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화 〉 444 영도로 가는 길
* * *
=헉! 환인… 성자님?=
레심은 갑자기 나타난 환인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환인은 가만히 그와 그 주변을 살폈다.
백중강의 지원을 받았다해도 혼자서 여행해 여기까지 온 건가. 믿을만한 사람을 붙여준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어디로 간 거지.
=성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알, 알소프가…… 소멸했습니다.=
“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제가 있었으니까요.”
눈을 휘둥그레 뜨는 레심에게 환인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을 살해하려 한 알소프 영주. 그 계획이 호수의 왕, 해왕 아드네빌라를 불러들여 몰살당했다는 것 전부다.
이야기를 들은 레심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원수를 찾아왔는데, 원수는 이미 자기 실수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원수의 가문까지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복수자의 표정이다.
“당신은 운이 좋았습니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 일찍 왔어도 당신 또한 해왕에게 살해당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하하, 힘없이 웃은 레심은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이 왜 이제야 여기에 도착했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가씨를 종용해 자살로 몰고 간 그놈을 추적한 결과 알소프 영주의 친인척이라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문 내에서 기밀에 속하는 더러운 짓을 도맡아 해오던 집행자 같은 놈이라더군요.=
“그 말은…….”
=예. 며칠 전 알소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는데…… 꼴을 보아하니 그 자식도 뒤졌나 봅니다. 하하하…….=
웃다가 털썩, 주저앉아버린 레심은 죄다 쓸려가 외성벽 일부만 서 있는 폐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뭔가… 엄청 허탈하네요.=
“자기 손으로 해결하지 못한 원한은 허무하기 마련이지요.”
=……제 손으로 그 자식을 베어버렸다면 통쾌했을까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카드람 알소프의 면상에 배와 사과를 투척해 박살 냈을 때 제 기분이 비슷했었으니까요.”
=푸하하하! 알소프 영주의 면상에 과일을 맞춰서 박살 내셨다고요?! 대단하십니다!=
크으, 그 장면을 저도 봤어야 했는데! 이거 천추의 한이 되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웃는 레심의 눈가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흐른다.
쏴아아아아—
비를 맞으며 실성한 것처럼 흐흐흐, 허허, 하흐흐흐. 웃던 레심이 기운이 쪽 빠진 것처럼 환인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성자님……. 아가씨는 아직도 성자님과 함께하고 계십니까?=
“예. 그녀에게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빛이지만 레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좀 전까지는 반쯤 죽은 명태 눈알 같았는데 지금은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 같은 눈이다.
그 순정 가득한 남자의 모습에 환인은 그에게만큼은 이걸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심.”
=예.=
“그녀는 이제 제 여자입니다.”
무릎 위에서 떨리던 그의 손이 뚝, 하고 멈춘다. 자신을 또렷하게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받아주고 있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아가씨가 죽어서나마 사랑을 성취하셨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씩 웃은 레심은 읏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비상에 올라타 있는 환인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가씨께서 꿈을 이루셨으니…… 이제 제 꿈을 이루어볼까 합니다.=
유명한 모험가가 되겠다는 꿈인가. 환인은 잠시 홀가분해진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백금색 반지를 뽑아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물건, 파르히스트 성주에게 선물 받아서 팔거나 버리기도 곤란하고 양도하기도 어려워 이제껏 끼고 있던 반지.
원거리 투사체에서 조금이나마 몸을 보호해주는 바람 가호 반지다.
“바람 가호 반지입니다. 파르히스트의 성주가 쓰던 물건이니 당신의 모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요.”
=예?! 그, 그런 귀중한 것을……!=
정말 놀랐는지 두 손으로 소중히 반지를 쥐는 레심을 보며 환인은 작게 웃다가 몸을 돌렸다.
“저나 제 일행에게는 활용도가 낮지만, 당신에게는 아닐 겁니다.”
=성…… 환인 님!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진짜입니다! 꼭 갚겠습니다!!=
멀어지는 그의 귀에 레심의 외침이 닿는다. 환인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한차례 흔들어준 뒤 비상에게 박차를 가했다.
구 알소프를 떠난 환인 일행은 에미트 정글 외곽을 따라 이동하며 환인의 기감, 비상의 눈, 환연의 감시 범위에 잡히는 짐승과 동물, 먹을 수 있는 야채와 과일 등을 손에 닿는 대로 수확하며 나아갔다.
