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47화 (447/813)

〈 447화 〉 441 호수의 왕

* * *

환인은 니오네브레스를 몇 년간 여행하며 적지 않은 종족을 만나왔다.

니오네브레스 주류 종족이라 하는 루크랑, 플뢰, 프라우드는 물론이고 난쟁이 같은 기플라와 드라이어드와 흡사한 암드룩스도 만났으며 아드섹트라는 충인족도 몇 명 보았었다.

그들은 불특정 다수를 임의로 칭할 때는 사람이라 하고 특정 인물이나 인종을 가리킬 때는 해당 종족의 종족 명을 부른다.

그리고 인간이라 부르는 것은 무례하게 칭하거나 비인간족이 인간종족을 부를 때에 해당한다……고 사회풍습으로 익혔다.

‘그 말은…….’

환인은 시선을 내려 날갯짓하려는 비상의 뒤통수를 보았다. 방금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되돌아 가려 하는 중이다.

똑똑한 녀석이니 만약 방금 목소리를 들었다면 일단 멈추었을 게 틀림없는데도 계속 움직이고 있다. 즉,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뜻.

거기다 주변에 살아남은 인간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 무엇보다 머릿속에 울려 퍼진 목소리는 느낌상 다른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부른 듯했다.

불가사의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느낀 환인은 비상을 멈춰세웠다.

“비상, 잠시 멈춰라.”

쿠우?

왜 그러냐고 물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제자리 비행을 하는 비상.

환인은 몸을 돌려 서양용이 아닌 동방의 용처럼 생긴 백청룡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백청룡, 짐작키로 호수의 주인 아드네빌라가 수 킬로미터 밖에서 자신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 부른 게 당신입니까.”

짧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괴물이 머릿속으로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게 이 세계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너에게서는 천원의 흔적이 느껴지니, 이 벌레들보다야 믿을 수 있겠지.》

반응은 즉각 돌아왔다.

벌레라는 부분에서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적개심과 대상이 사라진 듯한 짜증과 분노의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

목소리에서 감정이 어찌 이리도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의아함이 먼저 들었지만, 환인은 사소한 것은 일단 접어두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수십만 명이 사는 중급 도시를 괴멸시키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짜증과 분노의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으니 시간을 길게 끄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

“천원이라는 것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하다. 아니었다면 기분 나쁜 것을 다루는 너는 진즉 죽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찌르고 헤집으며 감정까지 흔드는듯한 목소리가 그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을 준다. 환인은 20년간 쌓아온 정신력과 인내심으로 그걸 버텨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천원??, 하늘의 근원.

그 단어를 듣자마자 우주수와 하늘에 박혀있던 눈을 보았던 그 불가사의한 대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때 그 경험이 자신에게 무언가 흔적을 남겼다는 건가.

‘기분 나쁜 거라면 검은 영혼 구슬이겠군.’

환인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왜…… 나를 부른 겁니까.”

《천원을 볼 정도의 영특함은 지니고 있군. 이리 와서 이몸을 도와라.》

쿠웅… 쿠우웅…….

몸 길이에 비해 빈약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다리로 물살을 헤치며 다가오는 용.

환인은 힐끔, 저 수평선 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광대한 먹구름에 시선을 주었다. 저건 저 용이 불러오고 있는 건가.

작게 심호흡한 환인은 백청색 용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 나를 호칭한 대로 나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땅의 수십만 인간을 몰살시켰습니다. 무엇을 도우라 할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제가 당신을 돕겠다고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너로 인해 이 인과가 시작되었다. 원흉이라 할 수는 없으나 원죄 일부는 짊어졌으니, 죄를 해하는 것도 너에게 주어진 짐이다.》

현기가 담긴 이야기에 환인은 후우우, 긴 숨을 내쉬었다.

용이 말을 할수록 분노와 짜증의 기색은 사라지고 알류겔 호수의 청명함을 담은 목소리로 변해간다.

그 덕분에 정신적 피로는 한결 해소되었지만,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굴복해버릴 듯한 정신파는 더욱 강해졌다.

환인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동맥을 피해서 허벅지를 푹 찔렀다.

화끈한 느낌에 이어 큰 고통이 일어나며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려 드는듯한 뇌와 정신을 단숨에 일깨운다.

그리고 고통 자극으로 깨어난 뇌가 타임라인을 단숨에 정리해 저 용이 말한 원죄를 짚어냈다.

