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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461화 (461/813)

〈 461화 〉 455 오를나하 대평원

* * *

갑자기 흠칫하고 놀라는 이실리테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환인.

그 시선에 이실리테는 아아, 당황한 것처럼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대답한다.

=남자는 모두 쓸 수 있어요. 좀 더 짐승에 가깝게 변신하는 게 남자의 수인화지만, 여자는 남자처럼 신체가 조금 변화하는 수준에 그쳐요. 그마저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셋 중 하나 정도 뿐이구요.=

“그 차이는 무엇 때문이지.”

=전적으로 남자의 피를 얼마나 진하게 물려받는지에 따라 나뉜다고 해요.=

“루크랑 종족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남자의 종을 따라가는 것과 비슷한 이유인가 보군.”

말하던 환인은 그녀가 이때껏 수인화를 쓴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며 물었다.

“너는 수인화를 못 쓰는 쪽인가.”

=네? 저… 그게…….=

환인은 자신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이실리테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 그…… 할 수는 있지만 조금, 강화되는 힘보다 천상의 장막을 착용하는 게 더 좋아서요. 변신해봤자 힘만 좀 더 세지는데 체격이 좀, 바뀌니까 그…… 입고 있던 게 다 부서지거나 찢어지거든요. 지속시간이 긴 것도 아니고요. 저는 체력 소모도 커서…….=

설명은 부차적인 이유고, 변신한 몰골이 흉해서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제 와서 외모를 신경 쓰는 게 조금 우스운 환인이었다. 크게 다쳐 예쁜 얼굴이 없어지고 팔다리가 뭉개져도 환인은 그녀를 버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변신 지속시간이라니. 종족적인 특성이라기보다 단순한 특수 기술 느낌이 강하다.

“언제고 한 번쯤 보고 싶군.”

다시 호브 굴 쪽을 돌아보며 하는 이야기에 천상의 장막을 입으려던 이실리테가 조금 고민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진짜 별거 아닌데다가 좀, 못생겨지니까… 웃으시면 안 돼요?=

보여줄 건가. 보여주더라도 나중에 여관방 같은 곳에서 잠깐 보여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실리테는 가슴이 빵빵해질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그 숨을 전신으로 보내는 것처럼 힘을 준다.

그러자 신체가 약 1.2배 정도로 빠르게 팽창하더니 팔다리가 길어지고 여리여리하던 몸이 선명한 근육질로 변했다.

아이샤와 다르게 체모는 나지 않는 대신 눈코입이 조금 더 커졌는데, 그 바람에 청순가련한 미소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어딘가 순박한 시골 처녀 같은 인상으로 변했다.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커진 호박색 눈동자. 오똑하던 콧날도 순박함이 느껴지는 주먹코가 되었고 세밀한 붓으로 그려 넣은 듯한 입술도 조금 더 굵어졌다.

「오.」

몰래 훔쳐보던 환연이 뜻 모를 감탄사를 흘린다. 그 소리에 이실리테는 환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보기 흉하지 않으세요……?=

“그게 끝인가.”

=네에…….=

그녀의 긴장을 읽은 환인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탄탄해진 엉덩이를 토닥였다.

“생각했던 것은 여자 유인원이었는데 실제는 전혀 다르군. 순박한 시골 처녀 같아서 귀여운 인상이다.”

그의 애정이 담긴 손길에 이실리테는 그제야 안심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와 동시에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원래의 초절정 미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비상이 내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퍼드덕— 날갯짓 소리와 함께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 비상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이실리테를 살피다가 꾸우…? 부리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무래도 방금 수인화를 보고 놀라서 내려온듯한 행동이다.

“비상, 근처에서 눈에 띄는 괴물은 없었나.”

자신의 부리를 밀어내는 이실리테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재미있어하던 비상은 환인의 질문에 고개를 붕붕 흔들더니 날개를 강하게 퍼덕였다.

쿠에~ 쿠우웃. 뀨삣!

“약한 괴물은 잔뜩 있었다고…….”

큐!

별거 없었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괜한 기우였나 하고 생각하며 바다 빛깔의 푸른 로브를 하늘거리며 다가오는 백려강을 바라보았다.

이 근방에는 이블팩션에서 계속 괴물들이 흘러들어온다기에 혹시 몰라서 백려강을 데려온 건데,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여자 영혼과 세르넨도 다가온다.

