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65화 (465/813)

〈 465화 〉 459 영도 에쉬누르

* * *

백려강.

유서 깊은 프라버 6급 백씨 호족 가문 37세손으로 파랑새의 피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가지고 태어난 명가의 자녀.

파랑새의 피라고 해도 큰유리새나 돌라버드, 혹은 달러버드dollarbird로 불리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옆에 있으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파랑새다.

그걸 증명하듯 백려강은 푸른 하늘의 여신이 땅으로 내려온 것 같은 찬란한 외모를 지녔다.

티 없이 맑고 푸른 하늘색의 머리카락에 사파이어처럼 영롱한 한 쌍의 눈동자. 길고 짙은 하늘색 속눈썹에 가지런한 이목구비는 절세 미녀라는 수식어가 빛바랠 정도다.

눈처럼 하얗지만 핏줄 하나 드러나지 않는 피부나 허리께에 난 한 쌍의 미려한 중천익도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일 뿐.

그랬기에 그녀를 본 사람은 그녀가 파랑새의 피를 이었다는 점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움에 반해 행복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남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대신 자기 자신은 새장에 갇혀 불행해지는 파랑새처럼, 백려강은 파랑새의 불행한 특성까지 고스란히 이어받고 말았다.

그녀를 본 남자가 새장에 가둬서 곁에 두고 키우고픈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비교적 평범하고 양호한 일이었다.

아직 어린 그녀를 강제로 추행하려 한 호족도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여자들의 시샘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빈번했다.

끝내는 가문의 사정과 외세의 음모에 휘말려 소중한 사람과 가족을 위해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마지막에는 새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된 파랑새처럼, 그녀도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것이다.

「…….」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백려강은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탑에서 몸을 던진 덕분에 그가 찾아오실 때까지 시간을 벌었으니까.

알소프 소멸 이후 환인이 프라버의 백중강과 연락을 위해 가끔 통신할 때, 백려강도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 자신의 투신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부친 자는 알소프의 영주였다. 도시의 방어 장막을 치워 공격을 용이하게 하려는 알소프 영주의 사보타주였던 것.

하지만 자신은 그에 응하지 않고 스스로 탑 위에서 몸을 던졌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가족과 자라온 도시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그를 위험에 빠트리는 대신, 가문 내 여러 문제점을 스스로 끌어안고 투신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자살을 선택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알소프는 자신의 사망 소식에 퍽 당황해서 후속 대책 마련에 시간이 걸렸었다. 거기다 자신의 투신이 호족의 명예를 위한 자진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다른 고위 호족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프라버에 몰아치는 맹렬한 비난이 한풀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에게 갈지도 몰랐던 음해와 모략도 중단되었고, 최종적으로 그가 프라버에 도착해 사태를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번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백려강은 그제서야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후우….」

그 이야기를 들은 유르파나 이실리테, 안느는 그걸 결과론적인 판단이라며 비판하고 매섭게 꼬집었다.

찾아보면 멀쩡한 대처 방식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섣불리 자살, 현실에서 도피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는 게 그녀들이 화를 내는 이유였다.

백려강은 그 비판이 자신의 선택과 현 상태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의 마음이란 걸 알았기에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법이다.’

뜻밖에도 그런 분위기를 일축한 것은 환인,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가족과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일이지.’

흥분한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을 두둔해주는 남자의 모습에 백려강은 그 선택으로 잃은 것 이상의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여행한 두 달 남짓한 짧은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를 향한 자신의 걱정 따윈 칠푼짜리 돼지 꼬리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것 같지만…….

백려강은 넓고 안락한 침실의 침대 위, 그곳에서 유르파와 함께 곤히 잠든 환인을 바라보다가 유령 특유의 부유감으로 몸을 웅크리며 조금 슬픈 눈빛을 지었다.

「…….」

그와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져서였다.

하다못해 쿠에들도 마차를 끌며 환인 님께 도움이 되는데 자신은 정말…… 환인 님의 여행길에 아무 쓸모가 없다.

하늘에서의 감시는 비상이가 있다. 땅속과 벽 너머 주변 밀착 감시는 환연의 정령 감시를 따라갈 수 없다.

환인 님의 영기와 원기가 없다면 자신은 가시화, 실체화도 못 하며 실체화한다 해도 단검 한 자루 들기 어렵다.

