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9화 〉 433 아크렛 마을
* * *
하루를 달려 도착한 아크렛 마을은 최소 규모의 소도시 구성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만에 이르는 인구수, 남자와 여자가 4:6 정도 되는 훌륭한 남녀성비, 반도여서 넓은 경작지가 붙어있고 호수가 동서남쪽으로 둘러싸고 있어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하다.
유일한 위협이라면 에미트 정글의 지류인데 정글에서 너무 멀리 뻗어 나와서일까. 정글이라기보단 숲에 가깝다.
그렇다 해도 맹수가 많고 때때로 괴수나 마수가 출몰하지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점은 반론할 여지가 없다.
3만에 이르렀지만 계속해서 늘고 있는 인구와 3~4층짜리 석조 건물이 즐비한 거리 풍경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마을에 도착한 환인 일행은 뒤숭숭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느꼈다.
마을 곳곳, 사람이 모일만한 장소나 모여있는 곳에서는 한결같이 전쟁을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다녀왔어요, 주인님.=
「우리 왔어.」
「다녀왔습니다.」
식량을 사러 나갔던 이실리테와 환연이 돌아와 꺼낸 소문은 환인이 예상한 수준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프라버하고 알소프가 전쟁을 벌일 거로 생각하나 보던데.」
=프라버와 알소프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는 거 같았어요. 지금 바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그 뒤에는 마도구를 팔러 갔던 유르파와 안느가 푸른 후드 로브 드레스를 입은 백려강과 돌아왔는데 그녀들이 가져온 소문은 앞선 이실리테 팀보다 좀 더 심화된 수준이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가 보더라.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솔리테 반도의 산꼭대기에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알소프 군함이랑 프라버 전함이 신경전을 벌이는 걸 볼 수 있대. 며칠 전에는 알소프의 군인들이 반도 동쪽에 상륙했는데 주둔 중이던 프라버의 기사랑 병사들이 쫓아냈다고 하고.=
=그 사건으로 프라버가 반도 남쪽 만에 군사 거점을 구축하면서 기사와 병사들을 배치하고 있고 알소프는 그걸 방해하려고 몇 번씩 위협 항해도 한다고 하고 정말 전쟁이 날 건가 봐.」
안느와 유르파의 이야기에 이실리테도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점 돌아다니면서 프라버 병사들을 봤어요. 알소프의 첩자를 찾는 거 같던데.=
=어머. 위험하진 않았니? 이슬이 아가씬 너무 예뻐서 시선을 사로잡으니까 오히려 의심 사기 쉬웠을 텐데.=
=환연이 병사가 오는 거 알려준 덕분에 몸을 숨겨서 피할 수 있었어요.=
이야기를 주고받던 여자들은 아까부터 조용히 있는 환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솔리테 반도에 군사 항구를 만들라는 건 내 조언이었다. 프라버 만으로 들어오기 위한 해협의 안전을 확보하고 해군 기지화해 알소프 측의 접근과 개입을 막기 위한 기초 단계지.”
「그러면 군사 행동으로 비추어져서 알소프를 더 자극하는 게 아닌가요? 그거 때문에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 더 많은 사람이…….」
백려강의 우려에 환인은 상관없다는 투로 영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차 순환시키며 말했다.
“계기야 어떻든 이제 와서는 상관없게 되었다. 프라버와 알소프 양쪽 모두 자존심이 상했고 양측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당위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둘 중 한쪽이 사과하겠다는 스탠스를 보이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갈 테지만…….
“려강에게 묻지. 백중익이나 카드람이 먼저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일 위인인가.”
「아니요. 두 분 다 죽었으면 죽었지, 상대에게 고개를 숙일 분이 아니세요.」
“그 말대로다. 내가 돕지 않았어도 프라버와 알소프는 전쟁이 벌어졌을 거다. 프라버는 알소프에게 흡수 병탄 되느니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사 항전으로 알소프의 발목을 잡고 함께 침몰하려 했겠지.”
차라리 힘의 추를 프라버에게 올려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게 피해를 덜 보는 길이다.
