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63화 (463/813)

〈 463화 〉 457 영도 에쉬누르

* * *

처음 소란 이후에는 무탈한 이동이 이어졌다.

환연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비교적 약한 괴물들이 가도 바깥에서 넘쳐나지만…….

「괴물들은 이쪽을 다른 강한 조직이나 집단, 씨족의 영역 같은 걸로 간주하는 거 같아. 그래서 여기 길로는 다가오지 않으려 해.」

“당연하겠지. 길을 만들려면 주변 안정화를 먼저 해야 하니 대대적으로 근방의 괴물이나 짐승을 정리했을 테고, 그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소탕 작전을 벌여왔을 테니까.”

말벌집이 보이면 보통 사람은 가까이 가지 않거나 멀리 빙 둘러 가는 것처럼, 오를나하 평원에 오래 머무른데다 지능이 있는 괴물이라면 이쪽으로는 다가오지 않을 거다.

괜히 건드렸다가 무사들이 출동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 자신들만 죽어날 테니까.

그렇게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올 때까지 이동한 일행은 우브의 안내에 따라 중간 야영지에 들어섰다.

=성자님, 곧 영도 지역 순행기관이 관리하는 제4 순찰 야영지입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으니 그곳에서 식사하신 다음 출발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리하지요.”

환인의 눈에 들어온 순찰 야영지는 파르히스트 근방의 파르히스트 숙영지와 흡사했다.

야트막한 돌담이 축구장 2개 규모의 대지를 둘러싸고 있고 잘 골라진 땅 위에는 가로세로 2m의 소형 데크에서부터 20m의 대형까지 수십 개가 박혀있다.

사이사이에는 공들여 만든 우물이 있고 가장자리는 간이 재래식 화장실도 있다.

입구 근처에는 야영지를 포함, 근방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는 5m의 돌망루도 세워져 있고 순찰대의 막사용인지 작은 기숙사처럼 생긴 석조 건물도 네 채나 지어져 있었다.

거기에 제대로 된 마구간과 감옥처럼 보이는 철격자 구조물까지. 순례자들이 텐트를 치고 푹 쉴 수 있도록 잘 손질되어있는 야영지다.

야영지를 이용 중인 순례자들이 제법 있지만, 이쪽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각자 자기 할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아지에라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아지에라가 마차에서 내리자 이곳저곳에서 헉, 어, 와앗, 탄성과 감탄사가 터져 나오더니 20m 정도 거리를 둔 채 둘러싸서 그녀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순례자들.

작은 소란 뒤에 이실리테가 미리 준비해놨던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일행은 20분간 휴식한 뒤 다시 야영지를 떠난다.

순례자들은 그런 그들을 입구까지 따라와 배웅하며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생각과 검토해볼 것이 있어 마차 안으로 들어간 환인은 유르파, 백려강과 마주 앉아있던 아지에라의 시선과 마주쳤다.

금방 시선을 피할 거라 생각했던 환인은 곱게 감은 듯한 눈매가 살짝 늘어지며 볼에 홍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곤 으음, 속으로 작게 침음을 흘렸다.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애달픔을 곱씹으며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던 아지에라였는데…….

‘좀 전의 일로 심경이 다시 변했군.’

여자 영혼의 부탁에 호브 굴을 쓸어버리고 아이를 구출한 것은 정의감과 인류애로 했던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영혼이니까 성불시켜 빛구슬을 흡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평판이 한층 좋아져 영도에서 자신의 편이 늘어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촌민 네 명이 지대한 역할을 했고 영도의 순찰대 무사들까지 병풍이 되어주어 상당한 이미지를 박아넣을 수 있었다.

그랬는데 효과가 지나쳤는지 아지에라가 반쯤 내려놓았던 감정을 다시 챙겨 들고 만 것이다.

몇 초간 시선이 마주치고 있으니 아지에라가 살포시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환인… 성자님을 조금 부럽다고 생각해버려서 창피하네요.=

“어떤 점이 부러우셨는지 궁금하군요.”

