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440화 (440/813)

〈 440화 〉 434 아크렛 마을

* * *

괴물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마을 바깥과 안을 나누는 방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 때문에 촌락이나 마을은 보통 지대가 높은 곳, 혹은 절벽이나 골짜기, 숲속 등지에 짓는다.

지대가 낮은 곳에 촌이나 마을을 형성하면 마을보다 고지대에서 민가의 불빛을 발견한 괴물이나 짐승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

비슷한 의미에서 방책도 최소가 4m, 키가 큰 동종이 모여 사는 집종촌의 경우에는 7m까지도 높아진다.

아크렛 마을을 둘러싼 것은 나무와 바위와 돌멩이로 축조한 높이 5m의 견고한 성벽.

성벽의 총 길이는 8km 정도로 현실에서 작은 도시가 들어설 수 있을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환인은 백려강과 환연을 대동한 채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서 그런 성벽 안쪽의 마을 전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환연이 그의 가슴 포켓 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더니 흥흥, 숨을 쉬다가 작게 말한다.

「흐으음. 공기가 맑네. 여기 묘지는 잘 관리하고 있나 보다.」

“그런 게 느껴지나.”

「성불하지 못한 영혼이 많은 장소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공기도 답답해. 너랑 같이 다니다 보니 알게 됐어.」

현재 위치는 마을에서 하나뿐인 짐승신의 성당, 그 옆에 붙어있는 묘역이었다.

환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당 근처에는 납골당과 묘역이 제법 크게 조성되어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묘비만 100여 개이고 납골당은 족히 수백 개의 뼛가루 항아리를 보관할 수 있는 사이즈다.

여기에 영혼을 위무한다는 꽃말을 가진 꽃들이 일라일 꽃과 함께 묘역을 뒤덮고 있는 데다 음기를 누르는 나무가 묘역 곳곳을 수호하는 것처럼 장엄하게 자라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영혼이 이지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데다 근방의 영혼도 끌어모으기 마련.

영혼은 보통 미련이 남아 현세에 남게 되는 것을 볼 때 이지를 가진 영혼은 그만큼 성불시키기 어려워진다.

어중간한 지성이 만족의 역치를 올려버리는 거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계속 쌓이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이곳에는 영혼이 다섯뿐이다. 마을이 얼마나 영혼을 대비해 잘 관리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당과 묘역, 마을을 한차례 둘러본 환인은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만 돌아갈까.”

「네? 저분들을 성불시키지 않으시나요?」

유르파가 만들어준 푸른 후드 로브 드레스를 단정하게 입은 백려강이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에 환연도 어? 하고 묻는다.

「뭐야. 이때까지 들른 곳에서 성불행을 안 한 적 없잖아. 그런데 그냥 간다고?」

“이곳의 영혼들은 심성이 선하고 부드러워 보이니 굳이 당장 성불시킬 이유도 없고, 성당이 존재하는 만큼 성불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승령천제가 열리니 저들도 그때가 되면 승천하겠지.”

저들의 생전 기억에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응해본 결과, 저 영혼들은 다들 큰 미련이 있어 성불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단지 살기 좋고 평화로운 이 마을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저 그 때문에 영혼으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한 명이 조금 강한 미련을 품고 있지만, 그런 그도 곧 성불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저 정도면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성불할 상태.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저들을 성불시키기에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되어서다.

마을에 들어설 때 영혼사라고 알리지 않았다. 성자라는 건 갖은 마도구로 정체를 숨겼다.

이런 상황에 아우라가 없는 영혼사가 갑자기 나타난다?

다들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테고 그리되면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의의가 사라진다.

몰래몰래 성불행을 하는 것도 문제다. 현재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를 보면 수상한 인물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니까.

“영혼이 많이 쌓여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아크렛 마을에서 성불행은 넘기기로 한 거다.”

자신들이 듣기에도 합당한 이유에 환연과 백려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가 없는 건 정체를 숨기기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너무 확실한 증거가 되어서 곤란하구만.」

「저는 환인 님의 아우라 모습도 보고 싶어요. 굉장히 고귀하고 성스러울 거 같은데.」

백려강의 해맑은 이야기에 환연이 어이없어하다가 되묻는다.

「갑자기?」

「네?」

「아우라 이야기를 한 건 맞지만 요점은 정체를 숨기기에 유용한 점과 단점 이야기였잖아. 근데 갑자기 환인의 아우라가 보고 싶다고?」

「…아.」

백려강은 온몸으로 당황을 표현하다가 창피해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 백치미에 환연은 피식거리면서 환인에게 말했다.