특히 비상은 휴식 시간 때마다 어디론가 날아가더니 마수나 동물 등을 턱턱 잡아 왔는데 그 덕에 식량은 충분할 정도로 확보할 수 있었다.
비상이 잡아 온 동물을 씻고 가죽을 벗기고 해체한 뒤에 다듬느라 이동이 지체되었을 정도.
이실리테를 도와 괴수를 도축하던 영혼 기사 한 명이 바로 옆의 안느에게 속닥거리며 묻는다.
=안느 님. 이실리테 님은 검희이신데 이런 일도 도맡아 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검희가 할 일이라고 보기에는 좀 아니지? 하지만 이슬이는 도령이 먹을 건 자기 손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청록 법술사의 도움을 받아 고기에 묻은 피를 씻던 안느의 대답에 영혼 기사들의 표정에 감탄과 감동이 드러났다.
=전설적인 직업을 얻고서도 몸과 마음과 기술을 바쳐 새벽의 빛님을 모신다니, 정말 영혼 기사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군요.=
알소프를 나온 뒤로 이실리테가 얼마나 환인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섬기는지 그녀들은 옆에서 전부 지켜보았다.
그녀들은 지금까지 영혼 기사란 영혼사를 근처에서 호위하고 지키는 게 제일이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실리테를 보고 있자니 우선순위가 바뀔 지경이다.
영혼사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영혼 기사. 그런 영혼 기사를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맡기는 영혼사.
그야말로 꿈 같은, 아니 꿈을 넘어 이상 그 자체의 관계가 아닌가.
잠시 상상하던 영혼 기사들은 저 멀리서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과 대화 중인 새벽의 빛을 돌아보았다.
플뢰가 연상될 만큼 잘생겼지만 그렇다고 플뢰처럼 호리호리하지 않다. 정말 딱 좋은 수준이라 할 정도로 탄탄한 신체에다 성투사와 검희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전기戰? 또한 훌륭하다.
영혼술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만 아픈 수준.
‘저런 분을 섬기는 거라면 나도…….’
성심성의껏 모실 텐데. 물론 아지에라 님을 섬기는데 허투루 행동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여기사로서 강하고 멋진 남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낭만과 로망이지 않은가.
어렵고 힘든 고난의 성불행 속에 싹트는 남녀의 애틋한 감정과 로맨스…….
잠시 야한 상상을 하던 영혼 기사는 커다란 날갯짓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비상 공이 또 먹을걸 잡아 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 쿠웅, 소리를 내며 근처에 떨어진 짐승에 모여든 영혼 기사들은 적지 않게 놀라워했다.
=와아. 이건 스트레이프 보어네. 이 마수 고기가 엄청나게 맛있다고 들었는데.=
=맛은 둘째치고 이거…… 4급 마수잖아요?=
=어금니가 상아처럼 크게 났으니까 맞을 거야.=
=대, 대단합니다. 녹색 쿠에란 이렇게나 강한 생물이었군요.=
=아무래도 제일 희귀한 쿠에니까. 근데 강함만 따지면 노을 쿠에가 더 강하지 않을까?=
=정말?=
다람쥐 귀의 여자 영혼 기사, 같은 영혼 기사라 금방 사이가 가까워진 세르넨의 말에 안느가 옆에 끼어들자 귀여운 얼굴로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노을 쿠에가 싸우는 거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진짜 집채만 한 불타는 바위를 소환하더니 수백 미터 하늘에서 쾅쾅 떨구더라. 무시무시했었어.=
=그래? 우리 비상이는 회오리를 만들어서 괴물을 다 날려버릴 수 있는데. 희귀 색 쿠에는 다 강한가 보다.=
경쟁 심리가 발동한 안느의 이야기에 이번에는 세르넨이 놀란다.
=진짜? 회오리도 만들 수 있어?=
=응. 린덴 폐촌락에서 타락한 바르둘이 만들어냈던 수백 마리 괴물 대군의 돌격을 비상이가 막아냈을 정도니까.=
=와아. 녹색 쿠에는 태풍도 일으킨다는 걸 책에서 봤을 땐 진짜일까 싶었는데,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어? 태풍? 으음, 저대로 계속 자라면 언젠가 진짜 태풍도 일으키는 거 아냐?
영혼 기사들은 물론이고 안느마저 새삼 감탄하는 얼굴로 날개 깃털을 손질하는 비상을 바라본다.
일행에게서 떨어져 아지에라와 대화하고 있던 환인은 저쪽의 소란에 잠깐 돌아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보며 확인했다.