아니, 짚어내고 할 것도 없다. 웨이포드에서 백려강과 레심을 만난 것부터가 사건의 발단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

환인은 신비의 초월이라고 해야 할법한 거구의 백청룡을 응시했다.

하늘 고래는 사방을 벽처럼 감싼 안개 속에서 출몰해 환상이라는 감상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백청룡은 현실에서 초월이라는 단어를 실체화한 것처럼 오롯이 그 존재감을 내세우는 생명체.

저런 존재는 두 눈으로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도 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헛소리를 내뱉은 걸로 보이지 않아 환인은 일단 가까운 성벽 첨탑, 해일에 무너지지 않은 멀쩡한 곳에 비상을 착지시켰다.

대화가 조금 길어질 듯한데 비상을 계속 호버링시키는 것도 안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뀨우우.

아무리 간이 큰 비상이라 해도 백청룡은 부담되는지 작게 신음하는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이 용에게 물었다.

“당신처럼 생명을 초월한 듯한 존재도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군요.”

말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 이 일로 일어날 여파와 이 일이 사회에 끼칠 영향을 계산했다.

《홀로 오롯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다섯 분뿐. 상천을 이루지 못한 이몸은 너와 같은 그저 피조물일 따름이다.》

“……도우라고 하셨는데, 도와준다면 무엇을 주실 겁니까.”

《이몸이 죽이겠다 결심한 대상에서 네가 구출한 인간만큼은 제외해주겠다.》

알소프 성을 워터 브레스로 날려버리고 물 폭탄으로 하늘을 날던 조인족과 수영해서 피신하던 사람들을 학살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다시 두통이 치미는 걸 느낀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신비나 이적, 권능이 존재하는 세계란 이다지도 불안정한 곳이군.’

환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니오네브레스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특정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도시 하나를 소멸시키다니. 지구에서도 몇 명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는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과학과 물리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니오네브레스는 어떠한가. 도시의 영주란 작자가 한 행동 하나로 개체 하나가 움직여 수십만 명을 몰살했다.

세계의 진리나 세계의 법칙 같은 걸 알고 있는 듯한 저 용도 당연하다는 듯이 수십만 명을 학살한 거다.

이런 세계는 안정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혼돈,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이다.

백청룡의 주위로 수십만의 영혼이 줄지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에 환인은 눈 밑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몸의 머리에서부터 등허리를 따라 157번째 비늘 아래, 더럽고 불결하고 역겨운 것이 박혀있다. 제거해라.》

환인은 용이 말하는 게 자신이 문양 강화 영혼 시야로 보았던 그 찌꺼기 같은 것을 말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게 이 도시를 궤멸시킨 이유입니까.”

《그렇다. 이 도시를 다스리던 인간이 나의 거처에 던지고 간 것이다.》

눈을 마주하고 있던 백청룡에게서 심상心?이 영상처럼 흘러들어왔다.

알류겔 호수 심해 깊은 곳에 둥지를 꾸려 깊고 긴 잠에 빠져있던 호수의 용.

머리 위로 수천, 수만 대의 배가 오고 가지만 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빠른 배 한 척이 머리 위로 지나가며 칼날 징표를 수면 아래로 던졌다.

더러운 위상력과 주물럭거려 오염된 신비 일부를 담은 칼날은 심해 깊은 곳까지 내려왔고, 잠들어있던 용의 역린?? 근처를 지나며 자극했다.

용은 몸부림쳤고 거처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는 도중 한없이 낮은 확률을 뚫고 백청룡의 비늘 틈에 칼날 징표가 꽂힌다.

동면 중이던 용은 강제로 깨워졌기에 일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드높은 지성과 이성은 사태를 금세 파악했다.

심상 속에서 또 다른 심상이 펼쳐졌다.

얼마 후, 들개 전사단이 두루마리를 움켜쥐고 한 남자에게 달려든다. 그 순간 용의 비늘 틈에 꽂힌 칼날 징표가 발동하며 더러운 신호를 뿌렸다.

비늘 아래 박힌 탓에 그 더럽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에너지의 파동이 백청룡의 몸 안을 헤집는다.

환인이 치환해 느끼기로 인분, 똥이 입안에 강제로 처넣어진 것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하고 구역질 나는 감각이었다.

전사단은 곧 환인 일행에게 쓸려나갔고 두루마리는 보존 주머니에 담겼다. 칼날 징표의 신호 발산도 함께 정지했다.

