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0화 〉 454 오를나하 대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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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 행동 기술로 소리 없이 호브 굴을 향해 나아가는 환인의 머릿속에는 여자 영혼의 기억을 들여다본 잔재가 떠다니고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
그녀가 영도까지 일직선인 이곳에서 호브에게 살해당하게 된 이유는 별것 없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영도행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 영혼사의 성불행 도중 평온의 파동에 감화되어 일평생 단 한 번뿐이라도 좋으니 영혼사의 본산인 영도를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갈망이다.
그녀의 가족은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영혼사의 성불행에 직접적인 혜택을 받은 가족이었으니까.
그날의 기억은 일체의 풍화 작용 없이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선명했다.
죽었던 아버지가 찾아와 가족과 일으켰던 불화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름다운 회백색 빛의 파문 속에서 성불하던 광경.
그랬기에 알소프 동쪽의 자그마한 마을 출신인 그녀의 가족은 영도를 찾아가 볼 결심을 굳혔고, 몇 년간 뼈 빠지게 벌고 살림을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순례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여덟 살과 일곱 살 된 아들딸을 데리고, 혹시 아이들이 영혼사가 될 자질이 있을까 조그마한 기대감을 품고 말이다.
‘멍청하군.’
영도로 순례행을 떠난 걸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환인이 멍청하다고 한 이유는 아무런 대책 없이 엘스너펠에서 그녀와 비슷한 사연과 사정의 몇 명이 모여…….
‘사람이 많으면 괴물도 도망갈 거다.’
‘영도가 바로 앞이고 영도의 무사님들이 순찰을 다니니 안전할 거다.’
……라는 낙관론에 어설픈 호위조차 없이 길을 떠난 거였다.
자신들도 여행 도중 습격을 몇 번 받았던가.
짐승의 공격은 셀 수도 없고 사람의 습격도 종종 받았다. 숲을 통과할 때면 그 공격 빈도가 더욱 높아졌었고.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괴물과 신비가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그 멍청한 짓의 결과가 지금 이거다.
앞에서 날아가는 저 여자 영혼의 가족은 미끼가 되어 다른 가족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게 된 것.
…키르으으……!
사람 키만 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환연의 레이더 정보를 취합하던 환인은 호브의 소리로 예상되는 것을 듣고 수풀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동시에 여자 영혼을 강제력으로 불러들였다.
「아으윽, 영혼사님……!」
발버둥치며 다시 호브의 굴로 날아가려는 여자 영혼을 환인이 말린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우리는 물론 저 괴물들에게도 보이는 상태입니다. 갑자기 당신이 나타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수 있으니 여기서 대기하십시오.”
「그러나 아이들이, 제 아이들이……!」
“당신의 등장에 흥분한 호브가 아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흐으으…….」
어미를 억제하는 데는 아이만 한 것이 없지.
환인은 악당이 할 법한 생각을 하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환연이 땅 정령 탐색으로 파악한 호브 굴은 방 같은 것이 여섯 개뿐인 작은 개미굴 형태였다.
아이가 갇혀있는 곳은 안쪽에서 두 번째 방으로, 현재 굴에 호브의 숫자는 스물두 마리.
「싸울 수 있는 게 그 정도고 암컷 같은 거랑 새끼까지 다 하면 오십이 넘어.」
……키야아아……!
……캬으캬르르……!
스르륵, 희미한 소리와 함께 이실리테와 아이샤가 한발 늦게 도착한다.
=으으음… 근처에 있나 보네요오.=
호브가 내는 소리에 아이샤가 침음성을 흘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안주머니 속의 환연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호브에게서 격리할 방법은 없나.”
「땅의 정령 하나 붙여서 작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토굴을 무너트리는 거면 가능해. 호흡 때문에 빨리 구해주긴 해야겠지만 그게 제일 간단하지.」
“흙으로 벽을 세우는 건 불가능한가.”
「벽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려. 10초 정도? 그 시간이면 자기들끼리도 피가 날 만큼 싸워대는 포악하고 사나운 것들이니까, 흙으로 벽이 만들어지는 걸 봤다간 당장 달려들어서 애들을 죽일지도 몰라.」
지금 들려오는 소음이 싸우고 있어서 나는 소음이었나.
환연이 알려준 제반 사항을 고려하면 꽤 곤란하다.