그의 영혼술이 있으면 자신은 친구들에게 강령 되어 그녀들의 신체 능력을 약 4배 가까이 극적으로 올려줄 수 있지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의 중급 정령 강령이면 3배의 신체 강화가 이루어진다.

문양으로 강화한 강령을 하면 3.9배 가까이 세질 정도니 말해서 무얼 할까.

자신도 문양 에너지를 받아들인 뒤 그녀들에게 강령 되면 될 테지만…….

‘그 방식은 너에 대한 안정성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쓸 수 없다.’

처음 의견을 꺼냈을 때 자신의 신변을 걱정한 그에게 거절당했다.

자신의 영혼을 매개로 저주를 내릴 수도 있지만.

‘너의 영혼으로 저주를 내린다면 수면과 평정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문양 강화와 마찬가지로 네 혼에 어떤 부담이 더해질지 모르니 함부로 할 수 없다.’

하다못해 실체화한 뒤 자신의 혼령으로 환인 님께 귀접, 영교접의 즐거움을 드리고 싶어도.

‘나와 교접한다는 것은 네 영혼의 일부가 내게 흡수된다는 뜻이다. 너의 혼에 부담이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라며 전부 거절당했다.

그걸 안타깝게 지켜보던 안느가 몰래 다가와 자신의 몸을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백려강은 마음만 고맙게 받았다.

친구의 몸으로 그의 밤시중을 든다는 행위에 이유모를 죄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백려강은 그와 일행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처음에는 이실리테의 요리를 도와주려 해보았었다. 비상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감시할 때 자신도 따라가서 주변을 감시해보기도 했었다.

유르파의 마도구, 마도기 제작과 분석에 자신이 가문에서 배운 지식을 전해주며 거들어도 주어봤고 안느의 성체술 이론 정립에 자신의 법술사 지식을 보태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부 다 마땅치 않았다.

실체화해도 감자 하나 들기 어려워 이실리테의 요리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고, 비상의 비행 속도는 그녀가 뒤쫓기도 버거운 수준.

유르파의 전문 지식 앞에서 자신이 쌓은 지식은 고작 며칠 짜리, 금방 지식이 바닥나 그녀를 돕지 못했고 그건 안느의 성체술 연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그 사실에 백려강은 강한 조바심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

‘저도 환인 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는 기다리다 보면 환인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며 위로해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백려강은 참기 어려운 답답함에 재차 한숨을 내쉬며 침대쪽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꺅, 작게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눈 감고 있던 환인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

「이, 일어나셨어요…?」

“근처에서 근심 섞인 한숨이 계속 들려오면 눈이 떠질 수밖에 없지.”

돕지는 못할망정 소중한 수면 시간을 방해하다니, 저는 정말 쓸모없는 여자예요…….

백려강은 그의 이야기에서 창피함과 괴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읏.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

환인은 유르파가 만들어준 하늘색 로브를 하늘거리며 돌아나가는 백려강의 모습을 시선으로 뒤쫓았다.

뭔가 표정과 분위기가 어둡던데. 또 자아비판과 자책을 겸하고 있는 건가.

침대에서 일어나 쫓아가려던 환인은 오른팔이 덜컥, 잡히는 느낌에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유르파가 자신의 팔을 가슴골에 끼운 채 꼭 껴안고 잠들어있다.

“…….”

오뚝한 콧날을 별 뜻 없이 쿡 찔러본 환인은 조심스레 팔을 빼고, 가슴골이 허전해져서 우응… 칭얼거리며 잠결에 침대 위를 더듬는 그녀에게 자신의 베개를 안겨준다.

그러자 베개를 꼭 끌어안으며 평온해진 얼굴로 색색 잠드는 유르파.

가운을 가져와 걸쳐 입으며 달빛이 번지고 있는 거실로 나간 환인은 백려강이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보인다. 밖으로 나간 건가.

테라스로 나가보려던 환인은 시야 가장자리의 거실 구석, 잎사귀가 커다란 조경수 아래에 쪼그려 앉아있는 백려강을 한발 늦게 발견했다.

“…….”

작은 이파리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요정 같은 자태. 수심에 잠긴 표정이 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던 환인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그 앞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왜 그러지.”

「…죄송해요…… 전 하나도 쓸모없는 영혼이에요……. 환인 님께 도움은 못 될 망정 방해나 하고…….」

오늘은 상태가 평소보다 심각하군.

