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 442 호수의 왕
* * *
촤아악 촤아아악—
비상의 등에서 내려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며 흔적만 남은 도로를 걸어가던 환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를 구성하고 있던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수영장처럼 변해버린 평지만 수 킬로미터 떨어진 성벽까지 펼쳐져 있다.
건물의 잔해도 없고 사람의 시체도 없다. 살아있는 거라곤 자신과 비상, 백청룡 셋뿐인 고요한 장소.
마치 해일이 밀려와 대지 위의 더러운 것을 모조리 가져가 정화된 듯한 광경이다.
무릎까지 차오른 수위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부슬비를 맞이하며 통통 튄다.
중턱부터 통째로 날아가 존재조차 사라진 알소프 성의 흔적과 저 멀리 서 있는 무너지거나 금 간 성벽이 쓸쓸함을 배가시키는 가운데…….
《빨리 와라.》
“…….”
물 운동장 한복판에 고고히 서 있던 용이 왜 그렇게 느리냐며 타박하는 감정을 전달해온다.
《뒤의 그것을 타면 금방일 것을.》
“…….”
《인간이라는 것들은 오래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느긋하기만 하지.》
“좀 조용히 하십시오.”
환인의 핀잔에 쿠우웅— 땅이 울리는 소리와 진동이 발밑을 치고 지나간다.
비늘과 백청색의 유려한 털로 뒤덮인 길고 아름다운 꼬리로 땅을 쿵, 쿵 때리는 백청룡의 행동.
길이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생명체의 그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극심한 압박을 주지만, 환인이 보기에는 기분 나빠진 고양이가 불만을 표시하는 것과 같아 보였다.
“꼬리도 가만히 두십시오. 아름다운 비늘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이유로 고집을 피웠으면서 그 비늘이 붙은 꼬리로 땅을 때리는 겁니까.”
《…….》
슬그머니 꼬리 치기를 멈추고는 딴청을 피우는 용. 환인은 탄식 같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위광이라는 것을 예의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날 이후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을 해소해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이름은 환인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얼마 살지도 못하는 인간 주제에 이몸의 이름이 궁금하다는 거냐.》
“그렇다고 당신을 너, 야, 이렇게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특별히 네놈에게만 알려주마. 이몸은 이 세상 모든 물의 주인이시자 생명의 원초를 관장하시는 그분의 계통을 이어받은 자, 아드네빌라다.》
“그분이라면 물신님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러하다.》
환인은 놀람과 함께 새삼스러워졌다. 지구에서는 전설, 허구로만 치부되는 용까지 본 마당이다. 신이 실존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신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겠군.’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신의 계통이니까 저 정도의 능력을 지닌 거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오대양에 비견되는 넓이의 알류겔 호수를 자기 집으로 삼을 수 있는 거겠고.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궁금해할 시간에 빨리 다가오기나 해라.》
“빨리 끝내는 건 이걸 쓰면 됩니다만.”
《무엇이 궁금하지?》
천칭을 들어 올리자마자 태도를 싹 바꾸는 아드네빌라에게 환인은 약간의 어처구니없음과 피로를 함께 느꼈다.
분위기가 적응을 못할 만큼 극과 극을 오간다.
알소프의 모든 것을 해일로 쓸어버린 직후에는 용이라 칭하기에 부족함 없는 초현실적인 존재감과 권능을 뿌렸다. 그런데 지금은 환연이 생각날 만큼 가볍고 생각 없는 행동을 보인다.
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여기에 정신을 압도하는 정체불명의 정신파까지 더해지니 제멋대로에 기분파인데다 행동까지 엉망진창인 윗사람을 보는 기분.
환인은 참을성을 가지며 물었다.
“천원이란 무엇입니까. 우주 속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대지와 우주를 떠받치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하늘에 박힌 커다란 눈이 있는 장소를 말하는 게 맞는 겁니까.”
