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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468화 (468/813)

〈 468화 〉 462 대성녀

* * *

《성자께서 새벽의 빛이시며 그 예언 속의 인물이라는 것으로 판명된 이상, 준비한 질문의 시간 같은 것은 무의미하지. 이 자리에서 소녀의 이름과 지위에 맹세하겠소. 영도가 성자님을 적대하는 일은 영혼의 굴레와 법칙을 흐트러트리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그리 말하는 대성녀의 표정은 ‘그대가 바란 것은 이것이었지?’라고 묻는 듯했다.

물론 환인이 바라던 것이 그것이긴 했지만, 환인은 어째 아까부터 느껴지던 거슬림과 거리낌에 슬쩍 어깃장을 놓을 준비를 했다.

이대로 시작될 대성녀의 이야기에 끌려가다가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일이 벌어질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곳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그마저도 2년이 갓 되었을 뿐이며 영혼의 굴레와 법칙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간단하오. 그대가 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존재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지.》

“…….”

《그리고 영혼의 법도란 사사로이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영혼의 순환 굴레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말하오. 지금까지 성자께서 해오신 것처럼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소.》

지금이다.

“그렇습니까. 제게 있어 그 법도라는 것이 꽤 이기적으로 들립니다만.”

후후후, 웃음을 흘린 대성녀가 재미있는 아이를 본다는 것처럼 물었다.

《그럼 성자님께 묻겠소. 사람이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이오? 동물은 동족마저 해치는 것들이 많소. 그런 본능의 세계에서 동족을 우선으로 보호하고 사랑하며 지키는 것이 이기적이오?》

“그럼 대성녀님께 묻겠습니다. 지성이라는 뛰어난 이지를 신께 선물 받아 종 대다수의 머리,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서게 된 사람이 오직 동족만을 생각하며 그 외에는 배제하고 배척한다면,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

대성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제가 영혼사가 맞긴 한 것인지 저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할 수 있는 것만을 해오며 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중입니다.”

모든 사람을, 영혼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눈에 보이는 영혼만 승천으로 이끌고, 필요하다면 싸움과 소멸도 마다하지 않으며 사욕 또한 적당히 챙기면서 사람을 도와 나간다.

“제가 살던 곳에는 윤회전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저는 그런 개념은 알고 있어도 믿지 않았지만, 이곳에 와서는 그게 진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업보를 씻고 깨끗한 영혼이 되어 새로 태어난다는 윤회의 고리.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죽은 뒤 영혼으로서 죄를 씻고 새로이 태어난다니, 어떤 죄를 짓든 죽어서 씻을 수 있으니 살아생전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녀도 괜찮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수많은 자들이 모여 대학살을 일으키고 세상을 뒤집어엎어 윤회의 고리가 끊어지게 될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생각에 잠기는 그 표정에 환인은 슬쩍 한발 물러섰다.

“저는 영혼사로 각성하기 위한 빛의 강에서 죽인 생명과 마주하는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라면?》

“행동에 대한 책임.”

《…….》

환인은 움직임을 멈춘 대성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꺼낼 이야기를 다듬었다.

“저도 영도의 이념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타인의 행복과 희망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은 아무나 실천하지 못하는 고귀하며 거룩한 행위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극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인가…….》

“대성녀님께서는 죽은 직후의 사람에게서 영혼이 일어나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소녀는… 없소.》

“대성녀님께서는 죽은 동물이나 괴수, 마수, 이형종의 시체에서 영혼이 일어나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 성자께서는 그들의 혼마저도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

눈을 뜬 그녀의 옅은 황금빛 눈동자에 자신이 맺히는 걸 보며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은 영혼입니다. 하지만 저는 영도의 영혼사님들과 같은 사람이지요. 그러다 보니 동물이나 괴물보다 사람의 평온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사상은 위험하다는 것이 성자의 주관이로군.》

“극선은 곧 극악이나 다름없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에는 중도가 필요한 법입니다.”

떠드는 것은 이쯤 하기로 한 환인은 가만히 대성녀를 바라보기만 했고, 대성녀는 이제 눈을 감지 않고 환인을 마주 바라본다.