평상시에는 자신의 일을 돕지 못해서 조금씩 우울해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우울증이 느껴질 정도로 기운이 없다.

환인은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백려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들려줄 수 있나.”

지금 입을 열면 그의 자상한 마음씨에 기댄 투정 밖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그녀가 조금씩 드러내는 내심, 자신도 친구들처럼 당신을 돕고 싶다는 고백에 환인은 말없이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차라리, 차라리…… 저도 악령이 되어서 들개 전사단 분들처럼 검은 영혼 구슬이 되는 게 환인 님께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바보 같은 소리.”

움찔, 백려강은 그와 여행을 떠난 뒤로 한 번도 듣지 못한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종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었지만, 연인인 그녀들과 뒤늦게 합류한 자신에게는 늘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를 들려주셨었는데.

방금 드린 말씀이 그만큼 화나는 이야기였을까?

백려강은 이어질 호통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호통이 떨어지지 않아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화난 게 아닌,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의 얼굴이… 노란 달빛에 물든 그의 표정이 그녀의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내가 조금 무신경했었군. 그녀들과 친하게 지내며 할 일을 찾는 모습에 나름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약간의 한숨이 깃든 그의 자책에 죄송하다고, 생각 없이 악령 같은 단어를 입 밖에 내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던 백려강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과 할 일이 있는데 자신만 명확한 역할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괴로운 법이지.”

환인은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타락은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다. 백려강이 들개 전사단의 여자들처럼 타락해서 악령화 해버리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그녀의 마인드 케어를 위해 그동안 기획해왔던 것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귀접을 통한 자신과 백려강의 능력 변화 확인.

그녀의 도움을 받아 영혼 구슬을 사용하는 영혼술의 변화 시도.

악령의 영혼으로 영혼술을 펼쳤을 때의 영혼 에너지의 소모도가 그녀에게도 해당하는지에 대한 실험.

그 외 영혼술의 접목으로 인한 부작용 확인 등.

이미 몇 가지는 방안을 세워놓았고 그에 관한 이론과 부작용 실험도 악령과 짐승, 괴물의 영혼을 통해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

그중 환인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영혼 구슬을 사용하는 영혼술의 변화 시도였다.

환인은 이때까지 영혼을 탄환 그대로 사용해왔다. 자신이 총기라면 영혼은 총알로 사용해 적을 공격해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최근, 린덴 촌락에서의 사건 이후로 조금씩 능력에 변화를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혼 구슬을 위상석처럼 영혼술의 매개로 쓰는 것.

“한 마디로 영혼 구슬을 손에 쥔 채 영혼 구슬을 소비하지 않고, 나 자신의 영기와 문양 에너지를 혼합해 기술을 발현하는 거지.”

「그, 그게 가능한 건가요……?」

“몇 가지 전조도 있었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속성 정령을 강령하면 정령의 속성을 쓸 수 있게 되는 점이나 검은 영혼 구슬을 쓰면 다시 돌아와 구슬로 변하는 것 같은 일들.”

「그럼……!」

“네 혼의 특성은 적에게 수면과 평정 효과를 부여한다. 만약 너에게서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정신력이 약한 적일 경우 제약 없이 재워버리고 투쟁심을 지워버릴 수 있게 될테니 비전투 상황에 매우 유용할테지.”

이실리테와 안느의 전투력은 지금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전투 기술은 여전히 환인과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제 대인전에 한해서는 그녀들을 일 대 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아지에라의 영혼 기사들도 1:1로는 이실리테에게 20초를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된 거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실리테와 안느가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 환인도 그녀들을 해치우는데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수준.

그것도 환인의 특성과 전투방식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아무튼.

“이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가 전면에 나설 일은 거의 없겠지. 어지간한 적은 그녀들 선에서 걸러질 테니. 하지만 그녀들이 나서기 어중간하거나 싸우는 게 곤란한 상황에서 네 혼의 특성으로 적을 다 재워버릴 수 있다면 전술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 편리함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환인의 이야기에 백려강은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전투술에 변화를 준다는 것은 수십 년 사용해온 무기를 버리고 종류가 전혀 다른 무기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인데, 그걸 자신을 위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환인 니임…….」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귀접의 특수성과 그것으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다.”