=환인 성자님. 아이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바로 들어가서 아이를 해칠 틈도 없이 죽이면 안되나요오?=
“돌입부터가 문제입니다. 동굴의 높이는 1.4m 정도로 진입하면 몸을 숙이는 수밖에 없는 데다,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안전이 우려되는군요. 아이를 인질로 삼을 정도로 지능적인 놈들이니…….”
여러 가지 방법은 있지만, 아이들이 완벽하게 안전한 방법은 없다.
=어…… 그건 조금 곤란하네요오.=
아이가 인질로 잡혀있지 않다면 환연의 힘으로 그냥 굴을 무너트린 뒤 살아남은 걸 정리하거나 정령을 들여보내 날뛰게 하면 그만인데,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방법을 고려하려니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성가시다.
‘역시 토굴을 무너트린 뒤 아이들을 구해내는 것이 가장 간편한가.’
그때 조용히 경청하던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제가 호브를 유인할게요.=
“…….”
환인의 시선에 이실리테가 설명을 덧붙인다.
=호브는 여자에게 환장하는 놈들이니까, 제가 변변찮은 방어구도 없이 다가가면 흥분해서 달려올 게 틀림없어요.=
=그, 그런거며언 제가 할게요오.=
어떻게 그런 걸 성자님의 영혼 기사에게 맡기냐며 아이샤가 나선다.
=아니요. 아이샤 기사님은 고양이처럼 저보다 더 조용히 움직이실 수 있으시니까요. 수인화 쓰실 수 있으시죠?=
=네에. 쓸 수는 있는 데에…….=
=전 괜찮아요. 이렇게 해봐요.=
환인은 이실리테가 생각해낸 간단한 계획의 타당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중급 정령을 강령받은 이실리테는 곧장 천상의 장막을 탈착하고 옷에 브래지어까지 벗어 팬티 차림이 된다.
물론 그상태로 나가지 않고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셔츠에 반바지보다 더 짧은 숏팬츠를 입는다.
그녀가 바지를 입는 행동에 수박만 한 가슴이 흔들리는 걸 잠깐 보다가 아이샤에게 호브 굴 내부 구조를 땅에다 그림으로 알려주는 환인.
“아이는 이 방에 있습니다.”
=네엡.=
이윽고 약간 선정적일 정도로 천 면적이 적은 옷으로 갈아입은 이실리테가 수풀을 조금 사납게 헤치며 뛰쳐나간다.
잠시 후, 소란이 단숨에 커졌다.
크갸아아~!
크랴랴랴~!!
캬우욱! 캬욱!
쿠헤헤헼!
소리만 들어도 호브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수풀을 살짝 젖혀 바깥 동태를 살피자 야트막한 언덕 저 아래로 장작개비 같은 나무토막을 든 이실리테가 사뿐사뿐 열댓 마리의 호브를 끌고 도망 다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잡힐 듯 말듯 거리를 잡으며 피해 다니는 이실리테.
크랴아악~!
키약, 캬아악!
때때로 장작을 휘둘러 텅, 터덩, 호브의 머리통을 갈기고 걷어차서 나동그라지게 만드니 호브들은 더더욱 약이 올라 가운데 토막을 빳빳하게 세우고 달려든다.
옆에서 그걸 확인한 아이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조금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이실리테 기사님이라서 효과 직방이네요오. 그러면 저도 가겠습니다아……아앙!=
드러난 아이샤의 피부에서 밀짚색의 체모가 길게 돋아난다.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면서 코와 입이 고양이처럼 튀어나오고 눈동자도 세로로 찢어지며 고양이 눈이 된다.
꼬리가 더욱 길어지고 다리도 역관절이 되더니 캣츠라는 뮤지컬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변신한 아이샤.
‘이게 수인화인가.’
롱부츠를 벗자 짐승 다리처럼 변한 그녀의 발바닥에 육구까지 생긴 게 보였다.
냐앙!
작은 고양이 울음과 함께 엎드려서 네 다리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아이샤. 땅을 밟는 소리가 조금도 나지 않는 무음의 이동이다.
정말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질주하는 모습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면 낮고 좁은 통로는 문제가 안 되겠지.
