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42화 (442/813)

〈 442화 〉 436 호반 도시 알소프

* * *

녹색 성자 일행에 대해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렇다.

세 마리의 밀짚색 쿠에가 끄는 검고 커다란 마차.

안개처럼 퍼져나오는 희귀한 아우라 형태의 성투사.

코트와 비슷한 형태의 빛입자 아우라의 검희.

흡정족인 6급 비술사.

그리고 녹색 성자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 선명한 녹색의 아름다운 쿠에.

막상 성자 본인은 검은 머리카락이라는 점 외에 크게 특징적인 외관은 없다. 오히려 아우라 미발현 특성인 탓에 성자 홀로 있다면 알아보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

장포를 휘날리며 달려온 무사 복장의 사내, 머리가 바다 수리인 남자는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남자와 그런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검희, 성투사 아우라의 두 여자를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녹색 성자라는 사실을 확신, 무사는 과장되게 손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자룩스와 린덴을 구원하신 명망 높은 녹색 성자님께, 알소프의 2급 호족 가문 리치사의 라카도가 인사드립니다.=

“…….”

=이렇게 기쁜 날은 또 없을 듯합니다. 녹색 성자님처럼 위명이 자자하신 분께서 일부러 알소프를 찾아와주셨으니까요!=

환인은 무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성문 안쪽으로 보이는 흥겨운 축제 거리로 시선을 주었다.

땅신 교단과 프라버 측에서 흘린 소문이 어떻게 각색되었기에 이러고 있는 걸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자신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영도나 땅신 교단의 눈을 가리기 위해 이런 판을 벌여놓은 것. 자신들이 성자를 공격한 것은 오해와 착각이라고 덮기 위해 성대한 축제로 맞이하겠다는 뜻이다.

알소프 성주는 아마도…….

‘땅신 교단 알소프 지부의 높으신 분과 영도의 일부 인사까지 모셔왔겠지.’

그 의도에는 ‘너희만 인맥이 있는 줄 아느냐.’라는 내색의 발현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너희를 환영하는데, 네가 앞으로도 신세 져야 할 사람들도 있는 장소에서 깽판을 칠 생각은 아니겠지?’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고.

자신을 환대하는 무사 복장의 인간들, 다른 도시의 기사 같은 이들이 자신을 향해 보여주는 태도에 따르면 거의 확실할 거다.

진상을 아는 것은 도시의 핵심 지배 계층 몇 명뿐.

나머지는 그저 ‘그 유명한 성자가 방문할 예정이고 영도에서도 높은 분들이 오시니 축제를 허락한다. 즐기면서 그분들을 반기도록.’이라는 명령에 따를 뿐인 게 아닐까.

환인은 담담한 얼굴로 비상의 등에서 내린 뒤 바다 수리 무사에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성자로 불리고 있는 환인입니다. 그보다 이런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듯하여 미안함이 앞서는군요.”

=예,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차가운 대답에 무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당황하고 있을 뿐, 적의나 적대감은 1g도 없는 무사의 태도에 환인의 눈빛이 칙칙해진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호반 도시를 벗어나면 100명 중 99명에게 떠받들어지는 호족이다.

한평생을 일반 백성들 머리 위에서 군림해왔을 텐데 이렇게 머리를 낮추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사회적 명예가 높아졌기 때문이며, 가진 능력 또한 명성만큼이나 높다는 사실이 알려져서이겠지.

그런 사람도 실상은 모르고 있다.

‘오히려 잘됐나.’

=저어, 성자님……?=

그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보다 집착하는 명분, 정당성은 이쪽에 있으며 증거도 절대 발뺌할 수 없는 것으로 두 가지나 확보해놓았다.

여기서 알소프를 엎어버리고 그 사실이 널리 퍼진다면 적어도 앞으로 자신을 우습게 볼 호족은 사라질 것이다.

환인의 결심이 견고해졌다.

“제가 알소프를 방문한 이유는 알소프의 영주이신 카드람 이니티 알소프 5급 호족에게 한 가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습격자들을 보내 절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입니다.”

=예!?=

수리 머리 무사의 두 눈이 경악에 흡 떠지고 노란 부리는 이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떡 벌어진다.

뒤에 서 있던 비슷한 무복 차림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일정 거리를 두고 흠모와 경외의 시선을 보내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환인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부정이나 의문을 보였다.

말도 안 돼. 영주님이 성자님을 죽이…려 했다고? 왜? 뭐 때문에?

그리고 의문은 수긍으로 변했고 수긍은 확신이 되었다.

성자님 같은 분이 거짓말을 하실 리 없어. 그 말은…… 정말로 영주님이 성자님을 살해하려 했다……?

헉.

경악과 분노를 넘어선 공포가 성문 앞을 빠르게 잠식해간다.