봉변을 당한 백청룡은 분노가 치솟았지만, 처음은 참았다.

비늘 아래 박힌 칼날 징표를 뽑으려고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용 자신의 강인한 위상류와 역쇄류, 세상에서 손꼽을 만큼 강인한 비늘을 뚫지 못해 무산된다.

심해에 살던 진수들을 불러 뽑으려 시도해보았지만, 성수인 호수의 왕이 가진 위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보다 약한 괴수와 마수는 위광에 닿자마자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다시 심상 속의 심상이 펼쳐졌다.

알소프 근방에서 유르파가 보존 주머니에 든 전송 두루마리를 꺼낸 순간 또다시 백청룡을 덮치는 역겹기 짝이 없는 에너지의 파동.

자신을 더럽히는 두 번째 봉변에 백청룡은 크게 분노했다.

분노한 백청룡은 신호를 쫓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 파괴된 거처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두 번째 신호의 발산은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방향은 읽었지만 위치와 원흉까지 읽어내기에는 짧은 시간.

백청룡은 움직임을 멈춘 채로 인내했다.

그리고 대청에서 환인이 전송 두루마리를 꺼내 카드람 알소프의 앞에 던졌을 때, 호수의 왕은 분노와 함께 알소프에 행차했다.

“…….”

이 심상을 보여준 것이 용이며, 그 시간은 0.1초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환인은 식은땀에 뒤덮인 얼굴을 쓸어내리고 물었다.

“미궁이 폭발한 것도 당신이 한 일입니까.”

《인간의 더러운 탁기로 오염된 궁이 순수한 기운을 받아들이고도 멀쩡할 리 만무하지.》

의문이 모두 해결된 환인은 눈을 감고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그가 본 심상 속 내용은 말 그대로 심상치 않았다.

마수와 괴수가 용에게 가까이 다가가다 피를 토하며 죽는 장면에 자신의 모습이 겹친다.

환인은 잠시 말없이 용의 자태를 눈에 담았다.

용이 서 있는 곳은 그 미궁이 있던 자리. 지금은 지반이 내려앉아 버려 바닷속 거대한 싱크홀처럼 되어버린 곳이다.

그리고 용을 중심으로 물결이 마치 진동하는 것처럼 수천, 수만의 파문이 일고 있다.

어느새 머리 위로 다가온 먹구름이 천천히 보슬비를 뿌리고 있는데 그 비도 용을 피해 떨어진다.

위상류와 역쇄류??의 현상인가.

용의 심상에서 스치듯이 읽은 개념을 생각하던 환인이 물었다.

“시험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해라.》

도시를 수몰시킨 흙탕물이 용에 의해 정화되듯 빠르게 침전하며 맑고 투명하게 변해간다.

그런 물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서 있는 용을 잠시 바라보다가 하급 정령 구슬로 영혼 화살을 생성, 용을 향해 쏘았다.

피싯—

용의 비늘에조차 닿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지는 영혼 화살.

위상류는 영혼 화살에도 효과가 있었나.

《호오. 이몸의 상류를 어느 정도 파하다니. 한가락 하는 재주가 있었군.》

“…….”

영혼 화살이 끄트머리만 살짝, 위상류를 건드리고 사라진 것을 평가하는 용의 태도에 환인은 문양 에너지 10%를 밀어 넣어 문양 강화 영혼 화살 4중첩을 만들었다.

《너, 잠깐…….》

용의 제지를 무시하고 쏴버리는 환인.

천칭의 끝에서 쏘아져 나간 황금 광채의 광선이 황급히 몸을 꾸물렁거린 용의 몸 근처를 스치고 지나간다.

환인이 왜 피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내자 용도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르릉거렸다.

《돕는다는 핑계로 이몸을 토벌할 속셈이냐.》

“당신 근처에 다가가면 일반적인 생물은 죽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 테고,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으니 이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대가가 목숨이라면 시험 삼아서라도 하기 싫습니다.”

다시 그르릉거리는 용.

환인도 용의 존재감에 압도당하면서까지 이렇게 돕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칼날 징표가 박혀있는 한 용이 언제 짜증과 분노를 쏟아낼지 모른다. 화풀이로 알류겔 호수와 붙어있는 도시를 차례대로 쓸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라드세아의 주도 라수비탄도 알류겔 호수 남부에 붙어있다.