=어머.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환인… 성자님은 일행이 아닌 척 멀리서 차 한 잔을 음미하셨으면서…….=

……아, 그것 말인가.

야영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아지에라는 근처에 모여든 야영지의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20분 동안 축복과 간이 세례를 내려주느라 조금도 쉬지 못했었다.

환인은 그녀가 그러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여자친구들과 한가로운 커피 타임을 가졌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환인이 아우라의 무발현 증상자여서였다.

일행 중 영혼사의 아우라가 드러나는 것은 아지에라뿐이니 순례자들이 아지에라에게 모여들었던 것이고, 아지에라는 그 점을 지적하며 농을 건넨 것.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환인도 농담으로 받아주자 아지에라가 소리 없이 웃음을 짓는다.

=무발현 직업자는 이때까지 두 명을 봤습니다만, 그분들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어떻게 환인… 성자님 같은 분이 무발현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능력의 강함이 아우라의 발현과 관계있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기록실에 무발현이신 분들의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리 적혀있었습니다.=

환인은 확실히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우라는 등급이 높아지고 힘이 강해질수록 진해진다. 그 말은 등급이 낮고 약할수록 희미해진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자신과 유르파가 추측하고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 신체 외부의 위상력의 상호 작용으로 아우라가 발생한다는 것은 어찌 된 걸까.

아지에라는 유르파를 돌아보며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 아우라 은폐 마도구를 보았을 때 놀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원리로, 어떤 작용 기제를 차용하셨기에 그러한 마도구를 연성해내셨을까 해서요.=

조금 곤란한 듯 미간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르파를 대신해 환인이 대신 움직였다.

먼저 탁자를 가져와 펼친 뒤 식품 보존 주머니에서 날달걀 하나를 가져와 아지에라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이 달걀을 아무런 도구 없이 똑바로 세워보시겠습니까.”

갑자기 웬 문제일까. 아지에라는 궁금해하면서도 달걀을 세워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아 못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달걀을 받아든 환인은 넓적한 부분을 아래로 가게끔 해서 탁, 소리 나게 탁자에 찍었다.

아랫부분이 깨져 움푹해지면서 똑바로 서는 달걀.

아지에라가 아, 작게 탄성을 지른다.

“방법을 알면 간단하지만 간과하기 쉬워 이루기 어려운 것. 그걸 제가 온 곳에서는 콜럼버스의 달걀이라 부릅니다.”

=은폐 마도구를 만든 것도 그와 같다는 말씀이시네요…….=

원리보다는 대화할 소재가 중요했던 것인지, 더 묻지 않는 대신 탁자 위에 똑바로 선 달걀을 보며 사색에 잠기는 아지에라.

환인은 마차 한쪽 구석의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워 곤히 잠든 아이들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아지에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영도의 기록실 자료 중 7할 이상을 읽었다고 했었다.

여러 가지 지식을 방대한 범위에서 쌓았을 그녀라면 미궁의 심핵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듯한데…….

‘심핵에 대해서 물어보아도 괜찮을까.’

르아웬=아기오시스는 자신이 산란못 미궁을 돌파하며 미궁 심핵에 접촉한 것을 다른 호족들도 알게 될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게 몇 달 전 이야기다. 지금쯤이면 미궁에 대해 알려지는 것을 꺼릴 호족은 물론 대성녀도 자신이 미궁을 돌파해 심핵과 접촉한 것을 알고 있겠지.

여기에 대성녀와 만나면 연유가 어찌 됐든 자신의 능력의 기원을 밝혀야 할 일이 높은 확률로 발생할 거다. 그러면 대화의 흐름상 현재 능력을 갖추게 된 계기가 언급될 테고 자연스럽게 심핵과 연관관계도…….

“…….”

영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면 그에 합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능력을 숨기겠답시고 ‘모르겠다.’는 식으로 일관하면 능력은 숨길 수 있을지언정 의심을 살 테고 호의도 사지 못할 것이다.

