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화 〉 440 괴멸하는 알소프
* * *
여자친구들과 기사들이 잘 쫓아오는 걸 보며 환인은 정북 방향, 성벽까지 최단거리로 일행을 안내했다.
구구구구, 쿠궁. 콰과광—
뒤쫓아오다가 앞서나가는 해일이 건물을 삼키고 사람도 삼키고 괴물도 삼키고 불도 삼킨다.
도시 중심부에 지름 300m의 싱크홀이 있는데도 이 침식 속도. 명백하게 이상하다.
=큭, 물이 벌써……!=
=발밑을 조심해라! 지형 훈련하던 때를 떠올려!!=
=집중하는 거다! 앞서가는 성자님을 따라라!!=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서일까, 페이스 배분을 못 해 벌써부터 지쳐 헐떡이는 기사가 나온다.
환인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원기 회복 마도구, 구원을 꺼내 원기의 파동을 펼쳤다.
파아아앗—
=어? 체, 체력이 회복됐어?=
=케겔 이 자식!! 정신 못 차려?!=
=큭, 넵!!=
기사들의 외침과 자신을 앞뒤로 껴안고 있는 여자들의 긴장한 숨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환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뒤통수가 따갑군.’
먼곳에서 강대한 존재가 자신을 노려보는 이 느낌. 눈이 마주쳐봤자 좋을 게 없다.
=아아! 성자님, 앞에 성벽이……!=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오는 알소프 외곽 성벽에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아지에라가 가냘프게 속삭인다.
성벽은 그 높이가 20m를 넘는 수준.
환인은 문양 에너지를 하급 영혼 구슬에 주입, 강화 영혼 폭발 구슬을 던져 성벽 일부를 날려버렸다.
콰과과광—!!
성벽에 갇혀 와류와 폭류를 일으키던 해일이 그쪽으로 쏟아져 나간다.
알소프에 들어오면서 본 성벽 너머는 천연 해자처럼 성벽을 따라 내리막길이 호수까지 이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길이 되어줄 장소도 있으니 이실리테와 안느라면 일행을 충분히 안전한 쪽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비상.”
큐우웃!
재차 훌쩍 날아오르는 비상. 환인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 커다란 바위가 언덕처럼 세워진 곳으로 날아가 두 여자를 그 위에 내려주었다.
후들거리며 주저앉아 헐떡이는 아지에라와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간신히 서 있는 르니.
환인은 툭툭, 가슴 쪽을 쳐서 안주머니 속에서 팔자 좋게 자고 있던 환연을 불러낸다.
「으웅…… 뭐야…?」
“이 두 사람을 지켜라.”
「……응? 얘들이 누군데?」
“조금 있다가 그녀들이 오면 물어봐라. 두 분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네, 네에.=
=예, 예!=
환인은 성벽을 빠져나온 여자친구들과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방향을 잡는 걸 보고 다시 훌쩍 날아올랐다.
단숨에 고도를 높여 연회장이 있던 곳으로 날아가고 있으니 해일이 부자연스럽게 몇 번이나 몰아쳐 도시를 덮치는 게 보인다.
‘역시.’
이미 선착장 주변 해안가와 도시 남부에는 멀쩡한 집이 한 채도 없을 지경. 도시 중부도 물에 뒤덮여있었고 북부 성벽 근처도 거의 물에 잠겨있다.
그사이 거대한 싱크홀은 수몰되었는지 보이지도 않고, 어떻게 지붕 위로 올라가서 해일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똑같이 살아남은 이형종에게 살해당하는 중.
날개가 있어 비행할 수 있는 조인족, 수생 동물의 피가 이어져 수영 실력과 폐활량이 어마어마한 이들만 살아남아 도시 밖으로 피난하고 있다.
촤아아악—
=성자님! 아지에라 님은 무사하십니까?!=
=성자님, 르니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무너진 궐 앞으로 돌아오자 삽살개 머리의 흘로드 영혼 심문관과 소머리의 알락스 고위 성직자가 간절한 바람이 담긴 모습으로 묻는다.
“두 분 다 성벽 바깥 안전한 곳에 계십니다. 기사들도 성을 탈출했으니 여러분들 차례입니다.”
쀼으으…….
환인은 저들도 등에 태우려고 하면 가만 안 있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비상과 시선을 마주했다.
“……안 되겠나.”
쀼엑!
싫어!
“태우는 것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
뀨으…….
그정도라면…….
완강한 거부에서 ‘내키지 않지만 네 부탁이니까.’ 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치켜드는 비상.
환인은 그런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여덟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몸이 가벼우신 분들부터 이리로. 네 분만 오십시오.”