《……눈? 방금 눈이라고 했나? 그 눈은 어떠하였지? 어떤 모습이었지?》
자신의 의문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관심을 비추는 모습에 환인은 일단 아드네빌라의 질문부터 대답해주었다.
《…….》
설명을 들은 아드네빌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숨을 쉬긴 하는지 미세한 움직임마저 없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상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
환인은 그런 아드네빌라의 유려한 자태를 감상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고, 생각은 환인이 거리를 절반으로 좁혀 무너져내린 미궁 근처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졌다.
고개를 든 용이 눈에 현기를 담고서 한참 늦은 대답을 내놓는다.
《천원이란 표현 그대로 하늘에 존재하는 만물의 근원이다. 성수의 요람이기도 하며 세상을 굽어살피는 신님들의 거처이기도 하지.》
“그걸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너라는 존재는 다시 보니 참으로 기이한 인간이군. 본디 네 운명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헌데 어찌…….》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아드네빌라의 눈이 은하수를 담은 것처럼 변하며 강한 빛을 내뿜는다.
먹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컴컴한 공간에 별빛이 수 놓이는 느낌.
《너로 인해 죽었어야 할 자가 살아남았고, 잡초로서 끝났어야 할 자가 화사한 꽃이 되어 피어났으며, 만개한 꽃이 돼야 했을 자는 채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스러졌다.》
“…….”
《이쯤 되면 변칙, 부정, 이상의 존재로 간주하여 세계가 너를 제거하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온전히 이 세계의 존재가 된 것도 아니고…….》
“제가 이계인, 차원 방랑자인데도 영혼사로 각성했기 때문입니까.”
《차원 방랑자라고? 그런가. 그래서……. 허나 각성이란 이곳 차원 생물만의 특혜이자 특권이다. 침입자에게 그러한 혜택은 주어지지 않거늘…….》
“……?”
아드네빌라의 눈이 환인을 주시한다.
그 시선에 환인은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흡사 잘못을 저지르고 어머니 앞에 선 느낌이다.
《그런가! 그래서였나. 너는 운도 좋은 놈이군.》
“제게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대지에 엎드린 채 앞발로 팔짱을 낀 아드네빌라는 환인의 과거를 모두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너,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기물을 손에 쥔 적이 있지 않나. 평범한 기물도 아니고 마물들이 가지고 다닐법한 조각상 같은 것.》
그 지적에 환인이 떠올린 것은 기이한 기술을 쓰던 녹색 호브의 사슴뿔 지팡이였다.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네빌라가 그럼 그렇지, 하고 말을 잇는다.
《그것은 본디 마물이 각성을 위해 힘을 모으던 것이었을 터. 그걸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네가 건드렸고, 그때부터 네 운명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운명입니까.”
《차원의 미아가 다른 차원에 흘러 들어가보았자 결말은 좋지 못하다. 생물에게 배척받고 무생물에게도 거부당하다가 끝내 세계에게 살해당하기 십상이지. 하지만 너는 마물의 힘으로 변칙적인 각성을 이루었고 얄궂게도 자질이 뛰어나 그 힘으로 경지를 이루었으니, 네 존재야말로 변칙 그 자체이다.》
“…….”
《천원을 방문하였다고 했지. 그때 널 맞이한 존재가 있었나.》
“하얀 꽃밭 한가운데 홀로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럴 테지. 보통 천원이란 방문하는 것이 아닌 초대받는 것이니…….》
후후후. 아드네빌라는 참으로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이 얼마 만에 보는 흥미로운 존재인가. 기분 나쁜 경험을 잊을 정도다. 하지만 너에게는 별로 재미없는 일이 될 테지.》
“…….”
의미심장한 아드네빌라의 말에 환인은 자연스럽게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천원에 속한 존재가 절 쫓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거처에 초대하지도 않았고 허가받지도 않은 자가 흙발로 멋대로 들어왔다가 돌아갔다. 집주인 되는 분께서는 별거 아닌 일로 여길지라도, 집주인을 모시는 아랫것들 처지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거나 의문을 가질 일이겠지.》
환인의 경우가 참으로 웃기는지 아드네빌라는 참지 못하고 연신 웃는다.