「쟤 진짜 웃겨. 보면 대화 중에 지금처럼 간혹 엉뚱한 소리를 하고 그러더라니까?」

「으으~.」

말하지 말라며 반쯤 울상으로 끙끙거리는 백려강. 환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는 영혼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사람의 지능 지수를 IQ라고 하지. 이 IQ가 30 이상 차이 나면 대화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IQ를 어떻게 측정해내는지도 궁금하지만……. 이유가 뭐야?」

“문해력에서 오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주제를 주면 차례대로 B와 C를 지나 D로 이어지는 게 대화의 맥락이라고 하지. 이때 IQ가 높은 사람은 A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B와 C를 건너뛰고 D에 이르게 된다……는 게 그 주장이었다.”

「오. 그러니까 려강이는 아우라라는 주제에서 아우라 무발현의 장단점이라는 B와 C의 단계를 혼자 생각한 뒤 건너뛰고 ‘그러니까 환인의 아우라가 어떤지 보고 싶다.’는 D 단계의 결론을 내놨다는 거지?」

“려강은 녹술사다. 생전에 바람 술법을 다루는 직업자였던 만큼 멍청하다고 할 수 없겠지. 남들보다 생각이 빠르고 깊어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은 결론을 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짜야?」

「…….」

백려강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데다 자기 생각을 정확히 읽는 환인을 향해 놀라면서도 달콤한 시선을 보내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부모님도, 남매들도 이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저건 맨날 딴소리만 해’라며 멍청한 년이라던가 정신줄 놓고 다니는 년이라고 비난했었는데…….

‘아.’

그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백려강을 찾아왔다.

검희 이실리테, 성투사 안느, 6급 비술사 유르파.

세 명 전부 어딜 가든 하나의 문파나 집단을 이끌만한 실력과 성격의 여자들이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일 테고, 그러한 성격이라면 소유욕 또한 만만치 않은 게 통설.

하지만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에 반인반령이라는 희귀한 생명체인 환연까지… 환인만 바라보며 서로 다투지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으며 사이좋게 지낸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환인이 방금 보여준 모습 때문이라고 백려강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절륜한 정력. 뛰어난 능력. 멋진 외모. 여기에 높은 이해심까지.

‘하아…….’

백려강은 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떨리는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그 모습에 처음부터 반했었고 재회했을 때도 그의 사려 깊음에 사로잡혔지만, 방금 일로 그에게 완벽히 마음이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육체를 잃은 것이 정말 아쉬워졌다.

자신의 몸으로 그에게 안기는 기분, 그리고 자신의 몸을 써서 그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면. 버티고 있었다면 그가 찾아와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을까?

‘그것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그녀의 눈빛에 아쉬움과 간절함이 스며들며 그를 향한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이대로 승천할 수는 없어. 적어도 환인 님이 이 여정의 끝을 볼 때까지는…….

환인은 백려강의 다짐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영혼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뭘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놀람이 가득한데.

「저…… 혹시 영혼사님 되십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아! 역시 영혼사님이셨군요. 멀리서 커다란 빛덩어리가 다가오는 걸 보았을 때는 이게 무슨 괴현상인지 영문을 몰라 두려움에 떨었었습니다.」

다섯 명 중 가장 앞선 영혼, 믹스견의 외형을 닮은 인견족 남자 영혼의 이야기는 이랬다.

언덕 아래에서 태양처럼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은 빛이 다가오더니 묘역의 가장자리에서 더는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있었다고.

처음에는 성불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자신들에게 벌을 주기 위한 짐승신님의 의지인가 했지만, 빛은 위협적이지 않고 온화한 느낌이라 궁금증과 의문을 참지 못해 다가왔다는 이야기.

“커다란 빛이라니…….”

환인은 영혼의 이야기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커다란 빛이라니, 이때까지 수많은 영혼을 만나고 성불시켜왔지만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영혼은 처음이다.

“려강. 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지.”

「환인 님의 모습이 눈부시긴 하지만…… 저분들이 말씀하시는 빛하고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해요.」

“…….”

환인은 잠시 지난 일을 되짚어보았다.

혹시 린덴 폐촌에서 경험했던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하늘을 뒤덮은 눈동자와 우주를 밝히는 찬란하고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던 환인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다 해도 흐라반 마을의 영혼들은 평소 마주치던 영혼들과 반응이 같았다.

북쪽 연안에서 마주쳐서 죽인 들개 전사들의 영혼도 저들이 말하는 빛을 본 반응은 아니었고 그건 백려강도 마찬가지였다.

「아, 뭔 빛이 보인다는 거야. 당최 이해가 안 가네.」

환인은 다가온 다섯 영혼 중 어린 소녀가 하는 이야기에 그리로 시선을 주었다.