“그러니까, 새벽의 빛이라는 분들은 저처럼 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채를 두르고 있다는 겁니까.”
=환인 님이 새벽의 빛이시라고 알아본 이유는 저와 흘로드의 눈에 다른 어느 영혼사들보다, 일곱별 모임의 수장이신 닌실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를 몸에 두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영혼사 중에서도 상급 영혼사들만이 볼 수 있다는 이야기.
알소프의 소멸로 혼란스러워진 에미트 정글 관통도로를 지나친 일행은 영도에서 나흘거리의 엘스너펠을 목표로 쉼 없이 마차를 달렸다.
환인은 그런 여정 속에서 여자친구들을 불러 아드네빌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부 공유했다.
자신은 이 세계에 있어 침입자 같은 존재이며 영혼사로 각성하게 된 것도 특수한 마물들의 성물에 의해서였다는 것과, 천원이라는 곳에서 자신을 쫓을 사람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환인은 그녀들을 믿었지만, 그녀들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더라도 받아들이려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보여준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최소 놀라거나 조금은 심각해질 줄 알았던 여자친구들은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처럼 ‘이제 와서 뭐 그런 걸 가지고.’ 같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천원이라는 곳에 얼마나 강한 존재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초대받아 간다는 곳에 약한 자들이 있을 리 없다.
즉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환인은 아무 잘못 없다는 듯이 당당한 그녀들처럼 자신도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이쪽은 잘못한 게 없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비굴하게 행동하는 것만큼 추하고 볼썽사나운 일은 없다.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있자고 생각하니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해졌다.
맞다. 자신은 이 세계에 강제로 끌려왔으며 각성 또한 이해 못 할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 힘으로 약간의 사욕을 채우긴 했지만, 넓게 보자면 성불행을 위해서였다. 각성하며 얻은 힘으로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 그리고 자신을 핍박하려는 놈들의 아구창에 펀치를 먹여줄 힘은 갖췄다.
떳떳한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건 얼마나 보기 흉할까.
환인은 그때부터 아지에라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었다.
나는 당신들과 같지 않을 거다. 내가 영혼술로 사람들의 영혼을 성불시켜왔지만, 내가 영혼사라는 건 믿을 수 없다. 당신도 보았겠지만 내게는 영혼술이라 하기 어려운 힘이 있으니까.
=예. 저도 보았습니다. 악령화 해버린 이들이 구슬처럼 변해 새벽의 빛님 곁에 머무르는 것을요.=
“…….”
=당신께서 평범한 영혼사 같지 않은 여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비자룩스에서 있었던 일, 오울링에서의 일, 그보다 앞선 파르히스트에서의 일, 그리고 카턴에서의 일에 율캄에서 있었던 일까지…….=
“…….”
=차원 방랑자이신 분이 영혼사로 각성한 일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각성하신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분께서 혼재를 발견하곤 정화하신 일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악령을 실체화한 뒤 한을 풀고 성불토록 유도하신 일은 영도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었지요.=
자신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지에라는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패랭이꽃처럼 아름다운 보라색 머릿결을 바람에 살랑이며 말했다.
=그렇다 하여도 폭정과 횡포에 괴로워하며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신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영혼사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새벽의 빛께서는 누구보다도 영혼사다운 영혼사이십니다.=
이로써 환인은 큰 시름까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영혼 심문관이란 영혼사를 사칭하는 이를 찾아 벌하고 영혼사를 핍박하는 이들을 찾아 엄하게 벌하는, 이를테면 종교의 이단심문관 같은 이들.
그런 이들이 ‘너는 영혼사다.’고 확답을 내려주었다. 영도에 도착해도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증이나 다름없다.
그 후로 환인은 아지에라와 좀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의 빛이란 무엇인가.
내가 새벽의 빛이라는 건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몇몇 영혼이 자신을 거대한 빛덩어리로 보긴 했지만, 자신의 출신이 문제인 만큼 그런 거룩하고 고귀한 칭호는 모두의 인정이 있고 난 뒤에야 칭하는 게 맞는 듯하다.
=……알겠습니다. 새벽의 빛께서…… 아니, 녹색 성자님께서 그리 불리시는 게 불편하시다면, 차후의 일로 미루겠습니다.=
어차피 새벽의 빛으로 불리겠지만. 그렇게 속으로 말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신뢰와 믿음이 가득한 미소였다.
[444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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