“서로 간에 힘의 균형이 엇비슷해서 상호확증파괴가 될 상황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소강상태가 될 테니까.”
「아.」
환인의 설명에 백려강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이 아예 싸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던가 해야 피해가 덜하다. 어중간하게 약하면 저항하고 항전하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쌓이게 되는 법.
영기의 순환을 세 차례 끝내며 세 번째로 흡수했던 한기를 완벽하게 정돈한 환인은 훈기가 40% 미만으로 감소한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실리테와 함께 채소를 다듬으려던 안느의 손을 잡았다.
=어? 왜?=
“영기가 필요하다.”
아가씨처럼 손이 잡힌 안느가 눈을 깜빡이다가 뺨을 붉히며 말했다.
=또? 어젯밤에 그렇게 많이 해놓고 12시간도 안 지났는데…… 무리하다가 또 쓰러질까 걱정돼.=
“흐라반에서 소녀 영혼을 성불시켜준 뒤에 정력이 더 세졌다. 그리고 감당 가능할 만큼만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그런가? 하긴 그때부터 도령이 더 세진 거 같긴 했는데…….
환인은 얼굴이 붉어진 안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를 부러워하는 얼굴로 보는 다른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1시간 정도 걸릴 테니 이실리테도 바로 준비하고 있어 다오. 유르파는 마지막에 와주면 됩니다.”
=넵.=
=응. 몸 깨끗하게 씻고 갈게!=
자신의 옆에 딱 붙어 헤헤 웃는 안느와 함께 방으로 걸어가면서 환인은 한쪽 벽에 나란히 서 있는 들개 전사단의 영혼 중 아직 한기를 흡수하지 않은 한 명에게 따라오라고 강제력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셰퍼드 귀에 검은색과 황색이 섞인 머리카락의 여자 영혼이 스르륵 따라온다.
나루터 사이 해협의 배 위에서 한 명, 아크렛 마을로 오면서 2명, 총 세 명의 한기를 흡수하고 이성을 일깨운 환인은 영혼 구슬을 총 25개나 늘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11개, 두 번째는 8개 세 번째는 6개.
영혼 구슬의 증가 폭이 갈수록 많이 감소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영혼 구슬을 손쉽게 늘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음 영혼술의 성장에 영혼 구슬이 192개가 필요할지 288개가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
늘릴 수 있을 때 늘려놓아야지.
방으로 들어온 환인은 거미가 먹잇감을 실로 꽁꽁 감는 것처럼 안느를 두 팔로 강하게 옭아매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하우으, 도령은 진짜 짐승이야♡=
“그런 짐승에게 박히는 너는 그럼 암컷인가.”
=읏~~♡=
잠자리 한정 성감대가 된 귀에 그의 숨결이 담긴 속삭임을 들은 안느는 그의 말대로 한 마리의 암컷이 되어버렸다.
* * * *
알소프 궁중 심처.
알소프의 영주 카드람=이니티=알소프.
영주의 장남이자 소영주 키드리스=이디티=알소프.
전략전술가 우사=학선.
알소프 가문 식객 필두 호아틀=드라군 6급 쌍검사.
녹해 기사단장 앙간=토이씨. 6급 도끼전사.
청해 술법단장 시니라=블루드. 6급 청술사.
이국풍으로 가꿔진 중정 정원의 정자에서 여섯 명이 차탁 위에 올려진 대형 수정구를 노려보는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티끌 한 점, 흠집 하나 없는 수정구 안에서는 온통 검은 옷에 머리카락까지 검은 남자가 빛의 창을 휘두르며 말라깽이 늑대 인간과 싸우는 장면이 재생되는 중이다.
늑대인간은 남자보다 머리가 5개는 더 큰 괴물인데다 빼빼 말라 관절이 두드러진 상태임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공격이 빠르고 흉포하다.
속도 기반의 직업자라 하더라도 선뜻 맞서 싸울 수 있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
그뿐만이 아니라 50cm의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기가 갈라지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또 단순한 바르둘답지 않게 발차기와 할퀴기, 때때로 물기에는 페인트 모션까지 들어가는 상태.
