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59화 (459/813)

〈 459화 〉 453 오를나하 대평원

* * *

해가 뜨고 야영지가 부산스러워진다.

안느와 유르파가 마차 안을 정리하고 이실리테가 영혼 기사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환인은 팬더 머리의 남자, 우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는 야영지가 준비되자마자 아지에라의 육보시에 이어 여자친구들과 회포를 푸느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

환인은 자신과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아지에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영도의 호출에서 불안을 느꼈습니다.”

=엇. 그러셨습니까……? 대성녀님께서 정중하게 성자님을 초대하는 초대장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환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그 속에 고이 끼워둔 닌실=아나그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걸 펼치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밑밥을 깔기 시작한다.

“제가 성자로 불리게 된 계기는 비자룩스에서의 일입니다. 하지만 비자룩스에서 혼재화한 영혼을 소멸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비자룩스의 기사들……. 그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혼재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게끔 막았었기에 큰 피해 없이 사태를 종결지을 수 있었던 겁니다.”

희생자들을 띄워주고 자신은 낮추는 겸허한 태도.

“그분들이 없었다면 혼재와 빙의자는 마을로 빠져나갔을 테고 인구밀도가 여느 마을보다 높았던 비자룩스에는 끔찍한 재앙이 내렸겠지요. 저는 단지 마지막에 가서 사태를 정리하고 마무리 지었을 뿐입니다.”

=으음…….=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에 우브가 머리를 긁적인다.

사락, 다시 편지를 펼친 환인은 유려하고 가냘픈 글씨체로 매우 정중한 초대의 뜻을 담고 있는 글귀를 읽었다.

[세간에 성불행을 이어가며 영혼을 널리 이롭게 만들어나가시는 환인 영혼사님께, 영도 에쉬누르에서 정중히 초청장을 보냅니다. 시기는 상관하지 않겠사오니 바쁘신 걸음을 하시어 존귀한 뜻을 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닌실=아나그]

“만약 대성녀님께서 그 일로 저를 부르셨다면 혹시 칭찬하시려는 것일까, 부끄럽지만 그런 기대감을 품었을 겁니다.”

그러나 편지는 사태 해결 직후 영주의 장남인 에사르트 편으로 전달되었으니 그 일로 인한 호출도 아니었을 터.

무명인 자신을 영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대성녀님이 불렀다는 것은 이유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고 이야기하며 편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편지를 본 우브는 =흐으으으음…….= 장탄식에 가까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맞지 않는 비유겠지만, 환인이 영도의 초대장을 받은 것은 어쩌다 보니 임관해서 자대 배치를 받아 복무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군 사령부에서 사령관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이 날아온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너 군 생활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잠깐 와봐라. ­중장 △△△]

이 경우 무슨 생각이 들까.

먼저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귀찮은 일을 시키려 하거나 회유해서 뭔가 마뜩잖은 명령을 내리려 할 거라는 생각이 들겠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우브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고이 접어 환인에게 돌려주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렇게 보니 환인 성자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이해해주신다니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입니다.”

때마침 이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던 아지에라가 환인이 여전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흠칫하며 고개를 다시 돌린다.

그걸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영혼 기사들.

환인은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다 우브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우브 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대성녀님께서는 어째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저를 일부러 집어서 부르셨는지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지에라는 알소프에서 우연히 마주쳤었다.

그녀의 목적은 환인과 알소프 영주 사이의 중재라지만, 그건 알소프의 요청으로 찾은 것. 거기다 영혼 심문관이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대성녀가 보낸 거라면 아지에라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할 경우 약점이 될 수 있는 질문은 할 수 없다.

해서 영도와 대성녀에 관해서는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얻은 정보는 새벽의 빛에 관한 것과 자신의 행적을 알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우브는 다르다. 집행부 소속에 닌실=아나그가 직접 보낸 사람인데다 아지에라에게 신뢰를 받을 정도인 인물.

명백하게 닌실=아나그의 의도에 따라 자신을 곤경에서 돕기 위해 찾아왔으며 집행부를 뒤에서 서포트하는 요원인 만큼 지식의 폭은 아지에라보다 넓을 게 확실하다.

그리고 어제, 아지에라는 우브에게 자신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다. 새벽의 빛으로 의심된다는 말조차 안 했다. 영도가 자신의 이전 행적을 다 알고 있다고 알려준 데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저 우브와 만나 서로의 안부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

우브가 그걸 인지하고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이면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겠지.

‘대성녀와 영도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면…….’

