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57화 (457/813)

〈 457화 〉 451 조천 도시 엘스너펠

* * *

환연의 보고를 받은 환인은 영혼 기사들에게 마차 안의 귀부인을 모시고 영도까지 가는 고용 호위 무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후드의 색도 다르고 아우라도 드러나지 않으니 저쪽도 어지간해서는 동일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정체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닌가 할 테지만, 얼굴이 같은데 아우라의 차이가 있다면 누구나 의문을 가질 게 당연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영혼 심문관의 영혼 기사라면?

그녀들 중 4급 전사인 한 명을 불러 아우라 은폐 마도구의 탈착을 지시하자 지목받은 여기사, 스코티시 폴드 고양이처럼 접힌 귀의 아이샤가 환인의 의도를 빠르게 눈치챈다.

=귀부인의 영도 순례길에~ 직업자가 한 명도 없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예. 말은 한마디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근엄한 척만 하십시오.”

=네에~.=

이런저런 사회 경험과 전투 경험이 있는 그녀들은 환인의 디테일한 요구에 맞춰 자연스럽게 호위인 것처럼 마차의 뒤를 따른다.

환인은 비상도 마차에 묶은 뒤 마부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일행은 대로를 따라 동쪽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높은뿔 나무 내벽과 도심 사이 완충 지역에 들어서자 성문으로 나가는 통로 관문 앞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물여덟 명의 중무장한 전투 인원들. 그리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반인들의 기를 죽이는 기사들이 서른 가까이 버티고 서서 예리한 눈으로 살피고 있으니, 시민들은 위축되어 그들의 눈치를 보며 통로를 이용 중이다.

환인은 그중 한 명, 황조롱이 머리의 5급 투사 조인족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에 결심을 굳혔다.

도심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이쪽을 노려보는 것처럼 응시하고 있다. 수리 계통의 뛰어난 시력으로 무언가 위화감을 포착한 건가.

‘죽여서는 안 되니…….’

전투가 시작되면 먼저 팔다리나 날개를 날려 무력화시킬 생각으로 품에서 광창의 코어를 몰래 꺼내드는 환인. 그리고 직업자들이 선 위치와 최단 공격 거리 및 궤적을 계산한다.

일단은 상대도 5급 투사다. 그 등급만으로도 도시의 핵심 무력이라 할 수 있을 테니 사지가 절단된다 해도 교단에서 치료나 회복을 받을 수 있겠지.

중급 정령을 몸에 강령시키려던 환인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빛에 감싸인 왼팔의 손등, 검게 물든 점 같은 여덟 개의 구슬에 시선을 주었다.

약 9일에 이르는 영혼 구슬 보유 한계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유지 중인 들개 전사단 여자들의 영혼들.

엘스너펠로 오는 중에 불침번 중인 영혼 기사에게서 멀리 떨어져 시험해본 검은 영혼 구슬은 놀랍게도…….

‘사용 후 자동으로 회수되었었지.’

강령과 저주에는 쓰지 않았지만, 영혼 폭발이나 영혼 화살로 사용한 뒤에 되돌아와 다시 구슬로 변해버렸다.

어쩌면 그 때문에 구슬화 시간이 초기화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무한히 이어질 거라고 환인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들을 악령화로 이끈 감정이 풍화되어 옅어질 때 즈음에는 사라지겠지.

어쨌든 지금은 쓸 수 없다.

문양 에너지로 강화한 영혼술은 황금색에 물드는데, 그렇게 된 건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다.

이 검은 영혼 구슬로 쓴 영혼술 또한 검게 물들었으니 마찬가지로 타인의 눈에 띄겠지.

아무튼, 중급 정령 구슬로 자신의 몸에 강령한 환인이 5급과 4급 직업자 셋을 3초 만에 무력화시키는 패턴을 반복해서 숙지하고 있을 때.

스윽, 5급의 황조롱이 머리 투사가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고 황조롱이 머리의 기사만 움직였다. 환인은 바로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경계수위만 한 단계 올린다.

