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64화 (464/813)

〈 464화 〉 458 영도 에쉬누르

* * *

멀리서 영도로 들어가기 위한 오름길 일부를 본 감상은, 중국의 어떤 심산유곡처럼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절벽에 쇠사슬을 박아놓고 그걸 잡고 올라가는 수준의 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몇몇 코스는 경사가 90도를 넘어 110도에 이르는 것도 보인다.

이름은 오름­길이지만 등산이 아니라 등반이라고 할까.

=푸흐흣. 이슬아, 이거 봐. 헬루멘의 연뢰, 시하=사이지=위르트 8급 호족 영주의 인정을 받은 적검희 이실리테의 추상화래. 실물보다 더 못생겼어!=

=넌 아예 깃털 투구를 쓴 모습이네. 거기다 체격은 이전 모습이고…… 이거 누가 만든 거야?=

그릴 거면 정확한 고증에 따라 그려야지, 왜 이렇게 무심하게 그리는 거냐며 이실리테가 조금 화를 내자 안느는 마냥 좋은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킥킥 웃는다.

“…….”

마차 지붕에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깨알같이 작게 보이는 사람이 코스를 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우라도 안 보이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인듯한데 저렇게 목숨 걸고 올라가는 이유가 뭘까.

영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영도 오름길 입산 통행로}◀라는 고급스러운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 표지판을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올라가자 좌우로 주욱 늘어선 숲 사이로 오름길의 입구. 절벽 사이로 난 통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깎아지른 높이 수백 미터의 기암?? 절벽이 성벽처럼, 혹은 병풍처럼 장엄하게 펼쳐진 가운데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

좁은 계곡 사잇길 같은 오름길 입구에는 순찰대와 비슷한 무사 복장의 네 명이 입산 대기 중인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입산을 원하는 사람들은 여자고 남자고 체격이 단단하며 험난한 등산을 대비한 듯한 차림이었다.

그 사람들을 발견한 이실리테가 그제야 으음,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우리 이제부터 저 산을 타야 하는 거지? 길이 꽤 험난해 보이네. 추락하면 좀 크게 다치겠는 걸.=

=나나 주인님, 유리 언니는 안 다치니까 너만 조심하면 돼.=

=칫. 나도 이제 성체술 이론을 거의 다 완성했거든? 이거만 완성하면 전투력이 2배 이상 상승할 거란 말이야. 그럼 7:3으로 치우친 대련 승률도 비등해질 거고 너도 괄약근 꽉 조이고 긴장…… 아야!=

안느의 속삭임이 이어지다 철썩, 호쾌한 타격음이 터지더니 팍팍팍, 이실리테의 앙증맞은 주먹이 그녀의 어깨며 옆구리, 팔을 마구 때린다.

=밖에서! 그런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아악 너무 아퍼! 꺅! 뼈, 뼈 맞았어!=

속닥이면서 아이들처럼 아웅다웅하는 여자친구들. 천상계의 미녀라고 해도 될 두 사람이 그러니 적잖이 눈 호강이 되는 기분이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던 환인은 입산을 앞두고 긴장하는 사람들을 차분히 살폈다.

12명 중 직업자는 세 명. 2급 2명에 3급 1명이다. 직업자들은 일행으로 안 보이고 일반인들은…… 한 팀으로 행동하는 건가.

조만간 밤이 찾아오는데도 입산하는 것을 막지 않는 게 이세계라는 느낌이 강하다. 소지품이 단출한 것도 신경 쓰이는데…….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려 까마득한 벼랑과 절벽으로 이어진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려있는 것에 준다.

저런 곳을 클러치백 수준의 소지품 양으로 돌파할 수 있는 건가.

‘오르는데 소지품이 제약된다면 평범한 오름이 아닌 일종의 테스트 공간일 수도 있겠군.’