사정을 설명하자 다들 구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환인의 강령을 받은 뒤 강해진 힘으로 비상의 두 다리를 꼭 잡는다.
한쪽 다리에 두 명씩 네 명이다.
“꽉 잡으십시오.”
=네, 네!=
=옛!!=
펄럭—!
비상이 날아오르니 아래쪽에서 작게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네 명을 빠르게 성 바깥, 그사이 아지에라와 르니의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 내려준 뒤 다시 성으로 되돌아갔다.
알소프에서도 지대가 높은 알소프 성, 그쪽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모여들고 있는 게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밀어닥치는 물에 무언가 미지의 힘이 담겨있는지 시시각각 땅이 깎여 나가는 것도.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아이만이라도 제발……!=
=선생님! 선생님!!=
=나으리……!!=
환인은 자신을 발견하곤 손을 뻗으며 제발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수백 명의 사람도 보았지만…….
“…….”
고개를 돌리고 마저 남은 네 명만 성 밖으로 탈출시켰다.
쁏!
무거워!
덩치가 커서 두 다리를 잡고 있던 알락스를 비상이 홱 뿌리치다시피 놓아버리자 땅신 교단의 대사제는 어이쿠 하고 3m 높이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찍는다.
하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상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시하는 알락스.
그렇게 스물세 명을 모두 탈출시킨 환인은 우선 자신의 여자들과 쿠에들이 무사한지 확인한 다음 저쪽 일행 중 신분이 가장 높아 보이는 두 여자에게 물었다.
“아지에라 님, 르니 님. 잊었거나 빠트린 분 있습니까.”
=저희는 모두 무사합니다, 새벽의 빛이시여.=
=구조에 감사드립니다, 성자님.=
르니 대주교와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의 깊은 감사 인사에 환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르니의 표정은 밝지 않고 수심에 잠겨있다.
아지에라 영혼 심문관 일행은 영도에서 찾아왔기에 저들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르니 대주교는 도시의 땅신 교단 알소프 교구에서 왔을 텐데 알소프는…….
그녀들도 날아오며 지상이 어떤 꼴인지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나서서 그 점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즈으으……
아주 잠깐의 공기 진동, 이어진 굉음과 함께 하얗게 물든 거대한 물줄기가 성벽 위쪽 일부를 박살 내며 날아와……
꽈과과과광——!!
일행이 모여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자락에 꽂혀 물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비처럼 어지럽게 쏟아지는 젖은 흙과 바위 파편들.
환인의 시선이 성벽 너머로 향했을 때 얼어붙었던 사람들이 경직에서 풀려났다.
=무, 물의 대격류……!?=
=아닙니다! 저건 해룡의 초고출력 수분류입니다!=
=저만한 굵기의 수분류를 쏘아낼 정도라면 길이 500m의 중룡급일 것이오! 당장 피난해야 하오!!=
중룡中?. 폭군룡의 미궁에서 싸웠던 아룡 따위가 아니라 진룡으로, 성장한 용은 등급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성수, 혹은 신수들이다.
《Ŀ Ŀ Ŀ Ŀ Ŀ Ŀ Ŀ Ŀ—!!!》
이어서 대기를 뒤흔드는 동시에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의 파동에 그의 여자들과 다른 이들이 귀를 막은 채 주저앉으며 고통에 괴로워한다.
일부는 피눈물을 흘리고 일부는 귀에서도 피가 흐른다. 쿠에들도 고개를 격하게 흔들거나 날개 아래로 머리를 숨기며 괴로워하니 비상이 날개를 활짝 펼쳐 뀨우우우우우—! 맑고 청명한 소리로 울음을 토해냈다.
부우우웅—
진동하는 투명한 공기의 막이 비상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일행 전원을 뒤덮으니 그제야 소리가 잦아들며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헐떡인다.
환인은 미간에 힘을 준 얼굴로 성벽 너머를 노려보다가 공기의 막에서 벗어났다.
《Ŀ Ŀ Ŀ Ŀ Ŀ Ŀ Ŀ—!!》
귀청을 찌르는 수준에서 벗어나 뇌를 후벼파는 듯한 감각. 린덴 촌락에서 경험했던 그때의 소리와 흡사하다.
환인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가 그 소리가 멈췄을 때 비상의 등에 올라탔다.
=자, 잠깐! 도령 어디 가려고?!=
=주인님!=
“잠시 다녀오지. 방금 그 소리가 또 터져 나올지 모르니 공기의 막을 발생시켜서 막고 있어라.”
=왜……?!=
안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비상에게 박차를 가해 하늘로 날아오른다.