우브는 환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매우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환인 성자님이 불안을 품고 있으시다기에 혹시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알려드리는 겁니다. 영도에 도착하시면 대성녀님께서 드릴 이야기일 테니 마음의 대비를 하시라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두를 땐 우브는 환인의 눈빛이 깊어질 이야기를 꺼냈다.

=영도의 예언자께서 약 2년 전 하나의 예언을 내리셨습니다.=

[아주아주 먼 곳, 평생을 걸어도 닿지 못할 장소에서 귀한 빛이 납실 것이니. 저 하늘의 높은 곳은 그를 주시할 것이며 그의 발자국에서 꽃이 필지 죽음이 필지 알 수 없으매.]

=……세상은 그의 걸음걸이에 위기와 흥망을 동시에 맞이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이 왜 추측으로 끝맺는지 모르겠지만, 환인은 꿈에서 본 환상에 아드네빌라와 나누었던 이야기, 아지에라가 해준 새벽의 빛에 대한 말과 예언까지 뒤섞여 머리가 복잡하게 끓어올랐다.

그러한 기색은 참새 눈물만큼도 티 내지 않으며 되묻는다.

“설마 그 예언 속의 귀한 빛이 저라는 겁니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환인 성자님이 그 예언 속의 귀한 빛이시라는 데에 예언을 접할 수 있는 분들의 의견 80%가 일치되었습니다. 비자룩스 이전 행적까지는 25%가량이었습니다.=

“제가 새벽의 빛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흘로드 님을 통해 전달되었나 봅니다.”

=……예. 말씀대로입니다.=

우브는 살짝 어깨를 움찔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움찔한 걸 못 본 척, 잠시 뜸을 들인 환인이 약간 부담스러운 듯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섬뜩한 예언이군요. 죽음이 피어날 수 있는 발자국이라니…….”

=예언자께서도 확신하지 못한 추측일 뿐입니다. 대성녀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강하게 보고 계십니다.=

신경 쓰지 말라며 위로하는 우브였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영도 같은 장소의 수장 되는 인물이다. 이런 타입은 주로 두 가지로 분류되지.’

인간 찬가에 빠져들어 있거나, 극도의 정치적인 인물이거나.

전자라면 문제는 안될 테지만, 후자라면 꽤 문제가 된다. 두 가지가 섞인 타입이라면 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해지겠지.

이유는 하나다.

‘들개 전사단의 검은 영혼 구슬.’

발자국에서 피어나는 죽음과 연관이 전혀 없지 않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괜히 들개 전사단의 검은 영혼 구슬의 기능 시험을 했나 싶어서 환인은 조금 생각이 깊어졌다. 거기다 하늘의 높은 곳이 주시한다는 건 아드네빌라가 말한 천원??을 말하는 듯하고…….

‘신비가 존재하는 세상이니 지구의 사이비 예언자들과 같을 리는 없다.’

바넘 효과처럼 막연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속임수도 아닌 듯하고.

=주인님, 아침 식사하세요.=

우브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부르는 소리에 우브를 향해 말했다.

“가시지요. 배가 고프니 사소한 생각도 심각해지는 기분이군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배고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그의 너스레는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환인은 역시 평범한 집행부의 서포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음식을 마련해놓고 이실리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글보글 끓는 철 냄비의 야채 스튜와 소스에 재워놓은 고기를 볶아 만든 덮밥, 소스에 찍어 먹을 흰 빵, 입가심으로 먹을 과일까지.

든든하게 배를 채운 일행은 다시 길을 따라 이동을 개시했다.

비교적 높은 곳에서 확인한 오를나하 대평원은…… 정확히 말하면 얕고 낮은 구릉의 연속인 언덕 초원이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나무나 덤불이 세워져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어느 구릉지에는 물도 고여 작은 호수와 연못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숲과 언덕과 초원과 물이 한곳에 모인 소형 생태계.

출발하기 전, 이제 영도도 코앞이니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어 변장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일행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잘 포장된 도로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 물안개가 곳곳에 낀 도로를 이동하던 환인은 비상을 탄 채로 밀짚색 쿠에를 탄 우브와 나란히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이 잘 포장되어있군요. 배수 대책도 확실하고…….”

6차선 도로 정도 되는 폭. 고대 로마처럼 땅을 깊게 파고 층층이 크기가 다른 바위, 돌, 자갈을 깔아 포장한 도로다.

배수도 확실하고 비가 온 뒤에 땅도 젖지 않아 보행이 편리하며 통행량으로 바닥이 파손되더라도 보수가 간편한 방식.