인견족 남자가 소녀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말한다.

「진짜 보인다니까?! 루카도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할배랑 루카 씨는 벌써 12년째 영혼으로 있잖아. 혼재로 변하려고 이상한 헛것을 보는 거 아냐?」

「이런 천벌 받을 놈이! 누가 혼재로 변한다는 거야!」

「꺄아! 폭력반대!」

아웅다웅하는 영혼들의 대화에 환인은 그들을 제지하고 다시 캐물었다.

다섯 명 중 자신을 빛으로 보는 사람은 누구누구이며 몇 년째 영혼으로 남아있는가 하는 질문.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서 환인은 정확한 이유를 깨달았다.

‘영혼으로 오래 있은 사람만 날 빛으로 보는 거군.’

영혼으로 오래 있다보면 영안??이 열리기라도 하는 걸까.

얼마나 오래 영혼으로 있어야 자신을 빛덩어리로 보게 되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린덴 촌락에서 경험했던 그 일이 계기가 된 것일 테지.

하지만 뭐 때문에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잠시 왼팔을 뒤덮은 빛에 시선을 주던 환인은 눈을 감고 의문을 접어두었다.

그 어떤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의문에 매달려봤자 얻는 것은 초조함과 배가되어가는 궁금증뿐.

지나친 궁금증과 초조함은 정신에 해가 될 뿐이다.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영혼들에게 성불하고 싶은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내심 짐작했던 대로 그들은 조심스럽게 아직 영혼으로 지내고 싶다는 답변을 받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오랫동안 성불하지 않고 버틴다면 영혼이 미련에 잠겨 혼재로 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에. 지난 승령천제 때 찾아오신 영혼사님도 그리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승천하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분이 있어서…….」

“그 보고 싶다는 분이 혹시 가족입니까.”

「아닙니다. 영도의 성녀님이십니다. 생전에 딱 한 번, 승령천제 때 그분을 뵀었는데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지요. 지금도 그때 일이 선명히 기억납니다.」

인견족 남자는 그 충격을 한평생 기억하며 평범하게 살다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영혼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녀님을 다시 보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단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

「생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영도를 향해 순례를 떠났을 테지만…… 저는 아둔하기 그지없어 죽고 나서야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혼 상태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자는 그 후로 성녀가 다시 방문하길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곧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영혼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혼재로 타락할 수 있다고요. 말씀대로입니다. 점점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필시 올해 승령천제가 마지막이 되겠지요.」

「할배. 올해 승령천제만 보고 승천할 거란 말이야?」

「그래. 내가 혹여 혼재가 되기라도 했다간 마을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다. 이번 승령천제 날, 그분이 오시든 오시지 않든 나는 성불할 생각이야.」

영혼의 입에서 사연이 흘러나왔지만, 환인의 관심 밖인 이야기였다.

여관으로 돌아온 환인은 훈기를 바치느라 엉망이 되었던 여자친구들이 말끔해진 모습으로 음식 재료를 다듬는 걸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연차가 오래된 영혼이 자신을 커다란 빛으로 보게 된 것은 그저 그뿐인 것으로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사고와 추리를 위한 단서가 너무 적다.

‘린덴 촌락에서 꾸었던 꿈과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고.’

돌아오자마자 혹시나싶어 정신을 차린 들개 전사단의 영혼 넷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백려강과 다를 바 없었다.

막막함에 환인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때까지 자신의 각성에 대한 것은 이 세계의 상식적인 부분에서 해명이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린덴 촌락을 기점으로 자신도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유르파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물리 피해를 흘려보내는 능력이 생겼다고 하는데 검증을 통해 알아볼 방법이 없다.

적당한 회초리로 팔이나 다리를 때려봤지만 통증이 그대로 전해졌고 단검을 들어 자해도 해봤지만 마찬가지로 피해 감소 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오늘 알게 된 사실까지.

자신에게 무언가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는데 그 변화가 어디서 유래되었고 그러한 변화의 영향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건 환인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역시 영도에 가서 확인해보는 수 뿐인가.’

환인은 왼팔을 뒤덮은 빛을 한동안 응시했다.

다음날.

어젯밤에 생각을 너무 깊게 해서일까, 환인은 린덴 촌락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보았던 꿈을 다시 꾸었다.

하얗게 빛나며 어두운 우주를 밝게 비추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검은 하늘을 뒤덮은 채 블랙홀을 담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외눈.

나중에는 나무의 하얀 빛과 외눈의 블랙홀 같은 홍채만 남아 세상을 어지럽게 뒤덮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정체불명과 해석 불가의 목소리.