이 세계에는 별의별 술법이 다 있고 거짓말을 간파하는 종족도 있는 만큼 거짓말 따윈 금세 들통날 테니까.

사실대로 말한다면 심핵과 접촉하며 얻은 문양도 밝혀야 할 테지.

그러기에 앞서 먼저 심핵에 대한 정보를 얻어놓는 것이 좋을 텐데…… 아지에라와 관계가 좋다고 해도 그녀에게 솔직하게 묻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인가.

이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은 아드네빌라 때문이다.

‘저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호수의 용왕도 문양을 언급하지 않았다. 천원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문양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는 건 문양에 관한 관심이 적거나 아니면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오니…….’

힘은 어느 정도 숨기는 게 좋다. 숨긴다면 어느 정도까지 숨길 것인가. 어디까지 거짓을 입에 담지 않고 감출 수 있을 것인가.

무수한 가정 속의 가정에 환인이 속으로 눈살을 찌푸릴 즈음 아지에라가 아, 작게 탄성을 지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생각에 잠기면 주위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뭔가 말씀하셨었나요?=

“……아지에라 님. 혹시 미궁의 심핵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네? 네에……. 그건 무슨 연유로 여쭈시는지……?=

“아지에라 님이 저를 새벽의 빛이라 부르시는 이유를 쭉 생각해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더군요.”

환인은 아지에라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뿅 하고 튀어 오르는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만큼 그녀의 표정 변화는 극적이었다.

=그것이 심핵이었단 말씀이신가요?!=

“제가 헬루멘을 떠나 프라버로 향하는 일정 중 사이에 공백이 발생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네…… 크라빈 마을에서 넉 달가량 모습을 감추셨다고.=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역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정답이었군.

아지에라는 자신과 몸을 섞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빼앗겼을 만큼 자신에게 감정이 치우친 상태다. 지금 아지에라를 설득, 납득시켜놓으면 영도의 활동에 도움이 되겠지.

“그 크라빈 마을은 크라빈 숲에 발생한 미궁으로 인해 멸망 직전에 놓여있었습니다.”

천천히 크라빈 마을과 산란못 미궁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환인.

고생 끝에 백수십 명을 구출한 뒤 중핵을 퇴치했다는 대목에서 아지에라는 눈마저 크게 뜨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 중핵을 해치우고 얻은 위상석입니다.”

=6급 적색 위상석!=

그저 놀랄 뿐, 탐욕 같은 감정은 1mg도 드러나지 않는 아지에라의 얼굴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환인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후 중핵의 산란장에서 마을의 고족과 남은 수십 명을 구한 일, 그리고 심핵을 부순 일.

“문제는 심핵을 부순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환한 황금빛에 휩싸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2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던 거지요.”

중간에 하나의 사실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지만, 이야기 자체는 전부 진실이다. 지구에서도 황금빛에 휩싸인 이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란못이 있던 숲속 한복판에 서 있었으니까.

=어쩜…….=

“그 후에 제 영혼술이 조금 변했습니다. 마음을 먹으면 이런 식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문양 강화 영혼 시야의 효과로 그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온다.

=영시가…… 그러면 오전에 천민을 착혼한 그것도…….=

“프라버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셨겠지요.”

=네. 앗! 설마?=

“저는 영혼이 생전에 겪은 경험까지 감응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십 명의 영혼과 강제로 감응이 발동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는데…….”

강제 감응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으로 평온의 파동을 펼치자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고 하니 아지에라의 얼굴에 경탄의 기색이 번져간다.

눈까지 뜬 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하던 아지에라는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말했다.

=환인… 성자님께서 심핵에 대해 질문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다면 그야 누구라도 그리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심핵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환인은 아지에라의 표정 변화를 티 나지 않게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심핵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무의식의 집합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도대로 그녀가 착각을 일으켜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순히 심핵에 대한 정보를 내놓는 것에 속으로 미소를 감추었다.