학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쥐고 수정구를 노려보던 학 머리의 문사풍 남자가 담비 머리의 가죽 경장비 차림 남자에게 묻는다.
=호아틀 경. 경이라면 저 바르둘을 상대하실 수 있으시겠소?=
=상대만 하는 거라면 가능합니다. 이길 수 있느냐고 하신다면 승률은 4할이 채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성자와 싸운다면?=
=……….=
호아틀이라 불린 담비 머리 남자는 함부로 답하지 않고 묵묵히 수정구 속의 검은 남자를 응시했다.
마침 남자는 빛의 창으로 난격을 펼쳐 바르둘을 말 그대로 썰어버리는 중이다.
어딜 노릴지 짐작도 못 할 만큼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창의 궤적. 빛이 궤적과 시야를 가린다는 점을 고려해봐도…….
=……1분.=
차분한 호아틀의 대답에 나머지 네 명도 그를 돌아본다.
학 머리의 남자, 우사가 심유한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1분이면 이길 수 있다는 뜻이시오?=
=아닙니다. 1분을 살아남으면 잘한 수준일 겁니다.=
=…….=
=…….=
가라앉은 침묵이 정자를 휘감는다.
알소프 가문에 머무르고 있는 식객 중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강한 인물이다.
일 대 일의 전투라면 녹해 기사단장 앙간보다 강하다고 평가되는 인물.
수정구 속의 싸움은 절정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검은 남자의 창이 일순간 번쩍이더니 바르둘이 선홍색 피를 울컥, 토해내며 주춤주춤 물러난다. 몸에는 다섯 군데의 꿰뚫린 흔적이 어느새 생긴 상태.
수정구를 뒤덮는 섬광이 일어난 직후 바르둘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고, 바르둘의 시체는 선 채로 가루가 되어 소멸해버렸다.
화면은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한다. 문어와 흡사하지만 꼿꼿하게 서 있는 데다 사람이 파리처럼 보일 정도로 커다란 괴물.
그 괴물이 수십 명과 싸우는 장면이 비춰지고 있지만 정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수정구에서 떠난 상태였다.
이미 세 번째 보고 있는 영상이니까.
상석에 앉아있는 푸짐한 하마 머리의 남자를 제외한 다섯 명이 신중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상석에 앉은 인물보다 조금 더 슬림한 하마 머리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프라버 놈들의 선전에 따르면 저 검은 남자가 녹색 성자라는 말인데…… 영혼사가 맞긴 한 겁니까?=
=키드리스 님의 의문은 저도 공감이에요. 우사 님의 말씀대로라면 저 바르둘은 7급 이형종과 같은 강함을 가졌다는 이야기잖아요. 신체가 강화되는 근접과 중거리 전투 직업자도 아니고 신체 능력은 일반인인 영혼사가 어떻게 저런.=
묘하게 색정적인 적발에 붉은 입술의 여자가 눈썹을 작게 찌푸리자 우사는 학우선을 조용히 부치며 눈을 감고 대답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 무직자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해냈거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그대와 키드리스 소영주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소.=
=음…….=
=흐응….=
=더욱이 성자가 쓰고 있는 창은 영웅급 유물로 백중익이 애지중지 아끼던 광창 나인볼그요. 그리고 이 부분을 주목해주시겠소?=
우사가 수정구를 조작해 화면을 돌려 한 지점을 보여준다. 흐릿하긴 하지만 형태를 알아보긴 어렵지 않다.
=허리띠와…… 팔찌인가요?=
=긜모암의 혁대와 완륜이오. 그리모암이라고도 하지. 혁대의 기능은 착용자의 완력을 최대 5배까지 증가시켜주며 완륜은 착용자의 정신을 보정해주고 보호해주는 기능을 하는데, 저것을 보면 신체 능력을 유물이나 유물 급 마도기로 올렸다고 볼 수 있소.=
=즉 성자는 파르히스트의 검귀 아렐 케드윈과 같은 하늘이 내린 무술의 재능을 가졌단 말이군요…….=
슬림한 하마 머리 남자, 키드리스의 침음성에 우사는 학우선을 내리며 침중한 눈빛으로 소견을 이어서 내놓는다.