이런 세계의 국가 수도에 용과 대화할만한 인물이 없다는 가정만큼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

대화가 성립된다면 이 사건의 전말이 알려질 테고 용이 도와달라 했는데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용이 화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호수의 북부 중급 도시 하나가 소멸했다. 주도에서 진상 조사를 위해 사람들을 파견할 텐데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말이 알려질 경우…….

쿠우웅! 쿠우우웅!!

용이 심기 상한 고양이처럼 크고 거대한 꼬리를 땅에 내려칠 때마다 굉음과 진동이 지진처럼 일어나며 성벽이 넘어질 듯이 흔들린다.

자신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나 하고 있냐며 항의하는 듯한 행위에 환인은 생각을 끊고 다시 천칭을 끝을 잡고 용을 가리켰다.

방금 문양 강화 영혼 화살을 피했다는 것은 저 용의 역장을 뚫고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

이번에는 중급 정령 구슬 네 개를 꺼내 영혼 화살을 4중첩 한 뒤 문양 에너지를 똑같이 10% 밀어 넣는다.

“이것도 몇 번 못 쓰는 겁니다. 또 피하면 도움이 필요 없는 거라 판단하고 떠나겠습니다.”

《이몸의 아름다운 비늘에 흠집이 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

가뜩이나 피를 흘려 머리도 어지럽고 피로한 상태인데. 환인은 드물게 짜증을 표정으로 드러내면서 말했다.

“알았습니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 기다리십시오.”

환인은 비상의 머리를 툭툭 다독였고, 그 신호를 알아들은 비상은 날개를 펼쳐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어으… 나 막 손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려.=

성술로 환인의 허벅지에 난 상처를 흉터가 남지 않게 치료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던 안느가 약간 가쁜 호흡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감상은 비슷했다.

피신한 이곳 넓은 바위는 알소프와 비교하면 지대가 낮았고 높은 성벽으로 가로막힌 알소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존재감, 시시각각 존재감이 강해졌다가 약해지고 무언가 쿵 쿵 대지가 울리고 흔들리는 것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는데.

설마 호수의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니.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감에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였다. 만약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사람들은 그 존재감에 기절해 볼품없게 나뒹구는 자신을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역시 새벽의 빛이십니다. 저 호수의 왕이 염사로 직접 말을 걸어오다니……!=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이는 실눈의 보랏빛 머리카락 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마치 견습 영혼사가 상급 영혼사를 본 것처럼 흠모와 존경이 가득한 모습. 환인은 용의 도움 요청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지식을 모으기 전에 아까부터 들던 의문을 물었다.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께서는 저를 계속 새벽의 빛이라고 부르시는군요. 그 새벽의 빛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새벽의 빛께서 하신 질문에 답변드리겠습니다. 새벽의 빛이란 영성을 뛰어넘어 저 하늘의 신성수와 이어지신 분을 지칭하는 고귀한 칭호입니다.=

“…….”

아지에라가 말하는 영혼수란 용이 말한 천원이라는 곳에 선 하얀 나무, 우주수를 가리키는 단어인듯한데.

환인은 두통이 다시 치밀어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허벅지의 치료가 끝났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자신의 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영혼 심문관들은 왜 자신을 새벽의 빛이라는 이상한 칭호로 부르고 있고 용은 어째서 자신을 천원의 흔적이 묻은 인간이라며 다소 우호적으로 대하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지는 생각은 일단 미뤄두고, 환인은 자신을 향해 경외심을 품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단 저 성벽 너머에서 용이 기다리고 있으니, 여러분들의 지식을 모아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칼날 징표를 용의 비늘 틈에서 뽑을 수 있겠습니까.”

=해제할 수 없는 위상류와 역쇄류가 발동하고 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먹구름에서 뿌려지는 부슬비를 맞으며 황금색 머리카락이 밀짚색으로 변해버린 르니가 여우귀를 뒤로 축 늘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위상류와 역쇄류는 용이 해제하고자 한다고 해서 해제할 수 없는 권능의 일부다. 그 말은 용에게 접촉할 수단은 극히 제한된다는 것.

=문제는 위상류와 역쇄류 뿐만이 아닙니다. 호수의 왕 정도 되는 존재라면 위광까지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을 겁니다. 비슷하거나 한두 단계 정도 차이 나는 격이 아닌 이상, 함부로 접근하면 피와 내장을 토해내며 죽게 되겠지요.=

=맞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며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물리력과 위상력을 거부하는 두 능력 때문에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같은 땅신 교단의 성직자인 알락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좌중이 적막해졌다.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침묵 속에 부슬비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만 작게 들릴 뿐이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람들은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기 시작한다.