알소프의 영주가 영혼사님을, 그것도 성자님을 죽이려 했다! 도시에서 도망쳐야 해! 혼재가 일어날 거야!!

=야. 우리… 그냥 돌아가는 게 좋아 보이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큰일이 벌어질 거야.=

=……돌아가자. 식량은 요바에 도착할 때까지 쓸 정도는 있어. 바로 떠나는 거야.=

가장 먼저 알소프에서 커다란 축제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는 소문에 찾아온 여행자, 다른 마을의 방문자들이 슬금슬금, 성문에서 멀어져간다.

다음으로 알소프의 호수 미궁을 목적으로 찾아온 모험가와 용병들이 식겁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알소프에서 머무르는 건 재고할 필요도 없을 거 같군. 우리도 돌아간다.=

=프라버에도 지저 호수 미궁이 있다니까 그쪽으로 가보는 건 어때?=

=음…… 배를 타는 것도 위험해 보이고, 육로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저 사람이 성자인 건 확실해?=

=등신아. 성자 사칭은 둘째치고 녹색 쿠에를 타고 희귀 아우라 두 명을 기사로 삼은 사람이 세상에 흔하겠냐?=

하나둘 멀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도 즉시 줄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멀리서 마악 도착한 사람들도 갑자기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무슨 일인가 했다가, 경위를 듣고는 경악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반대로 본거지가 알소프에 있거나 보존 중인 식량 사정이 나쁜 이들은 죽을상을 쓰고 반대편 검문소로 몰려가 얼른 들여보내달라고 소란을 일으켰다.

주거지 없이 지내던 이들은 일단 들어가서 재산을 챙겨 빠져나올 생각에, 주거지가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재산을 처분하고 도망갈 생각에.

멍하니 있던 바다 수리 머리 무사는 그 소란에 핫, 정신을 차리더니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디 진정하고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성자님, 영주 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란을 뚫고 널리 퍼지는 무사의 외침에 성문 앞의 사람들이 순간 행동을 멈추고 소리친 수리 머리의 무사를 돌아본다.

=……호족을 믿으라고? 미친, 믿을 게 따로 있지.=

=씨발, 진짠가보다. 좆됐네.=

=빨리 들여보내달라고!!=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검문을 무시한 채 억지로 들어가려 하거나 아예 다 포기하고 성을 떠나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난리통으로 번지는 성문 앞. 그 소요 사태에 위병소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태를 진압해나간다.

몽둥이질에 얻어맞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악다구니가 얽히며 소란이 가속화되니 혼돈의 도가니가 따로 없다.

환인은 말없이 손을 모아 평범한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파아아아—

회백색의 짙고 포근한 빛의 파문이 아우성치는 사람들과 흥분한 병사들을 휘감고 지나가자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장내가 천천히 진정되어간다.

환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흥분은 이성을 마비시키며 이성이 마비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

=…….=

“그리고 백성을 지켜야 할 병사들이 오히려 백성을 공격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겁니다.”

=읏…….=

=우…….=

소요를 일으키던 사람들은 환인의 시선에 머뭇거리며 다시 줄을 섰고, 사람들을 몽둥이로 패던 병사들은 그의 지적에 얼굴을 붉히면서 몽둥이를 감추거나 허리에 다시 걸며 물러난다.

간단한 행동으로 장내를 진정시킨 환인은 ‘좆됐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바다 수리 머리의 무사, 라카도에게 말했다.

“카드람 영주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성자님께서 필시 오해……!=

“그건 리치카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라카도=리치카는 얼음처럼 차가운 대꾸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목을 제대로 간수할 수 없게 될듯한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조금씩 어깨를 떠는 라카도의 귀에 환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저는 한낮 영혼사일 뿐인지라 어떤 절차를 거쳐 알소프의 영주님께 알현 신청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리치카 씨가 어떻게 하여야 영주님을 뵐 수 있을지 알려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알소프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성문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 그리고 성문에서의 소란에 성 안쪽에서 모여들기 시작하는 관심까지.

하지만 라카도는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성자의 시선에 가슴을 움켜쥔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 일행에게는 성내 접객당의 최고 객실이 내어졌다.

알소프 성 접객당은 일곱 채의 별관과 두 채의 건물이 이어진 본관으로 구성되어 기둥 하나, 기와 하나까지 세심한 주의가 들어가 있는 VVIP급 귀빈을 위한 장소.

그중 최고 객실은 현대의 동양풍 호텔 버금가는 세련되고 화려한 장소였다.

=우와…….=

=와아…….=

화려한 것은 어지간히 봐왔을 안느나 유르파도 연신 감탄사를 흘리며 구경할 정도.

환인은 일본 다다미 문화와 중국의 입식 문화를 섞은 듯한 내부 인테리어를 둘러보았다.