그럴 때마다 애벌레가 이동하는 것처럼 기다란 몸이 좁혀들었다 퍼져나가며 비늘이 연동 운동을 한다. 그 때문일까.
툭, 땡그랑—
《음?》
비늘 아래 박혀있던 칼날 징표가 스스로 밀려 나와 밑으로 툭 떨어졌다.
《…….》
“…….”
한 명과 한 용의 사이를 흐르는 어색한 침묵.
《……뽑으려고 그토록 애를 쓸 때는 안 빠지더니.》
뻘쭘해서 하는 목소리로 그 칼날 징표를 지그시 즈려밟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아드네빌라.
엉뚱하게도 일이 해결되었지만, 환인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아드네빌라에게 살짝 목례했다.
“도와달라 하신 일은 저절로 해결되었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고맙다고 해두지. 네 덕에 나빴던 기분도 좋아졌고 분노도 풀렸으니.》
“저도 고맙다고 해두겠습니다. 당신이 해준 이야기가 제 오랜 의문을 몇 가지 풀어주었으니까요.”
환인이 담백한 태도로 비상의 등에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아드네빌라는 잠깐, 하고 그를 멈춰 세웠다.
호수의 왕으로 군림하던 아드네빌라는 이때까지 많은 인간을 만나왔었다.
자신을 토벌하겠답시고 찾아온 인간도 보았었고 재물을 바칠 테니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인간도 보았으며 자신을 부하로 삼으려 하는 인간도, 자신을 신처럼 추앙하는 인간도 봤었다.
그 인간들은 전부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괴물로 치부하며 적의와 함께 더러운 욕망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저 환인이라는 인간은 달랐다.
자신을 그저 좀 크고 신기한 생물로 대하는 인간은 맹세코 일생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드네빌라는 변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부렸다.
《넌 천원을 본다는 게 어떤 뜻인지 듣지 않았다. 그 대답은 필요 없나.》
“말해줄 생각이 없어 말을 돌리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알류겔의 왕인 내가 그런 비굴한 짓을 저지르겠나. 말해주기 싫다면 거절할 따름인데.》
흥, 하고 콧김을 내뿜은 아드네빌라는 심유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천원을 본다는 것은 한 방면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이를테면 신님의 대행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지.》
“그 신의 대행자라는 분들은 사도라는 분들과 다릅니까.”
《사도는 통신 수정구 같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다. 대행자는 집사 같은 거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지.》
“…아드네빌라는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가 높군요. 종종 인간으로 변신해서 놀러 다니기도 하나 봅니다.”
《………….》
이건 물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나. 슬쩍 시선을 피하는 아드네빌라의 모습에 환인은 후,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드네빌라가 해준 이야기들은 생각이 복잡해질 요소가 매우 많았기 때문.
이전보다 더한 파란이 자신의 앞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오던 웃음도 멈추는 기분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드네빌라, 바라는 목표를 이루시길 멀리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어, 고맙다.》
꾸으?
이제 돌아가면 돼? 하고 묻는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환인은 순간 눈앞이 황금빛 광채로 뒤덮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이지만, 한 번 경험해봤던 현상이었기에 놀라지 않고 비상의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손에 쥔 고삐의 감각과 비상을 타고 있는 느낌에 집중했다.
비상도 갑작스러운 광채에 놀라 뻣뻣하게 굳은 상황.
‘또 지구로 되돌려지는 건가.’
느닷없는 일은 아니다.
아드네빌라의 접근으로 미궁은 제풀에 폭발해버린 상황. 처음에는 스스로 무너졌지만, 그 후에 아드네빌라로 인해 2차 붕괴가 벌어졌다.
만약 2차 붕괴 때 미궁의 심핵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풀려난 힘이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무너진 미궁 근처를 지나가던 자신에게 날아왔다면…….
“……?”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고 있어도 주변이 변화할 낌새가 없고 정신을 잃을 기미가 없다.