「환인 님. 비상이 내려오는 걸 보고 쫓아왔는데…… 여기 있어도 괜찮은가요?」

“그래.”

대답해준 환인은 세르넨이 아이샤가 없는 것을 신경 쓰는 듯해서 짧게 설명해주었다.

“아이를 구조하러 들어갔습니다. 호브 대부분은 이실리테가 유인해서 처리했고, 바람의 정령도 붙여주었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세르넨은 호/브가 된 사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환인의 이야기에 놀란 눈치만 보인다.

=바, 바람의 정령입니까?=

「환인. 고양이 여자가 나오고 있어.」

그때 환인의 품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르넨의 눈이 빛났다.

알소프에서 이곳까지 올 동안 두 번, 일행이 아닌 목소리를 들었었는데 역시 저 안에 환인 성자님의 또 다른 일행이 있는 거였어.

‘요정일까? 성자님은 정말 대단하시네. 요정은 사람을 기피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동료로 받아들이신 거지.’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요정의 특성을 생각하며 꾹 눌러 참고 호브 굴 입구로 다가간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쉭­ 바람 소리와 함께 등에 아이들을 태운 수인화 상태의 아이샤가 튀어나왔다.

그 뒤를 따라 꾸웩끄엑 괴성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세르넨이 챙­ 무기를 뽑아 들었을 때였다.

“환연, 해라.”

드드드드— 지진 같은 흔들림과 함께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야트막한 언덕이 나무와 함께 파도처럼 통째로 밀려 나간다.

=헉!=

흡사 고등급의 황술사가 직접 땅을 조작한 것 같은 광경에 입을 쩍 벌리는 세르넨.

이 자리에 황술사는 없으니 환인 성자님의 품속에 있는 요정이 한 것일 텐데, 아무리 정령을 다룬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영창 없이는 5급의 전문 황술사 정도는 되어야 이 정도의 흙 조작을 이뤄낼 수 있을 텐데. 거기다 바람 정령까지 다룬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성자님의 동료이시니까 특별한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세르넨은 환인이 성큼성큼, 속이 훤히 드러난 호브 굴로 걸어가는 걸 보며 황급히 그 뒤를 따르다가 눈을 부릅떴다.

퍼걱­ 쩍!

아이샤를 쫓아오던 호브였는지 갑자기 천장이 뜯겨나간 상황에 패닉에 빠진 듯 멈칫거리던 호브 두 마리의 머리가 공중으로 붕 뜨는 것을 목격한 것.

‘어…… 방금 어떻게…?’

두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자신이 본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보통 공격의 3박자는 지지 ­ 회전 ­ 가격이다. 다리로 땅을 단단히 받치고, 다리­허리­어깨로 회전력을 실어 무기를 휘두르는 식.

단순히 어깨나 팔심으로 빠르게 휘두르는 일도 있지만, 숙달되면 그 시간차이는 고작 0.5초 정도 일 뿐이다.

그에비해 하체에서 팔까지 전달되는 회전력이 공격력을 몇 배나 늘려주기 때문에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단순한 팔심만으로 휘두르는 일은 없다.

그랬는데 환인의 공격은 그녀의 눈에 오직 팔심만으로 도끼를 휘두른 것으로 보였다.

‘아니, 내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게 단축한 거야…….’

남들이 3단계로 나누어 공격하는 것을 환인은 1단계로 압축했다는 사실에 세르넨은 전율이 흘렀다.

두 영혼 기사님과 대련하는 것을 보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환인 성자님은…….

‘더 대단한 분이 아닐까?’

영혼술도 이미 영성급에 몸에 지닌 기술도 달인급. 머리도 좋으시고 해왕과 태연하게 대화하고 거래할 정도로 용기도…….

“세르넨 양. 암컷 호브와 새끼가 도망치려 하는군요. 마무리를 부탁합니다.”

=아, 네!=

세르넨은 이실리테가 뛰쳐나가는 걸 보며 아이샤에게 아이를 지키라고 한 뒤 자신도 뛰어들었다.

퍽­ 촤아악! 쓰걱­

옆에서 성자님의 탈것인 녹색 쿠에가 바람의 칼날로 호브를 도륙 내는 장면에 자신은 필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생각을 지우며 끼이이…! 두려움에 찬 비명과 함께 새끼를 안고 도망치는 호브를 뒤쫓아 검을 휘두른다.

“…….”

환인은 일행이 뒷정리하는 사이, 호브 굴의 가장 안쪽에 드러난 장면을 감정이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크헥, 키게겍!

