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화 〉 443 알소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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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사건이 끝난 직후 일행의 숫자는 총 27명에 4마리가 되었다.
환인 일행 4명과 4마리(+영혼, 요정 각각 1명)에 영도 측 인사 11명과 땅신 교단 측 인사 12명.
이중 땅신 교단 측인 르니 대주교 일행 12명과 흘로드 영혼 심문관 및 그의 영혼 기사 네 명은 동쪽의 작은 어촌을 향해 바로 떠났다.
일차적으로 알소프 소멸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소멸 당시 도시 밖 에미트 정글 관통도로 감시 주둔지의 병력이나 프라버와 대치 중이던 해군. 그리고 알소프 소속 여객선과 어선 등의 생존자 구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주도에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식량은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이건 성자님의 식량이 아닙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자체 식량 수급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어떻게 먹을 것도 없이 인근 어촌까지 가실 수 있겠습니까.”
=사, 사흘정도는 굶어도…….=
이차적으로는 식량이 매우 부족했고 환인과 가야 할 방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드네빌라가 일으킨 해일은 국지 규모였습니다. 알소프 이외의 어촌이나 마을은 피해를 입지 않았겠지요.”
환인이 하늘에서 확인하고 해준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듯이 도시 외에는 해일의 침식이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풍경에 르니 대주교는 이런 계획을 세웠다.
일단 여기서 사흘거리의 어촌에서 식량을 확보한다. 그리고 어촌에서 일주일 거리에 있는 항구 마을로 이동, 알류겔 호수 동부에 있는 소도시 피라리크스까지 가는 배를 구한다.
그 후 주도와 피라리크스를 왕복하는 정기 여객선을 타고 주도에 가 라수비탄 교구를 통해 주도 성궁의 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
문제라면 땅신 교단 측은 가진 거라곤 몸에 걸친 것들과 약간의 금화 및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 속의 소지품 조금뿐.
“받으십시오.”
환인은 극구 사양하는 르니 대주교에게 가진 식량의 70%를 억지로 안겨주었다.
원래 환인 일행은 스무 명이 한 달을 먹을 식량을 늘 유지했었다. 하지만 알소프 군의 공격과 추격을 대비해 접객당에서 짐을 최대한 줄여놓았었는데, 줄이면서 빼놓은 짐이 아드네빌라의 브레스에 성과 함께 날아가며 소멸해버린 상황.
현재 남은 식량은 영혼 심문관 일행이 가지고 있던 150인분의 건량에 환인 일행이 만약을 대비해서 남겨둔 얼마 안 되는 보존 식량뿐이다.
거기서 70%를 떼어내서 주려 하니 르니 대주교가 당황하면서 거부했던 거다.
“이쪽은 사냥이 익숙합니다. 이걸 가져가는 여러분보다 배부르게 먹으며 목적지로 향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그럼 염치불구하고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맞는 일이다.
교단에서도 귀한 대주교와 그런 대주교의 호위 기사들이다. 짐승을 사냥하는 법은 물론 음식을 만드는 법도 모를 텐데 어떻게 야생 동물을 찾고 사냥해서 갈무리하고 고기를 구워서 먹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사흘 치 식량을 가지고 사흘거리에 있는 어촌을 향해 떠나간 르니 대주교 일행.
그녀를 보낸 환인 일행도 마차를 다시 원래 크기로 되돌리고 쿠에들을 묶고 하며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뭐해? 당신들도 타.=
천장에 방수포를 덮으며 밖에서 비 맞으면서 어정거리는 영혼 기사 다섯에게 얼른 따라고 종용하는 안느.
돌아온 대답은 차라리 뛰어서 마차를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멀쩡한 마차가 있는데 왜 달려서 쫓아오겠다는 건데? 안쪽은 넓어서 너희들 전부 태우고도 충분하니까 얼른 타.=
=그,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안쪽은 새벽의 빛께서 머무르시는 곳인데 이렇게 더러운 몰골인 저희가 어떻게…….=
필두 영혼 기사, 다람쥐 귀의 세르넨을 포함한 다섯 여자는 도시를 탈출하고 쏟아져 내리는 흙탕물을 헤치며 빠져나오느라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지금은 비가 내리면서 물이 불어난 개울 근처로 가서 씻고 온 덕분에 그나마 나았지만, 좀 전에는 뻘밭을 뒹굴다 온 것 같은 모양새였던 것.
게다가 씻긴 했지만 옷의 틈새에 흙 알갱이가 박혀 원래 회백색이던 옷은 진흙 색으로 변해버린 상황이다.
여기에 머리카락까지 흠뻑 젖어있으니 조금 심하게 말해 비에 젖은 동물 냄새가 나고 있다.
=그건 그러네. 일단 이걸 써.=
=……이, 이건 성수를 적신 천이잖아요! 이걸로 닦으라고요?!=
=응. 너희도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 정도는 있지? 안에 들어가면 율이 언니가 있으니까 몸 닦는 거 하고 좀 도와달라고 해. 자, 얼른 들어가. 안 들어가면 오히려 도령이 나무랄지도 몰라.=
=읏. 네, 네…….=
환인이 나무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꺼내면서 겨우 여자들을 마차 안으로 들여보낸 안느는 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일행이 있을 때는 환인의 체면도 있고 대주교도 있어 멀쩡한 척했지만, 혼자 남으니 같은 교단의 형제자매들이 몰살당한 것이 떠올라 감정이 겉으로 스멀거리며 흘러나오려 한다.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아니라 교황 예하가 있었어도 어쩌지 못했을 테지만…….