환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을 아리게 만들던 광채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가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해진 것은 그때였다. 마치 불로 가슴을 지지며 무언가를 새겨넣는 느낌.
앞섬을 풀어헤친 환인은 기존의 그림 같기도, 글자 같기도 한 문양이 좀 더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산란못 미궁을 부수고 처음 새겨진 문양은 도무지 그 형태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양이 명치 쪽으로 좀 더 확장된 지금은 어떤 모양새인지 알 것 같다.
‘나무 그루터기인가.’
아니, 아직 다 그려지지 않은 나무 밑동과 뿌리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심핵을 부술 때마다 문양에 획수가 더해져서 나무를 그리는 거겠군. 이게 온전히 나무가 되었을 때 문양은 완성되는 것일 테고…….’
자신이 지구로 완전하게 귀환하는 건 그때가 되는 건가.
그 순간 환인은 우주수 길리아미를 떠올렸다. 천원의 대지에서 본 하얗고 거대한 신목??. 그게 이것과 닮았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일까.
큐?
비상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에 환인은 옷차림을 정돈하고 가볍게 옆구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그녀들에게 돌아가자.”
뀻.
비 내리는 거무튀튀한 하늘로 훌쩍 날아오르는 비상의 등에서 뒤를 돌아본 환인은 아드네빌라가 호수로 돌아가지 않고 미궁이 가라앉으며 생겨난 지름 천여 미터의 싱크홀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맑고 투명한 물속에 잠겨 들어 그대로 똬리를 트는 아드네빌라.
저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길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리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을 벌하겠다 찾아오는 인간들을 죽여 없앨 속셈인 걸까.
환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점차 강해지는 빗줄기 속에서 천막을 쳐두고 기다리는 여자친구들과 영도 및 땅신 교단 측 인사들.
그들에게 돌아간 환인은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오오, 정말입니까!=
=더는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듯하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과…… 형제자매들이 희생당한 것은…….=
=…….=
=…….=
쿠르르릉, 쏴아아아아—
땅신 교단 측 인사들의 묵념에 영도 측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묵념을 올린다.
“이번 일은 알소프의 영주, 카드람 이니티 알소프로 인해 벌어진 대형 참사입니다. 당사자는 죗값을 치렀다고 해도 될 테지만, 그로 인해 살해당한 땅신 교단 및 다른 교단의 성직자들, 그리고 죄 없는 일반 백성 수십만 명의 목숨은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일이 아니겠지요.”
환인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를 바라본다.
“아드네빌라는 당분간 저 땅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주도에서 진상조사가 진행될 텐데 그때 르니 대주교님과 알락스 대사제님께서 하실 일과 해야 할 말씀이 많을 겁니다.”
=예……. 저, 그러면 성자님과 영혼 심문관님들께서는…….=
기운이 빠진 듯한 르니 대주교의 물음에 아지에라는 젖어서 짙은 바이올렛색으로 변한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저희의 목표는…… 이번에 일어난 일로 인해 새벽의 빛님과 알소프 영주 사이의 중재에서 새벽의 빛님을 모시고 에쉬누르로 향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지만 알소프 사건의 대응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일. 흘로드 님.=
=예, 아지에라 님.=
=르니 대주교님과 함께하시며 이번 일의 전말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태시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르니 대주교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소멸한 알소프의 소식은 빠르게 라드세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도시 하나가, 그것도 막 소도시로 승급한 곳도 아니고 수백 년간 중급의 토대를 굳건히 다져 얼마 안 가 대도시로 승급할 거로 생각하던 도시가 증발한 것은 라드세아 역사를 통틀어도 몇 안 되는 대사건이다.
호족들은 호수라지만 해왕과 동일한 취급을 받던 아드네빌라가 알소프를 습격하게 된 이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영도와 땅신 교단, 프라버가 매일같이 쏟아내는 정황 증거 및 증거품과 증인의 증언까지.