게르르… 게르르르르…….

다른 호브들보다 유달리 튼튼해 보이는 갈색 호브와, 몸에 무언가를 잔뜩 그려놓은 왜소한 갈색 호브.

두 마리가 약에 취한 것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머리가 쪼개진 알몸의 여자 시체에 달라붙어 허리를 흔들고 있다.

한 놈은 아래로, 한 놈은 머리에

그 근처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는 작은 모닥불. 영혼 시야로 보니 연기에서 환각을 일으키는 적색이 묻어나고 있다.

‘마약성 풀인가.’

약에 취해서 자신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시체를 상대로 오입질에 몰두하고 있는 두 마리.

그런데 덩치가 조금 있는 호브의 밑에 깔린 여자 시체가 눈에 익숙하다.

이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여자 영혼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환인은 말없이 방벽 패널을 소환해 두 마리의 목을 꿰뚫었다.

켁.

끄륵.

목줄기에 빛의 검이 돋아나는 동시에 여자 시체의 배 위로 쓰러지는 두 마리.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허리를 흠칫거리는 그 역겨운 광경에서 환인은 눈을 돌리고 굴 내부를 차분히 살폈다.

거의 다 뜯어먹혀 머리만 남은 남자 시체 둘. 그 외 뼈다귀가 한쪽에 탑을 쌓고 있었고 악취 나는 고기에 이런저런 정체불명의 액체가 든 그릇이 널려있다.

“환연. 지하실 같은 것은 없나.”

「응. 땅속에 아무것도 없어.」

“그래.”

아공간 주머니에서 정화 마스크를 꺼내 낀 환인은 여자 시체로 다가가 그 위에 엎어져 있는 호브 시체를 퍽, 걷어차 날려버린다.

그리고 안 쓰는 망토와 조금 낡은 모포를 꺼내 두 명의 시체를 감고 있으니 소란과 함께 아홉 명의 무복 차림 인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환인 성자님, 무사하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저희는 영도의 제26 순찰대 소속 무사들입니다!=

남자 둘 여자 일곱. 그 주위에 아지에라의 영혼 기사들도 있고, 호브를 정리하느라 조금 멀어졌던 이실리테와 세르넨도 가까이 다가온다.

환인은 주변에 눈도 돌리지 않고 여자 시신을 대강이나마 염습하며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이들이었습니다.”

=아…….=

=으음.=

죽어 널브러진 호브의 시체들. 저쪽에서 여자 영혼 하나가 아이들을 앞에 두고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다.

단번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순찰대는 자책이 진하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이 조금만 더 일찍 달려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환인은 망토와 모포로 감싼 여자 시체를 두고 평온의 파동을 발사한 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여자 영혼에게 다가갔다.

「성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여자 영혼은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꼼짝없이 아이들까지 죽는 줄만 알았는데. 땅을 뒤집어버릴 정도로 강한 영혼사님 일행이셨다니, 짐승신님이 도우셨어…….

아직 조막만한 아이들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환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엄마 영혼의 옆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다.

곧 엄마와 헤어질걸 직감해서일까. 엄마를 따라 훌쩍훌쩍 우는 두 아이를 바라보던 환인은 영혼임에도 두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 영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원기를 흘려 넣어주며 말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군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전에 꼭 안아주십시오.”

「……!」

몸이 실체화한 것을 깨달은 여자 영혼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두 아이를 힘껏 안아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귀에 속삭인다.

「둘만 두고 떠나게 되어서 엄마가 미안해…. 옆에서 너희가 다 클 때까지 지켜줘야 했는데…… 미안해…….」

=싫어어. 엄마아, 가지마아……. =

=으아아앙…….=

「아르, 아라. 엄마랑 아빠가 없어도 울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야 해. 이 세상에 피붙이는 너희뿐이니까 서로 지탱해주면서…… 알았지?」

하얗게 빛으로 물들어가는 여자 영혼의 모습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싫어! 엄마, 가지마! 엄마아~!=

=으아앙! 엄마~!=

여자 영혼이 아이들에게 떨어지자 아이들이 울음을 더 크게 터트린다.

결국 아이샤가 두 아이를 잡고나서야 여자 영혼은 환인 앞에 설 수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환인을 바라보다가 깊게 허리를 숙이는 여자의 영혼.

환인은 구슬픈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빛무리가 되어 승천하는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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