=무슨 일로 길을 막으십니까.=

환인이 가만히 있자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고, 황조롱이 머리의 기사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부 일을 하기에는 아름다움이 비범한 여인이군. 나는 엘스너펠의 1급 호족 가문 네비야의 비거라고 한다. 혹시 전업할 생각은 없나?=

=…….=

뜬금없는 전업 권유에 이실리테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썹을 모으자 비거는 황조롱이 특유의 검은 눈으로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 도시의 4급 호족 가문, 로르투아르의 여가주께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시지.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채워져야 한다며 후원자를 자처해 예의범절과 품위를 가르치고 그에 걸맞은 자리를 찾아주시는 훌륭한 분으로, 네가 바란다면 귀부인의 가문에 알선해줄 용의가 있다.=

=…….=

=너에게도, 나에게도 득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널 그분에게 소개해주면 나는 로르투아르 가문의 여가주분과 인맥을 쌓을 수 있고, 너는 신분 상승의 큰 기회를 얻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내 안목에 너는 조금만 화장한다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어떤가.=

비거의 제안에 이실리테는 조금 곤란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제안에는 주인님이 나서줄 거로 생각했는데 주인님은 말없이 가만히 계시는 것이다.

이실리테는 하는 수 없이 주인님의 대화 예절과 이때까지 봐왔던 지위 높은 사람들의 대화 예절을 흉내 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몸과 마음을 바쳐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환인에게 왜 가만히 있으신 거냐는 약간 원망 담긴 눈빛을 보내는 이실리테.

=으음……. 결심이 확고하다는 게 느껴지는군. 그럼에도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게. 정말 전업할 생각은 없나?=

=기사에게 원주인을 버리고 다른 주인을 섬기라는 권유만큼 모욕적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기사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마음가짐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가……. 말투를 보니 평범한 마부가 아니었군.=

=귀하신 분을 모시고 영도로 향하는 중입니다.=

=그랬군. 내 실례를 용서해주게.=

이실리테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황조롱이 머리의 기사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을 지나칠 무렵 뒤에서 남녀의 대화가 들려온다.

=비거 님. 여자 여행자들에게 집적거리는 것 좀 그만두시라니까요.=

=집적거린다니! 나는 어디까지나 선의로 전업을 권유하는 거뿐이다. 그래서 직업자 여성이나 품위 있는 여성에게는 권유 하지 않지 않나.=

=마구 권유하다가 가문에 항의가 들어와서 가주님께 얻어맞고 자중하시는 거잖아요.=

=……시끄럽다. 그리고 방금 여인은 너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했기에 끼어들지 않은 거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요. 하지만 저 일행을 보면 어디 이름 높은 가문의 호위 같은데 그런 근본 없는 권유를 받아들일 리가…….=

=됐고. 올람 호텔 쪽에서는 연락이 없나?=

=네. 어쩌면 오인 신고가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님과 흘로드 영혼 심문관님은 엘스너펠에 들르시면 꼭 그곳을 이용하시는데…… 보고가 올라온 지 20분이 지났는데도 후속 보고가 없으니까요.=

=뭐,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국이다. 프라버가 먼저 선점하기 전에 우리 영주님이 정당권을 행사하려 하시니…….=

=영도에서 사태를 알게 되면 화낼 거 같은데 말이에요.=

=어쩔 수 있나. 위에서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으니 하는 수밖에. 어쩌면 암행하시는 이유도 이런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그러네요. 영혼 심문관님에 성자님이 합류한 일행이라면 규모가 클텐데 개인적으로는 무사히 빠져나가셨으면 좋겠……?=

환인의 기감에 그 두 명이 말하다 말고 이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진다.

4급이나 되는 직업자의 호위, 무사로 보이는 다수의 기마 탑승자들. 쿠에 네 마리가 끄는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까지.

=…….=

=…….=

시선이 더 강해지는 느낌에 환인은 역시 무리인가 하고 생각하며 품에 숨겨놓은 광창의 코어로 손을 뻗는다.