=그뿐만이 아니오. 이 장면을 보면……. 이 공격은 본인으로서도 당최 구조나 발현을 알 수가 없소. 시니라 단장은 아시겠소?=
적발의 여자는 황금색 광선이 괴물의 머리를 꿰뚫는 장면에 오한이 느껴져 로브 자락을 여미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얼핏 보면 빛 속성 같기도 하고 번개 속성 같기도 하지만, 빛 속성이라 보기에는 너무 느려요. 번개 속성이라 보기에는 소리가 너무 얌전하고요. 게다가 꿰뚫린 순간 몸체가 밀려났잖아요? 물리 관통력까지 지녔다는 뜻인데 빛과 번개, 어느 쪽과도 맞지 않는 흔적이란 말이죠.=
=막으라 한다면?=
=6급 법술급이라 치고 빛, 번개, 물리. 세 가지 방호를 펼쳐야 하니 청해 술법단 전체를 동원하면 너댓 번은 막을 수 있겠죠. 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최소 500m에요. 녹색 성자는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닌다고 하죠? 하늘 저 멀리에서 저것으로 저격하면 이쪽은 속수무책이에요.=
=가까이 붙으면 목이 떨어질 테고 멀리 떨어지면 이 정체 모를 광선 공격이 날아오겠군.=
호아틀의 어이없어하는 소리에 아마존 수달 머리의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자만 문제가 아니지 않나. 여기 이 여자는 지금 주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당대의 검희다. 반년 전쯤 헬루멘에서 각성했을 터인데 벌써 일검을 넘어 이검을 수족처럼 다루고 있군. 여기에 자기 키만 한 해머를 다루는 이 여자는 방랑 성투사로 유명한 땅신 교단의 대사제가 아닌가.=
=작년 파르히스트 무투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거머쥔 인물들이지요. 파르히스트 성주가 직접 백천 기사단 입단 권유를 했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쨌든! 저 두 명만 봐도 우리 녹해 기사단 전원이 피해 없이 제압하기 어려워. 아니 제압이 뭔가. 죽일 목적으로 전력을 다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저기에 성자까지 끼어들면 시니라 단장과 청해 술법단까지 합세해야 승리를 점칠 수 있을 거다.=
무식하고 투박한 외모와 다르게 진지한 전력 분석을 내놓는 앙간 녹해 기사단 단장의 이야기에 시니라 청해 술법단 단장과 알소프 전략전술가인 우사, 알소프 혈족의 장남인 키드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세 명 모두 앙간이 뒤에 붙였을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기 때문이다.
성자와 싸우는 것은 영혼사를 적대한다는 요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절대 좋지 않다는 이야기.
=……안 좋은 소식은 더 있습니다.=
영주의 장남, 키드리스의 이야기에 여기에 또? 라는 뜻이 담긴 시선이 모여든다.
=조금 전에 도착한 소식인데, 녹색 성자는 헬루멘의 영주님과 깊은 사이인 게 맞는 거 같습니다.=
=네? 소영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시하 사이지 영주께서 수십 년 만에 회임하여 현재 임신 6개월로 추산 중입니다. 녹색 성자가 헬루멘을 떠난 시기와 거의 일치하죠.=
=……세상에.=
=프라버 놈들과도 이미 밀접한 사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성투사를 영혼 기사로 삼았으니 땅신 교단과도 연결점이 있다고 보는 게 맞고 영도의 대 성녀께서도 그 성자를 주시하고 있다 합니다.=
정자에 무거운 침묵이 깔린다.
여기부터는 함부로 발언할 수가 없다. 이 상황을 지적한다는 것은 영주의 실태를 꼬집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현 영주, 카드람 이니티 알소프가 프라버를 삼켜 알류겔 호수 북부의 패자가 되기 위해 프라버를 병탄하려 한 것에서 비롯된 사건.
정자에 모인 것도 들개 전사단의 획책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된다는 알소프 첩보부의 보고와, 프라버에서 벌어졌던 승전 퍼레이드 중 유출된 전투 장면 때문에 급히 이루어진 것이다.
