흐지부지되어버렸네.=

=그러게. 으음, 언제 또 미궁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정원에서 비상의 곁에서 놀고 있는 여우 남매를 바라보던 백려강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언니들은 미궁을 많이 다녀보셨나요?」

=우리? 파르히스트에서 하나, 오울링에서 하나, 헬루멘에서 하나, 크라빈에서 하나……. 네 곳밖에 못 봤어. 그중에 하나는 1급 미궁이라서 미궁이라기보단 동굴 느낌이었고. 려강이 넌 미궁 경험 있어?=

「네. 웨이포드에서 환인 님과 들어간 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아~. 우리도 들었어. 그때 이슬이도 같이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 들어갔다고.=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아련히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에 안느가 후후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번 일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서 또 들어갈 일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미궁을 돌파해서 도령의 문양 힘을 늘려야 하니까.=

「네에.」

=그런데 안느 아가씨? 영도를 떠나면 다음 목적지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 전에 말한 대로 메리아놀로 향해?=

=글쎄? 파르히스트에서 세운 도령의 목적은 히스론드의 주도에서 고급 함정 해제술을 배우는 거였잖아. 그런데 르아가 끼어들어서 메리아놀로 부디 와달라고 하는 거고. 그때 프라버 북쪽 연안에서 했던 통신을 생각하면 도령도 메리아놀 방문에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거 같던데……. 갈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럼 가는 길에 히스론드를 방문할 가능성도 크겠네.=

히스론드 쪽 루트라면…… 기억을 떠올려본 안느는 으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서 메리아놀로 가는 길은 좀 애매한데.=

「그런가요?」

=어어. 히스론드 남부에는 벨티칼 대산맥이 있거든. 그걸 넘는 건 어어어어엄청나게 고생하는 길이라서, 보통은 벨티칼 대산맥 위로 우회하거나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알류겔 호수랑 대산맥 사이 벨티아 정글을 돌아가는 길을 골라. 잠깐만.=

환인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안느는 그에게서 대륙 전체 지도를 받아와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루트를 설명한다.

=여기 1번 경로처럼 대산맥 위로 우회하는 길은 히스론드가 맡은 동북부 이블팩션 접경지와 맞닿아있어 꽤 위험한 여정이 돼.=

어느쪽이든 여정길이 2000km가 넘어가는 대장정이 된다.

더욱이 그곳을 지나더라도 결국에는 쭈욱 남하해 메리아놀 남부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라면 알류겔 호수와 벨티칼 대산맥 사이 정글을 따라 사비족의 국가인 벨티칼을 가로지르는 루트를 쓰기 마련.

그게 아니라면 라드세아 서부 해안, 파르히스트에서도 서쪽으로 2천여 킬로미터 떨어진 라디사 해를 지나 메리아놀 북부 섬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잠깐잠깐. 안느 아가씨, 라디사 해로는 옥타비어스 무리가 출몰해서 막힌 길 아니니?=

=으응? 계속 왕래가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어…… 한 30년 전?=

=어휴. 플뢰 종족의 시간 감각은 정말…… 해로가 막히는 바람에 거기 있던 중급 도시가 소도시로 격하된 게 10년 전의 이야기야.=

=그, 그랬구나.=

유르파의 작은 웃음에 머리를 뒤통수를 긁적이던 안느는 =뭐.= 하며 지도를 툭 쳤다.

=보통은 남쪽 벨티아 정글을 통과할 거라 생각할 테니 허를 찔러 벨티칼 대산맥 위쪽으로 돌아도 될 거 같긴 해. 우리 일행 무력은 대성자급 한 명이랑 대도시 기사 단장급 직업자 둘에 술법 단장급 두 명이 있으니까.=

마지막 선택은 결국 그가 선택하겠지만…….

“…….”

여자들은 필령궁에서 돌아온 뒤 계속 먼 곳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연인을 돌아보았다.

뭔가 깊게 생각에 빠져든 모습이라 이쪽이 이야기하고 있어도 조금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티이잉—

=응? 이거 무슨 소리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속으로 궁금해하던 여자들은 갑작스레 들려온 맑은 쇳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초인종 소리 같아요. 제가 밖에 나가볼게요.」

=아냐. 같이 나가자.=

날아가려는 백려강을 뒤쫓아 안느도 정원을 지나쳐 담장 입구로 걸어 나갔다.

‘저택에 돌아오고 2시간째인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할 시간이긴 하겠네.’

부디 영도와 사이가 최악이 되지 않길 속으로 땅신에게 빌면서 대문에 도착한 안느는 문을 열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아, 이엘카타 님!」

[안녕하세요, 여러분.]

문 앞에는 옅은 빛 내림 현상의 아우라를 지닌 이엘카타와, 몸 주변 3m 정도 공간에 엷은 세피아 톤 필터를 씌운 것처럼 주변을 물들인 아프리카 흑곰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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