4급 근접 직업자인데다 유르파가 제작해준 스팀펑크 마비 단검까지 쥐여주었으니 그녀까지 불의의 사태에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실수해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면 일은 더 간단해질테고.
이실리테가 주의를 끄는 사이에 아이샤는 소리 없이 호브 굴로 들어갔다.
시선을 돌려 잡힐 듯 말듯 열댓 마리의 호브와 술래잡기하는 이실리테를 보고 있자니 안주머니에서 환연이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실리테한테 바람의 정령을 붙여놓았으니까. 바람총이나 가루 같은 건 안 통해. 그러니까 걱정 마.」
“아이샤 양에게도 바람의 정령을 붙였나.”
「당연히.」
환연의 조사에 따르면 호브들은 대부분이 허리춤에 작은 주머니와 대롱을 차고 있었다.
사냥을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굴에 들어온 것들을 바람총으로 요격하기 위한 소지품.
자신들의 키와 몸의 폭에 맞춰 굴을 파놓은 것도 덩치가 큰 것들의 침입을 대비한 거겠지. 그걸 고려하면 호브도 멍청하지 않다.
‘삼림형 미궁 근처의 호브들은 어설프지만 집까지 만들었을 정도이니.’
환인은 이실리테를 쫓는 호브를 보면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처음 트립했던 삼림형 미궁, 초승달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던 괴물들.
‘그곳에 마을을 꾸렸던 놈들도 이블팩션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놈들이었나.’
생각해보면 율캄의 위치는 매우 위험한 장소에 있다.
6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삼림형 미궁이 근처에 있고 그 미궁에 인접한 올조트의 호수에도 그와 비슷한 급의 호수 미궁이 있다고 한다.
율캄 촌락은 그 호수와 맞닿아있고, 그런 올조트의 호수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길이가 2.1만km에 버금가는 거대하고도 긴 강이 나타나는데 그 강이 라드세아와 이블팩션의 접경지역이다.
근처에 위험 요소가 셋이나 포진해있는 셈.
잠깐 류히와 그녀의 동생들이 떠올랐지만, 이실리테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던 호브 몇몇이 지쳤는지 헥헥거리다 허리춤의 바람총과 주머니에 손을 뻗는 장면에서 상념을 털어내고 수풀을 빠져나간다.
환인의 등장에 열댓 마리의 호브를 반쯤 가지고 놀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이실리테가 눈을 서늘하게 빛내더니.
촤악, 츠아악!!
다중 검기 두 자루를 소환해 호브를 호브였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진한 혈향과 함께 열댓 마리가 서른두 토막이 되어 내장과 함께 널브러지자 확인 사살까지 마친 이실리테가 육중한 가슴을 출렁이면서 다가왔다.
지지해줄 브래지어가 없어 조그마한 동작에도 가슴 뛰는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한 쌍의 유방.
위에서부터 단추 세 개가 풀어져 있어 뽀얀 1자 가슴골까지 드러나고 있다.
저러니 미물이라도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
호브는 이종간?까지 태연히 저지르는 괴물이다. 어쩌면 이성에 대한 미적인 감각은 인류와 별반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괴물에게 이실리테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었을 터.
=주인님, 아이샤 님이 아이들을 구출했나요?=
「아이들이 있는 방에 도착했는데 아이들 근처를 지키고 있는 호브 두 마리 때문에 지연되고 있어.」
환인 대신 환연이 그의 안주머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설명해준다.
=그래? 아이샤 님 실력이면 두 마리쯤은 바로 멱을 따버릴 수 있을 텐데…….=
이실리테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호브가 애들을 걷어차면서 괴롭히고 있어서 그래.」
=……나쁜 놈들.=
그 움직임에 맞춰 출렁이는 젖가슴을 주목하던 환인은 입술을 앙다물며 분노하는 이실리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쨌든 유인하느라 수고했다.”
=네, 주인님.=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환인의 칭찬에 볼을 붉힌 이실리테는 자신의 옷차림을 자각하곤 속옷과 다른 얌전한 옷을 꺼내 갈아입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환인은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마치 아름답게 보이는 방법을 연구한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빠르게 갈아입는 이실리테.
자꾸만 시선을 빼앗는 한 쌍의 젖가슴과 백옥같은 피부를 바라보던 환인은 궁금증 하나를 물었다.
“이실리테. 수인화는 루크랑 종족이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네,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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