두 번째로 꾼 꿈은 처음 꿈을 꿨을 때와 다르게 진한 정신적 피로감을 남겼다.

=…주인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신가요?=

=진짜네. 눈 밑이 거뭇거뭇해졌어. 어제 힘을 너무 써서 그런 거야?=

그런 변화는 대번에 그녀들에게 발각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밤 마지막 차례였기에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이실리테가 눈치챘고, 둘을 깨운다는 핑계로 들어와 있던 안느도 환인의 피로를 알아차렸다.

「환인 님, 악몽을 꾸신 거죠?」

“……티가 났나.”

「네에. 제가 악몽을 꾸고 난 뒤에 짓던 표정이랑 비슷했어요.」

뒤이어 아침 인사를 하러 들어왔던 백려강은 환인이 어째서 피곤한지를 빠르게 간파했으며.

=무슨 악몽을 꾼 거니?=

“린덴 촌락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꿈으로 본 것뿐입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 부분을 깊게 고찰하다 보니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겠지만…….=

유르파는 환인의 악몽을 단순한 악몽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도령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는 악몽을 꾸게 해서 정신적 고통을 먹는 정신체 마물도 있어. 언니가 말하는 건 그거일 거야. 혹시 모르니까 오늘 밤은 섹스하지 말고 그냥 자자. 내가 옆에서 성술로 정신의 방벽을 쳐볼게.=

그런 것도 있나 싶었던 환인은 별말 없이 그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쪽으로는 그녀들이 전문가이니까.

아침 훈련은 건너뛰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을 호소하는 중에는 정밀한 타격과 힘 조절은 조금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들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후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챙겨 먹은 일행은 곧장 아크렛 마을을 나와 동쪽 에미트 정글 지류로 향했다.

목적지는 알소프로 향하거나 프라버로 향하는 여행자들과 상단들이 이용하는 숲길이다.

=도령. 잠깐 이리로 와봐.=

아크렛 마을을 나와 한참 이동하던 중 안느가 환인을 마차 안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간 환인은 안느가 상의를 젖혀 한쪽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라버에서 구매한 마도 서적을 옆에서 읽고 있던 유르파의 표정이 지금 자신과 비슷하겠지.

환인은 방석에 다리를 모아 앉아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치는 안느에게 물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을 부탁해도 되겠나.”

=거기 앉지 말고 여기 내 허벅지 베고 누워봐.=

“…….”

일단 그녀의 말대로 왼쪽 가슴을 깐 안느의 왼쪽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그리고 환인은 자신의 입에 젖을 물려주는 안느에게 ‘이게 뭐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쪽쪽 빨아봐.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도령의 피로를 풀어줄 만큼 정수는 나올 거야.=

‘모유가 아니라 정수인가.’

정수 디스펜서도 아니고.

=실은 직접 젖을 짜서 컵에 담아주고 싶었는데 수유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리 해도 안 나오더라. 그렇다고 밑에 그곳으로 모으는 건 왠지 좀 그런 거 같아서.=

안느의 설명에 납득한 환인은 입술을 좀 더 벌려 유륜과 유두를 한번에 물고 조금 힘을 주어서 빨아보았다.

=흐응…….=

그녀의 작은 신음과 함께 입안에 무언가 액체가 소량 흘러나왔다.

톡톡 터지는 탄산 비슷한 느낌의 약간 달콤한 액체. 정수다.

좀 더 힘을 줘서 빨고 있으니 점차 흘러나오는 정수가 많아진다. 그걸 잠시동안 받아마시던 환인은 확실히 피로가 줄어들고 정신적으로도 바짝 당겨져 있던 느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으응. 우리 환인 아기, 배 많이 고팠어요? 오구오구.=

“…….”

이마를 쓰다듬어주고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그녀의 발언에 환인은 회사 후배가 이거 죽이는 에로 만화라며 보여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다 큰 알몸의 남자가 다 큰 알몸 여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젖을 물고 핸드잡을 받는 행위.

‘너는 회사에 음란물을 반입하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들을 거냐.’‘잠시만요! 환인 형님, 미녀에게 받는 수유 대딸 플레이는 메이저한 취향이라고요!’‘시끄럽다.’

=아이 귀여워~. 엄마 젖을 열심히 빠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네~.=

환인은 한순간 콱 유두를 깨물어버릴까 했지만, 그냥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의 장난에 정색해서 반응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니까.

=아휴, 근데 어쩜 이렇게 야하게 빠는지 모르겠네. 누구한테 이런 나쁜 걸 배웠을까?=

=쿡쿡쿡.=

“…….”

……진지하게 물어버릴까, 문다면 어느정도의 힘으로 무는게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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