=이 방식에 관해 설명하자면 미궁 생성의 역사를 되짚어 아득히 먼 옛날까지 올라가야 하며, 이에 대한 설명은 한 달의 집중 교육으로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양입니다. 이 자리에서 간단히 드릴 수 있는 설명이 아니지요.=

“…….”

=이런 설명으로 지나치기에는 환인… 성자님의 궁금증이 더욱 깊어지실 듯하니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미궁은 이 세계에 흘러넘치는 불가사의한 신비를 모아 위상력으로 전환하여 세상에 뿌리는, 이를테면 정화 장치입니다. 환인… 성자님께서는 신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지혜나 이론, 상식으로 설명하고 해명할 수 없는 불가지라고 봅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 신비가 모이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하지요. 그리고…….=

“심핵은 그런 신비가 모여있는 만큼, 그 심핵을 부수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이적이 발휘되는 거군요.”

=……정답입니다. 신비란 마냥 사람에게 이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신비가 가득 찬 고대 대륙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고 전해지지요.=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신학에 한 발 걸친 내용이었다.

이 세상의 다섯 신이 대지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긍휼히 여겨 힘의 파편을 뿌렸으니, 그것이 신비를 빨아들여 위상력으로 변환, 재살포하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 힘의 파편이 현재 미궁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설명을 주의 깊게 경청하던 환인이 물었다.

“아지에라 님은 심핵이 제 능력과 연관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저는 부족한 힘을 통감하고 있었습니다. 심핵이 그러한 제 바람에 공명하여 힘을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여태껏 미궁의 신비를 손에 넣은 이는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는 빠짐없이 물질화하였지요. 성자님께서 얻으신 그리모암의 유물과 광창처럼 말입니다.=

손가락으로 의미 모를 성호를 그린 아지에라가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이전까지 전례가 없었다고 해서 이후로도 없으란 법은 없습니다. 환인… 성자님이 그 첫 사례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수백, 수천 건의 사례 중 신비가 물질이 아닌 정신화한 적이 없다 보니 저로서는 환인… 성자님의 추측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해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에서 환인은 정보를 좀 더 얻을 수 있었다.

물질화한 신비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지녔기에, 어떤 물건은 소유한 자의 바람을 조금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뤄주는 소망석으로 변모하기도 했다는 것.

심핵을 통해 획득한 물건은 신비가 깃든 것이기에 이 세상의 법칙에 살짝 어긋나있으며 그 어떤 힘으로도 그 효능을 무효로 할 수 없기에 유물?物이라 부른다는 것.

어떠한 유물은 말 그대로 성 하나의 값어치를 한다는 것.

중핵을 해치웠을 때 때때로 소지품에 힘이 깃드는 것도 중핵이 심핵의 근처에 오래 머물러 신비의 일부를 몸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

‘이실리테의 레드릭도 일종의 하급 유물이라는 뜻이군.’

파르히스트의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중핵,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해치우고 변화한 그녀의 무기는 이때까지 수백, 수천 마리의 괴물을 마구 썰어댔지만 이 하나 나가지 않는 불가사의한 튼튼함을 자랑했다.

그 비정상적인 내구성이 무기에 깃든 이유는 이실리테의 바램, 자신의 힘에도 망가지지 않는 무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전까지 그녀에게 무기란 금방 망가지는 일회용 소모품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니까.

똑똑.

=주인님, 영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마부석의 쪽창이 열리며 이실리테의 보고가 들어왔다.

환인은 아지에라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키스해주며 지식의 나눔에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앗, 아으, 그그그런…….=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아지에라를 못 본 척, 천장의 선루프를 열고 지붕으로 빠져나온 환인은 한결 시원해진 바람과 함께 시야를 가리는 웅장하면서도 험난한 산맥 일부와, 그 아래 그림 같은 고도古?를 볼 수 있었다.

거리 때문에 원근감이 어그러지는 느낌이지만, 도시가 얼마나 큰지 가감 없이 전해져온다.