카턴 마을에서 기와집 문화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았었지만, 여기는 그보다 더 본격적이다.

아예 도시 자체가 청나라3 조선4 에도3으로 적당히 섞여 있는 느낌.

접객당까지 오면서 본 알소프 성도 이때까지 봐왔던 서양식 성이 아니라 궁궐로 낮은 층 여러 채의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에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어있는 경복궁처럼, 알소프 성도 법궁과 이궁, 행궁, 별궁 등으로 나뉜 궁궐이었고 일제의 금각사 같은 사찰 건물 비슷한 것에 중국의 절탑 같은 건물도 눈에 띄었던 것.

=주도 라수비탄도 이런 풍경이라던데, 그곳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

=주도는 모든 도시와 비교해도 화려하고 찬란하다고 들었어. 살면서 주도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죽는 건 인생의 손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

=저도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이때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여기를 보니까 한 번쯤 주도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야기도 들어본 적 있니? 이런 동방풍 건축기술은 차원 방랑자들에게서 전해졌다는 거.=

=헐. 정말이야?=

=진짜요?=

=건축 양식이 보통 건물이랑은 완전히 다르잖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통하고 있어.=

=도령, 율이 언니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사실일 거다.”

이 건물들은 세 나라의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양식이다.

만약 세 나라의 건축가가 있었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정도로 양식이 믹스된 건물이었던 것.

진짜 차원 방랑자인 환인의 확답에 오오,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는 여자들. 새삼 새롭다는 듯이 동양풍 인테리어를 감탄하며 구경하는 그녀들을 환인은 손뼉을 쳐서 불러 모았다.

“이제 그만 준비하지. 유르파는 마차를 축소해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손 써주십시오. 이실리테와 안느는 짐을 정리해서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도록 정리하고 환연은 가급적 유르파와 붙어있어라. 백려강, 너는 주변을 감시해 주었으면 한다. 수상한 자가 감시하고 있다거나 하면 와서 알려다오.”

=네, 주인님.=

=응.=

「넷.」

“그리고 다들 눈치챘겠지만…….”

=앗, 자기 잠깐만.=

환인은 유르파가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려 하는 것을 눈치채고 작게 웃으며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 곳곳에 느껴지는 굳은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객실 내 대화를 엿듣는 수단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환인이다. 지금 하려는 말은 일부러 들으라는 의미로 꺼내는 이야기.

“알소프의 영주는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을 거다.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내가 사로잡히더라도 멈추지 마라.”

자신의 이야기에 불만과 약간의 불안을 드러내는 여자들의 반응에 환인은 그녀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영혼사가 죽으면 혼의 역류와 영식이 발생할 거라고 본다. 만약 알소프의 영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전투가 벌어질 경우 정말 위험해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라는 뜻이다.”

=으응.=

=네…….=

“다행히 너희는 무척이나 강해. 일 대 일이라면 지금 알소프 성에서 너희를 감당할 인물은 거의 없을 거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의 안전에만 집중해라.”

=싫어. 어차피 도령 없는 세상에서 오래 살 생각은 없어.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난 목숨을 걸어서라도 도령을 구해낼 거야.=

=그런 일이 없도록 저희가 주인님을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그래.”

아쉽다.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해주었다면 이 대화가 영주에게 흘러 들어갔을 경우 도주로, 퇴각로 막기 위해 병력을 분산해 포위망이 허술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쪽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쳤으니 알소프 영주가 개짓거리를 생각하고 있다면 전력을 한데 모을 테고, 그럼 순간의 압박은 강해질지언정 빠르게 알소프의 주력 태반을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후 1시간 동안 일행은 짐의 정리를 진행했다.

“너희들에게 강령을 걸어주지. 한 번 걸면 최대 8시간은 가니까, 만약 너희를 괴롭히는 놈들이 나타나면 때려눕히고 너희들끼리 도망쳐라. 비상, 네가 부하들을 이끄는 거다.”

큐삣!

쿠에~

환인은 쿠르티와 쿠핀, 쿠라에게 중급 정령을 강령해주었고 비상에게는 특별히 중급 바람 정령에 문양의 힘까지 넣어 강령시켜주었다.

바람 정령에 문양 에너지까지 들어가 몸 주변에 녹색 아우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애시당초 녹색 쿠에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적다. 수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마차는 유르파의 축소화 비술로 성냥갑 크기가 되었다. 무게 또한 그에 합당하게 비율 감소한 상태.

짐의 80%를 차지하는 식량은 전부 정리해서 객실 한곳에 쌓아두고 각자 가진 아공간 주머니에 건량으로 10일 치 정도만 따로 챙겼다.

덕분에 다들 몸도 가벼워진 상태.