우브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오를나하 대평원은 주로 라드세아와 헤뷜트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가로지르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다들 두서없이 오가느라 오를나하 대평원에 자리 잡은 괴물이나 마수, 괴수들의 습격에 희생당하기 일쑤였지요.=

그걸 보다 못한 당시 영도의 대성자는 직접 라드세아의 도시를 순회하며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여 기부를 요청하였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인부를 고용해 엘스너펠과 영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 걷고 있는 이 순례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완성된 이후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한 기틀까지 마련하셨고 그 이후로 라드세아의 순례자들은 이 순례의 길을 따라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영도를 찾아올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훌륭하신 분이셨군요.”

=정말입니다. 그전에는 매년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었는데 제도가 마련된 이후에는 1/100 이하로 줄었으니까요.=

그런 순례자들의 안전한 여행길이 되길 기원하며 영도의 무인과 무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순례의 길을 순회하며 순례자들의 안전을 수호하고, 부서지거나 보수가 필요한 곳을 발견하면 돌아가서 이야기해 수선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못해도 300km가 넘는 엄청난 거리의 가도. 인천에서 강릉까지 직선거리가 200km인 것을 생각하면 아득한 노력과 시간, 그리고 비용이 들었겠지.

환인은 오른쪽 길 가장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길을 오가던 순례자들이 만든 건지 조각나거나 부서진 돌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돌탑이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다.

그와 함께 그의 생각도 이런저런 일들로 이어진다.

‘알소프 소멸 일로 인해 어그로가 많이 끌렸다. 영도에 도착한 이후 히스론드를 거쳐 종족 연합 국가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라드세아 너머 헤뷜트와 히스론드에도 퍼졌다. 그곳의 문화와 풍습을 모른 채로 넘어가도 괜찮은가.’

‘한동안 영도에서 머무르며 지식을 보충해야 할지도.’

‘그보다 새벽의 빛이 영도에 큰 의미를 지녔을 텐데 날 순순히 놓아주려 할까.’

‘그 예언이 사실이고 예언 속의 인물이 나라고 한다면, 내가 새벽의 빛이라는 것까지 더해 영도 입장에서는 날 더더욱 놓치지 않으려 할 텐데.’

‘검은 영혼 구슬은 아지에라에게 말했던 것처럼 꾸민다면 어느 정도 참작은 될 테지만.’

‘지금의 호출이 유인책이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상상은 점차 음습하고 악의를 가정하면서 나쁜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환인 성자님, 이엘카타 님을 아십니까?=

이엘카타=엘위드리스. 근 1년만에 들어본 여자의 이름에 환인은 걱정과 상념을 접어두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리운 이름이군요. 그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예. 한 명의 반듯한 영혼사님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이시지요. 환인 성자님도 뵈신다면 놀라실 겁니다. 하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우브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평범한 영혼사가 아니란 말인가.

환인은 웨이포드에서 만났던 묘지기 처녀를 떠올렸다.

안느와 같은 플뢰 족이지만 튼튼하다는 형용사 그 자체인 안느와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가녀렸던 여자.

자신 덕분에 영혼사로 각성했다고 믿고, 자신을 잊지 않겠다며 눈물 자국과 사랑을 속삭인 밀서에 야생화를 동봉해 보낸 여자.

‘가문이 이용하려 드는 것 같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본가에 끌려가진 않은 거겠지.

환인의 시선이 마부석에 앉아 이실리테와 시시덕거리는 안느의 뒤통수로 향했다.

본가가 이용하려 드는 이엘카타. 그리고 자신의 본명과 과거를 애써 지우고 있는 안느.

자연스럽게 종족 연합 국가에서도 결코 소소하지 않은 트러블에 휘말릴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환인이었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평탄하게 나아가던 일행은 갑자기 손을 드는 환인의 행동에 일제히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의 좌우와 후미를 호위하며 나아가던 영혼 기사들과 우브가 모여든다.

환인은 툭툭, 안주머니를 건드려 속에서 졸고 있던 환연을 깨우면서 물었다.

“근처에 사람 시체나 괴물은 없나.”

「없는데. 왜, 뭐가 있어?」

환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르넨과 우브,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는 여자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저곳에 영혼이 서 있습니다. 괴물에게 습격당해 죽은 것 같군요.”

비상의 등에서 내려 길 가장자리 난간에 다가간다. 개 귀의 여자 영혼이 멍하니 알몸으로 서 있는 곳, 작은 돌탑이 부자연스럽게 무너진 곳이다.

말에서 내린 세르넨도 환인에게 다가가다 무너진 돌탑을 발견하곤 눈썹을 좁혔다.