환인과 대성녀가 입을 다물자 두 번째 침묵이 내려앉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성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처음 봤을때의 포근한 미소와 다르다.

마치 ‘어째서 이제야 왔는가’하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미소.

《그대가 지금까지 몇몇 영혼을 소멸시킨 것을 알고 있소. 영도의 법도에는 좋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하지만, 그토록 확고하고 견고한 주관을 가진 성자라면 이유 또한 있을 것이니 큰 문제로 비화하지는 않겠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소.》

“…제 무엇을 보시고 그리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영성경을 두 번씩이나 만났으며, 그대의 혼에 천정의 향이 깊게 베여 있기 때문이며, 악령을 여덟이나 복속하여 사역 중임에도 눈과 마음에 한 점 미혹도 없으니, 그대의 발걸음에 오직 죽음만이 피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 믿기 때문이오.》

“……대성녀께서는 사람이 아니시군요.”

《후후. 성자께서는 아드네빌라와 만났다 들었소. 혹시 소녀의 종족도 짐작이 가시오?》

그녀도 신수 같은 존재인가.

“기린이 아니신가 합니다.”

환인의 답에 대성녀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웃음을 지었다.

《소녀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점, 소녀의 기운 속에서도 당당한 점, 설명 없이 소녀의 존재를 간파한 점.》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무릎 위로 올리며 말을 이어가는 대성녀.

어쩐지 저 미소가 어째서 꺼림칙하게 느껴져 환인이 대성녀의 말을 끊으려 했을 때.

《그럼에도 소녀를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변화도 없으니. 그대가 바로 간절히 바라던 이였음을 알게 되었소. 소녀뿐만이 아닌 영도와 쉼터의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하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다음 대 대성자의 방문을 말이오.》

닌실=아나그의 환한 미소에 환인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아으으. 안느 아가씨, 팔… 팔 좀 빌려줘…….=

필령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유르파는 비틀거리며 안느의 팔에 기대어 다리를 떨어댔다. 거의 2시간을 정좌하고 있어 혈류의 통행이 극도로 나빠진 탓이다.

=나도 다리가 좀 뻣뻣하네. 이슬이 넌 어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유르파를 부축해주는 안느의 질문에 대답한 그녀는 아까부터 화난 것처럼 눈썹 끝을 살짝 치켜세운 채 먼 곳을 응시 중인 환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이 영도의 다음 대 수장이라니…….’

거의 전 세계가 집중할, 그야말로 대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님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이야기일 뿐인데.’

이 여행의 목적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말을 한 적은 없지만, 환인은 이 세계를 사람이 살게 못 되는 엉망진창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린덴 촌락의 소멸과 알소프의 멸망을 본 뒤에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영도의 다음 수장?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대성자?

‘주인님한테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 증거로 좀처럼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주인님이 아까부터 화난 듯이 눈썹을 세우고 있다.

유르파는 간신히 다리의 마비를 풀고서 환인의 표정을 살피며 의견을 꺼내 들었다.

=자기. 못마땅한 마음은 알지만, 여기서 인상 쓰고 있는 건 별로 안 좋은 일 같아. 집으로 돌아가서 이후 일을 고민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지요.”

잠시 후 이실리테가 데려온 쿠에들을 타고 저택으로 복귀한 환인은 정원에서 쉬고 있는 비상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비상이 신기한지 은색 여우 남매가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다가간다.

‘영도가 나를 붙잡을 거라는 예측은 당연히 했다.’

대성녀, 닌실=아나그가 자신 휘하의 집행부에 들어오라는 제의나 일곱 영성이 자신을 찜하고 각 부처에 영입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랬는데 설마 대성녀가 직접 후계자로 지목할 줄이야.

‘지구인 관점에 치우친 판단을 내렸다.’

지구에서는 아무리 직업과 능력이 된다 해서 한 집단의 우두머리, 수장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대부분 인맥과 혈연, 지연, 학연으로 유세를 펼쳐 능력이나 직업보단 돈과 3연을 보고 뽑는 경우가 많으니까.