일단 아이들이 저 산을 타는 것은 무리일 테니 믿을만한 장소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어쨌든 짐을 챙겨서 오를 준비 해야겠네. 그럼 아이들은 어쩌지?=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안전한 곳에 맡겨둬야 하지 않을까? 주인님이 후견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아무에게나 인도할 수는 없잖아.=

마차 옆에서 함께 가던 우브가 여자친구들을 향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 오름길은 대성녀님께 상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타는 길입니다. 영혼사님과 영혼 기사들, 영도 거주자들은 기동 승강기를 이용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진짜? 오름길이 어떤지 궁금했는데 조금 아쉬운걸.=

=하하. 오름길은 다르게 고난의 길, 혹은 수행의 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름길은 일반인, 직업자 1급부터 7급까지 여덟 경로로 세분되어있으며 각 경로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 위험하지요. 특히 7급 경로는 영산 알노르의 절반을 경유하는 코스이기에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합니다.=

=경로를 세분화시켜놓은 것은 직업자의 등급에 맞는 경로를 맞추어 놓으신 건가요?=

이실리테의 질문에 우브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급 직업자부터는 영도에서 준비해주는 소지품만 가지고 가야 하기에 다른 분들 보다 더욱 위험합니다.=

=우음……. 그 정도는 해야 대성녀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거겠지?=

멀리서 본 영산 알노르는 산맥의 절반 이상 봉우리에 만년설이 쌓여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에는 구름이 갇혀 운무를 형성 중이었고, 기암괴석과 울창한 원시림이 나머지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어 보기만 해도 사람은 물론 괴물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는 비경??임을 알 수 있을 정도.

이야기 도중 마차가 오른쪽으로 꺾인다.

숲속 오솔길 같은 짧은 길을 지나자 일행의 앞에 나타나는 조금 밋밋한 금속 문.

3급 직업자 무사 두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우브와 세르넨을 보곤 경례를 올렸다.

=세르넨 경, 우브 님. 돌아가시는 길이십니까?=

=예.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님과 비자룩스의 녹색 성자, 환인 님을 모시는 중입니다.=

성자가 있다는 말에 수문병의 눈빛이 한차례 강하게 빛났지만, 태도는 여상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신원 확인을 진행하겠습니다.=

서로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신분과 인원 확인은 철저하다.

지붕에서 내려온 환인의 신원까지 확인한 수문병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높이 5m의 금속 문을 열어주었다.

=신원 확인 끝났습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열린 문 안쪽의 곧은 통로는 사람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장소였다.

조명 술법이 부여되어있는지 등?은 하나도 없는데 대낮처럼 환하다.

높이 5m의 천장은 아치형에 색색의 돌조각을 끼워 맞춘 스테인드글라스 느낌이고 좌우 폭 4m의 벽에 새겨진 것은 영도의 역사를 표현하는듯한 양각 벽화.

반대로 바닥은 유리처럼 깨끗한 대리석이어서 마차와 탈 것을 이용해도 될까 싶을 만큼 경건한 분위기다.

비상을 타고 통로를 걸으며 벽화를 구경하던 환인의 귀로 여자친구들의 속삭이는 대화가 들려온다.

=이게 그 유명한 역사의 통로구나.=

=역사의 통로?=

=영도의 시작부터 현재에까지 크고 작은 일을 새겨놓은 장소야. 지금도 계속해서 새기고 있다고 해. 봐, 벽화 끝났지?=

=진짜네…….=

좌우 벽화는 통로의 3/5 지점에서 끝나고 매끈한 유백색의 벽이 이어진다.

그런 500m의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은 천장이 직선으로 뚫린 작은 돔 형태의 승강장.

약 20평 정도의 발판 승강기가 있지만 로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 리프트 형식인가.’

하지만 수직으로 뚫려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면 그 높이가 아득한 수준이다.

도무지 리프트 형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다고 보기 어려운 높이.