=이건 공간 이동 두루마리야. 기존 이동 주문서를 내가 얻은 깨달음으로 강화한 건데 두 장뿐이니까 한 장은 자기가, 다른 한 장은 안느 아가씨가 받아.=

=어? 나보다 율이 언니가 쓰는 게 낫지 않아?=

=나는 빗자루 타고 날아서 도망갈 수 있고 이슬이 아가씨는 다중 검기를 밟으면서 하늘을 달릴 수 있어. 우리 중에 안느 아가씨가 제일 걱정이니 아가씨가 받으렴.=

=어, 으응.=

=쓰면 성벽 바깥으로 전이될 테니까 기억해둬야 한다?=

그렇게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 준비를 끝마쳤을 때, 환인 일행은 모시러 왔다는 시종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새끼 고양이 머리의 부드럽고 귀여운 인묘족 소년이 포권을 하며 허리를 꾸벅 숙인다.

=답신이 늦어 미안쩍다는 영주님의 전언입니다. 성자님을 맞이할 준비가 이제야 끝이 났으니 부디 찾아와주어 오해를 풀 수 있도록 한 자리를 맡아달라는 내용입니다.=

“알겠습니다.”

환인이 천칭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여자들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죄송합니다. 초대는 성자님 한 분뿐이시어서…….=

=뭐? 난 땅신 교단의 상급 성투사이자 성자 환인의 영혼 기사야. 영혼 기사가 영혼사님의 곁을 떠난다는 게 말이 돼?=

=그…….=

=저는 몸과 마음을 전부 주인님께 바쳤습니다. 주인님께서 가시는 곳은 저 또한 가야 하는 길. 막으신다면 베겠습니다.=

=힉….=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 안느와 이실리테의 기백에 새끼 고양이 머리의 시종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환인은 그런 여자 친구들을 몸으로 막으면서 시종 소년에게 말했다.

“제 기사들은 제가 독단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앞장서십시오.”

=하, 하지만…….=

망설이는 시종의 턱에 천칭을 가져다 댄 환인은 낮고 스산한 목소리로 겁을 주었다.

“후에 문제가 된다면 제게 협박받았다고 하십시오. 자, 앞장서십시오.”

아직 어려 담이 작았던 시종은 이 이상 거부할 정신력이 없었기에 덜덜 떨면서 환인을 높이 20m에 폭 100m의 거대한 궐로 안내했다.

수라간 같은 작은 건물이 붙은 대궐. 작은 건물에서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앞치마를 한 여염집 처자 같은 차림의 여자들은 쉴새 없이 대궐과 작은 건물을 오가며 음식과 빈 그릇을 나른다.

거대한 궐은 5m의 단 위에 지어져 있었다. 고저 차에 대궐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좋은지 여러 사람이 품위 있게 연회를 즐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후, 작게 웃은 환인은 겁먹은 얼굴로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시종을 옆으로 밀어내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는지 햇빛에 번쩍이는 계단들.

10개의 계단을 오른 환인이 본 것은 천 평이 넘는 대청과 매우 높은 천장의 화려한 적청색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적색의 화려한 기둥, 그리고 가운데를 비워두고 족히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잔칫상을 받아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3급 직업자 위병 네 명이 다가와 환인의 앞, 정확히는 그의 여자들 앞을 가로막았다.

=옆 건물에 호위 분들의 연회 자리가 마련되어있습니다. 세 분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긴말은 필요 없다.

환인은 하급 정령 중 저주를 걸었을 때 수면 상태가 되는 정령을 그녀들에게 부여했다.

=윽…….=

=아, 이게… 갑자…기…….=

풀썩, 풀썩풀썩.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뒤로 고꾸라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뒤통수를 찍는 위병들. 큰 충격을 받았을테지만 깊은 잠에 빠졌는지 깨지 않는다.

환인은 차가운 얼굴로 여자 친구들을 대동하고 대청에 들어섰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거리는 대청을 채우던 작은 소음이 끊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환인에게 모여든다.

=뭐야. 누구지?=

=어느 가문의 분이신지 모르지만, 참으로 격식 없는 차림이시군.=

=위병은 뭘 하고 있길래 저들이 함부로… 허, 참.=

=……아니 잠깐. 뒤에 여자 두 명의 아우라 좀 보시게!=

=검희에… 성투사?=

=성자, 성자님이다. 녹색 성자님이야!=

=허! 저분이 바로 그……?=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고 옥좌로 다가가고 있으니 옥좌에 앉아있는 하마 머리의 인간, 화려한 장포를 몸에 감은 인간이 족히 300kg은 되어 보이는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시오, 비자룩스와 린덴의 구원자이자 녹색 성자 환인. 본인이 알소프의 영주, 카드람이오.=

환인의 차가운 시선과 카드람 영주의 우묵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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