그리고 일련의 사건의 중심에 녹색 성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해왕 아드네빌라의 분노는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을 것이며, 알류겔 호수와 인접한 도시 및 마을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멸의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해서였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호족들의 반응,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반응.
일반 백성들, 시민들은 뒤져버린 알소프의 영주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녹색 성자에게만 관심을 가졌다.
비자룩스와 크라빈 마을의 구원자, 린덴 폐촌락의 해방자로 알려진 녹색 성자.영웅 같은 인물의 등장은 언제나 민초들의 자극적인 소재거리였으니까.
=녹색 성자? 영혼사님이라는 말인데 영혼사님이 용까지 멈춰 세울 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여?=
=힘도 세지만 그, 영혼술이 영혼 심문관님들도 한쪽 무릎을 꿇을 정도로 대단하시다더만.=
=알소프를 방문한 이유도 영주가 저지른 빌어먹을 짓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단 말이 있던데.=
=그, 영성 님들만 평생 가야 한 번 본다는 하늘 고래를 벌써 두 번이나 보았다고도 하더라고.=
그들은 녹색 성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호족들은 보다 내밀한 사정을 입수하고 긴장하는 중이었다.
=해왕이 습격한 것은 알소프 영주의 행동으로 인한 짓이지만…… 알소프 영주를 처단한 것은 성자 자신이라고?=
=성자의 영혼술은 혼재와도 소통해 부릴 정도라는 말이 있네.=
=알소프 영주가 성자를 공격한 것도 프라버를 삼키려다 성자로 인해 무산으로 돌아가니 분노해서 그랬다고 하더군.=
=성자는…… 습격자들을 죽인 뒤 영혼을 통해 정보를 얻고 알소프 영주에게 따지러 간 거였고? 허 참.=
=이건 내가 큰 돈을 들여 얻은 이야기인데 말일세, 어쩌면 영도의 지도자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라?=
=영성을 뛰어넘는 직위가 있는데 그게 새벽의 빛이라 한다네. 이번에 나타난 녹색 성자가 바로 새벽의 빛이라네.=
=그… 새벽의 빛은 뭔가?=
=영혼사의 정점이라더군.=
=정점…… 믿기 어렵지만 죽은 직후의 영혼까지 볼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사실 같아.=
=위험하군. 정말 위험한 인물이야.=
=정치적으로는 영도와 땅신 교단에 헬루멘과 프라버를 등에 업었고 본신의 무력도 타락한 바르둘을 해치우고 용을 멈춰 세우는 정도에…….=
=영혼술은 영혼의 왕이라 칭할 정도라고 하지. 무슨 고대의 영웅도 아니고 이런 인간이 나타날 수가 있는 건가?=
소식을 접한 호족들은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과장은 얼마나 더해졌지?
죽은 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한도가 없다. 그리고 영혼은 영혼사에게 꼼짝도 못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자칫 치명적인 정보가 그쪽으로 흘러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자의 방문을 마냥 환영할 수 없다.
이렇게 소도시나 마을 쪽으로만 알려지던 환인의 이름 두 글자가 한층 급이 높은 호족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환인의 이름 두 글자가 주도의 성궁 깊숙한 곳에까지 닿았다.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분이군요.=
호화로움을 넘어서버려 눈썰미와 심미안이 없다면 휑하다고 느낄법한 300평 남짓한 개인 집무실.
뒤로 알류겔 호수의 수평선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곳에서 아홉 꼬리의 백미호白美?가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죽은 직후의 영혼도 볼 수 있으며 혼재도 다루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이정도 되는 영혼술의 영사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왜 없죠?=
=……그건 800년전의 설화이지 않습니까.=
=글쎄요.=
모호한 미소를 띈채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여자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북쪽으로 난 거대한 창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분의 가는 길과 행적을 모두 수집하고, 이전에 있었던 일도 빠짐없이 모아보세요.=
=여왕 폐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관심을 끌어모으던 환인은 영도까지 앞으로 한 걸음인 장소, 조인족들의 도시인 엘스너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