눈 깜짝할 사이 500m 상공까지 올라온 환인의 눈에 이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 남부, 해안에 몸체를 우뚝 세운 백청색의 거대한 오리엔탈 드래곤과…….
‘…성을 날려버린 건가.’
좀전의 수분류, 아쿠아 브레스 같은 공격에 박살 난 듯한 구 알소프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환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일단 길이만 700m가 넘을듯한 거대한 백청색의 용을 찍는다.
착착착착착— 연속 셔터 기능으로 분노한 듯 눈에서 붉은 기운을 흘리며 쿵, 쿠우웅, 쿠우우우웅, 해일에 모두 휩쓸려 나간 알소프 남부로 올라오는 용의 모습이 스마트폰에 담기기 시작한다.
찰칵, 영상 촬영 모드로 바꾸고 다시 용을 찍기 시작한 순간 백청룡이 뱀처럼 길고 거대한 몸체를 한 바퀴 휙 돌리니.
《ÞĿĿĿ Ŀ Ŀ Ŀ Ŀ—!!!!》
“……!”
쿠구구구구구…… 미궁의 폭발로 싱크홀이 생겼던 곳부터 재차 땅이 무너져가며 알소프가 지저로 사라져간다.
이어 꼬리를 거칠게 휘두를 때마다 하나하나가 수백 킬로그램은 될법한 물폭탄 수백, 수천 발이 쏟아지며 그나마 남아있던 도시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나간다.
명백하게 화풀이하는 모습. 그 화풀이하는 모습마저도 창대무비하다.
저 백청룡에 산거북을 비교하는 것은 독수리와 병아리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
환인은 잠깐 생각했다.
처음 해일을 몰고 와 도시를 쓸어버린 것, 이어서 알소프 성을 브레스로 날려버린 것, 도시 자체를 지워버릴 듯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이 일련의 상황을 일으킨 범인은 알소프의 영주라고 환인은 추리해냈다.
‘전송 두루마리는 원하는 위치에 제약 없이 갈 수 있는 마법의 주문서가 아니다.’
전송으로 도착하는 곳은 미리 지정된 매개체가 박혀있는 곳이라야 한다고 유르파가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습격자들이 가져왔던 전송 두루마리의 좌표는 저 알류겔 호수의 심해라고 나와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전송 표식인 매개체를 저 알류겔 호수의 심해에 던져버린 거다.
환인은 문양 강화 영혼 시야를 열어 백청룡을 눈에 담았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밀도, 순백을 넘어 오히려 순흑으로 보일 정도의 마력이 백청룡을 휘감은 게 보인다.
사방으로 마력이 뿌려지며 일대를 뒤덮는 광경은 마치 백청룡이 마력 생명체로 보일 지경.
저 정도로 마력이 풍부하다면 그만큼 마력에 민감할 테고, 매개체가 발산하는 신호가 거슬렸다면……?
그때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포착한 환인은 눈매를 가늘게 뜨고 재차 살폈다.
백청룡의 비늘 한 곳에 순백의 마력에 낀 때 같은 조잡한 마력이 박혀있는 게 보인다.
‘저게 그 매개체인가? 그렇다면 저것 때문에 저토록 화가 난 거겠군.’
저게 아마도 전송의 매개체일 것이다.
저게 그토록 거슬렸다면 스스로 뽑으면 되는 게 아닌가. 몸을 땅에 한차례 비벼도 박살나서 바스러질 텐데.
그리 생각했던 환인은 백청룡의 비늘에 무언가 막이 맺혀있으며 그 막이 땅을 파헤치고 물을 밀어내는 걸 보고 사정을 이해했다.
호신강기 같은 것이 전신을 뒤덮고 있으니 저 비늘 사이에 낀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일 터.
몸을 비틀어 뽑아내자니 비늘 아래 깊숙이 끼어있고,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명령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저 호신강기를 부수는 것은 어지간한 생물로는 불가능할 테니까.
매개체 따위가 호신강기를 뚫고 어떻게 박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이나 발뒤꿈치에도 재수 없으면 아주 작고 가느다란 가시가 박히기 마련이다.
환인은 턱을 매만지며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은 것처럼 날뛰는 백청룡을 응시했다.
‘혹시 미궁이 폭발한 것도 저 백청룡이 내뿜는 마력을 미궁이 과다하게 흡수하는 바람에……. 말이 안 되겠지.’
자신도 모르게 정답을 맞힌 환인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추리라고 생각하며 비상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사태가 어찌 됐는지 대충은 파악했다. 남은 것은 알류겔 호수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자신이 해결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비상이 몸을 돌린 순간.
《거기 인간. 멈춰라.》
듣기만 해도 무릎을 꿇어야 할 것처럼, 존재의 격 자체가 다른 느낌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