나쁜 인물들 같진 않아서 험한 짓으로 원한 관계를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그때였다.

=비거 님! 남쪽에서 영혼사 두 분 일행이 나타났다는 연락입니다!=

=뭐? 혹시 성자님 일행이신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영혼사님이 두 분이나 함께 행동하고 계셨으며 그중 한 분은 아우라가 없으심에도 영혼사님들과 친분이 있는 모습이었다 합니다!=

=비거 님.=

=그래. 당장 그쪽으로 간다! 다들 따라와라!=

전원 조인족인 기사들은 날개를 펼쳐 단숨에 날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밀짚색 쿠에를 탄 팬더 머리의 후덕한 남자가 달려와 환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성자님, 대성녀님께서 보낸 우브라고 합니다. 이쪽입니다.=

품에서 여전히 코어를 놓지 않은 환인은 팬더 머리 남자를 따라온 세르넨에게 시선을 주었고, 세르넨의 긍정에 이실리테에게 눈짓해서 그를 따라가라고 신호를 주었다.

우브는 곧장 쿠에를 몰아 동쪽 성문 터널로 들어갔다. 이실리테도 마차를 몰아 그 뒤를 쫓았다.

엘스너펠 동문 밖은 완연한 노을이 져 하늘은 물론 대지도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늦어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한산하다.

「추적자는 아직 없어.」

환연의 확답에 마차는 속력을 내서 길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고 말을 탄 호위 기사들과 우브도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달리던 마차 앞으로 고봉들이 불쑥불쑥 솟은 지형 경계가 나타났다. 이어 내리막길이 펼쳐지며 세상이 확 넓어진다.

수백 킬로미터 끝없이 펼쳐진 야트막한 평야와 강, 작은 호수들.

그 한가운데 지평선을 나누고 있는 험준한 산맥.

‘저곳이 영도가 있는 산맥인가.’

내리막을 내려가며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일행에 합류한 우브가 아직 아우라 은폐 마도구를 착용한 세르넨과 함께 앞으로 나왔다.

=후우, 이제야 성자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

환인은 잠시 말없이 팬더 머리의 남자를 응시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어느 서양 3d 쿵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그대로 꺼낸 듯한 외형. 하지만 성격과 목소리는 정반대로 중후하고 진지하다.

환인은 기묘한 기분에 잠시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인데 우브는 침묵을 다르게 해석하곤 손을 가슴에 올리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영도의 대성녀이신 닌실 아나그 님의 지시로 엘스너펠에서 성자님을 기다리고 있던 집행부의 우브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환인입니다.”

환인은 마부석에 앉아있고 그는 쿠에를 타고 있는 터라 대화 나누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각.

손을 내밀어 짧게 악수를 나눈 환인은 잠시 어두워지고 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 야영지를 만든 뒤에 나눌까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저희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그에 관한 겁니다.”

=음, 그것은 전부 이 주술 도구 덕분이지요.=

우브가 품에서 꺼낸 것은 여자 손바닥만 한 거울이었다.

손거울을 꺼낸 우브는 그걸 허공에 대고 느릿하게 움직인다. 그러자 마차를 향할수록 거울이 빛나고, 마차가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키면 빛이 꺼진다.

=아지에라 님의 생흔을 가리키는 주술 도구입니다. 대성녀님께서는 아지에라 님께서 홀로 복귀하시는 것과 흘로드 님의 정기 보고 덕분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고 저와 영혼사님 두 분을 미리 보내놓으셨던 겁니다.=

‘길레스 백슬에게 새겨져 있던 그건가.’

원래라면 아지에라도 영도에 통신 보고를 올렸어야 했지만, 영도를 나올 때 가져온 통신용 수정구는 하나뿐이었다.

그건 흘로드가 주도로 향하며 보고를 위해 가져갔고, 아지에라에게는 유르파가 통신 수정구를 만들어 주려 했었지만 영도에서 쓰는 수정구의 파장에 맞는 소재가 그녀에게 없었다.