마차와 아지에라의 영혼 기사들 모두가 올라타도 넉넉한 발판에 오르자 세르넨이 난간에 설치되어있는 패널을 조작한다.

잠시 후 부우웅— 미미한 진동음과 함께 발판 중심부에서부터 청백색의 빛이 아름답게 퍼져나가며 꽃잎 같은 형상을 띄고, 이어서 승강기 주변으로 은은한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매끄럽게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오, 위상력으로 작동하는 승강기네.=

=주변에 떠오른 저 빛은 뭐야?=

=추락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야. 벽 같은 거.=

=아…….=

‘속도가 빠르군.’

엘리베이터는 높이마다 다르지만 보통 초당 1~1.7m 정도를 상승한다. 하지만 이 승강기는 척 봐도 초당 10m 수준.

물론 상승 직후 가속도가 붙는 동안에는 느렸지만,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니 중력으로 부하가 조금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수직 통로의 벽이 유백색의 매끈한 벽이라 속도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1.5분 정도 상승한 끝에 승강기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위층에 도달하자 쿵, 작은 진동과 함께 멈추어 섰다.

‘거의 700m 높인가.’

=도착했습니다. 먼저 가시지요.=

우브의 안내에 따라 입구 통로와 흡사한 출구로 나아가는 마차.

환인은 저 통로 끝에 보이는 빛에 가까워질수록 주위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계속 한여름 속에 있다가 갑자기 늦가을로 변한 것 같은 기온 변화.

통로를 빠져나온 환인은 화아악 불어닥치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작게 감탄을 흘렸다.

‘아드지에서는 영도가 안 보인다 싶더니.’

영도 에쉬누르는 일종의 탁상지?上?였다.

거대한 기암절벽의 평평하게 깎인 지반 위쪽, 그리고 높은 산의 거대한 구멍 속에 지어진 종교 도시.

도시의 절반은 밖으로 노출되어있지만, 탁상지 특유의 지형 덕분에 멀리서가 아니면 이쪽을 볼 수도 없고, 그나마 도시의 나머지 절반은 산 안쪽에 지어져 밖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소다.

그 넓이는 소도시의 절반 정도.

통로를 빠져나온 마차는 우브의 수신호에 맞춰 정차했고 약간의 부산스러움과 함께 아지에라가 영혼 심문관의 단정한 복장 차림으로 마차에서 내린다.

=와아…….=

=오…….=

세르넨과 우브, 아지에라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안느와 이실리테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영도의 독특한 분위기를 정신없이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북쪽은 거대한 구멍 속에 수많은 건물이 지어져 작은 도시를 형성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까마득한 산 정상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는 듯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저기 저 큰 나무가 엘스너펠이겠네. 진짜 다 보이잖아.=

안느의 혼잣말처럼 엘스너펠의 높은뿔 나무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데다, 서서히 노을이 지며 대지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조금 휘어져 보이는 지평선과 어우러져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

=와아, 풍경 뭐니?=

「절경이네요~.」

마차에서 부모를 잃은 여우 남매들과 함께 내린 유르파와 백려강도 그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환인은 풍경보다 영도의 구조와 분위기를 살피는 중이었다.

영도의 첫인상은 이탈리아의 수도에 있는 특정 종교의 시국市國이었다.

영도?라고 해서 동양 종교 풍 이미지가 강했는데 실제로는 서양 종교 색채가 진하다.

건물은 모두 서양 성당과 서양 교회 느낌이었는데 그런 크고 작은 건물 수십 채가 감싸는 듯한 거대한 원형 건축물은 어떻게 보면 콜로세움처럼 보이기도 했다.

길거리가 사람들로 가득해 활기차던 아드지와 다르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 노을이 지는 시기와 맞물려 도시에 거룩하면서도 고즈넉한 느낌이 충만하다.

도시를 대충 보이는 곳만 살핀 환인은 유르파의 다리에 매달려있는 소년 소녀를 돌아보았다.