침묵 속에서 우사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 아룁니다. 선하며 자비롭다는 세간의 성자에 대한 평가와 다르게 녹색 성자는 전투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호전적인 인물이며, 필요하다면 인연을 정리하는데 단호하기까지 한 성정으로 보입니다. 또한 두 영혼 기사와 힘을 합하면 중급 도시의 기사단 전력을 상회하는 것으로 사료되는 바.=
펄럭, 학우선을 한차례 펄럭여 한 템포 쉰 우사가 말을 이었다.
=영도의 닌실 아나그 대 성녀님께 오해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고, 성자에게는 실수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여 그의 개입과 난동을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겨집니다.=
=우사 님. 우리 알소프가 개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건가요?=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날카롭게 따지는 시니라를 예상했기에 우사는 학우선을 부드럽게 흔들며 대답했다.
=시니라 경의 심정은 이해하나 성자를 단순한 개인이라 여기면 크게 다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소.=
=…….=
=현재 첩보부가 전력을 다하여 그의 자취를 더듬고 있는 중이오.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는 소문은 그의 명성이 헛된 게 아니라는 사실 뿐. 시니라 경에게 묻겠소. 정치를 모르는 일반인이 헬루멘의 영주와 운우지락을 나눌 수 있겠으며 프라버를 곤경에서 꺼낼 수 있겠소?=
=남녀 관계라는 건 정치를 초월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프라버의 일은 성자가 프라버의 영주를 광증에서 치료했기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볼 수 있고요.=
눈을 감고 학우선을 살랑이며 그 이야기를 듣던 우사는 고개를 점잖게 가로저었다.
=스승님께서는 가정이란 언제나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소. 더하여 현재 프라버가 새 사업을 진행 중인데…… 프라버 영주와 그 자식은 그러한 사업을 구상할 만큼 사고가 유연하지 못 하다는 게 진실. 이게 무엇을 뜻할지는 시니라 단장이 더 잘 알 거로 생각하오.=
=나도 우사의 이야기에 동감이다. 프라버 하늘 기사단의 단장은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예민하고 짜증스러운 성격으로 잘 알려졌지. 헌데 성자가 다녀간 뒤 사람이 180도 변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군사령으로 승진하였다고까지 하더군. 거기에 프라버에서 치솟아 올랐던 두 번의 빛기둥…….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우사와 앙간의 설득과 지적에 시니라는 불만을 표정에 드러낼지언정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명망 높은 영성이나 고귀한 가문 출신의 영혼사도 아닌 자에게 알소프가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게 싫었을 뿐.
일련의 대화를 눈감고 묵묵히 듣고 있던 투실투실한 하마 인간이 눈을 떴다.
=우사. 그대의 고견 잘 들었다.=
영주의 발언에 좌중이 즉시 고개를 숙인다.
=하오시면…….=
=그 말대로 진행하도록. 공물의 준비는 맡기겠다. 사냥개와 관련된 일체, 그리고 비밀리에 추진하던 그 계획도 전부 조용히 폐기처분하라. 모든 것은 프라버 놈들의 억측과 시기 때문인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앙간. 자네가 우사를 돕도록. 시니라는 성의 방호벽을 성자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환하여 구축하라.=
=영주님의 명에 따릅니다.=
=영주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카드람은 손을 휘저어 넷을 내보낸 뒤 장탄식을 흘렸다.
=인고의 시간을 들여 진행한 계획이 성과를 이루어 달콤한 과실을 따 먹기 직전이었거늘. 짐승신께서 알소프 가문을 어여삐 여기지 않으시는듯하구나.=
=짐승신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설령 아버님 대에서 이루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뜻은 제가, 그리고 제 아들이 대업을 이어나갈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마시지요.=
=……그래. 알류겔 북부를 모두 거느리는 것이 하루 이틀로 이루어질 것이었다면 선조께서도 가문의 업으로 삼지 아니하였겠지.=
턱살이 삼겹을 넘어 사겹이 되도록 주억인 카드람은 먼 곳을 내다보는 눈으로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구나. 내 죽기 전에 알류겔 호수 북부가 통일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참으로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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