들개 전사단의 여자들에게서 한기를 흡수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건대,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백려강도 나름의 힘을 갖출 수 있게 될 거다.

그러면 마냥 지키고 보호해줄 존재에서 나름 전투력을 지닌 존재가 될 테니 난전이 벌어지거나 갑작스러운 습격이 벌어져도 걱정을 덜게 되겠지.

“물론 이것들은 영도의 규율을 확인한 뒤 문제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환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백려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다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저, 무엇이든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희망을 되찾은 것처럼 간절히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지.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한다.”

「흑… 네엣.」

환인은 품안에 들어온 그녀의 몸의 굴곡을 느끼며 잠시 생각했다.

‘아지에라가 백려강을 수호령이라고까지 한 마당이니 어지간해서는 말이 뒤집히지 않겠지만…….’

자신이 백려강의 혼과 계속해서 다니는 것을 영도가 걸고넘어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려해야 할 것이라면 사람 영혼으로 영혼술을 펼치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다.

정령이나 괴물, 이형종, 짐승의 영혼으로 기술을 쓰는 것은 영도도 관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 영혼은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허락이나 불허, 어느 쪽이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그의 내심인 거다.

‘불법성 여부나 규율 침해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을 대비해 조심스레 행동해야겠지.’

환인은 백려강의 떨림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고 후, 웃으면서 조금 심술궂은 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 일을 알게 되면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가 꽤 슬퍼하겠군.”

「……네?」

“이실리테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내게 맞춰져 있다. 그 때문에 매일같이 내 일거투일수족의 파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요즘 풀어주기 시작한 것이 너라고 이실리테에게 들었다.”

백려강이 옆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만 주어도 긴장과 피로가 풀려 마음이 훨씬 편안해진다고 이실리테가 직접 이야기했었다.

그걸 말해주자 백려강은 당황해서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저는 그냥 듣기만 했는 걸요. 그리고 이실에게는 안느도 있고 두 사람은 옆에서 봐도 굉장히 친밀하고 사이좋은데…….」

“안느도 그녀에게 소중한 친구이지만, 다른 의미로 라이벌이기도 하다. 자존심 탓에 마냥 편하게 대할 수는 없는 거겠지.”

「…….」

“그리고 그건 안느도 마찬가지다. 이실리테는 그녀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경쟁자. 나를 좋아하는 만큼 이실리테도 좋아하지만 모든 속내를 내비치기에는 이실리테에게 승률이 떨어지는 현재로서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아우…….」

“그런 안느도 너와 대화가 긴장을 한결 이완시켜주고 마음을 부드럽게 해준다고 하더군. 유르파도 자신은 전혀 생각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줘서 정말 고맙다고도 했고. 환연도 네가 몸만 있었으면 계속 달라붙어 있었을 텐데 그게 정말 아쉽다고 했었지.”

아우아우하며 당황한 듯 손을 어지럽게 움직이는 백려강.

환인은 그걸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일행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차라리 악령이 되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하다니. 그녀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환인 님…….」

환인은 자신의 손을 잡고 ‘제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표정에 큭, 작게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넌 일행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자책하고 있지만, 이미 일행에서 빠지면 안 될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이다. 훗날 또 자신이 쓸모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면 자신의 판단에 앞서 주변의 친구들부터 보는 걸 추천한다.”

「…….」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려강.

이 정도면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닌실=아나그와 면담을 끝내면 그녀의 활용에 대한 영역도 확실하게 정리될테고 그리되면 그녀에게도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이 생길 거다.

더 이상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하하지 않게 되겠지.

조금씩 주위가 밝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 환인은 백려강을 품에 안은 채 거실의 커다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그녀의 쓰다듬기 좋은 엉덩이를 만지며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동이 터오는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기 시작했다.

백려강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같은 걸 감상하며 마음 속에 따스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오전.

거실의 소파에 앉아 니오네브레스에 퍼트릴 기술의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던 환인은 우브의 방문을 받았다.

=환인 성자님. 대성녀님께서 오늘 뵐 수 있는지 여쭈셨습니다. 회답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늘 언제 말씀이신지.”

=가능하다면 지금, 안된다면 저녁을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면 점심시간입니다만. 그래도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영혼 기사님들께도 대성녀님의 초대가 왔으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지요.=

생각할 것도 없다. 언제 연락이 올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환인은 노트를 덮고 여자친구들에게 눈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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