=…….=

=우으….=

환인의 시선에 여우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감추며 움츠러드는 남매.

유르파는 아이들이 꼼지락거리며 허벅지를 건드리는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곤 환인을 향해 물었다.

=자기. 아이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니?=

“일단 여기 있을 동안에는 데리고 다녀야겠지요. 그사이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본 뒤에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도시에 남고 싶다고 한다면…….

영도로 오는 순례길은 결코 안전하고 평탄하지 않다. 여기까지 와서 여비가 바닥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여우 남매들이 겪은 일도 드물지만 벌어질 터.

그럼에도 도시가 깨끗하고 분위기가 좋다면 그런 일에 대비한 구제 정책이 있을 게 틀림없다.

찾아보면 고아원이나 보육원도 있을 테니 그곳에 맡기고 성자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맡기는 쪽도 이후 일을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우브, 세르넨과 대화를 나누던 아지에라가 환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환인 성자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아이샤를 따라가시면 그녀가 쉴 장소를 안내해드릴 겁니다.=

“아지에라 님은 대성녀님을 뵈러 가시는 겁니까.”

=네에. 대성녀님께 올려야 할 보고가 산더미여서요.=

작게 웃음 짓는 아지에라에에게 환인은 턱수염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는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는 언제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 만나는 것은 성자님께도, 대성녀님께도 피곤한 일이 될 테지요. 성자님도 그동안의 여행으로 여독이 쌓이셨을 테니, 여독을 풀고 계시면 내일이나 모레 즈음 사람을 보내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지에라는 품에서 보라색의 금속 티켓 같은 것을 넘겨주었다.

=이것을 사용하시면 서쪽 소형 승강장을 통해 아드지와 편히 오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동쪽 방면이다. 방금 이용한 승강기는 대인원이 쓰는 길이었나.

환인은 자신에게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떠나는 아지에라와 그녀의 영혼 기사 넷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샤에게 걸어갔다.

환인 일행이 안내받은 곳은 전형적인 중세 서양 저택이었다.

막 2~3층에 지붕 층까지 포함되는 대형 저택 같은 곳은 아니고, 성당을 조금 변형시켜 지은 듯한 기와지붕의 단독 저택.

안느는 마차를 저택 옆에 세워두고 먼지떨이로 마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대형 천막을 꺼내 마차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덮어씌웠다.

그리고 긴 시간 쉬지 않고 마차를 끄느라 고생한 쿠에들, 기지개를 켜며 꾸우큐으 우는 쿠에들을 모아서 피로를 감소시켜주는 성술을 펼쳐준다.

쿠에~

쿠으엣.

고마워하며 뺨을 비비적거리는 쿠에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안느는 저택 뒤편으로 몰아가며 말했다.

=마차 끌고 오느라 수고했어. 집 뒤쪽으로 가면 잔디밭이 나오는데 거기서 쉬어.=

쿠에!

쿠흐흥~

=우리 집 아니니까 잔디 막 파헤치지는 말고. 멀리 가지도 말고!=

쿠으~

쿠르티와 쿠핀, 쿠라를 보내놓은 안느는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안쪽이 훤히 보일 만큼 높고 커다란 창문이 곳곳에 붙어있는 단층 저택을 살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두워졌기에 집 내부에서 켜놓은 백색광이 밝게 흘러나오며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친구들과 (마음속)남편이 보였다.

=흐음.=

집 주변에는 담벼락과 과수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 있어 바깥에서 보이지 않겠지만, 대놓고 애정행각을 하는 건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확 풍겨오는 맵고 짭조름한 음식 냄새.

안느는 뱃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을 들으며 주방 쪽을 힐끔거리다가 남매들과 함께 있는 환인에게 걸어갔다.

“그런가. 조부모님도 돌아가셨다니…….”