통신 수정구라고 공용 회선은 아니었던 것.

‘라드세아, 영도, 히스론드, 벨티칼, 종족연합국가 전부 쓰는 소재가 다르거든. 엘스너펠은 영도와 가까우니까 영도 통신 수정구 소재도 팔고 있을 거야.’

거기서 영도와 연락을 하려 했었던 건데 대성녀는 오지 않는 연락과 점차 가까워지는 아지에라의 흔적에 이런 문제를 예견하고 도와줄 사람을 보내놨다는 이야기.

=사실 제가 돕지 않았어도 성자님께서는 문제없이 엘스너펠을 빠져나오셨을 거 같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이목을 끌어주신 두 분 영혼사님께서는 엘스너펠에서 충분히 쉬신 뒤 라드세아 서부의 승령천제를 위해 성불행을 떠나실 겁니다. 저는 이대로 영도로 돌아가서 원래 업무에 돌아가야지요.=

“원래 업무입니까.”

=예. 심문관과 집행관님들의 후방 지원, 그것이 제 역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할 말이 있는듯한 세르넨에게 시선을 주었고, 세르넨은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은 엘스너펠 권역 경계선입니다. 저 앞 오를나하 대평원의 저곳에 산맥이 보이십니까? 령임 산맥이라고 하는데 산맥 초입의 산 중턱에 영도가 있습니다.=

“탁 트인 곳인데다 지대가 적잖이 낮아 보이는데, 지나가는 데 문제는 없겠습니까.”

=사람들의 추격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를나하 대평원은 영도 어디에서도 모두 볼 수 있는, 영도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 점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환인은 세르넨이 무안해할까 봐 말을 아꼈다.

=다만 밤중에 이동은 장려하지 않습니다. 불빛을 보고 불청객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괴물이 많나 봅니다.”

=엘스너펠 권역 경계선이라 했지만, 사실상 이블팩션과 얼굴을 마주하는 라드세아 북부 국경입니다. 북부의 이블팩션 지역에서 천여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긴 하나 마물들이 소규모지만 끊임없이 유입되기 때문에…….=

“그렇군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면 추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이 근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길도 나쁘지 않고 다들 탈것이 있으니 하루면 영도 인근 순례자의 쉼터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세르넨 양의 제안에 따르겠습니다.”

이블팩션의 괴물은 어떤지 한 번쯤 보고 싶지만, 일행에 덤이 있는 만큼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일.

4차선 정도 되는 가도에서 벗어난 일행은 비상을 타고 하늘에서 지형을 확인한 환인의 안내에 따라 호수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자그마한 분지 지형에 자리를 잡았다.

지대도 평원보다 높은데다 크레이터처럼 삼면이 솟아있어 불을 피우더라도 아래에서는 볼 수 없고, 평원 반대쪽은 산과 봉우리로 가로막혀있다.

야밤에 창공을 순찰하는 엘스너펠 소속 조인족이 있을 수 있지만, 오를나하 대평원에 인접한 만큼 이쪽을 발견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온다.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식사를 준비하고 안느는 아우라를 되찾은 영혼 기사들과 함께 호수로 물을 뜨러 갔다.

마차에서 내린 아지에라는 우브와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 점 구김 없는 얼굴의 아지에라. 그런 그녀에게 공경의 태도를 내비치는 우브.

“…….”

그걸 확인한 환인은 마지막 의심까지 거두어들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물론 그대로다.

세르넨은 다섯 개의 목걸이를 가져와 환인에게 공손히 반납했다.

=환인 성자님. 은폐 마도구를 모아왔습니다.=

“이런 것을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환인 성자님의 기책과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강제로 영주의 성에 머물고 있었을 테니까요.=

기책이라고 할 것까지 없는데. 환인은 그렇게 말하는 세르넨의 표정이 밝은데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걸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밝은 것은 집이 보이는 곳까지 왔기 때문이겠지.