“저 도시가 영도인가. 영도는 산 중턱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그 말씀대로…… 꺄읏.=

지붕 위로 올라오기 위해 낑낑거리는 아지에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겨드랑이로 손을 집어넣어 쑥, 들어 올리는 환인.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움츠러들었던 아지에라는 수줍게 웃으며 그의 품에 일부러 반쯤 안긴 채 말을 이었다.

=지금 보이는 도시는 영도 에쉬누르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모이며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이름도 순례자의 쉼터이지요.=

“…….”

척 봐도 수십만 명은 살고 있을법한 대도시다. 그런데 이름이 쉼터라고…….

환인의 반응에 아지에라는 은근슬쩍 그의 가슴에 젖을 누르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처음 순례자의 쉼터를 본 사람들은 다들 환인… 성자님 같은 반응이지요.=

“…….”

이상하게 아까부터 자신을 부를 때 일부러 한 박자씩 쉬더니, 일부러였나.

자신의 턱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던 환인은 그녀가 수치스럽지 않도록 슬쩍 몸을 떨어트리며 순례자의 쉼터, 아드지로 시선을 주었다.

영도 에쉬누르는 영산 알노르의 산 중턱에 있는 고색창연한 소도시(지만 일반인은 주거하지 않는다).

영산 자체가 매우 험난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영도로 향하기 위해서는 순례자의 쉼터 아드지를 통해서 밖에 올라갈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도로 향하는 하나뿐인 길을 아드지가 가로막고 있는 형태.

고층 건물은 거의 없다. 건물 대부분은 석재와 구운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지만,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서인지 수많은 양식이 뒤섞여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고도라고 칭할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도시지만 그렇다고 노후화하여 보기 흉하다거나 그런 점은 하나도 없다.

영혼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기 때문일까. 도시는 정말 흙 하나, 얼룩 한 점 없을 정도로 깨끗했으며 사람들의 복장 또한 깔끔했다.

도시에 주인 의식을 발휘하며 시민 한 명 한 명이 도시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듯한 모습다.

그 외에도 아드지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와아! 아지에라 영혼사님의 기사님들이야!=

=세르넨 님~!=

=아이샤님! 꺄악!=

영혼 기사는 이 도시의 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

10차선 중앙대로, 영도로 향하는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난 대로를 이동하고 있으니 사방에서 환호성과 세르넨 일행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행자로 보이는 직업자들마저 세르넨 일행을 보며 선망의 눈길을 보낼 정도이니 이 도시에서 영혼사와 영혼 기사의 입지가 어떤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거의 퍼레이드나 다름없는 환호성에 안느가 옆자리의 이실리테에게 작게 속삭인다.

=나중에 가면 우리도 이런 환호성을 받으려나?=

=그, 글쎄?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은 조용히 활동하시길 바라시니까 받기 어렵지 않을까?=

두 아가씨의 대화에 마부석 옆에서 쿠에를 타고 이동하던 우브가 무슨 말씀이냐는 듯이 허허 웃었다.

=지금 아드지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보고 싶어하는 분 1위 2위 3위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우리란 말이야?=

=예에.=

허허 하면서 잠시 대열에서 이탈한 우브는 가판대에서 알림판 한 장을 가져와 그녀들에게 넘겨주었다.

그걸 받아든 안느는 커다란 글씨로 적힌 문장을 읽다가 해괴한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린다.

=…이게 뭐야. ‘이때까지 알려진 녹색 성자님의 영혼 기사님들 심층 분석’? 아니, 알고 싶으면 도령을 분석해야지 왜 우리를…….=

=영혼사님들은 감히 애호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분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신하여 영혼사님들을 지키고 수호하는 영혼 기사님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지요. 3개월마다 진행되는 인기 투표에서 순위권에 든 기사님들에게는 도시에서 특별한 품위 유지비가 증정되기도…….=

환인은 우브의 설명을 들으며 순례자의 쉼터, 아드지에 대한 단 한 줄의 평가를 내렸다.

‘거대한 팬클럽의 도시군.’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이것도 이 세계의 문화라고 생각하며 점차 가까워지는 영도 오름길에 시선을 주는 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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