더욱이 내부 파벌 정치질까지 더해진다면 그때부터는 운의 요소도 상당 부분 가세한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당사자의 능력보다 3연에 의해 뽑히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

환인 또한 그런 파벌 다툼, 권력 다툼을 가까운 데서 지켜보았기에 자연스럽게 영도의 수장 선출 또한 그런 라인 요소가 적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이렇게 대성녀의 권한이 클 줄은……. 예상 밖이었다.”

대성녀는 어째서 자신을 후계로 지목했는지 그 이유를 상세하게 꼽아주었다.

‘영혼을 다루어 영혼술을 펼치는 것은 영도와 기틀을 마련하신 초대 대성자이시자 새벽의 빛이신 리시우라님 뿐이었소.’

‘고작이 아니오. 시조이신 분과 같은 직업이라는 건 지금 당장 수장직을 승계하여도 이상한 것이 없는 일.’

‘지식이 얕은 것은 배워서 채우면 되오. 능력이 미천하다면 수행하여 드높이면 되는 일.’

‘하지만 직업은 그렇지 않소. 더욱이 소녀의 존재감과 기백 앞에서도 멀쩡할 수 있는 정신력도 그냥 주어지지 않소. 얻더라도 그것은 인내하는 것. 성자처럼 담담할 수가 없지.’

‘뒤를 보시오. 그녀들의 반응이 보통인 거요.’

여자친구들은 시종일 대성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꽁꽁 얼어있었다. 나와서 넌지시 물었을 때,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유르파가 환인의 혼잣말에 으음, 침음을 흘리다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자기는 대성자가 될 생각은 절대 없는 거지?=

“예. 대성자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을 테고 관련 지식과 품위도 익혀야 할 텐데, 그리되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될 겁니다. 최소한 년 단위로 영도에 붙잡혀 있어야겠지요.”

물론 대성자가 된다면, 신수 기린의 후원을 받으며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다면 니오네브레스에서도 손꼽히는 영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얕보지 못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대가가 니오네브레스에서의 수십 년 생활이라고 하면 비교할 가치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성녀님은 도령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저도 그렇게 봤어요. 주인님 아니면 다음 대성자는 없다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대성녀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환인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칼에 거절했었다.

환인도 자신의 직업과 자질이 그들에게 있어 결코 놓아줄 수 없는 수준이란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허용할 수 있는 제안의 상한선을 그어놓았고, 그것이 외부 활동이 자유로운… 일곱 영성 중 한 자리 정도였다.

그런데 외부 활동조차 자유롭지 못한 영도의 수장 지위라니.

환인의 칼 같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대성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환인에게 마음을 돌려달라 설득했고, 환인은 조금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권유를 사절하며 필령궁을 빠져나오려 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오찬까지 준비되어있는데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

결국 1시간에 걸친 식사 시간 동안 환인은 체할 것 같은 권유를 쉴 새 없이 받으며 정진 요리 같은 점심상을 들었다.

백려강이 조금 극단적인 수단을 내놓는다.

「몰래 도망가는 건 어떤가요? 영도는 대성급술법방호결계가 쳐져 있어 지정된 루트를 제외하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지만, 안쪽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문제가 없어요. 찾아보면 탈출 방법은 많을 거예요.」

그녀의 의견에 다른 여자들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칠 것까지는 없지 않나?=하며 약간 부정적인 뜻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환인은 몇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

“그녀가 포기할 때까지 계속 거절하던가, 아니면 몇 년간 세계를 돌아보게 해준다는 조건을 받아내든가 해보고 안되면 백려강의 말대로 도망쳐야겠지.”

=…….=

=…….=

도망쳐야 하는 거구나.

=도망쳤다고 설마 영도에서 잡으러 오지는 않겠지?=

“잡으려 들지는 않겠지만, 사람을 보내 계속 설득하고 회유하려 들 거다.”

그로 인해 자신을 노리는 사람도 더욱 많아질 테고.

만약 도망치게 된다면 여자들은 앞으로의 여행길이 다소 험난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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