세르넨은 우브와 대화를 나누는 아지에라에게 돌아가고, 잠시 할 일이 없어진 환인은 마차에서 떨어져 마치 수면에 비친 별빛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구에서는 깊은 숲속에서조차 볼 수 없을 만큼 별 가루가 쏟아지는 듯한 밤하늘.

그것을 잠시 올려다보고 있으니 비상이 토닥토닥 다가와 환인의 옆구리에 머리를 비볐다.

뀨우. 큣.

환인은 비상의 이야기에 영혼 시야를 열고 남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밤이 찾아오는 검은 하늘이 아니라 회색 야시경을 쓴 것처럼 밝은 회색의 하늘에 하루살이만큼이나 작은 것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엘스너펠의 조인족인가 보군. 불을 피워서 위치를 파악한 건가.’

그들은 잠시 후 남쪽으로 사라졌고 밤하늘은 다시 별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달그락달그락, 식사를 준비하는 작은 소음과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들의 작은 대화들. 그리고 허기를 자극하는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음식 냄새까지.

그만 돌아갈까 하던 환인은 품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리려다 말고 멈추었다.

「환인. 북서쪽으로 380m 땅속에 두더지 같은 괴물이 있어. 꽤 커. 비상이 정도야.」

그쪽으로 걸어간 환인은 땅을 훑었다. 환연이 말한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주의력은 땅이 미세하게 들썩거리는 위화감을 놓칠 만큼 느슨하지 않았으니까.

“…….”

손가락을 내밀려다 천칭을 꺼낸 환인은 검은 영혼 구슬을 꺼내 영혼 화살로 장전한다.

「으~. 그거 기분 나빠.」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대자연의 한복판이라서일까. 안주머니에서 환연이 조금 기운 차린 목소리로 칭얼거린다.

“어떤 식으로 나쁘지.”

「엄청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 같아. 그거에 맞으면 막막 썩고 부패할 거 같은걸.」

“악령의 혼이라서 부정한 효과를 뿌리는 건가.”

자신을 표적으로 잡았는지 움직임이 멈추는 두더지 괴물. 환인은 천칭을 내밀어 검은 영혼 화살을 쏘았다.

쉭—

뱀이 우는듯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검은 영혼 화살은 스며들듯이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10초 정도 지나자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바로 앞에 자그맣게 뭉치다가 구슬이 되어 환인의 왼팔에 스며들었다.

「응. 머리가 꿰뚫려 죽었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몸을 돌려 근처로 다가와 있던 아지에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지에라가 걱정하는 얼굴로 그를 부른다.

=환인 성자님…….=

“예, 말씀하십시오.”

=……아닙니다. 새벽의 빛께서 하시는 일이니 제가 참견한 것은 아니겠지요.=

환인은 아지에라와 함께 나란히 서서 야영지로 돌아가며 물었다.

“제가 검은 영혼을 다루는 게 걱정되시는 겁니까.”

=악령은…… 생자에게 피해만 줍니다. 환인 성자님께서 어떻게 영혼을 구슬로 만들어 다루시는지 저로서는 짐작도 못 하지만, 악령이 성자님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어서…….=

이런저런 군말을 덧붙이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환인은 주변에서 하급 땅의 정령을 불러와 그녀에게 강령을 펼쳐주었다.

=아……?=

“저는 혼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혼에게서 힘을 조금 빌릴 뿐이지요. 그리고 들개 전사단의 영혼들이 구슬화 되어 저에게 온 것은, 제 성불행에 도움이 되어 지상에서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아……. 속죄행…….=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에 따라 부드럽게 찰랑이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환인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그것을 작게 매만지며 유혹하듯이 속삭였다.

“정 걱정되신다면 오늘 밤 저에게 육보시를 해주어 제 혼탁한 기운을 정화해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날로부터 며칠이 흘렀으니 몸도 괜찮아지셨을 텐데요.”

환인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덮자 아지에라의 얼굴이 밤중인데도 훤히 보일 만큼 붉어진다.

「색마.」

환인은 품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부끄러워하는 아지에라에게 작게 웃음을 지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