마부석에 멍하니 앉아있던 안느는 고개를 붕붕 흔든 뒤 자기 뺨을 짝짝 때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오히려 도령이 아니었으면 그들뿐만 아니라 알류겔 호수와 인접해있는 도시의 형제자매들이 전부 당했을 거야.’
갑자기 용이 난입해서 다 죽여버리는데 뭘 어떻게 할까. 그 상황에서 대주교님이랑 대사제님을 살린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투두두두…….
안느는 방수 후드 망토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식수를 확보하러 간 환인과 이실리테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소프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 열도까지 통째로 들어가도 남을 만큼 넓은 에미트 정글이 나온다.
식량은 그곳에서 확보할 수 있다고 해도 식수는 그렇지 않기에 환인은 이실리테와 함께 하늘에서 봐두었던 깨끗한 냇가를 찾아가 30일치 식수를 확보해왔다.
그리고 유르파에게 할 말이 있어 마차 문을 열었던 환인은…….
=꺅!?=
=앗, 아앗.=
웬 여자들이 알몸으로 모여있는 모습에 움찔, 어깨를 미미하게 들썩거릴 정도로 놀랐다.
하얀 피부,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 약간 발그스레한 피부.
큰 젖가슴, 빈약한 가슴, 적당한 젖가슴.
잘록한 허리는 다 똑같고 큰 골반, 보통 골반, 안타까운 골반.
온통 살색의 향연이다.
“미안합니다.”
환인은 문을 닫으며 사과하고 마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 영혼 기사들이 없었지. 이걸 놓치다니, 내가 피로하긴 한가 보군.
이실리테와 함께 식수를 마차 수납함에 옮겨 넣던 안느가 빼꼼, 마차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도령, 마차 안에 영혼 기사님들이 옷 갈아입고 있어.=
“……다음부터는 조금 빨리 말해다오.”
=킥킥. 좋은 구경 했겠네?=
“너희들의 알몸 덕분에 눈이 높아져서.”
=…….=
=…….=
자신들에 비하면 손색이 크다는 이야긴가? 안느와 이실리테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겠지. 식수는 다 채웠나.”
=엉.=
=네.=
“그럼 출발한다.”
마부석에 오른 안느가 쪽문을 열어 안쪽에 출발한다고 알리고 이실리테는 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환인은 비상의 등에 올라 그 옆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여자친구들과 상의해보아야 할 것도 있고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에게도 물어볼 것도 있다.
‘내 각성이 그 사슴뿔 지팡이로 이루어진 거라니.’
확실히 그때 지팡이를 짚자마자 머리가 창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기절했었다. 그 뒤로 빛의 강을 보았었고.
그것으로 각성했다는 건 그렇다 쳐도…….
‘침입자인가.’
환인은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매개체, 메리아놀 종족 연합 주화를 꺼내 들었다. 문양 강화 영혼 시야로 보자 금화 자체에 일렁이는 마력이 보인다.
이걸로 강제 소환된 건데 침입자로 분류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침입자가 아니라 납치 피해자라고 불려야 하는 게 아닌가.
환인은 우연히 읽었던 한국 평균 하루 실종자 수가 100명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물론 거기에는 단순 가출이나 오인 신고 등도 있겠지만 진짜 실종자도 있을 것이다.
한국 내에서만 이 정도인데 이걸 전 세계로 확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루에도 수십 명이 이 세계로 소환되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침입자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소환하는 놈들을 찾아 처벌하고 처리해야 하는 게 우선일 텐데.
‘그나저나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건가.’
환인은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세상이 자신을 적대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공기에서부터 물과 땅, 식물까지. 홀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모든 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때였다.
언제부터 담담해졌었지? 곰곰이 생각해본 환인은 호브들과 싸운 뒤 지팡이에 손을 대면서 각성한 다음, 크게 앓고 난 이후부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블팩션 쪽 관련 직업자도 아니고 이쪽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사라는 직업도 아닌 건가.
이를테면…….
‘오류.’
게임으로 보자면 버그 플레이어라는 말이 된다.
환인은 이대로 영도를 향해도 괜찮은 건지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아드네빌라가 해준 이야기는 아마 일반인들, 사회 고위층 인사들도 알지 못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가 이때까지 만나왔던 호족의 반응과 행동을 생각하면 틀림없을……?
우연히 돌린 그의 시선 저 멀리 높은 언덕이 들어왔고, 3.0에 가까워진 그의 시력이 그 꼭대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늑대 머리와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사의 아우라.
솔직히 말하면 아우라 덕분에 발견했다.
왠지 눈에 익숙한 형태에 설마 하던 환인은 백려강이 마차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곤 비상을 조종해 혼자서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간 마음고생과 몸 고생이 엄청났는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의 얼굴은 어디 크게 아픈 중병 환자 같아 보였다.
볼살이 홀쭉해지고 눈 주위도 퀭하다. 회색 모피는 색이 바랜 것처럼 회백색으로 변한데다 근육도 조금 빠졌는지 그의 기억보다 조금 왜소해진 모습.
“……레심.”
백려강의 소꿉친구이자 그녀를 은연중에 짝사랑하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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