작은 충격에 쉽게 무너지는 조그마한 순례자들의 돌탑이 안쪽으로 무너져 있다는 것. 그건 길 바깥에서 나타난 괴물이 달려들었다는 증표와도 같으니까.

=근처에 전투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면 뭔가에 유인당한 것 같군요.=

=순례자는 하나의 방침만큼은 교육을 받기 마련입니다. 순례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사고를 당하면 불을 피워 연기를 만들라고요. 그런데 불을 피운 흔적도 없는 걸 보면…….=

=하으. 몇십 분 뒤면 오전의 1차 순찰자들이 올 시간인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순찰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런데 순례의 길에서 습격받다니, 또 흘러들어온 이블팩션 새끼들이 근방에 자리 잡았나? 진짜 징그럽게도 모여드네, 망할 새끼들.=

분노한 영혼 기사들의 대화 소리에 마차에서 내린 아지에라는 환인에게 다가가다 영혼을 발견하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영혼을 향해 성호를 긋는다.

그사이 환인은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며 여자 영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신의 벽을 강하게 친 덕에 유사 삶의 체험은 겪지 않고, 책으로 여자의 최근 기억을 읽은 것 같은 지식이 밀려왔다.

스윽. 여자 영혼에게 영기를 작게 흘려 넣어주며 평온의 파동도 약하게 펼치자 영혼이 정신을 차린다.

「……아, 앗. 아아.」

“진정하십시오. 저희는 영도로 돌아가는 영혼사 일행입니다.”

「아아아, 영혼사님, 영혼사님! 제 아이를, 제 아이들을 살려주세요! 제발…!」

약한 강제력으로 진정하라 했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 걱정은 그 정도에 해소될 수준이 아니다.

여자 영혼은 환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제발 아이들을 살려달라 애원한다.

“정신 차리십시오.”

「……!」

“당신의 기억을 보았습니다만 애석하게도 괴물들이 당신의 자식을 어디로 끌고 갔는지 나와 있지 않더군요. 정신을 집중해 기억을 떠올리십시오. 당신이 죽은 곳, 당신의 아이들이 끌려간 곳이 어디인지.”

부들부들 떨던 여자 영혼은 벌떡 일어나다시피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이쪽이라며 조금 우거진 수풀과 작은 관목 사이로 사라진다.

환인은 바로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안느와 유르파는 남아 마차를 지키고 이실리테, 백려강은 날 따라와라. 영혼 기사분들 중 두 분만 따라오십시오. 순례자를 습격한 괴물은 갈색 호브입니다.”

그리고 비상의 등에 올라탄 환인은 아지에라가 =앗…!= 하고 손을 내미는 걸 무시한 채 관목을 헤치며 들어갔다.

길에서 벗어나 100여 미터 정도, 머리 높이까지 자란 수풀을 헤치고 작은 구릉을 넘으며 나아가자 옷깃 사이로 환연이 머리만 빼꼼 내밀며 말했다.

「저쪽으로 400m 정도에 있는 구릉 아래 땅굴이 나 있어. 그 속에 호브들이 자리 잡은 상태야.」

날아서 환인의 뒤를 따르던 백려강이 짧게 안타까움의 탄성을 질렀다.

한쪽 수풀이 엉망으로 눕혀지고 잘려 나간데다 핏자국이 흥건한 것을 백려강이 발견한 것이다.

「아아. 호브가 아이들을 끌고 가면서 어른들을 유인했나 보네요…….」

=피가 얼마 굳지 않았어요. 이 정도면 아이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커요.=

=이실리테 경,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뒤따라온 세르넨과 아이샤가 쳐다보자 이실리테는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어린아이들은 연약하고 힘이 없어요. 그리고 덩치 큰 먹이……가 다수 생긴 상태죠.=

=흐으으. 아이들을 보존 식량처럼 삼았다는 뜻이네요~.=

분노한 아이샤의 중얼거림에 이실리테도 기분 나쁨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브의 습성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큰 이야기에요.=

일행 중 두 명을 빼면 다들 여자다. 살해당한 여자의 심정에 공감한 여자들에게서 살기가 끓어오른다.

「환인, 아이 셋은 아직 살아있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일정 거리에서 비상을 멈춰 세우고 여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살기를 뿌리며 습격하면 오히려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살기를 죽이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조용히 뒤따르십시오.”

그리 지시한 환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오랜만에 켈틱 돌도끼를 꺼내고 은밀을 발휘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인의 뒤를 바짝 따르는 건 이실리테와 아이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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