=위광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밧줄을 던져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나름 300m 거리에 있는 사과를 밧줄로 낚아챌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그것도 물리력의 작용이라고 해서 역쇄류가 반발하지 않을까요.=

=위상류가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약한 염동력을 써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산들바람만도 못한 힘일 텐데…… 비늘 틈에 끼어있다는 징표를 꺼내는 게 가능할까요?=

=그러면 프라우드 종족에게 의뢰해 호수의 용이 다룰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스스로 뽑도록 하는 건…….=

=주도와 영도의 주술사, 비술사들을 모아 용에게 약화 비술을 거는 것은 어떨까요? 신체가 약해지면 방호도 떨어지기 마련이니…….=

중간중간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파고들어 보면 문제가 있는 방안이었다.

고고한 용이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저주를 받아들일지도 의문이고, 저 굵고 투박한 손으로 몸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게 가능할지 어떨지.

부슬비에 푹 젖어 궁상맞게 변한 삽살개 머리의 남자, 흘로드가 눈을 가리는 털을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각국의 주도에 계시는 사도님들께 부탁드려보면 어떨까요. 그분들이라면 호수의 왕을 감싼 위광에도 괜찮으실 것이고 위상류와 역쇄류도 흘려넘길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게 가장 온전하고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환인은 용을 찾아가 제안을 해보았지만.

《거절한다.》

용은 단칼에 거부했다.

“어째서입니까.”

《그놈들은 인과율 상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있다. 너의 말에 따르려면 이몸이 그놈들의 영역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놈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몇 배나 강해지지만 놈들의 영역에 들어간 나 같은 존재들은 몇 배나 약해진다.》

게다가 사도라는 것들은 자신들처럼 자연에서 깨달음과 덕을 얻어 성수??로써 신수??가 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자신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성미가 괴팍한 놈은 죽이려 들기까지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실력 있는 주술사와 비술사를 모아 당신을 약화시킨 뒤에 징표를 뽑겠습니다.”

《이몸에게 저주를 걸겠다고!!》

우르르릉— 꽈과광!!

용의 역정에 먹구름이 포악해지더니 천둥 벼락이 떨어진다. 이쯤 되자 환인도 짜증을 숨기지 않고 천칭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 징표가 박힌 비늘을 부수겠습니다. 그러면 징표도 부서지겠지요.”

《이놈! 그 지팡이를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나!》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대체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러니 네 녀석이 와서 뽑으라 하지 않았나!》

“당신의 위광에 죽고 싶지 않습니다.”

돌려 표현하는 것 없이 솔직한 감정 그대로 부딪치자 용도 크으음, 꼬리로 바닥을 쓰는 것처럼 두 차례 크게 흔든다.

《천원은 하루살이 같은 벌레 같은 것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너도 위상류를 가지고 있으며 미약하지만 역쇄류 또한 가지고 있지. 무턱대고 생명을 걸라 하지 않겠다. 가까이 다가와 시험이라도 해봐라.》

너라면 나의 위광에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위상류와 역쇄류 또한 일부 상쇄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용의 이야기에 환인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약속하십시오. 그것마저 안된다면 비늘 한 장 정도는 버리겠다고.”

《……약조하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에 환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용이 비겁하고 포악하거나 의구심과 의심이 가는 존재였다면 거래고 나발이고 파투 내고 여자친구들만 데리고 도망쳤을 텐데.

우르르르릉—

먹구름으로 인해 어둑어둑한데다 비까지 내리는 폐허가 된 도시 속, 고고하게 머리를 든 백청색의 용은 전설 속의 청룡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자태다.

무엇보다 능력.

자신이나 자신의 일행 정도는 단숨에 짓뭉개버릴 수 있는 용임에도 예의와 배려를 지켜주고 있다.

“비상, 내려가자.”

환인은 수몰된 폐허 도시로 내려와 물이 무릎까지 차 있는 폐허 속의 길을 통해 용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뀨으!

“위험할지 모르니 따라오지 마라.”

참방거리며 자신을 쫓아오는 비상을 내쫓는 환인이었지만, 비상은 뀻! 작게 울며 못 들은 척 환인의 뒤를 쫓는다.

“……알아서 해라.”

피로했던 환인은 말씨름하기도 귀찮아 고고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백청룡을 향해 움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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