=……훌쩍.=

아무래도 아까 했던 이야기,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근처에 서 있는 유르파와 백려강에게 다가간 안느는 환인이 품에서 검지 굵기의 은색 털 뭉치를 꺼내는 걸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뭘까. 도령이 저런 걸 따로 챙기는 건 본 적 없는데.

“자. 받아라.”

=……어… 이건…….=

=엄마 냄새가 나…… 흑…….=

“너희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유품으로 잘라 온 거다. 너희가 자리 잡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장소에 묻어 묘지를 만들어드리면 하늘에 계실 너희 어머니도 안심하시겠지.”

=가, 감사합니다아…….=

“그래. 지금은 피곤하고 머리가 복잡할 테니 편히 쉬고 있어라.”

환인은 소년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본 유르파는 훌쩍이는 소년 소녀에게 다가가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

=아르, 너는 똑똑하고 머리가 좋으니까. 성자님이 말씀을 꺼내실 때까지 잘 생각해두렴.=

=뭐, 뭐를요…?=

=앞으로 이 도시에서 살아갈지, 아니면 너희가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로 돌아갈지 말이야. 성자님이라면 너희가 원하는 걸 충분히 들어주실 수 있거든.=

=…….=

소년이 생각에 잠겨 드는 것을 본 안느는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애들이 태어난 마을로 돌아갈 이유가 있어? 내가 보기에 그냥 여기에 자리 잡고 적응하는 게 훨씬 좋아 보이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부모라는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은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마련인데…… 차라리 환인 님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아래쪽 도시에서 지내는 게 훨씬 안전할 수 있어요.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고요.」

=하지만 태어난 고향이라는 것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거니까…….=

=음…….=

「아…….」

=아무튼, 언제 질문이 와도 대답할 수 있도록 잘 생각해야 해. 아르, 네 미래는 물론 여동생의 미래도 걸린 일이니까. 알았지?=

=네. 잘 생각해둘게요, 누나.=

=응. 착하다.=

아르와 아라의 머리를 토닥여준 유르파는 유르파는 안느와 백려강을 돌아보며 후우, 긴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어떻게 영도에 도착하긴 했네. 영도에 도착할 날이 올까 싶었는데 말이야. 그치?=

=그러게. 비자룩스에서 편지를 받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한 9개월 됐나?=

=크라빈의 4개월까지 더하면 1년이 넘을 거고, 아니면 그 정도지.=

=오래 걸리긴 했네. 아, 르아한테 연락도 해야 할 텐데…… 여기서 수정구 통신을 써도 되나 모르겠다.=

=해도 될지, 하지 말 아야 할지 고민될 때는 하지 않는 게 좋다더라.=

=으음…….=

유르파와 안느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백려강은 주방 쪽을 돌아보며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요. 환인 님은 괜찮으실까요? 오시는 길에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나도 조금 걱정되긴 해. 아지에라 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령이 새벽의 빛이라는건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고…… 그렇게 되면 영도에서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지에라 님은 자기의 편인 게 확실하지만, 대성녀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니까…… 자기도 대응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거야.=

=…….=

「…….」

잠시 생각하던 여자들은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들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 상황은 알소프 소멸로 인해 고도의 정치적 문제가 얽혀있는 것으로 아는데, 자신들은 정치 쪽은 젬병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들른 도시에서 빠짐없이 문제가 터졌었다. 하나의 법칙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기에 여자들은 여기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금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유르파는 잠시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초조해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자기가 적어도 우리 품 안에서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도록 티 내지 않는 게 좋겠어. 그 외에는 평소에 하던 대로 움직이고.=

=……응.=

안느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게 정답이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라면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언급을 해줄 테니까.

안느는 주머니에서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꺼내 꼼꼼히 손질하기 시작했고 유르파도 주머니에서 마도기를 꺼내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꼼꼼히 조율해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백려강의 머릿속에는…….

「…….」

환인의 왼팔에 잠들어 있는 여덟 악령의 혼 구슬이 떠다니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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